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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청명(淸明) 절후를 관장하는 이정(李靖)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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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22 조회4,2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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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군무와 정문수가 잇달아 격파당한 뒤 소선은 더 이상의 항전의지를 잃고 그 다음날 당군에 항복의 사자를 보냈다.

 

이정은 즉시 입성(入城)했다. 입성과 함께 전군(全軍)에 이정의 엄명(嚴命)이 내려졌다. 사사로운 약탈(掠奪)과 보복 행위를 행하는 자는 군법(軍法)에 따라 엄벌에 처해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정의 명령은 당시가 승리한 군대의 약탈권(掠奪權)이 일정하게 인정되던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전리품(戰利品)을 기대하고 있던 대다수 장수와 병사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소선의 토벌에 참여한 모든 장수들이 총사령관 효공에게 요청했다.

 

“소선의 장수들과 더불어 관군(官軍)에 항거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청컨대 그들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시고 그들의 가족은 노비로 삼아 이를 장졸들에게 하사하시어 이번 토벌에 참여한 이들의 공로를 치하하소서.”

 

이들의 주장은 당시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당군(唐軍)에 저항한 잘못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은 승리한 군대의 약탈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이를 바라보는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군이라고 해도 여느 도적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민심의 이반(離反)을 불러올 것이며 이 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의 평정에도 도움될 것이 전혀 없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정은 대다수 장수들의 의견과는 다르게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됩니다. 우리 군은 왕사[王師, 제왕(帝王)의 군대]입니다. 왕사는 정의(正義)를 수호하고 어려움에 빠진 백성을 위문하며 죄 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을 소명으로 합니다. 천하대란으로 백성들이 전쟁에 내몰리고 세력이 강대한 자들에게 핍박 받은 지 오랩니다. 이곳의 백성들이 우리 군대와 맞서 싸운 것이 어찌 그들의 본래 뜻이었겠습니까? 이제 형(荊)01, 영(郢)02이 평정되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관대(寬大)함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항복한 이들의 가산(家産)을 몰수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노비로 삼는다면 형(荊) 이남의 지역은 어찌 되겠습니까? 형(荊) 이남의 지역 백성들은 성(城)을 견고히 하고 관군(官軍)에 대항하면서 죽을지언정 항복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군대가 형(荊) 이남의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을 뿐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에게 적대적 행위를 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장졸들에게 상(賞)으로 나누어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정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관군에 저항한 이들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자는 의견은 시행되지 않았다. 이렇게 항복한 이들에 대한 관대한 조치가 전해지자 강한(江漢)03 지역의 여러 성들이 평정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정은 상주국(上柱國)에 배수(拜受)되고 영강현공(永康縣公)에 봉(封)해졌으며 비단 1,250필(匹)이 하사되었다.

 

또한 고조의 명으로 이정은 검교형주자사(檢校荊州刺史)가 되었다. 아울러 이정에게 영[嶺, 호남성(湖南省)과 광동(廣東), 광서(廣西) 두 성의 경계에 있는 산맥]을 넘어 계주(桂州)04까지의 지역을 초위(招慰)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정이 각 지역에 관리들을 보내니 이 지역의 대수령(大首領)들인 풍앙(馮), 이광도(李光度) 등은 그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당에 귀부(歸附)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이정의 명에 따라 각 지역에 파견된 관리들은 당의 관대함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미 소선의 예에서 보듯이 평정된 지역에 대해서 지난 과오(過誤)를 묻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을 것이다. 유력자들이 이에 응하여 자제들을 보내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 지역이 이미 당의 세력권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지역의 유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에 편입되어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 굳이 목숨을 걸고 당에 대항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정은 이들에게 적당한 관직을 하사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남쪽 지역이 완전히 평정되었는데 96개 군(郡)과 60여 만호(萬戶)가 이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수도로부터 거리도 멀고 산과 바다로 가로막혀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의 확보는 고조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정에게 다시금 영남무위대사(嶺南撫慰大使), 검교계주총관(檢校桂州總管)의 벼슬이 내려졌다.

 

623(무덕 6)년. 당이 나라를 세우고 수나라 말에 일어난 혼란을 수습해 나가고 있던 중 가장 큰 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당에 투항(投降)했던 보공석(輔公, ?~624)05이 단양(丹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그것이다. 고조는 이번에도 효공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조직했다. 이정은 부사령관이 되었는데 달라진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세적[李世勣, 소설(小雪) 절후를 관장] 등 7명의 총관(總管)들에게 절도사(節度使)의 직(職)이 수여되고 토벌군의 구성이 완료되었다.

 

보공석은 당의 공격에 대비하여 풍혜량(馮惠亮)에게 수군(水軍) 3만을 주어 당도(當塗)에 주둔하게 하고 진정통(陳正通)에게 보기(步騎) 2만을 주어 청림(靑林)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양산(梁山)에서부터 연쇄(連鎖)하여 강(江)의 통행을 막고 길이가 10리(里)나 되는 긴 성(城)을 쌓았다. 이른바 기각지세(角之勢)를 형성하였는데, 기각이란 사슴을 잡을 때 뒤에서는 사슴의 발을 잡고 앞에서는 뿔을 쥔다는 것으로 병법(兵法)에서는 아군(我軍)이 적군(敵軍)을 앞, 뒤에서 협공할 수 있도록 대비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 당군(唐軍)에서는 보공석의 토벌을 위한 전략회의가 소집되었다. 여러 장수들의 중론(衆論)은 다음과 같았다.

 

“적들은 강병(强兵)에다가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이제 적들은 싸움을 회피하면서 아군이 지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포공석의 본거지인 단양을 바로 공격하여 취하게 되면 혜량 등 나머지 장수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정의 의견은 달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외곽의 수비를 맡은 풍혜랑과 진정통의 군대도 정예지만 보공석이 직접 이끌고 있는 본진의 군사들 또한 정예병이 틀림없습니다. 저들이 이미 성을 쌓아 대비하고 있는데 우리가 본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면 풍혜랑과 진정통이 아군의 배후를 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군은 진퇴양난에 빠질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는 만전(萬全)의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마땅히 풍혜량, 진정통과 싸워 먼저 승부를 내야 합니다. 풍혜량과 진정통은 야전 경험을 지닌 노련한 장수로 어떤 싸움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보공석이 중요한 곳의 수비를 맡긴 것입니다. 하지만 아군이 적들이 채 방비를 갖추기도 전에 공격하면 반드시 풍혜량을 격파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보공석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정의 전략을 총사령관 효공이 승인하였다. 이정은 바로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그는 수륙(水陸) 양군(兩軍)을 이끌고 진군하였으나 예상대로 적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당군이 고전(苦戰) 끝에 만여 명의 적을 살상(殺傷)하니 전세가 불리해진 풍혜량이 달아났다. 이정이 이끄는 당군은 승세를 타고 바로 보공석의 본거지인 단양까지 진격하였다. 보공석은 자신의 외곽 수비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격파 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정의 진군 속도는 보공석으로선 예상 밖의 급속한 진격이었다. 외곽 수비군의 패배와 당군의 거침없는 진격이 공포를 불러 왔다. 보공석의 본진은 당군에 비해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공포가 확산되어 싸우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마침내 보공석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주(逃走)하다가 당군에 생포(生捕)되었다.

 

보공석이 사로잡힘으로써 강남(江南)이 평정되었다. 임시로 동남도행대(東南道行臺)가 설치되고 이정은 행대(行臺)의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 조정(朝廷)은 강남 평정의 공로로 이정에게 비단 500필, 노비 100명, 말 100필을 내렸다.

 

이정은 동남도행대(東南道行臺)가 폐하여지고 난 다음 검교양주대도독부장사(檢校揚州大都督府長史)로 다시 임명되었다.

 

고조가 이정의 공로를 칭찬하면서 말했다.

 

“이정이야 말로 소선과 보공석이 가장 두려워하던 인물이다. 그 옛날의 한신(韓信), 백기(白起), 위청(衛靑), 곽거병(去病)이 어찌 이보다 나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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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적(宿敵) 돌궐을 토벌함

 

625(무덕 8)년 돌궐(突厥)이 태원(太原)을 침입했다.

 

이 당시 중국 북방의 군사대국이었던 돌궐은 당으로서는 큰 근심거리였다. 고조 이연이 이미 태원(太原)에서 거병하여 장안(長安)으로 진공하면서 돌궐에 칭신사(稱臣使, 신하를 칭하는 사절)와 함께 공물을 보냈다. 이때 장안을 차지하면 그 땅과 백성은 이연이 가지고 금(金)과 옥(玉) 그리고 비단은 돌궐에게 바치기로 하고 지원을 받은 일이 있었다.06 이후 당은 계속적으로 돌궐의 끊임없는 요구에 응하여 갖은 명목의 조공물을 보내는 굴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당이 굴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나라 전성기에 비하여 형편없이 쇠퇴한 국력 때문이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인구수가 국력의 절대적인 지표가 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당나라 초기의 국력은 수나라의 전성기에 비하면 형편이 없었다. 이른바 천하대란이라고 할 변동을 겪고 나서 수나라 전성기에 비해 당시의 호구(戶口)와 인구는 1/3에 불과했다.07

 

또한 수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거의 모든 세력들은 돌궐의 힘을 빌리기 위해 돌궐을 섬기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지원받은 돌궐의 병마(兵馬)를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였고 돌궐도 이를 구실로 중국에 간섭함으로써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돌궐이 태원을 침입한 것은 당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한편으로는 공물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은 표면적으로는 당과 돌궐이 다시 화의(和議)를 맺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실제는 당이 또다시 금은보화(金銀寶貨)로 평화를 산 것이었다. 이때 이정도 군사를 이끌고 나섰는데 많은 장수들이 패했지만 이정이 이끈 군대는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돌궐 우위의 역학(力學)관계는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은 고조의 둘째 아들이면서 뛰어난 전략가로 당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626(무덕 9)년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태자(太子) 건성(建成)과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처단하고 정권을 획득하였다.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이정은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고 소선과 보공석을 토벌한 공이 인정되어 400호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이정은 628[정관(貞觀) 2]년에 검교중서령(檢校中書令)이 되고 다음해 다시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내정의 쇄신과 함께 강력한 군사력을 길러 돌궐에 설욕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군을 정예병(精銳兵)으로 만들기 위해 당태종이 직접 군사 훈련에 참가했다. 명실상부 최고의 실권자가 직접 군대를 조련하는 일은 중국 역사상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과를 보인 장수와 병사들에게 직접 은상(恩賞)을 내리는 등 훈련을 독려했다. 이러한 당태종의 노력은 병사들의 의욕을 최고치로 끌어 올렸고 이는 당군을 짧은 시기에 강군(强軍)으로 거듭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 돌궐은 북방의 패권자로 자처하던 힐리가한(詰利可汗)이 정치력의 부재와 부족 사이의 이반(離反)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고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 내부 사정은 바로 당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3~4년 사이에 몰라보게 국력을 회복하고 정예(精銳)로 거듭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당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돌궐의 복잡한 내정(內政)을 보고 받은 당태종은 곧 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병부상서 이정을 정양도행군대총관(定襄道行軍大總管)에 임명하여 돌궐을 토벌하도록 하니 이때가 629(정관 3)년 8월이었다. 연이어 9월 화주자사(華州刺史) 시소[柴紹, 소서(小暑) 절후를 관장]를 승주도행군총관(勝州道行軍總管)에 임명하여 돌궐로 보냈고, 11월에는 병주도독(竝州都督) 이세적을 통막도행군총관(通漠道行軍總管)에 임명하고 이세적 외 4명의 총관(總管)에게 돌궐 공격을 명하였는데 모두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동원되었다.

 

이정은 직접 경기(勁騎) 3,000을 이끌고 마읍(馬邑)을 출발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정양(定襄) 남쪽의 악양령(惡陽嶺)까지 바로 진격하였다. 이정의 장기인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신속한 진격이었다.

 

돌궐의 힐리가한은 깜짝 놀라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무너뜨릴 기세가 아니라면 어찌 이정이 홀로 여기까지 진군하였겠느냐?”

 

돌궐은 당군의 불의의 습격에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이러한 돌궐 수뇌부의 혼란을 탐지한 이정은 간첩을 보내 힐리가한과 심복(心腹)들을 이간(離間)하였다. 이정의 반간계(反間計)는 성공하여 힐리가한의 심복 장수인 강소(康蘇)가 성을 몰래 빠져 나와 당의 군문에 항복했다. 심복의 투항(投降)을 보고 받은 힐리가한은 더 이상 정양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병사들을 이끌고 황망히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이 정양을 함락시키고 난 다음 힐리가한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맹추격하였으나 그를 잡지는 못했다.

 

『典經』에 이때 이정이 힐리가한을 추격한 장면과 관련된 한시(漢詩)가 보인다. 당나라 시인인 노륜(盧綸)의 「새하곡(塞下曲)」이란 4수의 시 중 세 번째 시이다.

 

月黑雁飛高 달은 어둡고 기러기 높이 나는데

單于夜遁逃 선우는 이 밤에 달아나는 구나

欲將輕騎逐 날랜 기병을 내어 그를 좇으니

大雪滿弓刀 큰 눈이 활과 칼에 가득 쌓이네

(행록 1장 23절)

 

(다음편에 계속)

 

 

 

01 호남(湖南), 호북(湖北), 광서(廣西) 및 귀주(貴州)를 지칭하는 말.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땅을 일컬음.

02 호북성(湖北省) 강릉현내(江陵縣內)로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서울.

03 양자강과 한수(漢水). 또 그 부근의 지방.

04 남조(南朝) 양(梁) 때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유주시(柳州市) 남동쪽에 둔 주(州).

05 수나라 말에 일어난 여러 군도(群盜)들 중 하나이다. 당에 투항하여 서국공(舒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무덕6년(623)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송(宋)’이라 하고 칭제(稱帝)하였으나 이듬해(624년)에 진압되어 참수되었다.

06 이에 관해서는 卞麟錫, 「隋末唐初 中國의 突厥에 대한 ‘稱臣使’의 學說史的 考察」, 『東方學志』80, 1993 참조.

07 백양(栢楊) 지음, 김영수 옮김, 『맨얼굴의 중국사3』, 청해, 2005, p.148 참조.

 

<대순회보 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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