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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청명(淸明) 절후를 관장하는 이정(李靖)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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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3.01 조회4,6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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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을 정벌한 이정

 

당태종은 크게 기뻐했다. 비록 힐리가한을 잡지는 못했지만 소수의 군대를 동원하여 적의 심장부까지 치고 들어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이정의 전략은 탁월한 것이었다. 임금이 이정을 대국공(代國公)에 봉(封)하고 비단 300필과 명마(名馬), 각종 보기(寶器)를 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옛날 한(漢)나라의 이릉(李陵)이 보졸(步卒) 5,000을 거느리고 사막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끝내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였는데도 청사(靑史)에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경(卿)이 기병(騎兵) 3,000으로 돌궐에 쳐들어가 정양에서 크게 이겨 우리의 위세를 저 북적(北狄)에게 떨치니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다. 족히 우리가 힘이 없어 지난날 위수(渭水)에서 돌궐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수치를 씻을 만 하도다.”

  

힐리가한은 철산(鐵山)01으로 도망가 보루를 만들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속국(屬國)이 되길 청했다. 당태종이 이정을 정양도총관(定襄道總管)으로 삼아 힐리가한의 사자를 맞아들이도록 하고 홍려경(鴻卿)02인 당검[唐儉, 입동(立冬) 절후를 관장]과 장군(將軍) 안수인(安脩仁)을 사자로 파견했다. 힐리가한이 이렇게까지 저 자세로 나오는 것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 전세(戰勢)를 만회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정은 이번 기회에 돌궐을 완전히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당태종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미 이정을 정양도행군대총관에서 정양도총관으로 바꾸어 임명한 것에는 이런 묵시적 지시가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정이 부장(副將)인 장공근[張公謹, 백로(白露) 절후를 관장]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힐리가한에게 사신을 보내셨으니 저들이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만 명의 기병에게 20일치의 식량을 주어 돌궐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장공근이 말했다.

  

“폐하께서 저들의 항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돌궐을 공격하신다면 이미 당검과 안수인이 사자로 파견되어 그곳에 있는데 이들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정이 말했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한신(韓信)이 제(齊)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어찌 당검과 안수인의 목숨이 아깝겠는가.”

   

두 사람의 사신이 죽는다고 해도 국가적 숙원 사업을 성취하는 일이었다. 이정은 군사들을 독려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진격 도중에 만나는 돌궐의 정찰병과 순찰병은 모두 사로잡았다. 이렇게 하여 진격하니 돌궐이 당군의 습격을 알지 못했다. 돌궐이 당군을 발견했을 때 이들 사이의 거리는 7리(里)에 불과했다.

  

당의 사신 파견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던 돌궐은 당군의 기습에 당황하여 제대로 된 응전을 하지 못했다. 당군의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되었다. 돌궐은 패망의 날이었지만 당(唐)으로선 대승리의 날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정이 이끈 당군은 돌궐인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돌궐에 시집갔던 수(隋)나라의 의성공주(義成公主)는 살해되고, 천하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돌궐에 자신의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수양제(隋煬帝)의 황후인 소후(蕭后)와 그의 손자인 양정도(楊政道)는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힐리가한은 재기(再起)를 위해 토욕혼(吐谷渾)으로 도망가다가 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음산(陰山)03에서 대막(大漠, 고비사막)에 이르는 영토가 개척되었다.

   

당으로서는 돌궐 정벌이라는 국가적 숙원 사업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돌궐로 인한 당의 근심이 얼마나 막대했으며 그 반대로 승리의 기쁨이 얼마나 컸었던가는 다음과 같은 당태종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지난날 나라를 처음 세울 때 태상황[太上皇, 고조(高祖) 이연(李淵)]께서는 백성들을 염려하여 저 돌궐에 칭신(稱臣)하셨다. 짐이 흉노 정벌에 뜻을 두고 근심하고 걱정한 지 오래다. 그동안 좌불안석(坐不安席)에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했다. 이제 적은 병력을 동원하여 연전연승으로 선우(單于, 힐리가한)를 잡았으니 지난날의 치욕을 갚은 것이다.”

  

그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돌궐을 패망시키고 힐리가한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연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고조(漢高祖)는 백등(白登)에 포위되어 묵돌선우(冒頓單于)에게서 큰 곤욕을 겪었지만 끝내 설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내 아들이 돌궐을 멸망시켰구나. 내가 부탁할 만한 사람들을 얻었으니 어찌 다시 근심하겠는가?”

 

 

그리고 이연은 당태종과 귀한 신분에 있는 공경대부(公卿大夫), 제왕(諸王)과 그 비(妃)를 불러 모아 능연각(凌煉閣)에서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주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술을 마셔 얼큰해지고 흥이 나 어우러질 때 이연이 스스로 비파를 타니 당태종이 일어나 춤을 추고 공경들은 태상황 이연의 축수(祝壽)를 기원하면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전국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이 내려졌고 백성들에게도 5일간 먹고 마실 음식이 하사되었다. 돌궐 정복을 기념하여 조정은 물론 모든 백성들까지 먹고 마시는 5일간의 국경일(國慶日)이 선포되었다.

  

중국 서북(西北) 지역의 패자(覇者)를 자처하던 돌궐이 당에 의해 패망하자 이 지역의 군장(君長)들은 당태종에게 ‘천가한(天可汗)’이란 칭호를 올렸는데, 이때부터 이 지역의 군장들에게 새서(璽書, 천자의 도장을 찍은 문서)를 내릴 때 당태종은 이 칭호를 겸하여 사용하였다.

  

이정이 돌궐 토벌에 나선 것이 정관 3년 8월. 그리고 그가 돌궐 정벌을 완수하고 힐리가한을 잡아서 조정에 바친 것은 정관 4년 3월이었다. 국가적 숙원사업을 단 8개월 만에 완수한 것이다. 이렇게 돌궐을 평정한 이정의 공은 컸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소우[蕭瑀, 곡우(穀雨) 절후를 관장]가 이정을 탄핵(彈劾)했다. 탄핵의 사유는 다음과 같다.

  

‘이정의 군대는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하여 그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았고 돌궐 정벌 과정에서 획득한 기이한 보물을 모두 잃어 버렸다.’

  

당태종은 이정을 소환하여 크게 꾸짖었다. 이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죄를 물어 처벌할 것인가? 제법 긴 고민의 시간이 흐른 뒤 당태종이 말문을 열었다.

  

“수(隋)나라 장수 사만세(史萬歲)는 달두가한(達頭可汗)을 정벌하였으나 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짐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공의 죄를 사면해 주겠노라. 그리고 공의 업적을 기록하겠다.”

  

이정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로 진급하였고 비단 100필을 하사받았으며 식읍(食邑)이 더해져 500호가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정의 혐의가 풀리니 당태종이 말했다.

 

“전에 그대를 참소하는 이가 있었다. 짐은 이제야 깨달았노라. 공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말라.”

  

이정에게 다시 흰 비단 2,000필이 하사되고 그의 관직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옮기게 하였다. 이정은 성정(性情)이 침착, 온후하였고 매번 정사(政事)에 참여할 때에도 조심조심해서 말하여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

    

늙어서도 토욕혼을 정벌한 이정

    

634년(정관 8). 당태종은 전국에 16도(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풍속을 순찰하게 하였다. 이정은 기내도대사(畿內道大使)가 되어 장안 주변의 지역을 순방하였다. 그러나 발에 병이 나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언사(言辭)가 간절했다. 이때 이정의 나이 64세였다.

      

당태종이 중서시랑(中書侍郞) 잠문본(岑文本)을 보내어 말했다.

      

“자고로 부귀하면서도 그칠 곳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아무리 질병이 있어 고생을 해도 오히려 힘써 벼슬길에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 공이 물러나려 하니 짐이 깊이 하례(賀禮)하는 바이다. 공이 미덕(美德)을 완성하여 일대의 사표(師表)가 되고자 하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이정의 사퇴를 허락하고 검교(檢校)로 특별히 진급하게 하였다. 아울러 많은 비단과 항상 타고 다닐 수 있도록 말 두 필을 하사하고 관청에서 이정에게 지급되는 품목과 녹봉(祿俸), 하사품, 소속 관리 등은 그가 관직에 있을 때와 같도록 했다. 그리고 이정의 병에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으면 사흘에 한 번이라도 문하중서(門下中書)에 나와 정사(政事)를 살피게 했다. 다음해 태종은 발병으로 고생하는 이정에게 영수장(靈壽杖)을 하사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토욕혼(吐谷渾)이 변방을 노략질 하였다. 당태종으로선 이정의 은퇴가 아쉽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돌궐정벌에서도 증명되었듯이 당태종의 의중을 읽고 전략을 수립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에는 이정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공식적으로 이정의 은퇴를 허락했고 65세로 고령(高齡)인 그의 나이도 걱정이었다. 당태종이 주변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정이 군대를 다시 맡을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이유로 토욕혼 원정군을 직접 맡아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정이 적임자란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당태종의 이 말은 이정에게도 알려졌다. 이정이 임금의 뜻을 알아채고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을 찾아가 말했다.

      

“이 몸이 비록 늙었지만 이번 일만은 감당하겠소.”

      

방현령으로부터 이정의 말을 전해들은 태종은 기뻐하며 그를 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에 임명하여 토욕혼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정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은 5총관(總管)과 이에 소속된 병사로 구성되었다. 5총관은 다음과 같다. 병부상서(兵部尙書)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 형부상서(刑部尙書) 임성왕(任城王) 도종(道宗), 량주도독(州都督) 이대량(李大亮), 우위장군(右衛將軍) 이도언(李道彦), 이주자사(利州刺史) 고증생(高甑生)이 그들이다.

      

당군은 휴사성(休俟城)04까지 진군하였다. 토욕혼의 가한(可汗) 모용복윤(慕容伏允)은 대비천(大非川)05까지 후퇴하면서 전통적인 청야전술(淸野戰術)로 대응했다. 들판에 있는 모든 풀을 태움으로써 전마(戰馬)들의 활동을 제약하려고 한 것이다.

      

당군의 진영에서 전략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장수들의 의견은 양론(兩論)으로 갈렸다. 양론중 하나는 토욕혼의 청야전술로 마초(馬草)가 부족하고 봄의 풀이 아직 돋아나지 않았으니 말들이 허약한 상태에서 추격을 계속한다면 위기의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의견은 후군집의 주장으로 승세(勝勢)를 타고 있을 때 공격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격을 계속하면 마초의 확보도 용이(容易)할 수 있으나 이 순간을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정은 후군집의 의견을 채택했다. 항상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고 신속한 병력의 운용이 장기인 이정으로선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정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기로 하고 적진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드디어 적석산(積石山)까지 쳐들어가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숱한 적을 섬멸하고 토욕혼을 대파했다. 전세(戰勢)를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모용복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정은 모용복윤의 아들인 모용순(慕容順)을 왕으로 세우고 귀환하여 토욕혼 원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런데 토욕혼 원정 중에 고증생의 군대가 약속보다 늦게 도착한 일로 이정이 고증생을 질책한 일이 있었다. 고증생이 이 일로 이정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토욕혼 원정군이 돌아오고 난 뒤 고증생은 이정과 광주도독부장사(廣州都督府長史) 당봉의(唐奉義)가 반란을 꾀했다고 고발했다. 당태종의 명으로 관리들이 조사에 착수하였으나 그러한 사실이 없자 고증생을 무고죄(誣告罪)로 다스렸다.

      

이정은 모반의 혐의를 벗었다. 그러나 비록 고증생의 무고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정은 근신했다. 그는 문을 닫고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이나 친척의 방문을 일체 사절하고 돌려보냈다. 이정은 소우에게 탄핵을 당했을 때와 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해명하는 것 보다는 스스로 근신하는 쪽을 택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모습은 수도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637년(정관 11) 이정은 위국공(衛國公)으로 고쳐 봉(封)해졌다. 그리고 당태종은 공신들에게 세습자사(世襲刺史)의 벼슬을 내려 이정에게는 복주자사(州刺史)가 제수되었는데 이는 그 자손들에게까지 벼슬을 세습할 수 있도록 한 조처였으나 당사자들이 반대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당태종이 조서를 내려 궁궐에 돌궐에 있는 철산(鐵山)과 토욕혼에 있는 적석산(積石山)의 형상을 만들어 이정의 업적이 드러나도록 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진급(進級)시켰다.

      

당태종이 장차 요동(遼東, 고구려를 뜻함)을 정벌하려고 할 때에 이정을 불러 물었다.

      

“공은 남(南)으로는 오(吳)를 평정하고 북(北)으로는 돌궐을 격파했으며 서(西)로는 토욕혼을 토벌했는데 오직 고려만은 아직 복종시키지 못했으니 뜻이 있소?”

      

이정이 대답했다.

      

“예전에는 천자의 위엄을 빌어 조금의 공이나마 세울 수 있었으나 지금은 늙고 또 병들었습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정녕 버리지 않으신다면 병도 저절로 나을 듯합니다.”

      

이때 이정의 나이 74세였다. 당태종은 이정의 노쇠함을 가엾이 여겨 요동정벌에 나서겠다는 그의 뜻을 허락하지 않았다.

      

649년(정관 23) 이정의 병이 위독해지자 당태종이 직접 이정의 집을 방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공은 짐의 평생 친구이며 국가에 큰 공적을 세웠소. 지금 병세가 이와 같으니 실로 걱정이오.”

       

이윽고 이정이 죽으니 그의 나이 79세였다. 사도(司徒)와 병주도독(幷州都督)을 증직(贈職)하고 장례에 쓰도록 반검(班劍)06과 우보(羽)07, 고취(鼓吹)를 내렸다. 이정은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는데 시호(諡號)를 경무(景武)라 했다.

 

 

01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남쪽에 있는 음산의 북쪽에 있다.

02 홍려시(鴻寺)의 수장(首長). 홍려시는 외국사절을 맞이하고 그들의 상장(喪葬)에 관한 의례(儀禮)를 담당한 기관으로 전객서(典客署)와 사의서(司儀署)를 하부기관으로 두었다.

03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남쪽에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

04 지금의 청해호(靑海湖) 서안(西岸) 포합하(布哈河) 하구(河口) 부근.

05 청해성(靑海省) 청해(靑海) 서쪽이 있는 하천.

06 진대(晉代) 조회(朝會)에서 찼던 무늬가 새겨진 목검. 한대(漢代) 진검을 차던 것을 바꾼 것으로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했다고도 한다. 뒤에 의장용으로 쓰여 무사가 차거나 천자가 공신에게 하사하였다.

07 장례 때 사용하는 의장(儀仗)의 일종. 새털을 깃대 꼭대기에 모아 일산(日傘)과 같이 만든 물건.

 

 

<대순회보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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