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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모(昴) 별을 관장하는 이충(李忠)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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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4.06 조회5,5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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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수(昴宿)

 

모수는 28수 가운데 열여덟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규루위모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 가운데서 네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7개로 상징 동물은 닭[鷄]이다. 모수의 속성(屬性)은 일(日)로 유(留)라고도 하는데 떼를 지어 무리를 이루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모수를 의인화하여 서방모일계성군(西方昴日鷄星君)이라 하는데 얼굴은 닭과 흡사해서 입은 닭의 주둥이 같다고 한다. 또한, 황금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활을 들고 있고 검을 차고 있다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이충

 

이충(李忠, ?-43)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중도(仲都)로 동래군(東萊郡) 황현[黃縣, 현재 산동성(山東省) 황현 동쪽] 사람이다. 이충의 아버지는 고밀(高密)의 도위(都尉)02였는데, 이충은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BCE 1-5) 중에 아버지로 인해 랑(郞)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 부서에는 수십 명이 있었지만 오직 이충이 예를 좋아하고 행실이 반듯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왕망(王莽, BCE 45-CE 23)03이 전한을 타도한 이후에 이충은 신박(新博)의 속장(屬長)04이 되었는데 군(郡)에서는 모두 그를 존경하고 믿었다.

 

경시제(更始帝)05가 집권한 이후에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여러 군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그때 이충을 도위관에 임명하였다. 이때 유수는 경시제로부터 하북 평정의 명령을 받고 하북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유수가 하북을 평정해 가는 과정에서 왕랑이라는 강력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왕랑은 자신이 전한의 6대 황제인 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주장했다. 왕망 치하의 장안에서 자신을 유자여라고 주장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왕랑은 그때 죽은 유자여는 가짜이고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경시제가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으로 이에 실망한 민심은 왕랑을 진짜 ‘유자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왕랑은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그는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이렇게 해서 유수는 왕랑에 의해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북의 모든 군현이 왕랑에게 투항했지만 임광(任光)과 비융(邳肜)이 태수로 있던 신도와 화성(和成)만은 예외였다. 이런 이유로 신도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유수에게는 옷을 갈아입을 여유조차 없었다. 유수의 때 묻고 낡은 옷을 본 이충은 자신의 옷을 벗어 유수에게 바쳤다. 유수는 그를 우대장군(右大將軍)으로 삼고 무고후(武固侯)로 봉했다. 유수는 그때 자신이 차고 있던 인끈을 풀어 이충에게 매어주었다. 또한, 유수는 이충에게 자신을 수행하여 왕랑 토벌에 따르도록 했다. 유수군이 고형현(苦陘縣)에 이르자 유수는 여러 장군들을 모아놓고 획득한 재물을 점검하였다. 그런데 이충만은 약탈한 재물이 없었다. 유수가 말했다.

 

“내가 특히 이충에게 상을 내리고 싶은데 여러 경들은 원망이 없겠는가?”

유수는 자신의 여마(驪馬)06와 비단 이불, 옷가지를 이충에게 하사하여 그가 자신의 옷을 벗어 준 것에 보답했다.

 

유수군은 계속 진격하여 거록(鉅鹿, 하북성 평향현)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반격에 나선 왕랑이 장수를 파견하여 신도(信都)를 공격했다. 신도의 호족(豪族)이었던 마총(馬寵)이 성문을 열고 왕랑군을 맞아들였다. 곧이어 마총은 임광을 대신했던 태수(太守) 종광(宗廣)과 이충의 가족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들에게 이충을 불러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마총의 아우는 이충의 수하에서 교위(校尉)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충은 즉시 그를 불러 마총의 배신과 모반을 여러 번 책망하고 그 자리에서 격살(格殺)07하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의 전개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놀라서 말했다.

 

“장군의 가솔들이 마총의 수중에 있는데 그의 아우를 죽였으니 너무하신 처사입니다”

이충의 대답은 단호했다.

“만약 적을 나두고 베지 않는다면 이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이충이 모반을 일으킨 마충의 아우를 죽인 것은 자신의 변치 않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유수가 이충의 말을 듣고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

“이제 우리 군대로 다 갖추어졌소. 장군은 노모와 처자를 구하려 돌아갈 수 있으니 가족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시오. 그대에게 천만금을 하사할 테니 가져가시오.”

이충이 사양하며 말했다.

“명공(明公, 유수)의 큰 은혜를 입어 명령을 받들 것만을 생각할 뿐 감히 종친(宗親)을 돌볼 수는 없습니다.”

 

이충이 사양하자 유수는 임광에게 신도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수가 파견한 병사들이 도중에 흩어져 왕랑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임광은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때마침 경시제가 장수를 파견하여 신도를 탈환하니 이충의 가족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유수는 이충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태수의 일을 보게 하였다. 신도로 돌아온 이충은 군(郡)의 호족들 가운데 왕랑에 항복했던 수백 명을 처형했다. 유수군이 한단의 왕랑을 토벌한 이후에 임광이 군으로 복귀하자 이충은 다시 도위가 되었다.

 

왕랑을 토벌하고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26(건무 2)년 이충은 중수후(中水侯)로 봉해졌고 그의 식읍(食邑)이 3천 호(戶)나 되었다. 그해에 이충은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에 임명되어 광무제를 수행하여 방맹(龐萌,?-30)08, 동헌(董憲)을 평정하였다.

 

30(건무 6)년 이충은 단양(丹陽)태수에 임명되었다. 이때에는 전국적인 혼란이 차츰 수습되어 가던 때였다. 하지만 남방의 해안지대인 강(江), 회(淮) 지방에는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았다. 이충은 단양군에 부임한 이후 그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베어 죽이니 이 지역이 한 달 만에 평정되었다.

 

지역이 안정을 찾은 이후에 이충은 지역민의 교화에 힘썼다. 이충은 원래 단양이 월(越)나라 풍속이 있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혼례의 의례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는 학교를 세워 예의를 가르쳐 사람들에게 춘추의 예절을 익히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지역 사람들의 언행이 예의에 맞도록 하고, 관리의 등용은 명경(明經)09으로 하니 군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숭상하였다. 또한 많은 밭을 개간하여 떠도는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데 힘썼다. 이충의 조처로 3년 동안 정착한 유민(流民)이 5만 가구에 이르렀다.

 

38(건무 14)년 삼공(三公)10들이 광무제에게 이충의 공적이 천하제일이라고 상주하여 예장(豫章)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태수직을 사퇴하고 부름을 받아 경사(京師, 서울)로 나갔다가 43(건무 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위(李威)가 그의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35.

02 본래 진(秦)나라가 36군(郡)에 위(尉)를 두었는데, 한(漢)나라 경제(景帝)때 이를 도위(都尉)로 고쳐 불렀다. 무관(武官)으로 태수를 보좌하며 군대의 일을 주관했는데 주로 도적을 잡아들이는 일을 맡았다.

03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4 왕망이 신도(信都)를 신박(信博)이라 했고 도위(都尉)를 속장(屬長)이라 했다.

0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검정색 또는 푸른색의 말을 여(驪)라 한다.

07 손으로 때려 죽임.

08 산양(山陽, 현재 산동성 金鄕 西北) 사람. 처음에는 하강병(下江兵)과 함께 거사하여 유현(劉玄)이 경시제가 되자 기주목(冀州牧)에 임명되었다.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과 함께 왕랑(王郎)을 격파하였다가 사궁이 패망하자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가 황제에 즉위하여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평적(平狄)장군에 봉해져서 합연(蓋延)과 함께 동헌(董憲)을 공격했다. 29(건무5)년 반란을 일으켜 동헌, 유우(劉紆), 교강(佼彊) 등과 합세하니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서 이듬해 오한에 의해 토벌되고 참수되었다.

09 관료를 선발하는 방식의 하나로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에 밝은 사람을 발탁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 무제(武帝) 때 처음으로 시행되어 송(宋) 신종(神宗) 때 폐지되었다.

10 가장 높은 세 가지 벼슬을 의미한다. 전한에서는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후한에서는 태위, 사도(司徒), 사공(司空)을 뜻한다.

 

 

<대순회보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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