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大暑) 절후를 관장하는 장손순덕(長孫順德) > 인물

본문 바로가기

인물
HOME   >  교화   >   인물  

인물

24절 신명대서(大暑) 절후를 관장하는 장손순덕(長孫順德)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07 조회4,474회 댓글0건

본문

 62e8f447da051dad3576c1e0c1f21d21_1528329 

 

당 왕조 창업에 기여한 장손순덕

 

장손순덕(長孫順德)은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의 부친인 장손성(長孫晟)의 친척동생으로 귀족출신이다. 할아버지 장손징(長孫澄)은 북주(北周, 557~580)01의 진주자사(秦州刺史)였고 아버지 장손개(長孫愷)는 수(隋)나라에서 개부(開府)02의 권한이 있는 고급관료였다.

 

장손순덕은 수에 벼슬하여 우훈위(右勳衛)가 되었다. 그는 수양제(隋煬帝)의 요동(遼東: 고구려) 원정에 참가했다가 태원(太原)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태원유수는 당을 창업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으로 장손순덕과는 평소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장손순덕은 이세민과도 가까웠는데 그 이유는 이세민이 장손성의 딸을 아내[뒷날의 문덕황후(文德皇后)]로 맞아들여 서로 인척이 되기 때문이다.

 

장손순덕이 태원에 망명한 이후 수나라에 대한 반란이 일상화되었다. 양제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지만 이 일이 대실패로 끝나고 이로 인해 민심의 이반(離反)이 극에 달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끊임없는 전쟁과 노역(勞役)에 동원되어 피폐해진 백성들은 열에 아홉은 도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거나 야망이 있는 유력자들은 곳곳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였다.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나 각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태원도 더 이상 안전지대일 수 없었다. 우선은 자위책의 방편으로 병사들을 모으기로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직은 수나라에 충성하는 관료들의 의심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때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는 뒷날 당(唐)의 2대 황제가 되는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장손순덕과 유홍기[劉弘基, 소만(小滿) 절후를 관장]에게 명하여 군대를 모집하였다. 처음에 모인 병력은 만 명 정도였는데 이후 계속해서 인원이 늘어 수만 명에 달했다. 장손순덕은 이들 중 일부의 인원을 따로 편성하여 밭을 경작케 하였다. 이를 둔전(屯田)이라 하는데 모병(募兵)에 응한 인력을 활용하여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군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장손순덕은 대장군부(大將軍府)가 세워지자 통군(統軍)에 임명되었다. 장손순덕은 곽읍(邑)을 평정하고 임분(臨汾), 강군(絳郡)을 차례로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장손순덕은 유문정(劉文靜)03과 함께 동관(潼關)04을 수비하고 있던 굴돌통[屈突通, 망종(芒種) 절후를 관장]을 공격하였는데 매번 선봉에서 싸웠다.

 

이때 굴돌통은 낙양(洛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최후까지 수나라에 충성하며 이연의 군대에 저항하던 그로서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하들이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병장기를 내려놓고 항복을 하는 데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장손순덕이 도림(桃林)까지 추격하여 굴돌통을 사로잡았다. 장손순덕이 굴돌통을 사로잡음으로써 섬현(陝縣)이 평정되었다.

 

장안(長安)이 평정되고 나서 이연이 즉위하자 장손순덕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이 되었으며 설국공(薛國公)에 봉해졌다.

 

626년[무덕(武德) 9] 이세민은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을 처단했다. 장손순덕은 이때 이건성의 잔당을 토벌하였고 이때의 공로로 이세민이 즉위하고 나서 장손순덕에게 식읍(食邑) 1,200호(戶)와 궁녀(宮女)를 내렸다.

 

그런데 얼마 뒤 장손순덕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당태종이 이 사실을 접하고 나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장손순덕은 외척으로 개국공신이다. 그의 지위는 높고 작위는 두터우니 가히 부귀하다고 칭할 만하다. 고금의 일을 살펴 이 경우를 비춰볼 것 같으면 짐이 마땅히 그와 부고(府庫)05를 함께 가져야 할 터인데 어찌 뇌물을 탐했다는 소리가 들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고는 비단을 하사하였다.

 

뇌물 수수로 적발된 고위직 인사에 대한 참으로 어이없는 처분이었다. 이에 대리소경(大理少卿)06 호연(胡演)이 아뢰었다.

 

“장손순덕은 뇌물을 받아 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사면(赦免)도 불가한데 어찌 또 그에게 비단까지 내리십니까?”

 

이에 당태종이 대답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하사품을 받게 되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이는 금수(禽獸)와 다름없는 것이다. 금수같은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당태종은 이렇듯 절묘한 논리로 엄중처벌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꺾고 장손순덕에게는 준엄한 경고와 함께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당태종의 이와 같은 배려도 소용없는 일이 일어났다.

 

627년[정관(貞觀) 원년(元年)] 12월 이주도독(利州都督) 이효상(李孝常)과 장군 유덕유(劉德裕), 문덕황후의 배다른 오빠인 장손안업(長孫安業) 등이 숙위(宿衛: 숙직하여 지킴)하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다가 적발되었다. 장손순덕이 이 모반에 연루되어 적(籍)을 박탈당해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당태종이 공신도(功臣圖)를 들춰보다가 장손순덕의 그림을 보며 애석히 여기고는 우문사급(宇文士及, ?~642)07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장손순덕을 살펴보고 온 우문사급이 다음과 같이 보고 했다.

 

“장손순덕이 늘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당태종은 다시 장손순덕을 불러들여 택주자사(澤州刺史)로 삼고 벼슬과 식읍을 복귀시켰다. 또다시 장손순덕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평소에 검약을 몰라 사치스럽게 지내던 장손순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정사(政事)를 행함에 사리에 밝고 엄숙하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전날의 수장(守長)들이 군량미 담당자들과 자주 내통하였으나 장손순덕은 비리를 들춰내어 용납하지 않았다. 이로써 장손순덕은 전날의 과오를 씻고 훌륭한 관리로 인정을 받았다.

 

장손순덕은 전임 자사(刺史)였던 장장귀(張長貴)와 조사달(趙士達)이 비옥한 토지 수십 경(頃)을 사사로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빼앗은 집도 찾아내어 돌려주었다.

 

장손순덕이 딸의 죽음을 심히 애통해 하였는데 태종이 이를 경박하게 여기며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에게 말했다.

 

“장손순덕이 강기(剛氣)가 없어 딸자식의 죽음에 너무 애통해하며 큰 병이 날 지경이오. 뭘 그리 애달파 하는지…”

 

얼마 후에 장손순덕이 죽자 당태종은 사자를 보내어 조문하고 조회(朝會)를 파하여 그의 죽음을 조상했다. 장손순덕은 형주도독(荊州都督)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를 양(襄)이라 했다. 639년(정관 13)에 장손순덕은 비국공(國公)에 봉해졌으며 영휘(永徽)08 연간에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추증했다.

 <대순회보> 103호

-------------------------------

01 북조(北朝)의 하나. 선비족(鮮卑族) 우문각(宇文覺)이 서위(西魏)를 멸하고 세운 나라. 후주(後周)라고도 한다. 도읍은 장안, 24년 만에 수(隋)나라에 망하였다.

02 한(漢)나라의 제도로 삼공[三公: 가장 높은 세가지 벼슬. 전한(前漢)에는 승상, 태위, 어사대부]에게 허락된 것. 뒷날 장군(將軍)에도 이에 준(準)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 함. 삼공, 대장군, 장군 등이 관서를 설립하고 관리를 선발하여 두는 것을 이르는 말.

03 팽성[彭城: 현재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 대대로 경조(京兆) 무공[武功: 현재 섬서성(陝西省) 무공(武功)]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소(劉韶)가 전몰유공자(戰歿有功者)였던 까닭으로 관직이 내려졌는데 어린 유문정이 그 아버지의 관직을 잇게 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그는 수(隋)나라 말에 진양령(晉陽令)이 되었는데 이때 진양궁감(晉陽宮監)이었던 배적(裴寂)을 알게 되었다. 배적, 이세민과 함께 당시 태원 유수였던 당 고조 이연을 설득하여 수나라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키자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사절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고 이들이 이연의 배후를 공략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군사마(軍司馬),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납언(納言)이 되었다. 당 창업 초기 고조는 유문정에 명하여 수나라의 개황율령(開皇律令)에 첨삭을 가하여 당의 법령으로 사용하였다. 유문정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공공연히 배적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권력 내부의 긴장을 형성하였다. 배적이 이 일로 고조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의 진언(進言)을 하게 되었다. 배적을 신임하고 있던 고조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유문정을 죽이니 그의 나이 52세였다.

04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현(縣)의 이름으로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사이에 위치한 요새.

05 궁중의 문서(文書)·재보(財寶)를 넣어두는 곳집.

06 대리(大理)는 형옥(刑獄)을 맡은 벼슬. 지금의 사법관(司法官).

07 수양제(隋煬帝)의 집권에 공을 세운 우문술(宇文述)에게는 화급(化及), 지급(智及), 사급의 삼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막내. 수(隋) 개황(開皇) 말년에 신성현공(新城縣公)에 봉해지고 양제의 딸인 남양공주(南陽公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양제를 따라 강도(江都)까지 수행하였고 우문화급이 양제를 시해하였을 때 촉왕(蜀王)에 봉해지기도 했다. 우문화급이 두건덕에 패배하자 당에 귀순하였다. 사급의 누이가 당고조 이연의 소의(昭儀)가 되어 총애를 받게 되고 사급도 그 혜택을 입게 되었다. 당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워 영국공(國公)에 봉해졌고,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에서 이세민 측에 가담하여 태종(太宗)이 즉위하고 나서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죽을 때 전중감(殿中監)이었는데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과 양주도독(凉州都督)이 증직(贈職)되고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다.

08 당의 세 번째 황제 고종(高宗)의 연호로 650~65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12616)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전화 : 031-887-9301 (교무부)     팩스 : 031-887-9345
Copyright ⓒ 2016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