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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관자』,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실현과 소인시대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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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5,5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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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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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관념은 참으로 무섭다. 한 번 굳어지면 너무나도 단단해서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대표적으로 우정을 가리키는 말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성어가 있다. 잘 알다시피 관포는 관중(管仲)(?~645 BC)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사람의 성을 가리킨다. 사실 두 사람의 우정을 소개한 글을 보면 관포지교가 아니라 포관지교가 맞다. 그럼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관중이 제나라에서 한 업적이 훌륭했던 것만큼 두 사람의 우정도 관중 중심으로 쓰였기 때문이리라.

  포숙아와 관중 둘이 장사를 한 적이 있다. 수입이 생기면 관중은 금액을 속여서 자신이 많이 갖고 포숙아는 적게 가졌다. 사람들이 포숙아를 바보라고 했지만 그는 관중이 노모를 모시고 있으므로 돈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그의 처지를 이해했다. 그 뒤에도 제나라에 제후 자리를 두고 내전이 벌여졌다. 포숙아는 공자 소백(小白)을 모셨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모셨다. 규는 내전에 패하여 죽었고 관중은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되었다. 보통 모시던 사람이 죽으면 참모도 따라 죽는 게 도리다. 굳이 『전국책』의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예쁘게 꾸민다”01는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패배한 집단의 길은 자살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포숙아의 구명 노력으로 관중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관중이 아니라 포숙아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므로 ‘포관지교’가 더 어울린다. 관중 스스로 포숙아의 죽음 앞에 비 오듯이 눈물을 흘리자 수행원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했다.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기도 하는데 하물며 그를 애도하는 일인데 뭐가 문제인가⋅”02 우리가 늘 고정관념과 승자독식을 문제라고 말하면서 진실한 우정마저 그렇게 봐서는 안 되지 않을까⋅ 
  오늘날 『관자』라는 책이 전해진다.03 이 책은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훗날 유명한 관중의 이름을 빌어서 지은 위작으로 여겨진다.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춘추 좌씨전』과 『국어』 「제어(齊語)」 등에 실려 있고, 『관자』도 부분적으로 관중의 마음을 전한다고 본다. 따라서 관중은 제자백가의 아이콘이 아니라 성왕의 오경 시대가 오패의 사서 시대로 바뀌는 것을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질서의 중심: 성왕의 사해동포에서 오패의 존왕양이(尊王攘夷)로 


  오경과 사서(일명 제자백가서)는 모두 아주 오래된 옛날에 쓰인 책이다. 현대인의 눈에는 둘 사이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오경과 사서는 각각 다른 세계를 반영하고 있어서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커다란 틈새가 있다.
  첫째, 주인공이 다르다. 오경은 사소한 욕망이나 나약한 의지로부터 벗어난 성왕(聖王)과 현신(賢臣)들이 펼치는 세계이다. 사서는 오늘날 사람과 한결 가까워서 질투하고 시기하고 욕심 부리는 소인과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군자들의 세계이다.

  둘째, 질서의 재생산 방식이 다르다. 오경에서 대다수의 불완전한 백성들은 성왕과 현신이 제시하는 언행을 모범으로 삼아서 각자의 삶에서 충실하게 모방하면 세계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사서에서 절대 다수의 불완전한 소인과 백성들은 강렬한 욕망의 질주와 공적 질서의 규제 사이에서 비틀거리면서 묘하게 균형을 잡아갔다. 
  셋째, 세계상이 다르다. 오경에서 중원 지역은 성왕에 의해서 통치되는 이상 사회이면서 주위의 이민족에게 이상의 빛을 전파시키는 세계의 중심이다. 간혹 반기를 드는 불온하고 완강한 이민족이 있지만 결국 중원 세력에 의해 계몽되곤 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국경을 넘어설 수 있는 사해동포였다. 사서에서 중원 지역은 찬란한 문명을 가진 곳이지만 세계의 중심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늘 주위 이민족으로부터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문명을 지키려면 중원지역에서 누군가 이민족을 물리치고 성왕의 가치를 지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실현해야 했다.

  제자백가는 바로 이처럼 오경(五經)의 질서에서 사서(四書)의 질서로 바뀌는 즈음에 나타났다. 그 시작을 누구로 보느냐를 두고 이견이 있다. 철학사에서 노자와 공자 중 누구를 선배로 보느냐라는 가벼운 논쟁이 있었다. 『사기』에서 보면 공자가 주나라 왕실 도서관을 맡고 있던 노자를 찾아서 예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04 이에 따라 노자로 철학사를 시작한다. 반면 대부분 『노자』에는 인의(仁義)로 대변되는 도덕과 문명을 비판하는 주장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인과율에 따르면 부정하려면 이전에 부정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인의는 공자 철학의 핵심이다. 이에 따르면 공자가 노자보다 앞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은 대부분 공자로부터 철학사를 서술하기 시작한다. f107f15235850d7859db28d7d10894f9_1545181 

▲ 孔子와 老子畵像 (중국)

  
  이러한 통속적 철학사에서 놓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자이든 노자이든 오늘날 전해지는 ‘텍스트’의 존재를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text)는 결국 말(word)로 짜인 조직(texture)이다. 말이 있다면 텍스트 이전에 그 말의 주인공이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자와 노자 이전에 오경과 다른 말을 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제자백가의 개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제나라의 관중과 안영(晏⋅, 오나라), 계찰(季札, 정나라)의 자산(子産) 등이 춘추시대를 연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언명은 『춘추 좌씨전』과 『국어』의 곳곳에 심어져있다. 이들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등장하기에 앞서 자연학을 일구고 존재론의 길을 텄지만 오늘날 그들의 사상이 단편으로 남아 있던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등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관중은 개인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면서 정치적으로 성공하고 사상적으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여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무슨 이유로 관중을 오경에서 사서로, 성왕에서 오패로 넘어가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볼 수 있을까⋅ 오경에는 성왕과 현신이 이상적 파트너가 되어서 세계의 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근원이자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요와 순, 순과 우, 탕과 이윤 등은 이러한 이상적 조합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오경 중 특히 『서경』은 바로 이러한 이상적 협치(協治)의 현장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행동을 주워 담고 있는 것이다. 
  사서(일명 제자백가서)에는 당시의 함량 미달의 군주와 신하를 위해 기억 속에 있던 성왕과 현신의 협치 전통을 끊임없이 되살리고자 하고 있다. 현실에는 군주가 넘쳐나지만 대부분 암주(暗主)로서 공동체에 질서가 아니라 혼란을 불어넣고 있는 반면 간혹 현신이 무능한 암주를 대신해서 옛 성왕의 언행을 현실에 재현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오경의 시대와 달리 사서의 시대에는 오패를 빼놓으면 군주의 이름은 남지 않고 현신의 이름이 더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관중은 제 환공과 파트너가 되어 존왕양이의 과제를 실행했던 것이다. f107f15235850d7859db28d7d10894f9_1545181 

▲ 百家争鸣是指春秋 (중국)

  
  공자는 관중에 대해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주군이 죽었을 경우 모신이 함께 죽어야 하는 관습을 어긴 관중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이런 평가는 공자의 학단에도 전해져서 즐겨 토론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 결과 제자들은 관중이 영웅 또는 현신이라기보다 쿨하게 죽지 않고 죽어야 할 목숨을 구걸한 찌질이로 보았다. 이와 달리 공자는 관중이 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없었더라면 중원의 세계가 남쪽과 북쪽의 이민족으로부터 멸망될지 모를 위기 상황을 극복한 인물로 긍정하고 있다.05 성왕이 현신과 짝이 되어 덕을 일구던 오경 시대가 아니라 현신이 암주를 계몽시켜서 힘을 키우던 사서 시대에 관중 정도라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으로 볼 만했기 때문이다.

  


⋅행위의 동기: 거룩함에서 이로움으로


  사서의 시대에 살면서 오경의 시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동경할 수는 없지만 돌아갈 수 없다며 현실을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유불리를 떠나서 반드시 현실에서 재현해야 할 이상이자 과제로 생각해야 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 공자와 맹자의 생각이 갈린다. 이 엇갈림은 두 사람이 관중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맹자에 이르면 관중의 평가는 공자와 완전히 달라진다. 공자는 관중을 삼왕과 오패를 이어주는 과도기의 인물로 보고 있다. 관중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된다는 평가이다. 맹자는 삼왕과 오패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인물로 명확하게 구분한다. “다섯 명의 패자는 세 명의 성왕들에게 죄인이다.”06 관중은 삼왕의 시대를 끝내고 오패의 시대를 연 인물이므로 맹자는 죄인(罪人)이란 말까지 사용하면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나아가 맹자는 관중이 현실의 흐름을 너무 받아들여서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모시는 군주조차 오경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며 노력을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맹자의 말을 빌린다면 관중은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자 스스로를 내다버린 사람이다. 또 제 스스로 할 수 없다며 자신을 해친 사람이자 군주를 어찌 할 수 없다며 군주마저 해친 사람인 것이다.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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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중기념관, 산둥성 린쯔(臨淄) / www.zibo.baike.com 


  맹자는 늘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는다고 하면서 그가 관중에게 내렸던 우호적인 판단을 내치고 관중을 가혹하게 비판하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 이유는 단순히 관중이 쌓은 성과가 보잘 것 없다는 결과주의 관점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관중이 오경에서 다룬 성왕들의 세계를 현실에서 재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면서 그것의 가치를 철저히 부수어버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맹자』와 『관자』의 제일 첫 구절을 살펴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오경에서 성왕은 세계를 평화와 정의가 흘러넘치는 거룩한 덕(德)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물론 오경의 세계에서 성왕의 사려 깊은 의도를 모른 채 간혹 공공(共工) ⋅ 환도(驩兜) ⋅ 삼묘(三苗)처럼 망나니가 나타나 물을 흐리기는 하지만 문제는 곧 해결된다. 사서에서 암주와 현신의 어설픈 조합은 늘 삐거덕거리면서 닥쳐오는 문제를 겨우 해결하면서 국정을 펼쳐나간다. 이때 국정은 더 이상 모두 평화롭고 편안한 세상이 아니라 나의 나라가 상대보다 더 잘 살고 더 강한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즉 거룩함보다는 이로움을 국정의 선두에 내걸었다. 이는 『맹자』의 초두에 나오는 맹자와 양 혜왕의 대화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양 혜왕은 맹자를 보자마자 “어떻게 하면 우리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08 맹자는 혜왕의 질문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로움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로 가득 찬 거룩한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맹자는 돈키호테인양 현실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상의 현실화로 나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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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자』의 첫 구절을 보라. 그것은 두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거룩함을 제쳐놓고 이로움을 다투는 오패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널리 알려진 말처럼 “창고가 가득해야 사람들이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부해야 영욕을 안다.”09 예절과 영욕은 이제 목숨을 걸고 지키거나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 않다. 그것은 창고와 의식의 조건이 채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관중이 제나라 제후 계승을 둘러싼 내전에서 패배하고서 왜 죽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오경의 시대라면 패배 이후 관중의 삶은 잉여의 삶이지 의미의 삶이 아니다. 패배했다면 깨끗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포숙아가 환공을 설득한 것도 있지만 환공이 관중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관중처럼 더 이상 성왕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을 잊어버리고 나날이 바뀌는 국제 정세에서 오패에 의지해서 거룩함을 잊고 이로움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성속聖俗이 분리되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관중이 그 신호탄을 발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관중이야말로 춘추전국에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소인시대의 막을 연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긍정: 소인시대의 개막 


  물질을 둘러싼 이해의 투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다만 오경에는 물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성왕과 현신이 주연과 조연으로 나오므로 물질을 둘러싼 이야기가 많지 않다. 물질 이야기가 있다면, 잉여 물질을 낭비하고 물질 생산의 고통에 무지하다는 훈계가 들어 있을 뿐이다.

 『논어』에 이르러 공자는 물질 소유와 공정 또는 정의의 상관성을 자주 이야기했다. 정의롭지 않은 물질, 공정하지 않은 물질은 단지 특정인의 타락과 부패가 아니라 공동체가 활력을 잃고 투쟁과 몰락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맹자』의 첫 구절에서 보이듯 맹자는 물질을 향한 관심은 결국 경쟁과 투쟁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사실 탁견이다. 오늘날 공정과 정의를 보장하는 각종 법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집단, 계급간의 대립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특히 맹자는 생산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더 많은 물질의 소유’를 향한 관심은 만인 대 만인의 파멸적인 상황으로 진행되리라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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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 제나라 지도 (齊國歷史博物館)

  
  그렇다면 맹자와 비슷한 시대에 관중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파멸적인 상황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물질적 소유를 향한 소인의 거친 욕망을 인정했던 것일까⋅ 첫째, 평준(平準) 제도이다. 이는 향후 물가를 조절하는 경제 정책의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민간에 농산물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데 이를 방치하면 소농의 경제 기반이 위험해진다. 국가는 싼 가격에 물자를 구매하여 가격의 하락을 막는다. 반대로 농산물이 적으면 가격이 올라가는데 이를 내버려두면 소농의 생활이 힘들어진다. 국가는 비축한 물자를 내놓아서 가격 하락을 유도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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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인은 물자의 가격 동향에 따라 막대한 이익을 거둔 반면 소농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평준을 통해 대상인이 독점을 통해서 소농을 수탈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한제국의 무제도 평준법을 시행했다가 다음 소제는 이를 폐지했다.) 이처럼 관중은 물가 안정을 통해 소농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빠지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맹자가 우려했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농업 이외에 상공업의 활성화이다. 제나라가 내륙에 자리한 허난성과 달리 바다와 가까이 있었다. 이는 자연히 소금과 어류 등의 어업 자원을 초기의 상품 경제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는 농업에 바탕을 둔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두드러진 특징이었다.11 

  이처럼 관중은 상공업을 통해서 국가 경제의 부를 축적하고 평준법을 통해 소농이 대상인의 수탈에 의해 파멸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은 국가가 소농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정전법을 통해 소농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키려고 했던 맹자의 방법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맹자는 농업 생산에 기반해서 소농의 이탈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 관중은 농업에 바탕을 두면서도 당시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초보적인 상품 경제를 활용해서 부국을 일구어냈던 것이다.

  관중은 부국을 목표로 하면서 경제적 잉여를 아낌없이 쓰는 생활을 즐겼다. 『논어』에도 관중이 검소하지 않았다는 고발이 제기될 정도로 그는 사치로운 생활을 했던 것이다. 누대를 짓는다든지 부인을 많이 둔다든지 ….12 이것은 관중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제나라의 일반적 습속이 되었던 것 같다. 사치와 호화 그리고 문화와 유희를 즐겼던 제나라는 전국시대 전쟁밖에 모르는 잔인한 서쪽의 진나라에 패해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던 것이다.13  
  

 <대순회보> 132호 


필자소개 
신정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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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국책』 「조책」1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보통 이 구절의 출처를 『사기』 「자객열전」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전국책』을 참조한 것이므로 원 출처는 『전국책』이라고 할 수 있다. 

02 『설원(說苑)』 「복은(復恩)」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士爲知己者死, 而況爲之哀乎!”

03 번역본으로 김필수 외 옮김, 『관자』, 소나무, 2006이 있다. 관중에 다가가기 위해서 신동준 옮김, 『국어』, 인간사랑, 2005 참조.

04 이 이야기는 『사기』 「노자한비열전」, 「공자세가」, 『예기』 「증자문(曾子問)」, 『장자』 「지북유」, 「천도」, 「천운」 등에 나온다.

05 「헌문」17(365)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헌문」18(366)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子曰, 管仲相桓公, ⋅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06 「고자」하7 “孟子曰: 五覇者, 三王之罪人也. 今之諸侯, 五覇之罪人也. 今之大夫, 今之諸侯之罪人也.”

07 「이루」상10 “自暴者不可與有言也, 自棄者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공손추」상6 “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08 「양혜왕」상1 “孟子見梁惠王. 王曰: ⋅! 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09 「목민(牧民)」 凡有地牧民者, 務在四時, 守在倉⋅. 國多財, 則遠者來, 地⋅⋅, 則民留處. 倉⋅實, 則知禮節. 衣食足, 則知榮辱. 上服度, 則六親固. 四維張, 則君令行. 『관자』의 첫 구절은 기쁨, 즐거움, 군자를 노래하는 『논어』와도 다르고 예의를 말하는 『시경』의 첫 시와도 다르다.

10 『漢書』 「食貨志」下 “民有余則輕之, 故人君斂之以輕. 民不足則重之, 故人君散之以重. 凡輕重斂散之以時, 則准平. …… 故大賈富家不得豪奪吾民矣.”
11 『史記』 「齊太公世家」 “輕重魚鹽之利, 以贍貧窮.” 『史記』 「平准書」 “或言通輕重之權,⋅山海之業.” 『史記』 「管晏列傳」 “通貨積財, 富國强兵.”
12 「팔일」 22(062)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13 장웨이, 이유진 옮김,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춘추오패 우두머리 제나라의 번영과 몰락』, 글항아리,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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