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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등석자(鄧析子)』 소송사회의 출현과 계몽 군주의 자기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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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4,7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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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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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나라도 소송이 빈번하게 늘어나고 있다. 옛날 같으면 이해 당사자끼리 다투게 되더라도 결국 서로 합의하고 조정해서 끝내는 일이 많았다. 옛날 사람이 착해서 그랬다기보다 법에 의지해서 권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희박했던 것 같다. 요즘 자신이 손해를 본다 싶으면 소송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만회하려고 한다. 진짜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미국 영화에서 자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정의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서 소송을 만드는 소송사회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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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 정나라에는 공자(기원전 551~479)보다 약간 앞서서 활약하던 유능한 정치가 자산(子産, 기원전 ?~522)이 있었다. 그는 목공(穆公)의 손자로 정나라의 세습 귀족이었는데, 사람들이 공손교(公孫僑), 정자산(鄭子産)으로 불렀다(자산은 공손교의 자이다). 자산은 일찍이 국인(國人) 계층의 정치적 성장을 고려해서 법률을 종에다 새겨서 공포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자산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사람들이 이제 학자-관료의 지시와 해석을 믿지 않고 모두 법률의 자구에 주목해서 서로 바늘처럼 세밀하게 이해를 다투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01 공자가 법의 지배를 반대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사고였지만 법률 만능과 소송 사회를 예언한 것은 꽤나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 
  자산은 귀족 출신이면서 공자가 비판했듯이 자신의 특권을 부정하는 법률을 공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살펴볼 등석(鄧石, 기원전 501)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02 

 


불행한 라이벌, 등석과 자산 


  자산이 세족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굳혀갈 때 정나라에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이가 바로 등석자였다. 그는 뛰어난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법률에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산보다 진보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여씨춘추』와 『열자』를 보면 자산과 등석이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등석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두 사람의 애증을 확인할 수 있다. 자산이 정나라의 국정을 주도할 때 등석은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일반 인민 중에 소송이 걸린 사람이 있으면 등석은 큰 사건에 긴 옷 한 벌, 작은 소송에 바지저고리 한 벌을 사건 수임료로 받아서 변호사 역할을 자처했다. 사람들은 등석의 성공을 보고 너도나도 그에게 소송을 배우고자 했다. 이를 통해서 그른 것은 옳은 것으로 뒤바뀌고 옳은 것은 그른 것으로 뒤바꿔서 옳고 그른 기준이 없어지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날마다 바뀌었다. 극단적으로 등석이 소송을 이기고자 하면 반드시 이기고 죄를 주고자 하면 반드시 유죄가 되었다. 정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지고 백성들도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처리하려고 하였다.03 

  또 다른 일도 있었다. 정나라의 유수(洧水)가 크게 불어나는 바람에 어떤 사람이 빠져 죽었다. 우연히 한 사람이 죽은 이의 시신을 수습하게 되었다. 가족이 사례를 하며 시신을 인수하려고 했지만 너무 많은 돈을 부르는 바람에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들이 등석에게 사건을 의뢰하자 그이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도 다른 사람이 살려고 하지 않을 터이니까요.” 상황이 반대로 되자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등석을 찾아와 사건을 외뢰했다. 등석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시신을 달리 살 데가 없을 터이니까요.” (『여씨춘추』 「離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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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석이 오늘날 태어났으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명변호사가 되었을 듯하다. 

  그는 사태가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거나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범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사태의 양면성을 날카롭게 포착해내고서 그에 대해 윤리적 선악 판단을 배제한 채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가에 따라 판단했다. 이렇게 되면 사태에 대한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태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로 분석된다. 『열자』에서는 등석의 이러한 특징을 다음처럼 포착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두 가지의 대안을 찾아내고 끝을 알 수 없는 논변을 펼친다.” 그는 자유로운 상상과 상대주의 논법을 빌어서 대대로 전승되어온 고대 성왕의 언행을 비판하고 또 획일적 절대적 목표와 가치를 세우려는 자산에 대응했던 것이다.04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경우 자산이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가치 상대주의자 또는 포용적 다원주의자가 아니라면 등석과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이승만과 김구·조봉암, 박정희와 장준하·김대중 등의 관계에서 보이듯 자산은 권력의 힘을 빌어서 등석을 영원히 침묵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05

  


불세계의 객관적 인식


  등석은 사람이 씨족 공동체 단계에서 하늘 등 자연신과 조상신에 의존해있던 사고를 넘어서고자 했다. 그 단계에서 세계는 자연신의 은총과 조상신의 가호에 의해서 전개된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제사를 주기적으로 지내면서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다. 즉 사람들은 자신과 신과의 특별한 유대 의식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찾았던 것이다. 
  등석은 오늘날 전해지는 『등석자』의 첫 구절에서 세계를 신의 의지와 신인감응론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하늘이 사람을 특별 대우하지 않고 군주가 인민을 특별 대우하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을 특별 대우하지 않고 형이 아우를 특별 대우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가? 하늘은 몹쓸 병의 기운을 막아 주거나 요절하는 사람을 살려 주거나 착한 사람이 반드시 장수하게 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하늘이 사람을 특별 대우하지 않는다.”06

  
  등석은 하늘과 사람 등 씨족 공동체의 질서를 지탱하는 기본 관계의 유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사람은 자연을 신인감응론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냉정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등석은 “감각적으로 청각은 소리 없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시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계획은 징조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통제할 수 있고 지식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 움직임마저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07

  이를 바탕으로 등석은 감각에 한정되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 인식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사태 파악과 대비가 미리 정해지지 않으면 갑작스런 일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병사가 평소 훈련하지 않으면 실전에서 적에 대적할 수 없다. 묘당 안에서 천리를 계산하고 장막 안에서 기묘한 대책을 세우니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기는 것이다.”08 등석의 이러한 인식은 묘하게 노자와 합치한다.09 등석과 노자는 인격을 투영해서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부정하는 데에 공동의 보조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 등석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뒤에 명실의 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순명책실(循名責實)에 따라 법을 제정했다.10 이렇게 법이 제정되고 나면 치수의 정확성과 통일성이 중요한 공작 도구와 마찬가지로 쉽게 고치거나 시속에 영합해서 뜯어고쳐서는 안 된다.11 그렇게 한다면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이 없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낳게 된다. 여기서 등석은 법을 사적 이해, 의지와 대립되는 것으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12 

 


계몽적 명군의 주관 능동성 


  등석 이후 상앙과 한비는 전국시대에서 예치(禮治)가 아니라 법치(法治)로 사회 운영의 시스템을 변혁시키고자 했다. 이때 능동적인 군주, 세습 귀족의 제어, 관료-학자의 독립적 위상,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인민의 동의가 법치 성공의 관건이 된다. 법치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주관적 해석이 아니라 법률의 규정과 메뉴얼에 따라 운영된다. 군주가 정치를 법치 시스템에 맡기지 않고 정치에 개입하면 초법적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군주가 법치를 방해하게 된다. 그래서 상앙과 한비는 공통적으로 법치가 작동하게 되면 군주가 법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법의 적용을 유보시키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특히 한비는 법치가 실현되는 사회라면 군주가 고대의 성왕처럼 초월적 지성을 가질 필요가 없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중주(中主)라면 별 다른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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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등석을 제자백가 중 법가, 명가와 연결시킨다. 등석이 예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등석은 법가의 선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등석의 특징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는 현행 『등석자』에서 군주가 다른 사람에 비해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사태를 법에 따라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운영을 전문가(신하)에게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분명 보통 지능의 법치 시스템과 완전히 다른 모델이다. 등석은 계몽 군주, 즉 명주(明主)의 능동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등석이 법가라고 하더라도 상앙이나 한비와 다른 문제의 지평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임금이 스스로 오로지 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전문가(신하)에게 맡기면 지혜가 날로 곤궁해지고 술수가 날로 막히게 된다. 전문가(신하)에게 압박을 받으면 제 뜻을 펼칠 수 없고 국인들에게 질질 끌려가면 제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지혜가 나라를 다스리기에 부족하고 위엄이 처벌하기에 부족하다면 아랫사람과 제대로 교류할 수도 없다.”
13

  
  “군주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그림자까지 숨긴다면 여러 전문가(신하)들은 사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면 백성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 것이다.”14

  
  아래 인용문을 보면 등석은 상앙과 한비가 법치의 또 다른 파트너로서 강조하고 있는 술(術), 형명(形名)에 바탕을 둔 인군남면지술(人君南面之術)을 똑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군자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전문가에게 과제를 맡겨서 각자 의견을 내고 그 의견을 따른 결과를 점검하는 것이다. 의견과 결과가 일치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준다. 이때 군주는 자신의 호의와 생각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절대로 알려지지 않게 자신의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누설 행위를 완전히 차단해야 했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을 보면 등석은 군주가 인군남면지술의 상태에 머물러있으면 결국 전문가와 백성을 통제할 수 있는 지식과 권위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는 명군(明君)이라면 사태의 진행에 개입해서 주도적 작용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위의 인용문은 등석의 원래 주장에 부합하고 아래 인용문은 후배 법가의 주장이 뒤섞여 들어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등석은 씨족 공동체 단계에 있던 고대 성왕들이 개인의 인격에 의해 실시하던 정치를 부정한 것이지 계몽적 군주의 능동성마저 부정하려고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등석이 자산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소극적인 반발을 넘어서 적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던 행적과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관자』가 관중의 사고를 충실하게 반영하는지 확실하지 않듯이 『등석자』가 등석의 원래 발언을 100%로 전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즉 현행 『등석자』에는 등석의 발언과 후대 사람들의 삽입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등석이 자산과 대립하던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그는 후대 사상가와 비교해서 나름의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보통 등석을 명가와 법가의 후예와 연결 짓는다. 나는 이 이외에도 등석이 노자와 이어지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씨족 공동체의 이상적 성왕들이 사라지면서 암주(暗主)가 세상을 파괴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모델의 명주(明主) 시대를 기원했다. 이 명주는 신인감응을 벗어나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 명주는 『노자』에 등장하는 성왕(聖人), 후왕(侯王)과 겹치는 측면이 많다. 


   <대순회보> 139호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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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기원전 536년 정나라 자산이 주형서(鑄刑書)를 하자 제나라 숙향(叔向)이 이를 반대하는 편지를 자산에게 보냈고, 기원전 513년에 진(晉)나라 조앙(趙?)이 鑄刑書를 하자 공자가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숙향의 주장은 『좌씨전』 소공 6년에 보이고, 공자의 주장은 소공 29에 보인다. “民知爭端矣, 將棄禮而徵於書, 錐刀之末, 將盡爭之. 亂獄滋豐, 賄賂並行. 終子之世, 鄭其敗乎? 肹聞之, ‘國將亡, 必多制.’ 其此之謂乎!”(숙향) “何以尊貴? 貴何業之守? 貴賤無序, 何以爲國? 且夫宣子之刑, 夷之蒐也, 晉國之亂制也, 若之何以爲法?”(공자)

02 등석의 전기와 『등석자』의 신빙성과 관련한 간단한 정보로는 임동석 역주, 『등석자·윤문자·공손룡자·신자』, 동서문화사, 2011 참조.

03 『여씨춘추』 「離謂」 “子産治鄭, 鄧析務難之, 與民之有獄者約, 大獄一衣, 小獄襦袴. 民之獻衣襦袴而學訟者, 不可勝數. 以非爲是, 以是爲非, 是非無度, 可與不可日變, 所欲勝因勝, 所欲罪因罪. 鄭國大亂, 民口諠譁.”

04 순자는 등석을 혜시와 같은 부류로 파악하고서 그의 사상이 가지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荀子』 「非十二子」 不法先王, 不是禮义, 而好治怪說, 玩琦辭. …… 然而其持之有故, 其言之成理, 足以欺惑愚衆, 是惠施鄧析也.

05 『列子』 「力命」 鄧析執兩可之說, 設無窮之辭, 當子産執政, 作竹刑, 鄭國用之. 數難子産之治, 子産屈之. 子産執而戮之, 俄而誅之,

06 「無厚」 天於人, 無厚也. 君于民, 無厚也. 父於子, 無厚也. 兄於弟, 無厚也. 何以言之? 天不能屛勃厉之气, 全夭折之人, 使为善之民必寿, 此於民無厚也. 凡民有穿窬为盗者, 有诈伪相迷者, 此皆生於不足, 起於贫穷, 而君必执法诛之, 此於民無厚也. 尧舜位为天子, 而丹朱商均为布衣, 此於子無厚也. 周公诛管蔡, 此於弟無厚也. 推此言之, 何厚之有?
07 「無厚」 诚聽能闻於無声, 视能见於無形, 计能规於未兆, 虑能防於未然.

08 「無厚」 虑不先定, 不可以应卒. 兵不闲习, 不可以當敌. 庙算千里, 帷幄之奇, 百战百勝, 黄帝之师.

09 『노자』 47장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不行而知, 不見而明, 不爲而成.

10 「無厚」 循名责实, 察法立威, 是明王也. 夫明於形者, 分不遇於事. 察於动者, 用不失则利. 故明君审一, 萬物自定. 名不可以外务, 智不可以从他, 求诸己之谓也.
11「無厚」是以规矩一而不易, 不为秦楚缓节, 不为胡越改容. 常一而不邪, 方行而不流.

12 「转辞」 夫治之法, 莫大於使私不行. 君之功, 莫大於使民不争. 今也立法而行私, 與法争. 其乱也, 甚於無法. 立君而尊贤, 與君争. 其乱也, 甚於無君.
13 「轉辭」 君人者, 不能自專而好任下, 則智日困而數日窮. 迫於下, 則不能申, 行隨於國, 則不能持. 知不足以爲治, 威不足以行誅, 則無以與下矣.

14 「無厚」 君者, 藏形匿影, 郡下無私. 掩目塞耳, 萬民恐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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