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읽기『윤문자(尹文子)』, 세속적 인간의 긍정과 일자一者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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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4,761회 댓글0건본문
글 신정근
동양고전을 즐겨 읽거나 제자백가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윤문자(尹文子)를 들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덜 알려졌다고 해서 윤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해가 그만큼 공자, 장자, 한비자와 같은 인물 중심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사상사가 그만큼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는 윤문자를 통해 빼놓은 사상가의 빈틈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윤문자는 많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맹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선왕(宣王) 시절에 활약했다. 전국시대 제나라는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처럼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설립해서 여러 나라 출신의 제자백가를 초치했다. 그곳에서 학자들은 자유로운 연구를 하고 자문에 응하기는 했지만 직무를 수행하지는 않았다. 당시 윤문자도 직하학궁에 참여해서 다양한 사상가와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상과 관련해서 윤문자는 다양한 학파로 분류된다. 예컨대 선한(先漢)시대의 문헌 목록을 최초로 제시한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윤문자’를 명가(名家)로 분류하고 있다.01 또 전근대 청제국 시절에 작업했던 최대의 데이터베이스화 프로젝트였던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 윤문자는 잡가(雜家)에 속한다. 실제로 『윤문자』의 내용을 검토하면 명가 이외에 도가, 법가, 유가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02 사실 윤문자는 명가의 경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한 학파의 인물로만 볼 수 없는 복합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윤문자만이 아니라 제자백가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학파로 보는 관점에 반대한다. 학파가 아니라 개인 윤문자에 주목하기로 하자.
우리 주위에 참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성실한 사람, 얄미운 사람, 이타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 등등.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세상 살맛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사람이 저럴 수도 있나 싶어 힘이 빠지기도 한다. 후자 부류의 사람이 정도가 심하면 우리도 “귀신은 뭐하나, 저런 사람 잡아가지 않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후자의 부류를 도덕적 계몽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문제적 인간이기 때문에 교화를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세속적 인간의 긍정
윤문자는 문제적 인간에 대해 섣불리 도덕의 교화와 종교의 세례라는 개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강자에게 굽실거리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인간의 약은 모습을 그대로 인정했다. 윤문자는 인간성에 대한 좋다와 나쁘다, 고상하다와 저급하다는 이분적인 대립 구도를 설정하여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의 변화를 타락 아니면 발전으로 보지 않았다.
“세속의 사람들은 칭찬받으면 기뻐하고 헐뜯으면 걱정한다. 이것은 일반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자신과 같으면 히죽히죽 즐거워하고 자신과 다르면 발끈 성낸다.”03
윤문자가 본 사람이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사람에 대해 윤문자는 도덕적 평가 또는 윤리적 접근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이 그렇다며 담담하게 보고하고 있다. 담담한 보고는 다음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의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칭찬하기를 잘하고 순순히 따르기를 잘한다. 상대가 옳다고 하면 자신도 역시 옳다고 하고, 상대가 그르다고 하면 자신도 역시 그르다고 한다. 즉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에 맞장구친다. 그래서 현명한 리더가 비록 이치상 올바른 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반드시 올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있다. 또 현명한 리더가 이치상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을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반드시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을 수 있다.”04
사람이 도덕적이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면 사람은 자신과 상대를 도덕과 이성에 따라 규제하게 된다. 설령 상대가 자신과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하는 일이 타당하지 않다면 비판하게 된다. 윤문자는 꾸미지 않는 사람의 실제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다. 사람은 도덕과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당파에 따라 움직인다. 도덕을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보다 이해에 따라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윤문자의 주장은 어디에 그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현명한 리더라면 정직을 긍정하고 편당(偏黨)을 부정하므로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편당하는 사람을 멀리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현명한 리더라고 하더라도 꼭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 반대로 행동할 수 있다. 즉 현명한 리더조차도 정직한 사람을 내치고 편당하는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문자가 사람을 도덕, 이성, 진리의 기준에서 바라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역시 현실적인 이유를 내놓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실제로 많고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은 실제로 적다. 이익을 추구하는 감정(욕망)은 현명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심하고, 청렴하고 부끄러워하는 감정은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더 강하다. 가령 예의로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을 모으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은 만 명 중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명예와 이익으로 현명하지 않은 사람을 모으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땅(길)에서 부닥칠 정도로 많다.”05
윤문자는 현명한 소수와 현명하지 못한 다수라는 현실의 조건을 인정한다. 소수가 다수를 계몽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세속적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세속 사회를 전제하고서 사회 질서의 수립을 모색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처럼 부연했다. “예의가 군자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군자가 예의를 다 갖추지 못하고 명예와 이익이 소인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소인에게는 명예와 이익이 없을 수 없다.”06
독치(獨治)를 넘어 공치(共治) 사회로
윤문자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보통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다. 이는 결국 하늘 또는 하늘의 대리인인 왕과 인민 사이에 다른 존재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공자는 군자(君子)를 설정해서 하늘을 대리하는 왕을 돕도록 했다. 이때 인민은 왕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군자를 직접 만나므로 어찌 보면 군자 중심의 사회라고도 할 수 있다.
윤문자는 이러한 군자 중심의 사회를 독선(獨善)과 독현(獨賢)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선을 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 하게 못한다면 이는 독선이다. 교묘한 기술을 쓰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 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이는 독교(獨巧)이다. 이것은 모두 선과 기술의 이치를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선을 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실행하고 기술을 쓰더라도 일반 대중과 함께 능숙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선(善) 중의 선이고 기술 중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여기는 성인의 다스림은 독치(獨治)를 높이 치는 것이 아니고 대중과 함께 공치(共治)할 수 있는 것을 높이 친다.07
“윤문자는 홀로 선을 하는 독선(獨善)과 홀로 기술을 쓰는 독교(獨巧)를 다시 홀로 다스리는 독치(獨治)로 귀결시키고 있다. 마지막에 그는 이 독치를 여럿이 함께할 수 있는 공치(共治)와 대비시키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공치를 인민주권으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공치의 가치가 낮게 평가될 수는 없다. 윤문자가 성인, 군자 등 소수의 특별한 위인이 선도하고 다수의 인민이 모방하는 사회 질서를 바라지 않았다. 사회 질서의 초점을 다수의 인민이 바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바탕을 두고자 한다. 이로써 다수의 인민을 사회 질서의 외부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일원으로 포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문자는 유감스럽게도 인민을 내부로 포섭하고 나서 그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08
윤문자의 기획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에는 아직도 개인의 탁월성에 바탕을 둔 사회 질서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한 윤문자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하자.
“요즘 세상 사람들은 행동은 홀로 현명하고 일처리가 홀로 유능하고 변론은 무리에서 뛰어나고 용기가 대중과 비교되지 않으려고 한다. 홀로 실행하는 현명함은 그것으로 교화를 마칠 수 없고 홀로 유능한 일처리는 그것으로 급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고 무리에서 뛰어난 변론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설득할 수 없고 대중과 비교되지 않는 용기는 적진을 깨뜨릴 수 없다. 이 네 가지는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이다.”09
이제 윤문자의 주장은 분명하다. 독현(獨賢), 독능(獨能), 출군(出群), 절중(絶衆)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사회 질서를 가져오는 미덕이거나 기능이 아니라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다. 이는 개인의 탁월성에 바탕한 사회 질서와 완전히 딴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개인적 탁월성은 결국 사회보다 개인에 초점을 두게 되고, 그러한 개인들의 권력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 권력화로 인해 질서가 아니라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윤문자는 다수의 인민을 중심으로 사회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면서 법을 그 밑그림에 놓고 있다. 이 점은 윤문자가 도가와 법가의 연계성을 모색하던 시대에 출현한 사상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도에 맡겨서 위험 요소를 없애고 법을 만들어서 차이를 조정하여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떨쳐버리게 하지 않고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빼버리지 않도록 한다.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빼버리지 않으면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 모두 공을 나란히 세울 수 있다. 또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떨쳐버리지 않으면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고려(대비)를 비슷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질서의 기술이다.”10
다수의 인민이 모두 법에 따르게 된다. 이 법은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치의 법 사회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묵적, 상앙, 한비는 능력 중심의 사회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업적주의, 결과주의, 국가주의에 빠지게 되면 격차, 소수자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윤문자가 해결책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윤문자는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이 차이 때문에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천인(天人) 도식에서 도기(道器) 도식으로
윤문자 이전에 사회 질서는 하늘, 하늘을 대리하는 왕, 왕을 돕는 특권 계급[君子]과 인민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로 유지되었다. 사람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대로 살아간다면 사회가 안정되는 것이다. 즉 천인(天人)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윤문자는 이러한 천인 관계와 군자 중심의 사회 질서를 넘어서고자 했다.
윤문자는 세계를 형체가 없어 특정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도(道)와, 네모와 원 등의 형체가 있어서 특정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기(器)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했다. 세계 질서는 규정할 수 있는 기(器)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다. 이름이 없으면 크고 작은 것, 나쁘고 좋은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사물과 사태 각각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여하게 되면 세계는 모두 이름에 의해서 제 가치를 가지면서 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11
다양한 기(器)의 영역에 이름을 부여해서 질서를 잡을 때 이름을 붙이는 원칙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도는 특정하지 않으므로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특정한 것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여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문자는 도량형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자로 길고 짧은 길이를 재고, 되로 많고 적은 양을 재고, 저울로 가볍고 무거운 무게를 잰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름으로 불일치와 일치를 재고, 법으로 안정과 혼란을 정하게 되고 또 간단한 것으로 번잡한 것을 가리고 손쉬운 것으로 험난한 것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12 이로써 세계가 복잡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간단하고 손쉬운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해 분류되고 평가될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을 전부 하나로 귀결시키고 모든 기준을 전부 법으로 잰다. 하나로 귀결시키는 것은 간단함의 지극함이고 법으로 재는 것은 쉬움의 극치이다. 이와 같다면 완고하고 속이고 귀먹고 눈먼 사람도 모두 예리하고 지혜롭고 귀 밝고 눈 밝은 사람과 함께 사회의 질서를 함께할 수 있다.”13
『노자』에서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라고 했다.14 노자는 도와 하나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라는 것 자체도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윤문자는 도와 하나 사이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하나인 도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다양한 사물과 사태로 나뉘게 된다. 사물과 사태는 하나인 도와 결부해서 연계성을 가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즉 이름 없는 기(器)는 잠정적인 존재이고 이름 있는 기(器)가 현실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윤문자는 도가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적용되는 점에서 노자보다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윤문자는 노자에 없지만, 도(道)가 현실 세계의 질서를 가져오는 작용 체제에 주목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서 도(道)→법(法)→술(術)→권(權)으로 하강하고 권→술→법→도로 회귀하는 쌍방향 흐름을 통해서 무한한 질서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15
이렇게 보면 윤문자는 노자 이후에 법가의 논리를 바탕으로 노자의 사유를 현실 사회에 적용하려는 흐름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자(一者)를 기준으로 독치(獨治)를 넘어서 공치(共治) 사회를 수립하고자 했던 점에서 사상사의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대순회보> 140호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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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오늘날 전해지는 『윤문자』는 『大道』 상하 두 편과 다른 쪽에 흩어져 있는 단편을 모은 일문(佚文)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윤문자를 명가로 보는 견해가 널리 알려진 평가이다.(알프레드 포르케 저, 최해숙·양재혁 옮김, 『중국 고대철학사』, 소명출판, 2004 참조)
02 임동석 옮김, 『등석자 윤문자 공손룡자 신자』, 동서문화사, 2011, 111~113쪽 참조.
03 『佚文』 世俗之人, 聞譽卽悅, 聞毁則戚, 此衆人之大情. 同己則喜, 異己則怒, 此人之大情.(출처 『群書治要』).
04 『佚文』 故佞人善爲譽者也, 善順從者也. 人言是, 亦是之. 人言非, 亦非之. 從人之所愛, 隨人之所憎, 故明君雖能納正直, 未必能親正直, 雖能遠佞人, 未必能疏佞人.(출처 『群書治要』).
05 『大道』上 今地之間, 不肖實衆, 仁賢實寡, 趨利之情, 不肖特厚, 廉恥之情, 仁賢偏多. 今以禮義招仁賢, 所得仁賢者, 萬不一焉. 以名利招不肖, 所得不肖者, 觸地是焉.
06 『大道』上 故曰: 禮義成君子, 君子未必須禮義. 名利治小人, 小人不可無名利.07 『大道』上 爲善使人不能得從, 此獨善也. 爲巧使人不能得從, 此獨巧也, 未盡善巧之理. 爲善與衆行之, 爲巧與衆能之, 此善之善者, 巧之巧者也. 所貴聖人之治, 不貴其獨治, 貴其能與衆共治; 貴工倕之巧, 不貴其獨巧, 貴其能與衆共巧也.
08 이러한 한계로 인해 윤문자만이 아니라 상앙, 한비 등도 국가주의의 특색을 지닌다. 이와 관련해서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참조.
09 『大道』上 今世之人, 行欲獨賢, 事欲獨能, 辯欲出群, 勇欲絶衆. 獨行之賢, 不足以成化; 獨能之事, 不足以周務; 出群之辯, 不可爲戶說; 絶衆之勇, 不可與征陣. 凡此四者, 亂之所由生.
10 『大道』上 是以聖人任道以夷其險, 立法以理其差, 使賢愚不相棄, 能鄙不相遺. 能鄙不相遺, 則能鄙齊功; 賢愚不相棄, 則賢愚等慮, 此至治之術也.
11 『大道』上 大道不稱, 衆有必名; 生於不稱, 則群形自得其方圓; 名生於方圓, 則衆名得其所稱也. 『大道』上 故亦有名以檢形, 形以定名, 名以定事, 事以檢名. 察其所以然, 則形名之與事物, 無所隱其理矣.
12 『大道』上 古人以度審長短, 以量受多少, 以衡平輕重, 以律均淸濁, 以名稽虛實, 以法定治亂, 以簡治煩惑, 以易御險難.
13 『大道』上 以萬事皆歸於一, 百度皆準於法, 歸一者簡之至, 準法者易之極, 如此, 頑嚚聾瞽可以察慧聰明同其治也.
14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15 『大道』上 道不足以治則用法, 法不足以治則用術, 術不足以治則用權, 權不足以治則用勢. 勢用則反權, 權用則反術, 術用則反法, 法用則反道, 道用則無爲而自治. 故窮則徼終, 徼終則反始, 始終相襲, 無窮極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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