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읽기『서경』, 정치의 재정의와 탕평의 이론적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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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4,508회 댓글0건본문
글 신정근
『주례』, 『서경』, 『춘추』, 『논어』, 『중용』 등은 다들 알다시피 동양고전에 속하는 문헌이다. 이들 동양고전은 전근대에서 다른 문헌보다도 특권의 지위를 누렸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말이 이 문헌에서 나왔다고 하면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지위를 누렸다. 전근대에 학자•관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전을 배워야 했다. 그래야만 학자•관료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누가 “『논어』에 따르면” 하면서 무어라고 하는데, 알아듣지 못한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양고전도 시대마다 다른 대접을 받았다. 어떤 시대에는 한 문헌이 다른 것보다 각광을 받았다면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른 문헌이 다른 것보다 화려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01 한(漢) 제국 초기에는 『춘추』가 주목을 받았다. 한 이전의 고대, 즉 삼대(三代)에는 최고 정치지도자가 성왕(聖王)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성왕이 최고의 지성인이므로 그들은 늘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한 이후에 왕은 치열한 공방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최고의 지성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시각각 터지는 사건을 접하고서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이때 『춘추』는 복잡한 사건을 처리하는 판례집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건이 생기면 유사한 사례를 『춘추』에서 찾아서 판단을 내렸다. 한 제국의 이러한 관행을 인경결옥(引經決獄)이라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동중서의 『춘추결옥(春秋決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경』도 역사적으로 부침을 거듭했다. 한 제국에는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진위를 두고 논쟁이 되었다.02 이 논쟁은 바로 금문경학과 고문경학이 학술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던 형태로 진행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문상서가 매색(梅賾)의 위작으로 판결이 났지만 전근대 내내 학술 논쟁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적이 없었다. 주희가 사상의 무게를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에 두면서 『서경』의 비중이 조금 낮아졌다. 아마 성왕이 주인공인 오경보다 군자와 소인이 나오는 사서가 사람의 기질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서 적용 가능성이 더 풍부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서경』이 다시 한번 더 학술사의 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조선 후기 정조와 정약용이 바로 『서경』의 가치를 재발견한 주인공이었다.03 이들은 『서경』의 어떤 점에 주목했던 것일까?
정조와 정약용, 『서경』의 재발견
한국과 중국의 경우 전근대의 정체는 왕정이었다가 근대에 들어서 민주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보통 왕정하면 왕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사람 목숨마저 파리 목숨 취급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이 적절한 역사적 사실과 결합해서 동아시아의 전제왕권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 왕조의 건국 영웅이나 특별한 역사적 변동기에 특정한 왕(황제)이 신권보다 압도적인 왕권을 행사한 적이 있다. 진의 시황제, 한의 무제, 명의 태조, 청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이 이들이다. 특히 옹정제는 주접(奏摺)이란 비밀 편지를 활용해서 특정 지역의 동태, 지역 행정의 실상을 소상하게 파악해서 황제의 의지를 이른 시간 안에 전국 곳곳으로 전달하여 현실 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04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왕권은 전근대의 역사에서 보면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고 특별한 황제들도 개인 의지가 아니라 조종(祖宗)을 존중하고 왕실을 고려하며 신권을 활용하면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제왕권설은 냉정하게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도 분명 왕정의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전제왕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왕과 세자는 개인 의지와 무관하게 서연(書筵)과 경연(經筵)을 통해 유학의 소양을 내면화시켜서 그 이념을 현실 정치에 구현해야 했다. 현실적 구현 여부와 상관없이 왕은 유학의 이념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못했다. 기상과 취침에 이르는 왕의 움직임과 언행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훗날 『실록(實錄)』과 『일기(日記)』 등으로 정리되었으므로 기록으로부터도 자유롭지도 못했다. 또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대신과 협의했고 결정 이후에도 잘잘못을 따지는 대간의 간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야에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림(士林)으로부터 상소를 받았다. 물론 왕 개인의 능력과 통치 스타일에 따라 견제와 압박감은 다를 수 있겠지만 왕이 마음먹은 대로 정치를 주물렀다고 할 수는 결코 없다.
왕들은 다양한 층위의 견제를 넘어서 통제권을 행사하고자 다양한 길을 찾았다. 숙종은 환국(換局) 정치를 통해 특정 붕당의 세력화를 막으면서 이해 조정자로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이는 정국 불안을 가중시킬 뿐 의도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통해 인재를 균형 있게 선발하고자 했다. 환국이 역학 관계를 조정하려는 현실적인 타개책인 반면, 탕평책은 인위적인 집권파의 교체가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정성을 원칙으로 내건 정치 운동이다.
영조와 정조는 탕탕평평(蕩蕩平平)의 탕평책의 근거를 현실적 이해타산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서경』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서경』 「홍범」은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는 아홉 가지 원칙, 즉 구주(九疇)를 다루고 있다.05 그중 다섯 번째 황극(皇極) 부분은 바로 영조와 정조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정조는 황극이 정치의 도(道)를 집약하고 있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호오(好惡)에 따른 붕당과 편들기에 따른 당쟁이 생겨난다고 보았다.06 황극에서 말하는 탕평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기울어지고 치우치지 않으면서 왕으로서 정의를 따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 왕으로서 도리를 따르고,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대로 피하지 않으면서 왕으로서 길을 따라라. 기울어지지 않고 편들지 않으니 왕의 도리가 크고 드넓으며 편들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니 왕의 도리가 가지런하고 고르다.”07
정약용은 영조와 정조의 「홍범」 이해를 한층 심화시킨다. 그는 홍범구주의 틀을 온전히 다섯 번째 황극을 중심으로 파악했다.
<표 1> 정약용의 홍범 구조08
위의 도해에서 구주는 각각 영역이 다른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1 오행, 4 오기, 7 계의는 하늘의 영역이다. 둘째, 2 오사, 5 황극, 8 서징은 군주의 영역이다. 셋째, 3 팔정, 6 삼덕, 9 복극은 사람의 영역이다.09 이렇게 보면 황극은 단순히 위치상의 중앙이 아니라 나머지 팔주가 서로 올바른 연관을 맺도록 조정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황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하늘과 백성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황극은 이 세계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황극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왕이 집행해야 할 덕목이다.
황극 중심의 「홍범」 이해는 단순히 텍스트 정합적인 독해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도해는 영조에 이어 정조가 추진하고자 하는 탕평책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극(皇極)과 지인(知人)ㆍ안민(安民): 붕당을 넘어 탕평을 위한 근거
황극은 탕평을 위한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총론만으로는 탕평을 현실화시킬 수는 없다. 즉 황극을 통해 탕평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탕평이 현실에 적용되려면 구체적인 실천 원칙이 필요하다. 「고요모(皐陶謨)」에 보면 고요와 우임금 사이에 대화가 있다. 둘의 대화에서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이 정치의 큰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지인은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서 적재적소에 쓰는 일이고, 안민은 사람을 제대로 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10
정조와 정약용은 정치의 요체를 지인과 안민으로 설정한 『서경』 「고요모」에 주목했다. 「고요모」의 지인과 안민은 「홍범」의 황극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인과 안민은 정치의 핵심이자 급무이다. 고요모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우임금이 탄식하면서 아직 그렇게 할 만하다고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왜 그럴까? … 군주 중에 크게 유위를 떨칠 기량이 없다면 마음속으로 성왕도 미치기 어렵고 이상적인 정치도 실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게으름 피우며 포기해버린다. 예컨대 또 지인과 안민은 요임금도 실행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니 누가 다시 그것을 실행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11
정조는 지인과 안민이 정치의 요체라는 고요모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고요모와 우의 대화에서 우가 요의 한계를 들면서 우려했듯이 지인과 안민의 과제는 당연한 요청임에도 불구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정조는 유위(有爲), 즉 커다란 사업을 꿈꾸며 일으키려고 하는 군주라면 지인과 안민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지인과 안민은 「대학」 한 편의 으뜸 취지이자 또 같은 한 편의 귀결이다. 그 연원이 이 경, 즉 『서경』 「고요모」에 있으니 아득히 멀고 오래전부터 밝혀졌던 것이다.”12
정약용은 정조와 마찬가지로 「고요모」에서 황극을 현실화시키는 지인과 안민의 과제에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홍범」의 황극과 「고요모」의 지인과 안민은 ‘탕평’을 실현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이자 실천 과제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서경』 이해는 참으로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경(經)을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여 규제하는 원칙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한 제국 인경결옥(引經決獄)의 용어를 빌린다면 두 사람의 경전 해석은 인경결의(引經決疑)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서경』 하면 많은 학자들은 성왕들이 서로 전수했다는 「대우모(大禹謨)」의 심법(心法) 16자에 주목한다.13 정약용은 『고문상서(古文尙書)』의 가치를 부정하지만 그곳에 나오는 심법의 의미를 인정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서경』을 심성 수양만이 치국방략(治國方略)을 위한 책으로 독해해내고 있다.14 이렇게 보면 정약용은 바로 정조가 찾고자 했던 지인(知人)의 인(人)이고, 정조는 정약용이 세우고자 하는 황극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존재 이유, 정의의 실현
동아시아의 전근대에 숱한 전적(典籍)이 있는데 정약용은 왜 『서경』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책이 경(經)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경은 고대 성왕의 언행이 담긴 자료이다. 역사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의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그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경에 주목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 성경, 불교 신자에게 불경이 갖는 의의에 견주어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다. 경만해도 삼경(三經)이니 오경(五經)이니 십삼경(十三經)이 있고, 서(書)만 해도 사서(四書)니 오서(五書)(사서+『소학(小學)』)가 있다. 이렇게 고대의 문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하필 『서경』에 커다란 관심을 쏟게 되었을까?
동아시아는 자연신, 조상신, 기능신 등 다양한 신이 있지만 유일신이 없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현실의 거악, 성공한 쿠데타 등 불의(不義) 또는 부정의(不正義)가 득세를 했을 때 누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유일신의 문화라면 불의의 사람이 살아있든 죽었든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 생전이나 사후에 정의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동아시아의 다신교 전통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적 존재가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춘추』의 역사 서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죽은 악인에 대해 철저한 심판을 가하는 정의의 법정이기도 하다.15
잘 생각해보면 『춘추』가 불의를 심판하여 정의가 승리하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즉 현실에서 악인이 떵떵거리며 살고 불의한 자가 정의로운 자를 압살한다고 하더라도 『춘추』는 당장 현실에 개입하여 심판할 수가 없다. 정약용은 이러한 『춘추』의 약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명(命)의 의미를 둘로 구분함으로써 “『춘추』 = 사후 심판, 『서경』 = 현실 심판”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보통 『서경』 하면 천명(天命)을 떠올린다. 이 천명은 하늘이 유덕자(有德者)에게 세상을 통치할 권한을 위임하는 의식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대덕수명(大德受命)이다. 그리고 다른 천명이 있다. 『중용』의 첫 구절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바로 그것이다. 이 천명은 사람이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성정을 가리킨다. 통상 같은 천명이라고 해도 이 둘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정약용은 『서경』의 명을 부성지명(賦性之命: 도덕적 성정을 부여하는 명)과 득위지명(得位之命: 정치 지위를 수여하는 명), 호선오악(好善惡惡) 또는 호덕(好德)의 성과 사생화복영욕(死生禍福榮辱)의 명으로 구분한다.
사람은 군주이든 인민이든 부성지명 또는 호선오악의 성에 개입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득위지명과 사생화복영욕의 명은 군주가 하늘을 대신해서 지상에서 행사할 수 있다. 공정한 인사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개인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국가는 유능한 인재를 통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할 수 있다. 따라서 군주는 능력자에게 자리를 주고, 무능력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바로 그것으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시대의 한계는 인정한다. 정약용에게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정치를 현재의 부정의를 바로잡아서 정의를 실현하는 맥락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홍범」의 황극, 「고요모」의 지인과 안민 그리고 『서경』의 득위지명은 삼위일체처럼 탕평을 실현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경』의 성왕이 삼위일체로 태평성대를 열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부정할 수 없는 『서경』의 권위를 빌어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책은 읽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특성을 드러낼 수 있다. 정약용과 정조는 시대를 구제하는 양약으로 책을 읽는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정조가 탕평으로 붕당을 넘으려고 했지만 사후에 거세게 몰아닥친 세도정치의 파고를 막지 못했다)
<대순회보> 142호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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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춘추』, 특히 동중서의 『춘추번로(春秋繁露)』는 청말(淸末)에 다시 한번 더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역사는 단계적 진화[발전]를 거치게 되므로 현재는 국면의 전환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다시 강유위(康有爲)에 의해서 춘추삼세(春秋三世)의 대동론(大同論)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곡구규구웅(谷口規矩雄) 편, 정성일 옮김, 『아시아 문화와 역사4 중국사-근세Ⅱ』, 신서원, 1997, 240~243쪽)
02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45~63쪽 참조.
03 이 점은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주희와 마테오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이학사, 2007, 363~400쪽에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필자도 이 글에 힘입은 바가 크다.
04 최근 정조가 근신(近臣)만이 아니라 정적(政敵)과 어찰(御札)을 주고받으면서 정국을 이끌어가려고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옹정제의 주접과 정조의 어찰은 운용 방식이 다르지만 ‘정보’의 완전한 통제를 통해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권력의 행사 방식에서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정조의 어찰첩(御札帖)은 김문식·안대외 외, 『정조어찰첩』,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참조.
05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내용과 설명은 이민수 옮김, 『서경』, 서문당, 1975, 185~194쪽 참조.
06 『弘齋全書』권50 「策問3 皇極」 王若曰: 爲治之道, 莫京於皇極. 而自箕子之發之, 更後數千載, 尙有能建其有極者乎? 夫朋分於好惡, 黨生於比周, 而皇極之不能用也舊矣. 猗我先大王誕敷建極之治, 五十年如一日. 烏虖蕩蕩無能爲名, 盛矣哉!
07 「洪範」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08 정약용의 「홍범」 도해는 『상서고훈(尙書古訓)』 권4: 28b에 나온다.
09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주희와 마테오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이학사, 2007, 376쪽.
10 「皐陶謨」 皐陶曰: 都在知人, 在安民. 禹曰: 吁, 咸若時, 惟帝其難之. 知人則哲, 能官人. 安民則惠, 黎民惠之.
11 『홍재전서』권97 「經史講義34·書5」 知人安民, 治道之要務, 皐陶之言是也. 而禹吁而未深然之, 何也? …… 凡人主之不能大有爲者, 其心以爲聖王難及, 至治難行, 故怠焉而沮, 若又以爲知人安民, 堯猶難之, 誰復能爲之云爾.
12 知人安民者, 大學一篇之宗旨, 亦大學一篇之結局. 其淵源在此經, 遙遙其遠矣.
13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無稽之言勿聽, 弗詢之謀勿庸(사람 개개인의 마음은 위태위태하고 도리를 지키려는 마음은 작고 희미하다. 오직 뒤섞지 않고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해서 진실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근거 없는 말은 듣지 말고, 제대로 상의하지 않는 대책은 쓰지 않도록 해라). 이 16자는 고대의 전설적인 성왕, 즉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이 서로에게 전해준 정치의 핵심이라 하여 심법(心法)으로 불린다. 사람의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흔들리기가 쉽고 원칙을 지키려는 마음은 현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바람 앞의 촛불마냥 마구 흔들린다. 이때 사람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굳게 잡지 않으면 스스로 뭘 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따라서 기준 이외에 다른 것을 끌어들여서 뒤섞지 않고 오로지 기준 하나에만 집중한다면 최선의 선택에 이를 수 있다. 설혹 결정이 내려진 뒤 사람들이 이해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결정을 내린 마음은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는 공정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14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53~54, 57~59쪽 참조. 정약용은 『육경사서(六經四書)』로 수기(修己)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이는 자신의 학문과 저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5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84~8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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