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읽기『춘추번로(春秋繁露)』, 중화질서의 수립과 시스템 운영자의 자기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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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4,757회 댓글0건본문
글 신정근
선진시대의 제자백가는 제각각 분열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루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그들은 경쟁자가 말하는 통일의 길이 실로 치유와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대립을 가져온다며 비판의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예컨대 장자는 상앙과 한비가 말하는 법의 세계가 사람을 공평과 번영을 누리는 이상 사회로 이끌지 못하고 사람을 억압과 고통의 감시 사회로 이끌어갈 뿐이라고 보았다.01
진한 제국의 출현으로 인해 통일은 이제 더 이상 과제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이와 함께 통일 이후의 학문 활동도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사상가들은 무소속의 자유민에서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공자만 하더라도 조국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15여 년에 걸쳐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군주를 찾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살 국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아울러 『논어』 「미자」에 나오는 숱한 ‘은자’(隱者), 즉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들의 별천지가 가능했다.
제국이 등장한 뒤에 사상가들은 소속을 강요받았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국가 밖에 있지 못하고 국가 안에 어떻게 자신의 역할을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 자신의 관심과 국가의 이해를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고, 자신의 이상과 국가의 방향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동중서 (董仲舒, 기원전 198~106)는 통일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漢) 제국이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던 시기에 살았다. 특히 무제(武帝)는 그간 지속되어온 대외적 소극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쳤다. 예컨대 북쪽 유목민족 흉노에 대해 협상을 통한 현상 유지가 아니라 정복을 통한 원인 제거로 정책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02
이러한 상황에서 동중서는 한 제국 이전에 전승된 씨족적 문화 전통을 제국의 차원에서 재해석하여 시대의 통합을 일구어내면서, 공자가 강조했던 국가의 공적 역할을 제도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런 작업을 『춘추번로(春秋繁露)』로 수행해냈다.03 흔히 동중서의 사상적 공헌을 유학의 국교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국교화가 아니라 유학을 포함한 문화 전통을 한족화(漢族化)시켜서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구축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04
삼통(三統), 중화질서의 수립
한 제국이 성립하기 이전에 진의 통일 제국이 먼저 있었다. 그 이전에는 전국시대와 춘추시대가 있었다. 그 이전에 하, 은, 주 등의 왕조가 황하 중하류 지역에서 씨족 질서에 바탕을 둔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했었다. 이렇게 보면 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공동체를 주도하던 종족이 계속 바뀌었다. 이 과정이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교체로 이어졌다고 할 수 없다.
『시경』, 『서경』을 보면 은의 탕(湯)은 하의 걸(桀)과 대결해서 새로운 지배권을 장악했고, 주의 무왕도 은의 주(紂)와 최후의 일전을 겨룬 뒤에 승리를 거두었다. 춘추전국시대에서 진 제국으로, 진 제국의 분열시기에서 한 제국으로 이르는 과정이 빈번하고 참혹한 전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 제국 이전의 지배 종족과 정치 공동체는 각각 기원과 계통 또는 문화와 가치를 달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한제국은 영토와 정치의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문화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동중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삼통’(三統) 개념을 만들어냈다. 하, 은, 주, 춘추시대는 분명히 각각 다른 계통과 지배 종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서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왕조의 교체는 백통(白統: 은), 적통(赤統: 주), 흑통(黑統: 춘추) 순으로 순환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주 이전은 백통에 해당되고 춘추 이후는 흑통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더라도 결국 삼통 안의 고리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에 황하 유역의 문화는 조금의 차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하족(夏族) 이래로 변함없이 쭉 뻗어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동중서의 말을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탕 임금은 천명을 받고서 왕의 칭호를 내걸며 하늘의 뜻에 따라 하 왕조를 대신하고서 ‘은(殷)’의 국호를 내세웠다. 한 해의 표준시는 흰색 계통의 시대[白統]로 했다. 직전 왕조인 하족을 우대하고, 한층 멀어진 순 임금의 후예인 우를 옛 나라로 대우하고, 요 임금을 왕위(王位)에서 빼내서 제위(帝位)에 대우하고, 신농을 적제로 예우했다. 낙수 하류의 북쪽에 궁궐을 짓고, 보좌하는 관료를 ‘윤’(尹)으로 부르고, 호(濩)라는 국가를 만들어 단순성에 바탕을 두고 예를 제정하여 하늘을 받들었다.
문 임금은 천명을 받고서 왕의 칭호를 내걸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은왕조를 대신하고서 ‘주’(周)의 국호를 내세웠다. 한 해의 표준시는 붉은색 계통의 시대[赤統]로 했다. 직전 왕조인 은족을 우대하고 한층 멀어진 탕 임금의 후예인 하를 고국(古國)으로 대우하고, 우를 왕위에서 빼내서 제위에 대우하고, 원헌(轅軒)을 황제(黃帝)로 예우하고, 신농을 제위에서 밀어 올려 아홉 왕의 반열[九皇]에 두었다. 도읍을 풍(豊)에 짓고, 보좌하는 관료를 ‘재’(宰)로 부르고, 무(武)라는 국가를 만들어 복잡성에 근거하는 예를 제정하여 하늘을 받들었다.
하늘의 명령은 영원히 보장되지 않고 유덕한 사람에 복을 준다. 공자가 지은 『춘추』에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왕의 사업을 만들어 제시하고, 한 해의 표준시는 검은색 계통의 시대[黑統]로 했다. 제후국에 불과한 노(魯)를 왕의 국가로 예우하고, 검은색을 숭상하고, 탕 임금을 제위로 옮기고, 직전 왕조인 주족을 우대하고, 은왕조의 후예인 송을 고국으로 대우했다. 음악은 소무(韶武) 종류를 사용하는 게 적합하므로 제순을 우대했고, 작위는 상(商)왕조의 제도가 적합하므로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다섯 등급 중 백자남을 하나로 합쳐서 세 등급으로 줄였다.”05
동중서의 논법에 따르면 하, 은, 주, 춘추, 전국, 진, 한의 역사는 결코 타자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문화를 끊임없이 이어온 역사(役事)의 과정이 된다. 이제 한 제국 이전에 있었던 문화는 결국 한족(漢族)으로 귀결되기 위한 필수적인 수순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아울러 한족은 그렇게 전승되어온 문화가 소명하지 않도록 수호해서 다른 세대 또는 왕조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과제를 떠맡은 것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결국 한족의 문화를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고, 또 한족을 문화 계승의 절대적 주체로 상정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세 계통 시대[三統]의 변화는 부근의 이민족이나 멀리 떨어진 국가가 끼어들어 좌우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세계의 중심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삼대가 한 해의 표준시를 바꾸면서 반드시 세 계통에 따라 세계를 통솔했다 … 하늘이 성인을 낳아서 구악을 없애고 새로운 시대를 펼치려면 강역(疆域)이 반드시 세계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삼대는 반드시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 자리 잡았다.”06
중원 지역은 원래 하, 은, 주족만이 아니라 이족(夷族) 등 다양한 종족이 어울려 살았던 인종의 용광로와 같은 세계였다. 동중서의 삼통론에 따르면 하은주의 종족과 한족을 제외하고 나면 이민족은 모두 문화의 창조자와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문화의 수용자와 객체일 뿐이다. 중국도 한족의 고유한 영토로 자리 매김되고 중국 이외는 모두 주변과 변방으로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중화주의는 근대 서세동점의 시대 이전까지 완강한 영향을 미쳤다.
천인관계의 가시화와 규범화
『시경』, 『서경』에 보면 왕은 천명(天命)을 받아야 될 수 있다. 이때 하늘(하느님)은 기후, 환경의 측면에서 모든 사람과 관계하지만, 정치 질서의 측면에서 특별한 덕을 가진 사람과 독점적으로 관계했다. 『중용』에 이르러 하늘과 사람의 폐쇄적 관계가 깨어져 나가게 되었다. 첫 구절에 바로 “하늘이 명령한 것이 본성이다”07라고 한다. 이제 사람이 누구나 본성을 가졌다는 측면에서 어떤 중개를 필요로 하지 않은 채 하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늘과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자 사람은 하늘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이것을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불렀다. 어떻게 하면 천인합일에 이를 수 있을까? 공자, 맹자 등은 사람이 하늘(하느님)이 준 덕(德)과 성(性)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맹자는 이를 위해서 올바름에 집중하는 집의(集義),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야기(夜氣)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더 이상 천인합일에 이를 수 있는 실천적 방법, 동조(同調)의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한 제국에 이르러 양생(養生), 음양 오행의 이론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사상가들은 이전에 없었던 실천적 방법, 동조의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 동중서는 음양 오행, 양생의 이론을 끌어들여서 천인합일의 현실화를 훨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사람을 키울 수 있으나 빚을 수는 없다. 사람을 빚는 것은 하늘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늘은 인류의 증조부이다. 이 때문에 사람과 하늘이 서로 닮은꼴이 된다. 예를 들자면 사람의 신체는 천체 운행의 주기와 부합해서 이루어지고, 사람의 혈기는 하늘의 의지와 부합해서 따뜻하고, 사람의 덕행은 하늘의 구조에 따라 반듯하고,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함은 기후의 따뜻하고 서늘함에 호응하고, 사람의 기뻐하고 성냄은 기온의 추위와 더위에 호응하고, 사람의 환경 적응은 자연의 네 계절의 변화에 호응하고, 사람이 살아가며 희·노·애·락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가 있는 것에 대응한다.”08
동중서에 따르면 사람과 하늘은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기(氣)에 의해서 연속된 존재다. 하늘이 자연에서 낳은 현상은 사람이 몸에서 일으키는 반응과 공통 현상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천인합일은 사람이 하늘이 보이는 현상과 코드를 맞추는 것이다.
이제 하늘은 명령을 내리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다. 하늘은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서 이끌어가며 반응을 보여서 호오(好惡)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늘 하늘이 보이는 뜻과 반응을 읽어내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사람이 하늘의 뜻대로 살기만 한다면 하늘과 사람 사이 또는 사람이 사는 사회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뜻을 몰라서 다르게 살거나 하늘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개별자에게 보통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을 ‘사변[異]’이라고 하고 규모가 작은 경우 ‘이상 현상[災]’이라고 한다. 둘 중 이상 현상이 늘 먼저 일어나고 사변은 뒤따라 출현한다. 이상 현상이 하늘의 질책이자 경고라면, 사변은 하늘의 징벌이자 위력이다. 하늘이 경고를 했는데도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위력을 행사하여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 이상 현상과 사변의 근원은 한결같이 국가의 실책으로부터 생겨난다. 국가의 실책이 처음으로 가시화되려고 하면 하늘이 이상 현상을 일으켜 경고하여 다가올 위험을 알려준다. 경고를 했는데도 정치인들이 고칠 줄을 모르면 사변을 일으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워할 줄 모르면 재앙이 일어난다. 이런 경과를 보면 우리는 하늘의 의지가 사랑에 있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려 다치게 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09
하늘은 사람이 자신의 뜻과 반응대로 살지 않으면 늘 침묵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다시 살도록 신호를 보낸다. 하늘은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사는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는 잔인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 작은 경고를 보내고 이어서 큰 경고를 보내서 사람이 스스로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서 잘못을 고치도록 한다. 즉 하늘은 사람의 변화를 기다리는 인내를 보여주고 새롭게 기회를 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의 밑바탕에는 하늘과 사람이 기본적으로 계약의 성실한 준수, 책임의 냉정한 부과를 내세우는 차가운 관계가 아니라 관용과 인내를 보여주는 따뜻한 관계가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10
이처럼 동중서는 당위적 요구에 치우쳐있던 천인합일을 실천적이고 제도적인 틀로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틀에는 『예기』, 『여씨춘추』 등 음양 오행의 ‘월령’(月令), ‘시령’(時令)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농업 중심의 사회 경제와 어울리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동중서는 한 제국까지 축적되어온 문화와 가치 체계를 다원주의의 측면을 지니는 삼통(三統)의 포용적 틀로 녹여낸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다수성과 차이를 분열이 아니라 통합의 자원과 동력으로 이끌어가려면 동중서의 사유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익사회 출현의 공포와 시스템 운영자의 엄정한 자기 관리
동중서는 제국 운영의 시스템을 확립한 뒤에 초점을 시스템의 운영자로 돌렸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운영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운영자 문제와 관련해서 동중서는 정치 지도자와 이익의 추구에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었다. 정치 지도자가 일반인에 비해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이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면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성은 오히려 상호부조의 전통을 깡그리 잊고서 사익을 위해 싸우다 소중한 제 몸을 잃는다. 하늘은 만물에게 생존의 기술을 한 가지씩 주었다. 예컨대 동물 중에 뿔이 있으면 날카로운 이빨은 없다. 이 때문에 이미 커다란 뭔가를 가졌으면 또 다시 자잘한 이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늘이 정한 규칙[天數]이다. 이 큰 것을 가지고서 다시 작은 것을 아울러 가지려고 한다면 하늘이 찬성하지 않을 터이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현명하신 성왕께서는 하늘이 한 바에 따라 한계를 제도로 만들었다. 이에 많은 봉록을 받는 자라면 모두 자잘한 곳에서 나는 이득을 차지할 수도 없고, 일반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생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天理]이다.”11
동중서는 가진 자의 탐욕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부유한 운영자, 가난한 백성의 사회는 운영자에게 커다란 이익과 충만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지속하지 못하고 언젠가 해체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은 노력해도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므로 삶의 의욕을 갖지 않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민이 삶의 의욕을 잃는다면 부유한 운영자도 더 이상 부유해질 수 없다.
동중서는 노나라 은공(隱公)이 수도 곡부(曲阜)에서 원행을 나가서 물고기를 잡았던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물고기 잡은 것을 두고 뭘 그리 비판하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군주가 사익을 추구하면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다. “군자(공직자)는 하루 종일 ‘리’(利), 즉 ‘돈’이라는 말 자체를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서 풍속을 교화시켜야 할 군주가 다만 ‘리(돈)’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12
우리나라도 우월한 업자가 체인점 점주에게 물건을 강매하는 등 우월적 갑(甲)이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는 을(乙)에 하는 횡포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활기를 잃고 사람은 도전할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된다. 물론 동중서가 말하는 해법, 즉 권력을 가지면 재력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길이 오늘날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하지만 동중서가 일반 백성이 송곳 꽂을 땅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제(限田制)를 말하게 된 취지를 이해해볼 만하다. 독점 사회는 타락과 부패로 이어지고 결국 공동체의 해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순회보> 146호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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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와 관련해서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철학이 뭐길래?』의 추연 항목, 동아시아, 2011 참조.
02 한무제의 전기, 흉노 전쟁과 관련해서 왕리췬, 홍광훈·홍순도 옮김, 『사기 강의: 한문제편』, 김영사, 2011; 양성민, 심규호 옮김, 『한무제 평전: 진취적 개척 정신으로 세계 제국을 일궈 낸 개혁가』, 민음사, 2012 참조.
03 번역본으로 남기현 옮김, 『춘추번로』, 자유문고, 2005; 신정근,『춘추-역사 해석학』, 태학사, 2006 등이 있다.
04 신정근, 『동중서: 중화주의의 개막』, 태학사, 2004 참조.
05 「三代改制質文」 湯受命而王, 應天變夏, 作殷號, 時正白統, 親夏, 故虞, 絀唐, 謂之帝堯, 以神農爲赤帝, 作宮邑於下洛之陽, 名相官曰尹, 作濩樂, 制質禮以奉天. 文王受命而王, 應天變殷, 作周號, 時正赤統, 親殷, 故夏, 絀虞, 謂之帝舜, 以軒轅爲黃帝, 推神農以爲九皇, 作宮邑於豊, 名相官曰宰, 作武樂, 制文禮以奉天. … 春秋應天作新王之事, 時正黑統, 王魯, 尙黑, 絀夏, 親周, 故宋, 樂宜親招武, 故以虞錄親, 樂制宜商, 合伯子男爲一等.
06 「三代改制質文」 三統之變, 近夷遐方無有生煞者, 獨中國, 然而三代改正, 必以三統天下. … 天始廢始施, 地必待中, 是故三代必居中國.
07『禮記』 「中庸」 “天命之謂性.”
08 「爲人者天」 爲生不能爲人, 爲人者, 天也, 人之人本於天, 天亦人之曾祖父也, 此人之所以乃上類天也. 人之形體, 化天數而成; 人之血氣, 化天志而仁; 人之德行, 化天理而義; 人之好惡, 化天之暖淸; 人之喜怒, 化天之寒暑; 人之受命, 化天之四時; 人生有喜怒哀樂之答, 春秋冬夏之類也.
09 「必仁且智」 天地之物, 有不常之變者, 謂之異, 小者謂之災, 災常先至, 而異乃隨之, 災者, 天之譴也, 異者, 天之威也, 譴之而不知, 乃畏之以威. …… 凡災異之本, 盡生於國家之失, 國家之失乃始萌芽, 而天出災害以譴告之; 譴告之, 而不知變, 乃見怪異以警駭之; 驚駭之, 尙不知畏恐, 其殃咎乃至. 以此見天意之仁, 而不欲陷人也.
10 하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양식화되면서 일군의 집단은 자연과 사회 사이의 이질성을 간과하고 동질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중서의 천인관계는 나중에 무리하면서 과도한 천의(天意) 독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동아시아 사회에서 아직도 퇴영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11 「度制」 民猶忘義而爭利, 以亡其身. 天不重與, 有角不得有上齒, 故已有大者, 不得有小者, 天數也. 夫已有大者, 又兼小者, 天不能足之, 況人乎! 故明聖者象天所爲爲制度, 使諸有大奉祿, 亦皆不得兼小利, 與民爭利業, 乃天理也.
12 「玉英」 君子終日言不及利, 欲以勿言愧之而已, 愧之以塞其源也. 夫處位動風化者, 徒言利之名爾, 猶惡之, 況求利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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