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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격몽요결(擊蒙要訣)』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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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4,6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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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신정근

 

  동양고전은 중국고전을 생각한다. 아마도 중국철학이 동양철학을 대표하기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동양고전은 중국고전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고전이나 일본고전만이 아니라 베트남고전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가 유럽문화에 끼친 영향만큼 중국이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모두 중국고전으로 환원되거나 그 아류로 취급될 이유가 전혀 없다.
  한국의 경우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고전을 소화해냈다. 첫째, 『사서집주(四書集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처럼 중국에서 전래된 텍스트를 그대로 판각하여 간행하기도 했다. 둘째,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처럼 편집자가 자신의 의도에 맞게끔 중국고전에 있던 글과 그림을 골라서 책을 묶는 경우도 있다. 셋째, 개인 문집속의 시(詩)나 서(書: 편지글)처럼 문자를 익히고서 순수 창작한 작품이 있기도 하고, 최한기의 『기측체의(氣測體義)』(1836), 『기학(氣學)』(1857), 『인정(人政)』(1860)처럼 시대적 요구와 철학사의 재해석을 통해서 운화(運化),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소통(疏通)의 관점에서 새로운 철학을 시도하기도 한다.
  세 가지의 경우 중에 첫 번째는 당연히 중국인 것이지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장소를 달리해서 간행한 것 이외에 ‘덧보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사정이 다르다. 원서에 없던 의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새롭게 편집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별도로 철학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양고전하면 당연히 중국고전을 말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타성을 바꾸어야 한다. 한반도에 생겨났던 유의미한 텍스트의 존재는 그것이 설령 중국고전의 영향을 받았던 받지 않았던 상관없이 참으로 자연스럽게 동양고전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 16세기가 되면 학문장(學問場)에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학계와 정계의 주도권이 훈구파가 사림파로 바뀌는 상황에서 아동용 서적의 발간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희가 편집했던 『소학(小學)』과 『동몽수지(童蒙須知)』가 단순히 간행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한글 번역, 즉 언해(諺解)가 되었다. 『소학』의 경우 중종 때 의역 중심으로 번역되었다가 선조 때 다시 직역 중심으로 재번역되었고 영조 때 또 번역되기도 했다.01
  이러한 흐름에 맞물려서 조선에서 아동용 텍스트의 편집과 저술도 이어지게 되었다. 박세무(朴世茂, 1487~1554)가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었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속몽구(續蒙求)』를 편집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이(1536~1584)는 『격몽요결(擊蒙要訣)』(1577)을 지었던 것이다. 그가 해주에서 시간을 보낼 때 배우려 찾아오는 아이들을 위해 교재를 만들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해주 아이들을 위한 교재 편찬이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16세기 아동용 교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아동용 교재라고 해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 『소학』은 이론(가치)과 응용(사례)을 겸하지만 분량이 방대하여 요점잡기가 쉽지 않다. 『동몽수지』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적절한 행위를 알려주는 생활 지침서의 성격이 강하다. 『몽구』는 인물과 사례를 이야기 중심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격몽요결』은 이론과 실천을 겸하면서도 간명하여 아동용 교재의 취지를 살린 다목적 교재라고 할 수 있겠다.

 

 

학문(學問)으로 성인(聖人)되기


  영화를 보면 처음은 이야기를 풀어가고 마지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관객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영화는 그 특성상 이야기를 펼치지 않는 상태에서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제일 앞에 결론을 제시하고 그 과정을 하나씩 풀어가는 영화도 있다. 이와 달리 책은 처음부터 지은이의 메시지를 꽝하게 던져놓고 시작할 수도 있고 논의를 쭉 이끌어 와서 결말에서 꽝하고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점에 책을 고를 때도 전부를 훑어보고 판단하기보다는 처음과 끝을 쭉 넘겨보면서 살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리라.
  이이의 『격몽요결』은 마지막까지 가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소개팅을 할 때 이 말 저 말 빙빙 돌리지 않고 만나자마자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자신을 밝히는 사람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이는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지은이의 서문에서 자신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 노릇할 수가 없다. 학문이란 평상과 달리 특별한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부모이면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이면 마땅히 효성스럽고, 전문가(신하)이면 마땅히 충실하고, 부부이면 마땅히 분별하고, 형제이면 마땅히 우애롭고, 젊은이이면 마땅히 어른에게 공경하고, 친구이면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활동을 하거나 조용히 지내거나 상황에 따라 각각 마땅함을 갖추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마음을 기묘한 곳으로 달려가서 신기한 효과를 거두려고 할 게 아니다.”02

 

  첫 문장부터 꽝 하고 못을 박는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학문의 한자가 학문(學文)이 아니라 학문(學問)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텍스트를 읽고 외우며 분석하는 것에 치중되지만 후자는 굳이 텍스트를 읽지 않더라도 어떻게 할지 묻고 찾아서 그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이이는 학문을 ‘學問’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학문의 핵심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실로 다양한 역할을 맞는다. 누구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부모이고, 누구의 연장자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연하자이고, 누구의 상사이면서 누구의 부하이고, 누구의 남편 또는 아내이기도 하고 또 누구의 친구이기도 하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자신의 역할에 어울리는 행위를 하면 된다. 부모라면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이이는 상황에 어울리는 가치를 ‘당(當)’ 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내가 산 복권의 번호가 추첨으로 뽑힌 번호가 일치하면 ‘당첨(當籤)’이 된다. 내가 역할에 맞게끔 행동을 하게 되면 ‘합당(合當)’, ‘적당(適當)’이 되는 것이다. 이이는 학문의 길이 상황에 어울리도록 합당하게 사는 데에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이는 『격몽요결』의 서문에서 ‘학문(學問)’과 ‘당(當)’의 가치를 강조한 뒤에 바로 이어진 첫 장에서 다시 한 번 더 학문의 길을 강하게 제시한다.

 

“처음 학문할 때 먼저 뜻을 세워야 하고 반드시 성인(聖人)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되겠느냐며 조금이라도 뒤로 물러서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과 성인은 본성의 측면에서 똑같다. 물론 둘 사이의 기질은 맑거나 흐리거나 순수하거나 뒤섞인 차이가 있지만 참으로 철저하게 알고 착실히 행하며 옛날 습관을 버리고 처음의 본성으로 돌아간다면, 새로이 뭔가를 조금도 보태지 않아도 모든 선이 갖춰지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어째서 성인이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지 못할까? 맹자도 성선(性善)을 말할 때마다 전설의 성왕 요와 순을 들먹이며 실증했다. 그가 ‘사람은 모두 요순처럼 될 수 있다’고 했으니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03

 

  학생은 공부 잘하겠다고 생각하고, 프로 스포츠선수는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고 하고, 정치인은 좋은 정치가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한 다짐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이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불러 일으켜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이는 이를 ‘입지(立志)’라고 표현했다. 즉 뜻을 세운다는 뜻이다. 아프면 침대에 눕지만 화장실에 가든지 무엇을 하려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주말에 소파에 누워서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면,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것을 꼭 해야겠다는 뜻이 서지 않으니 계속 누워있는 것이다.
  이이는 우리에게 “성인이 되어야 겠다”라는 뜻을 세우기를 요구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성인(聖人)’하면 지금의 나와 너무 차이가 나서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이이가 「격몽요결서」에서 말했듯이 성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성인은 자신의 역할을 ‘당(當)’하게 하는 사람일 뿐이다. 프로야구 선수가 3할 대 타자가 되겠다고 하는 뜻을 세우지 않는다면 목표 의식이 뚜렷하지 않는 것이다. 목표 의식을 강하게 세우게 되면 한 경기 한 경기, 한 순간 한 순간마다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3할 대 타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부모로서 자식으로 친구로서 역할을 ‘당’하게 하는 것이 3할 대 타율을 유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당연(當然)한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길이다. 이이는 바로 그렇게 당연한 것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라고 우리에게 권하는 것이다.

 

 

『격몽요결』의 체제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책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격(擊)은 치다, 때리다, 공격하다, 가격하다, 쳐서 죽이다, 싸우다, 부딪치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모두 싸움을 연상시키는 잔인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점에만 주목하면 우리는 이이가 도대체 왜 아이와 싸움을 하려고 하는지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이런 작명은 『주역』의 산수몽괘[ ]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괘는 위가 산이고 아래가 물이여서 어디로 나아가더라도 위험이 있다.04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관행대로 움직이면 어려움이 더 심해지게 된다. 이 상황을 타파하려면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거나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의해 덮어 씌어있는 상황을 걷어내어야 한다.
  몽괘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동몽(童蒙)’, 즉 어리석은 아이를 사용하고 있다.05 아이가 어른보다 사태 파악을 잘못한다는 점에서 동몽이라고 할 수 있고, 어른이라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동몽인 셈이다. 산수몽괘의 초육(初六)에 어리석은 자를 일깨워주는 ‘발몽(發蒙)’, 구이(九二)에 어리석은 자를 껴안는 ‘포몽(包蒙)’, 육사(六四)에 어리석음에 꽉 막혀있는 ‘곤몽(困蒙)’, 상구(上九)에 어리석은 자를 쳐서 일깨워주는 ‘격몽(擊蒙)’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이는 이들 중에서 상구의 ‘격몽’을 책 제목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요결(要訣)’은 격몽을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비결, 핵심이라는 뜻이다. ‘요결’인 만큼 『격몽요결』은 주희의 『소학』, 『동몽수지』 그리고 『몽구』 류의 아동용 교재처럼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내용을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이는 아이들의 습성이랄까 한계를 알고 있는 듯하다. 아이가 듣든 말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선생님이 “무조건 배워야 한다”라고 윽박지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선생님과 학생 사이가 멀어지게 될 수 있다. 이이는 그러한 무지막지한 선생님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이이가 제시하는 격몽의 요결을 살펴보자. 책은 10장과 부록으로 되어있다.06 10장은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 구습을 뜯어고치는 혁구습(革舊習), 몸을 거두는 지신(持身), 책을 읽는 독서(讀書), 부모를 모시는 사친(事親), 상을 치르는 상제(喪制), 제사를 지내는 제례(祭禮), 부부 생활과 살림을 다루는 거가(居家), 사회생활을 다루는 접인(接人), 벼슬살이에 필요한 처세(處世) 등의 순서대로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격몽요결’은 글자 그대로 어린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허둥지둥하거나 멍하니 있는 ‘어른-아이’(adult like child)를 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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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당위와 현실의 차이

 

  이이는 사람이 노력을 통해서 ‘지금의 나’를 결별하고 ‘미래의 나’, 즉 ‘이상적인 나’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는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무조건 낙관하는 몽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바뀔 수 있는 그 길을 찾아서 당시의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사람의 외모의 경우 추한 것이 예쁜 것으로 바뀔 수 없고, 힘(체력)도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바뀔 수 없고, 키도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바뀔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몫이 있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다. 하지만 오직 마음과 뜻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고, 못난 것을 현명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텅 비어있지만 영명한 마음이 타고난 기질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혜로운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게 없고 현명한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괴롭게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을 훼손하고 깎아내고 있는가?”07

 

  이이는 오늘날 의료기술의 발달을 알 수가 없었다. ‘성형 한국’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이런 말을 했을까?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초점은 아니다. 이이에 따르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어찌 할 수 있는 부분과 후천적으로 노력하여 고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이 분류에 따르면 이이의 결론은 뻔하다.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느라 또는 고치려고 애를 쓰고 돈을 들이느니, 고칠 수 있는 것을 고치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밑바탕에는 모든 사람이 지혜와 현명을 바란다는 것이 깔려있다. 여기서 보면 이이는 정신과 도덕의 지혜와 현명이 육체와 감각에 비교해서 우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육체와 감각의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이이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모, 체력, 키를 변화시키는 데에 집중하여 살 것이다. 이와 달리 육체와 감각의 가치가 정신과 도덕의 가치와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이의 권고를 수정해서 수용할 수 있다. 먼저 외모, 체력, 키를 바꾸고서 도덕과 정신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이는 사람의 변화 가능성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이전에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거나 생각은 같지만 우물쭈물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러있을 수가 있다. 이이는 이를 ‘구습(舊習)’으로 불렀다. 사람이 고쳐야한다고 하면서 고치지 못하고 그 상황에 머물러있는 습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금연과 다이어트의 사례만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금연한다고 하면서 또 담배를 찾고,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서 야식을 찾는 것이다.
  이이는 현실의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지(立志)’에 이어서 바로 ‘혁구습’을 제안하고 있다. 보통 ‘입지’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뭔가 성취를 거두지 못한다면 구습이 바뀌려는 사람을 막고 실패하게 만든다. 구습의 구체적인 조목은 차례대로 아래에 나열하니, 뜻을 채찍질해서 구습을 아프게 끊어내지 않는다면 끝내 배우서 일군 게 없게 된다. …… 여섯째,  즐겨 할 일 없는 사람을 불러 모아서 바둑과 장기로 내기를 일삼으며 배불리 먹고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남과 다투려고 하는 것.”08

 

  이이는 습관의 힘을 참으로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입지(立志)’하라고 하더니 이제야 ‘용왕직전(勇往直前)’의 노력과 ‘여지통절(勵志痛切)’의 단절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이가 사람의 이기성, 욕망, 타성을 가볍게 취급했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욕망이 산업화되면서 산업화된 욕망이 다시 개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대에 놓여있다. 예컨대 ‘성형’하면 단순히 예뻐지고 싶은 개인의 순수한 욕망만이 아니라 예쁨을 강요하는 사회와 그 강요를 산업화시키는 자본의 욕망과 결합되어있다. 따라서 성형(외모, 미)에 대한 오늘날의 욕망이 이이 시대의 욕망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이는 자신의 시대에서 욕망을 산업화, 자본화, 과학-기술화의 측면이 아니라 구습의 측면에서 주목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미적거리는 나를 앞을 향해서 용감하게 뛰어나가게 하고, 허물어지는 뜻을 다시 날카롭게 세워서 과거와 아프게 단절해야 하는 것이다. 산업화되고 자본화된 욕망만큼이나 구습의 욕망의 힘도 막강한 것이다. 이이는 막강한 구습과 결투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의 제목에 ‘격(擊)’ 자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다. 미적거리는 자신에게 죽비를 내리치라는 주문인 것이다.


 <대순회보> 1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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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소학』의 내용과 특성에 대해서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참조.
02 「擊蒙要訣序」: 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 所謂學問者, 亦非異常別件物事也. 只是爲父當慈, 爲子當孝, 爲臣當忠, 爲夫婦當別, 爲兄弟當友, 爲少者當敬長, 爲朋友當有信, 皆於日用動靜之間, 隨事各得其當而已. 非馳心玄妙, 希覬奇效者也.
03 「立志」: 初學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 不可有一毫小退託之念. 蓋衆人與聖人, 其本性則一也. 雖氣質不能無淸濁粹駁之異, 而苟能眞知實踐, 去其舊染, 而復其性初, 則不增毫末, 而萬善具足矣. 衆人豈可不以聖人自期乎? 故孟子道性善, 而必稱堯舜, 以實之曰: 人皆可以爲堯舜, 豈欺我哉?
04 『주역』 「몽괘 단전(彖傳)」: 山下有險, 險而止, 蒙.(산 아래 위험이 있는데, 위험하여 그친 것이 몽이다.)
05 『주역』 「몽괘 괘사(卦辭)」: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 告; 再三, 瀆. 瀆則不告.(내가 어리석은 아이를 찾아서 점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아이가 나를 찾아서 점치니, 처음 점치면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점치면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면 알려주지 않으리라.)
06 부록 제목은 제의초(祭儀抄)이고, 그 안에는 출입의(出入儀), 참례의(參禮儀), 천헌의(薦獻儀), 고사의(告事儀), 시제의(時祭儀), 기제의(忌祭儀), 묘제의(墓祭儀), 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의 등 제례를 지내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07 「立志」: 人之容貌, 不可變醜爲姸, 轝力不可變弱爲强, 身體不可變短爲長, 此則已定之分, 不可改也. 惟有心志, 則可以變愚爲智, 變不肖爲賢. 此則心之虛靈, 不拘於稟受故也. 莫美於智, 莫貴於賢, 何苦而不爲賢智, 以虧損天所賦之本性乎?
08 「革舊習」: 人雖有志於學, 而不能勇往直前, 以有所成就者, 舊習有以沮敗之也. 舊習之目, 條列如左, 若非勵志痛絶, 則終無爲學之地矣. …… 其六, 好聚閑人, 圍碁局戱, 飽食終日, 只資爭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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