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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맹자의 성선(性善)과 올바른 삶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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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8 조회4,9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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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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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학은 공동체에서 악이 없어지고 선이 넘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줄여서 선의 충만과 악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목표에 따라 선행을 하려고 하지 악행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늘 위기라는 말이 넘쳐나고 말세라는 탄식이 끊이지 않는다. 즉 악행 그것도 참혹한 만행이 끊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동양 철학에서는 일찍부터 인성(人性), 즉 인간 본성의 문제를 탐구해왔다. 맹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사람은 원래부터 완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당연히 악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다면 사람은 당황해한다. 그게 당연한데 왜 새삼스레 질문을 하느냐는 식이다. 사실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선행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에서 선행이 넘치지 않고 또 악행을 어떻게 제재해야 하는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말을 얼버무릴 수 있다.
 우리는 선행을 하는 이유로 전통, 신의 뜻을 답으로 내놓을 수 있다. 전통이 선행의 근원이라면 우리는 전통을 배워야 한다. 전통에 따른다면 공동체가 우리를 바람직한 사람이라 평가하겠지만 전통에 따르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우리에게 제재를 부가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예의가 참 발라”, “인사성이 참 좋아”, “사람이 얼마나 착하다고” 등이 긍정적인 반응이라면 “몹쓸 사람이야”, “막돼먹은 녀석이야”, “이런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등은 부정적인 반응이다. 전통사회에서 전자는 좋은 기회를 얻고 후자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데, 이로써 선행을 권장하고 악행을 제재하게 된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다 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전통이 선행의 근원이라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또 전통에서 규정하는 것을 ‘내’가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가정에 국한되었고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규범을 선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 공동체가 전통의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반도덕적 가치를 강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늘 선행의 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맹자의 시대에도 예(禮)로 대변되는 전통의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전통에 따라 선행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외적인 강제나 폭력을 끌어들이지 않고서 사람들이 선행을 해야 하는 도덕의 근원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감정이 무딘 사람도 지구 온난화로 살 곳과 먹을 것을 심각하게 위협 받는 상황을 그린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을 보면 마음이 짠해진다. 우리는 불우한 처지의 사람이 열심히 생활하다가 다쳐서 재기에 어려움을 겪으면 십시일반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낸다.
 맹자도 이런 사람의 심리에 주목했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앞에 우물이 있는데도 위험을 모르고 기어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는 아이를 구해주고서 그 부모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으려고 생각하거나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깜짝 놀라서 안타깝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어떤 이해를 고려하지 않는다.
 맹자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고서 “사람은 모두 이해를 따지지 않고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순수한 바탕 마음을 지니고 있다”(人皆有不忍人之心)고 주장했다. 이런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 네 가지인데, 이를 선행을 일으키는 마음의 네 가지 싹이라는 점에서 사단(四端)이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딱한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나쁜 짓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만약 어떠한 사람도 이런 바탕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맹자는 그이를 “사람 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다”(非人也)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맹자의 논증을 통해 사람을 선행으로 이끄는 근원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외적 규범이 지시해서도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그것이 바로 악행을 벗어나 선행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보았다며 성선론자(性善論者)로 규정한다.

 

 

성선과 유일신은 서로 다른 문화이다
 맹자의 성선은 사실 간단한 주장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어떤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의 힘으로 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달리 말하면 사람이 완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충격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늘 생활 세계에서 보듯이 사람은 그렇게 티 없이 맑은 존재도 아니고 굳건해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도 아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고 했다가 결국 늦잠을 자고 나서 머리를 긁적거린다. 담배를 끊는다고 했다가 3일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담배를 피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 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들로 넘치는데 “사람이 완전하다”니 믿기 어렵다.
 둘째, 완전하다는 것은 신에 어울리는 말이니 인간에게 가당치는 않는 말로 보인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이므로 다른 어떤 것에 기댈 필요가 없다. 신은 전지하므로 미래에 불안하거나 무지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신은 전능하므로 실패의 가능성에 초조해하거나 불리한 환경에 지레 겁을 집어먹지도 않는다. 반면 인간은 미래, 무지, 실패, 불리한 환경에 늘 전전긍긍하고 좌불안석해 한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은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천천히 설명을 해보자. 맹자도 사람이 유약하고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맹자는 안정적인 일자리, 즉 항산(恒産)이 없으면 사람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반면 항산이 보장되면 사람이 항심(恒心)을 굳게 지킨다고 본다. 따라서 딴 마음을 먹을 정도로 불리한 환경이 아니라면 사람은 성선을 향한 항심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를 위해서 사회 정치적인 환경이 성선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 지도자는 인정(仁政)을 펼쳐야 한다. 즉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 전체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자질을 갖추어야 하고 공동체가 개인에게 정전(井田)과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천주교는 외방 선교를 통해 개신교에 비해 실추된 교세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으로 와서 서양의 과학을 전해주면서 정부와 지식인의 환심을 샀고 『천주실의』를 지어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특히 성선에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성선을 긍정하게 되면 인간 개인 또는 인간 사회를 구원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사람이 선천적으로 본성이 선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덕행에 의해서 선하게 된다[습선習善]고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성선은 처음에 도덕의 근원으로 출발했지만 동서양의 접촉 과정에서 지역 문화의 특성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성선의 문화는 내재성을 강조한다. 사람은 선행을 위한 바탕을 가지고 있고 그 바탕이 굳건하게 살아서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수양을 해야 하고 공동체는 그 성선이 약해지지 않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서 사람은 완전성의 축복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동시에 그 완전성을 가꾸어야 하는 무한한 책임을 지고 있다. 만약 축복을 누리지도 책임을 완수하지도 못하면 사람에서 짐승의 자리로 떨어지게 된다.
 반면 유일신의 문화는 초월성을 강조한다. 사람은 육체와 영성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육체의 욕망을 벗어나서 영성을 온전하게 가꾸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육체를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은 영성보다 식욕·색욕 등 강렬한 육체의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고통을 겪는다. 이때 사람이 육체의 욕망을 뛰어넘어서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야만 신과의 계약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사람은 죽어서 계약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계약과 심판 개념은 사람이 육체의 욕망을 초월하여 선행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한국을 비롯해서 동아시아는 외세의 침략, 왕조의 교체, 극심한 사회적 위기의 상황에서 타력 구제를 설파하는 정감록, 미륵불, 관세음보살과 같은 염불신앙이 성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처럼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로 하는 것을 추구했지 유일신의 힘에 의지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천명도 사람들의 집단 의지가 응집해서 만들어가는 역사적 운명이지 세계의 시공간을 타락과 구원으로 양분하는 초월적인 심판은 아니었다.

 

 

대인배가 되자
 맹자에 따르면 사람이 완전한 존재로서 그 완전성을 가꾸어야 하고 공동체는  성선을 위한 호의적인 환경을 일구어야 했다. 그럼 사람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쉽게(?)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맹자는 바람직한 이상 사회를 위해 성선과 인정을 각각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의 결합이라는 방안을 내놓았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도 사람이 좋은 환경에만 놓이면 자동적으로 선한 존재가 된다고 낙관하지 않았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은 심의 대체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이목(耳目)의 소체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從其大體, 爲大人. 從其小體, 爲小人] 둘의 차이는 그렇게 멀지 않다.
 오늘날 자본주의 상품경제 사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고 있다. 제품의 생명 주기는 나날이 짧아져서 어제 것이 헌것이고 오늘 것만 새것일 수가 있다.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시세에 뒤떨어지면 버려야 한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렇게 상품 경제에 현혹해서 쓰레기 아닌 쓰레기를 쏟아내면서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이때 한편으로 우리의 눈과 귀는 한편으로 계속 새로운 게 언제 나오나 기다리며 동동거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은 새로운 것이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며 사람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인 것인지 따져보게 된다. 이목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욕망의 가속페달을 밟는다면 마음은 제정신을 차리고 욕망의 브레이크를 밟는다.
 맹자가 말한 대체와 소체가 바로 제정신을 차리는 마음과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목에 대응한다. 맹자는 사람이 제 자신만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소체만을 애지중지할 게 아니라 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동시에 나의 주위를 돌아볼 수는 있는 대체를 소중하게 여길 것을 권고하고 있다. 소체의 욕망에 중독되면 우리는 관심사가 점점 좁아진다. 게임에 중독되면 게임만을 알지 그 나머지에는 눈을 닫아버린다. 일전에 게임에 중독된 부부가 아이를 방치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이들이 바로 작은 사람이자 점점 작아지는 사람이기에 소인(小人)이다.
 반면 소체의 욕망에 브레이크를 밟고서 중독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신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돌아보고 자신을 포함해서 주위를 함께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큰 사람이자 점점 커지는 사람이기에 대인(大人)이다. 최근에 일본 후쿠오카 지역에 쓰나미가 발생해서 수천 명이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한국은 일본과 숙원(宿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나미로 상처 받은 사람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 이것이 바로 대인배의 자세이다. 나무가 끊임없이 자신의 밖을 열어 안을 키워야 거목으로 자라듯이 대인도 자신의 경계를 열어 쉼 없이 지평을 넓혀가는 추월(推越)의 존재이다.
 맹자는 대인배의 모습을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그리고 있다. 우리가 마음을 쫀쫀하게 먹으면 생각(관심사)이 문지방을 벗어나도 금방 방안으로 주워 담는다. 그리고 “왜 내가 그딴 일에 관심을 써야 하지!”라고 묻는다. 우리가 마음을 너그럽게 먹으면 생각이 문지방을 넘어서 빛이 닿지 않는 세상의 어두운 구석구석에 미치게 된다. 이때 마음은 내안에 있으면서도 하늘과 땅 사이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가득 메우게 된다. 그 기상이 바로 호연지기이다.

 

 <대순회보> 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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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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