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읽기『대학(大學)』의 일신(日新)과 삶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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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8 조회4,611회 댓글0건본문
글 신정근
오늘날 미디어든 사람이든 책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변화’와 관련된 단어군이다. 혁신과 개혁은 말만 다르지 결국 그 속에 변화를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어있다. 세계화와 국제화에도 바뀌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하는 외침이 들어있다.
느긋하게 인생을 관조하며 현재를 즐기자는 소리는 약하고 왜들 이렇게 사람들을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고서 달달 볶아대는 걸까? 물론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한국의 산업이 더 이상 다른 나라를 모방해서 먹고 사는 단계를 벗어나 세계를 선도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발전이 힘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저임금을 바탕으로 우리의 턱밑까지 다가선 중국을 비롯한 신흥개도국과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원천기술을 가지고 저만치 앞서가는 선진국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로 끼어있다.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다가는 지금의 상태가 최고의 발전이 된 채 낙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IT산업, 유전자공학, 신소재, 대체에너지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뒤따라올 수 없는 고지를 선점해야 미래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지금과 다른 사고방식, 관행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담론이 과연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를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동양 고전하면 사람들은 지레 전통을 굳게 지키고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고루한 인상을 가질 것이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은 고정된 실체보다 변화하는 운동을 껴안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동양 고전 중 『대학』에서 변화와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대학』은 누구를 위한 어떤 책이었나?
동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변화의 철학이자 변화의 형이상학이다. 서양철학에는 주로 이데아, 순수 형상, 절대자의 계시와 같은 철칙이 있고, 사람이 그것을 인식해서 모든 상황에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양철학에서는 맹자의 경(經)과 권(權), 즉 일반 원칙과 임시 원칙 그리고 장자의 망아(忘我), 즉 기억의 동일성 부정처럼 하나의 원칙을 모든 사태(현상)에 우겨넣을 수도 없고 우겨넣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동양철학에는 아무런 원칙도 없고 어떤 도덕 규율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원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늘 다양한 현실의 특성을 고려해서 그 상황에 제대로 어울리는 융통성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모든 고전이 그렇지만 동양의 고전 중에서 『주역』과 『대학』이 변화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주역』은 음과 양이 번갈아가면서 세상의 주도적인 변화를 이끌어간다고 본다. 또 개인이든 사회이든 상황에 따라 변화를 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고 일이 술술 풀려간다는 변통론(變通論)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도 1년이나 1개월 주기가 아니라 1일 주기로 늘 새로워지라[日新]는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대학』과 변화(운동)의 관계를 알아보기에 앞서 『대학』이란 책과 관련해서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동양 고전을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부를 때 『대학』은 사서 중의 하나이다. 『대학』과 『중용』은 원래 『예기(禮記)』라는 책의 한 편명에 지나지 않았다. 송나라 주희가 두 책의 철학적 가치를 알아채서 『논어』·『맹자』와 함께 꼭 읽어야 할 네 가지 책, 즉 사서(四書)로 삼은 이래로 둘은 독립된 책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 뒤 『대학』은 사서 중에서 가장 먼저 읽는 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논어』와 『맹자』는 다 읽고 나도 무엇을 말하는지 그 줄거리와 핵심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두세 차례 읽어보면 그제서야 “아, 이걸 이야기하려고 하는구나!”라는 감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은 3강령과 8조목처럼 명명덕(明明德)과 격물(格物) 등 중요 개념을 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감 잡기가 어렵지 않다. 아울러 판본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학』은 다른 동양 고전 중에서 글자 수가 제일 적다. 겨우 1,753자에 불과하다. 『중용』이 3,568자이고, 『논어』가 13,700자이고, 『맹자』가 34,685자이다.
주희 이전에 형제 철학자 정호(程顥)와 , 즉 이정(二程)은 『대학』의 가치를 알고 학문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이 덕목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평가했다. 주희는 이 평가를 이어받아서 대학(大學)을 대인지학(大人之學), 즉 대인의 학문의 줄임말로 보았다. 대인의 학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학』을 『소학(小學)』에 대비해서, 후자가 어린이의 학습 대상이라면 전자는 성인의 학습 대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인이 자기 주도적 인간을 나타내는 군자(君子)의 별칭이므로, 대인의 학문은 사람이 이기적인 소인(小人)의 자질을 극복하고 이타적인 군자가 되는 공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대학』을 주희처럼 성인 일반 교육에 쓰이는 교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대학』을 천자의 적자(嫡子)와 서자 그리고 삼공(三公)과 제후의 적자들을 위한 특별 교재로 간주한다. 이에 의하면 『대학』은 제왕학의 교재가 된다. 『대학』의 8조목, 즉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특히 마지막 부분의 치국과 평천하에 주목하면 『대학』이 누구를 위한 책이라는 게 분명하다는 논리이다. 치국과 평천하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학습하고 준비해서 훌륭한 치자(治者)가 되어야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배울 가치가 없다는 논법이다.
이는 주희와 정약용이 누가 틀리고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이 각각 치자의 위상과 역할, 사대부의 이상과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내면 세계에서 성인, 생활세계에서 지도자가 되자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기치를 내걸면서 사대부가 치자와 함께 세계를 질서롭게 만드는 분치자(分治者) 의식을 가졌다. 정약용은 왕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상황에서 왕권의 강화를 통해 세계의 질서를 확립하는 쪽에 관심을 두었다. 이처럼 같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학자의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읽힐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치국과 평천하는 반드시 현실 정치의 집권자가 전유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개별 국가의 정부를 감시·감독할 수 있고, 세계시민의 의식으로 윤리적 소비를 촉진할 수도 있다. 즉 『대학』을 정약용처럼 제왕학이 아니라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 변화의 동력
마라톤의 경우 기록이 계속 갱신되어서 선수들은 지금 42.195km를 2시간 4분대까지 주파한다. 이를 100미터 달리기로 환산하면 거의 17·18초 안에 뛰는 것이고 시속으로 환산하면 20km를 넘는다. 헬스장의 런닝머신에 올라서 시속 3km는 만만해도 10km가 넘으면 오래 달리기 어렵다. 마라토너는 그 어려운 상황을 2시간 넘게 지속해서 뛰는 것이다.
마라톤 경기에서 간혹 경주를 포기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결코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그들도 얼마나 끝까지 뛰고 싶겠는가? 보는 사람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도중에 그만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의지가 굳건해도 다쳐서 도저히 뛸 수 없거나 힘이 쭉 빠져서 한 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울 수가 있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다. 다치지 않았다면 에너지가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그럼 오늘날 사회에서 소리 높여 주장하는 변화의 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생존과 이윤이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는 변화와 생존을 짝짓는 것이다. 또 변하지 않으면 얼마 뒤 경쟁 상대에게 추월당할지 모른다고 하는데. 이는 변화와 이윤을 연결짓는 것이다. 생존과 이윤을 위해서 변화를 부르짖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기업이든 사회이든 지금 취약한 재생산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정부가 정책을 미래 지향적으로 설계하지 못하고 기업가가 앞을 내다보고 생산 전략을 짜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바꿔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희한하게도 우리는 변해야 할 대상이 변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쉼없이 변해온 사람에게 잠시 엉덩이가 의자를 데울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변화의 소용돌이로 내모는 게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대학』에서는 사람이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나아갈 목표로 3강령을 내놓고 있다. 첫째가 명명덕(明明德)이고, 둘째가 신민(新民)이고, 셋째가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하나씩 간단하게 알아보자.
명명덕은 밝은 덕을 밝힌다는 뜻이다. 인간의 능력은 계발할수록 더욱 좋아진다고 한다. 공을 찰 때 헛발질하던 사람도 연습하다 보면 공을 자신이 보내고 싶은 대로 찰 수가 있다. 수학 문제도 자꾸만 풀다 보면 어려운 문제도 혼자서 풀 수 있게 된다. 올바른 삶도 너무 높고 험한 듯해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다른 길을 갈 수 없게 된다. 이는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발자국이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흔적이 뚜렷해서 다시 되밟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 그 위에 눈이 덮이면 발자국의 흔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사람은 수학 문제를 풀듯이 도덕적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계속 갈고 닦아서 흐릿하게 하지 않으면 그 밝은 빛이 언제나 환하게 빛나게 된다.
신민은 원래 친민(親民)으로 된 것을 주희가 글자를 고친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의 취지와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여기서는 어느 게 맞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민은 글자 그대로 새롭게 거듭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도덕 권력을 쥔 사대부가 일반 백성을 계몽시켜서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오늘날 사회는 어떤 사람 또는 계층이 우월적 도덕의식을 가졌다고 보지 않으므로 사대부와 백성의 도식으로 『대학』을 볼 필요는 없다. 각자가 도덕적 삶을 통해서 자신이 넓어지는 느낌을 겪고 또 그 체험을 통해서 인격이 높아질 수가 있다. 어린이가 극기 캠프를 다녀와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청소년이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고 나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성인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지어지선은 완전한 선에 머무른다는 뜻이다. 한 마리 제비가 날아왔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니듯 선한 삶은 단 한 번의 시도로 쟁취하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식구들에게 잘해주어야지 생각했다가도 사소한 일 하나로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서 식구를 마음 아프게 한다.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의아해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다음이다. 이처럼 도덕적 삶은 “한번 해야지!”라는 결심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자신을 다독이고 힘을 줘서 걸어가야만 비로소 “아, 이제는 좀 됐구나!”라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특성을 갖는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 안에 자신을 내모는 밝은 빛[明德]을 한 번 쪼이게 되면 멈출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 나날이 그리고 영원히 진화하는 삶
일신(日新)이란 말은 은나라를 세운 탕(湯) 임금이 목욕하는 그릇에 새긴 문장에서 나오는 말이다. 길지 않으므로 그 부분을 살펴보자.
탕 임금이 목욕하는 그릇에 다음의 글귀를 새기도록 했다. “진실로 하루 새로워졌다면 나날이 더욱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지도록 하라!”(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우리나라 학교나 건물 이름을 ‘일신’과 ‘우신’으로 많이 짓는데, 그 이름의 연원이 되는 곳이 바로 이 문장이다. 탕 임금의 일신은 목욕을 해서 몸을 깨끗하게 한다는 위생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의 세례(洗禮) 의식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이 세례 의식을 통해서 정화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수양하다는 뜻의 수(修) 자 중 위에서 아래로 빗금을 친 세 획도 세례 의식과 관련이 있다.
고대인들은 어떤 외적인 이물질 또는 존재가 사람에게 달라붙어서 사람이 타락하고 병들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처럼 주기적으로 세례, 즉 몸을 씻는 상징 행위를 통해서 심신의 질병과 질환을 예방하려고 했던 것이다.
『대학』에서는 고대의 세례 의식을 영혼의 자기 정화 문맥으로 끌어와서 사용하고 있다. 『대학』의 8조목, 즉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중 앞의 넷 격물·치지·성의·정심은 외적 세계가 아니라 내적 세계의 통치와 관련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의와 정심은 영혼의 정화와 관련이 깊다.
사람은 몰라서 속게 된다. 이 때문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사물과 무지로부터 속는 일이 없게 된다. 성의와 정심은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부주의해서 산만하다 보면 자신이 무슨 일을 해놓고서도 나중에 깜짝 놀라며 자신이 한 일을 믿지 못한다. 또 행동으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별의별 것을 꿈꾸고 상상한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듯이 자신의 마음가짐을 올곧게 하지 않으면 생각해서는 안 되는 영역까지 자유롭게 넘나든다. 남의 재물로 성을 쌓는다든지 남의 지식으로 자신의 위세를 세운다든지 …. 정심과 성의는 의식의 상태에서부터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연기하게 하는 자기기만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매일 사람을 만나면 인사로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상대는 “좋은 일은요. 그렇게 없습니다. 걱정거리가 풀려서요!”라고 대답한다. 걱정거리가 없으면 마음의 세계에 평화가 깃든다. 걱정거리가 많으면 마음의 세계에 온갖 모략과 술수가 자란다. 이는 드라마의 선역과 악역을 맡은 배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논어』에 보면 “자기 주도적인 사람은 비 갠 뒤 하늘마냥 해맑기 그지없고 잇속만 차리는 사람은 늘 울상을 짓는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고 한다.
『대학』의 일신은 남이 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완성이 깊어지고 그로 인해 주위의 평화가 돈독해지는 것이다. 경쟁과 이해에 의한 성공과 환희 뒤의 배반과 분노가 숨어있지만 자기완성에 의한 실의와 좌절은 고통스러울지언정 기만과 모략은 없다. 한번 맛을 들인다면 외부의 에너지 공급 없이도 계속 달려 나갈 수 있다. 하루가 지나면 또 그만큼 나아지는 삶, 자신과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삶이다. 이로써 자신과 세계가 함께 진화하는 공진(共進)의 터전이 된다.
<대순회보>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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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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