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경(孝經)의 효(孝)와 영원한 삶 > 고전

본문 바로가기

고전
HOME   >  교화   >   고전  

고전

동양고전읽기효경(孝經)의 효(孝)와 영원한 삶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01.21 조회5,210회 댓글0건

본문

글 신정근

 ​

  이미지를 클릭하면 창이 닫힙니다.  

 

 

효에 대한 상반된 평가

      

   효(효도)가 동양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꼽더라도 아마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이 효를 바라보는 시선은 둘로 뚜렷하게 나뉜다. 하나는 효를 현대 문명의 문제를 고칠 수 있는 희망으로 본다. 야구로 본다면 효는 역전과 패배의 위기에 몰린 팀을 구할 수 있는 구원투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효를 아동과 같은 약자의 권리를 소홀히 하면서 가부장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규범으로 비판한다. 두 입장은 간격을 결코 메울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르다.  

   이제 두 입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오늘날 가정과 학교를 비롯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연일 온갖 사건 사고가 생겨난다. 자식이 오락에 빠진 자신을 꾸중하는 부모를 때린다든지 공교육 현장에서 학생이 훈계하는 선생님에게 물리적으로 반항한다든지 군 입대를 피하기 위해서 몸의 일부를 고의로 손상한다든지…. 말로는 담기 어려울 정도로 숱한 사고가 연일 터진다.   

   효의 가치를 긍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늘 되풀이해서 다음처럼 주장한다. “사람들이 효도를 하지 않아서 이런 문제가 생겨난다. 효도를 하기만 하면 이런 문제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효도는 자식이 진심으로 부모를 돌보며 의사가 충돌할 때 자신보다 부모의 생각을 앞세우는 품행을 가리킨다. 아울러 효자는 한 두 차례 효도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효도와 사람이 하나로 되어 제2의 천성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효자라면 집안만이 아니라 집밖에서도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효가 제 자리를 잡으면 각종 사회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효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효가 인간관계에서 약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긍정론자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를 하므로 효가 결코 일방적인 규범이 아니라고 맞선다. 이에 대해 부정론자는 자식의 효도와 부모의 자애가 서로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둘이 결코 대등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식이 가정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말도 못하거나 부모의 반대로 인해 기를 펴지 못한 채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일도 있다. 따라서 효의 가치를 강조하면 할수록 고통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 오늘날의 관점에서 효를 돌아보기

 

   사실 사람의 일에는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부작용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예컨대 게임과 오락이 일(공부)에 지친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지만 게임 중독은 사람의 일상마저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효도도 사회 정치적으로 많은 순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역기능이 없을 수는 없다.

   여기서 효도의 긍·부정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보다 문제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첫째, 효도에 부정적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측면이 과연 효의 본질에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효를 현실적으로 제도화시키면서 나타나는 것인지 구별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의 소재가 앞에 있다면, 오늘날 효의 가치를 철저하게 반성해봐야 하겠지만, 뒤에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효가 본질과 달리 왜 사회적으로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그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둘째, 효도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측면이 과연 보편 인권(자유 등)과 아무런 충돌 없이 잘 결합할 수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전통적 가치가 소중하지만 오늘날 사회의 규범인 보편 인권의 기준을 완전히 모른 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 일어나는 학교에서 결식아동의 굶주림, 이주노동자의 처지, 동남아지역 출신 신부의 고통, 세계 각지의 재난과 재해 당사자들의 문제를 모른 채 하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고 어려운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시일반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낸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환경이 모두 보편적으로 누려야 하는 인권과 일치하기 않기 때문에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효경』의 한 구절을 먼저 살펴보자. “몸과 터럭 그리고 피부는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므로 자식이 함부로 다치거나 상처 나지 않게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설 자리를 확실하게 하고 도리를 실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명예롭게 만드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이 구절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한국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내용이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이 구절도 통속적으로 보는 것과 비판적으로 보는 것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읽힐 수 있다.  

   통속적으로 보면 앞부분은 자식이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몸 건강에 유의한다는 뜻이고 뒷부분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부모님의 위신을 세워준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 사람이 효도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변해주는 내용으로 보인다.  

   반면 비판적으로 보면 효도가 사람으로서 자식을 한편으로 소극적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출세 지향적으로 만든다. 온전한 신체의 유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것 자체를 효도의 전제 조건으로 못을 박게 되면 사람(자식)이 모험적이며 진취적인 일을 하게 하는 기상을 약하게 할 수 있다. 몸 다치는 것을 걱정하는데 어떻게 격렬한 동작을 요구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는 것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즉 이 주장을 심각하게 고려하면 우리는 신체에 대한 자신의 결정권을 부정하게 된다.  

   사람이 지배욕이나 출세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효경』의 인용문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라서 흥미를 자아낸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구절은 원문에 분명히 “입신행도(立身行道),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로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행도(行道)’는 빠지고 그냥 ‘입신양명’ 네 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동아시아 사람들은 『효경』의 원문을 왜곡하면서까지 효도를 출세욕과 결부시켜서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즉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길로서 다른 욕망이 있을 수 있는데, 출세욕이 반드시 다른 길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동양 고전에서 효도를 다양하게 풀이하고 있지만, 『효경』의 내용만을 보면 효도는 보편 인권과 부딪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그렇지만 효도가 신체의 통제권을 통해 순종적인 인간을 키운다거나 반인권적인 특성만을 갖는다고 섣불리 결론내릴 수는 없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창이 닫힙니다.  

 

■ 효의 다면적인 특성  

 

   북송시대 사상가 장재(張載, 1020~ 1077)가 자신의 삶을 경계하기 위해서 지은 「서명(西銘)」을 들여다보자.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대지를 어머니라 부른다. 나는 아주 미미한 존재로서 다른 존재와 뒤섞여서 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 사람들은 모두 나와 하나의 뿌리에서 태어난 형제이고 사물은 나와 천지를 메우고 있는 짝이다.”(乾稱父, 坤稱母, …… 民吾同胞, 物吾與也.)

   같은 효도라고 하더라도 『효경』과 「서명」의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효경』에서는 전적으로 혈연관계를 가진 가족을 효도의 범위로 한정하지만 「서명」에서는 하늘과 대지를 아우르는 우주 차원에서 효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 『효경』에서는 한 가족의 건강과 평안 그리고 명예를 효도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명」에서는 우주를 가족으로 보므로 거기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남김 없이 모두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맥락으로 효도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같은 효도라고 하더라도 어떤 문맥에서 쓰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특징이 크게 다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효도하면 가부장적 질서를 뒷받침하는 규범으로 생각해왔을까? 이는 우리가 효도를 주로 사회 정치적 규범으로 파악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자연히 효도는 자식보다는 부모의 권리를, 여성보다는 남성의 특권을 주장하는 윤리 규범이 되어버린다. 아울러 이러한 특징의 효도는 현대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기 어렵다.

  그런데 「서명」에서 보이듯 효도는 사회 정치적인 문맥이 아니라 종교 사상이나 종교 문화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 영원한 삶의 길로서 효 

 

   연예인과 학생의 자살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그만큼 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처럼 순간을 살기도 빡빡하고 팍팍한 삶인데 영원을 사는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반색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잘 살든 못 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이처럼 유한한 사람은 유사 이래로 문화권마다 나름대로 영원을 사는 길을 찾아왔다. 살다가 그냥 사라진다고 할 경우 사람은 허무의 무게에 질식할 듯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지구상에는 다양한 종교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중에 유일신 전통의 사회는 현생의 삶보다 내생에서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삶을 통해 영생을 누린다고 이야기해왔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동아시아는 유일신 전통이 없고 다신론(자연신) 전통에 가깝다. 보통 착하게 살면 현생에서 복을 받고 죽더라도 조상과 신의 보살핌으로 자손들이 잘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사회는 유일신 신앙을 내세우는 종교가 전래하여 다소 복잡할 정도로 다양한 종교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다신교 전통에서 사람은 어떻게 영생의 길을 찾았을까? 바로 효도가 그 물음에 답을 주는 길이었다. 물론 앞서 보았듯이 효도가 모계보다는 부계 중심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다신교 전통에서 내세의 구원이라는 사고가 없으므로 사람은 물리적으로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로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모 세대는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를 『효경』의 신체와 「서명」의 기(氣)를 통해서 자식 세대로 유전시키게 된다. 즉 부모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자식에게 몸과 기를 남겨 놓은 것이다.

   유전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질 때 릴레이 경주처럼 부모,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 등으로부터 이어진 하나의 혈통이 소멸되지 않고 끊임없이 유전(전승)될 수 있다.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끊임없이 부활(復活)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신주(위패)는 죽은 조상을 대신하는 불사의 상징물이고, 제사는 영생의 매듭 속에 담긴 기억과 서사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의식이고, 출산은 영생의 고리를 새롭게 잇는 거룩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서 여아보다는 남아를 선호하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사례는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간혹 부모의 친구분들이 남은 자식을 보고 “어쩜 돌아가신 부모 얼굴을 쏙 빼닮았느냐?”라고 한다. 이때 나의 몸은 분명 나의 인격을 담은 몸이면서도 부모의 몸을 잇고 있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또 개신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아직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돌아가신 조상을 기린다. 즉 한국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면서도 아직 기존의 방식으로 영생을 찾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제사와 조상 숭배가 나날이 엷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현대인이 제사 지내기를 싫어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일신 종교를 믿음으로써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게 영생을 찾아가는 길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현대의 효도  

 

   이제 같은 효(孝)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개념이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볼 효는 어떤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기본적으로 다음의 전제를 수용하는 바탕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 효도가 주로 가족 윤리의 차원에서 이야기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효도는 시민 윤리나 보편 인권과 충돌 없이 연속될 수 있는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효경』에서 말하듯이 개인(가문)의 출세 지향적 욕망을 부풀리는 “입신양명(立身揚名)”보다 개인(가문)의 욕망과 공공선의 결합을 요구하는 “입신행도, 양명어후세(立身行道, 揚名於後世)”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 주변에 보면 좀 살림 형편이 나아지거나 출세를 했다고 하면 제일 먼저 가묘를 호화롭게 정비를 한다. 가묘 정비가 적법하게 이루어진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죽은 조상을 위해 자원을 쓰는 것만큼이나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이웃에게도 관심의 눈길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입신양명과 행도(行道)를 조화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과 부모의 위신을 세우는 이기성을 만족시키면서도 공동선을 증진하는 이타성을 만족시킬 수 있다. 아울러 「서명」에서 말하듯이 우리 자신을 좁은 혈연관계에 가두지 않고 넓은 생명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현대사회에 통하는 효도일 것이다.

      <대순회보> 119호

 

*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12616)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전화 : 031-887-9301 (교무부)     팩스 : 031-887-9345
Copyright ⓒ 2016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