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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세이인자심동仁者心動)-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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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작성일2020.09.11 조회4,0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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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놓아두면 일정한 지향점이 없어 이리저리 날뛰게 마련이다. 또한,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사소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내일은 미세먼지가 많을까?” “이번 달 카드값은 얼마가 나왔을까?” “부모님은 건강히 잘 지내실까?” “허리가 아픈데 병원을 가봐야 하나?” 등의 잡다한 생각과 걱정을 한 번씩은 해보았을 것이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할 것이다. 도대체 생각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어서 이토록 사람을 쉴 새 없이 흔들어 놓는 것일까? 옛 선사(禪師)들은 이러한 생각과 걱정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며, 생각의 움직임은 마음의 지향 또는 마음의 지각작용이라고 보았다.

 

 

육조 혜능 선사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 두 승려를 보았다.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여 서로 다투고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였다. 이에 육조 혜능 선사가 말하였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이 말을 듣고 두 승려는 깜짝 놀랐다.01 

 

 

  윗글은 남송 시대에 편찬된 『무문관』의 비풍비번(非風非幡)이라는 유명한 일화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고, 아마도 한 승려는 바람이 불기 때문에 깃발이 흔들리니 저것은 바람의 흔들림을 깃발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므로, 이 움직임의 실질적 정체는 바람의 움직임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다른 승려는 바람에 의해서 흔들리지만, 현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깃발이 흔들리고 있으며 깃발이 없다면 흔들림 자체를 인지할 수 없으니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두 승려 간의 논쟁은 바람과 깃발이라는 두 가지 현상 중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인지, 혹은 인지적 측면에서 실질적인 인식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혜능의 관점에서 두 승려는 현상만을 보아 필요 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승려의 논쟁은 현상에서 대립과 분별을 세워 표면상의 선후를 따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삶에 있어 이러한 표면적 논쟁으로의 치우침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며 이러한 생각과 지각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 질문을 간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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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능이 말하고자 했던 마음과 그 마음의 움직임이란 무엇일까? 불교의 유식(唯識)02사상에서는 사람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의 5식을 통해서 외부를 알아차리는 ‘감각’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6식은 주어진 5식의 감각을 알아차리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하는 ‘사유능력’이다. 5식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단순히 감각을 떠올리는 것인데 반해, 6식은 의식에 떠오르는 감각을 주객분별의 구도하에서 대상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감각자료를 대상화하고 객관화하여 아는 것을 감각과 구분해서 ‘지각’이라 부른다.03 이때 지각이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인식능력의 근거를 의근(意根)라고 하며, 이는 제7식으로 지각, 사유, 판단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근거이다. 말나식(末那識)으로 불리는 7식은 세계 속에서 나 아닌 것들과 부딪히며 살아갈 때 내가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나를 유지하며 나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자아식(自我識)이자 생존본능의 식이다. 6식인 사려분별의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동하기에 ‘본능’이라고도 불린다.04 이러한 7식인 자아식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6식은 의식(意識)이라 칭한다. 주목할 점은 5식은 항상 열려있지만, 6식은 5식의 감각을 모두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주의집중을 통해 선별적으로 인지해 내는 식이다.05 또한, 6식의 인지는 기본적으로 차이와 대비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지각에서 감각자료를 정리하고 배열하여 지각세계를 형성하는 기본틀이 바로 자신의 개념 틀이며, 6식의 지각은 이러한 자신의 개념틀에 따라 사물을 인지한다. 이러한 인지는 각각의 감각자료의 차이와 대비를 통해 대상의 분별을 이룬 것이다.06

  유식사상을 통해 비풍비번의 일화를 살펴보면, 애당초 두 승려는 시각의 안식(眼識)을 통해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자신들 각자의 마음에 개념화된 인식 틀에서 형상화하였고, 흔들림에 대하여 바람과 깃발의 대비에 생각을 쏟아 그것을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두 승려의 마음이 애당초 깃발과 바람이 아닌 조석예불에 향해 있었다면, 이러한 논쟁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생각과 판단의 사유는 인간의 여러 감각이 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가운데, 마음의 지향이 작용한 것이다. 이는 선별적 인지를 통해 사유와 생각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용문의 일화에서 혜능은 생각과 지각의 본원인 마음과 이 마음의 지향에 대하여 두 승려에게 일깨워 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지향은 곧 마음의 쓰임이다. 『전경』에 공우가 일진회들에게 머리를 깎여 바깥출입을 하지 않을 때, 상제님께서는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머리와 무슨 상관하리오.”라고 하여,07 결코 종도들의 겉모습이 아닌 상제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지향, 즉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일깨워 주셨다. 이를 현재에 비추어 보면, 수도인들이 표면적으로는 각각의 양태로 생활하고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은 항상 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시간에 맞춰서 심고를 드리는 것은 그 표상은 비록 사회에 있지만, 그 마음은 도를 향하고 있으니 마음의 쓰임을 올바르게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08

  수도의 측면에서 언급하자면, 지각의 근원 또는 지각의 대상에 따라 마음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09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이는 ‘양심’과 ‘사심’으로 구분되고 있다. 편벽됨이 없고 사사됨이 없이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으로10 도를 지향하는 마음이다. 이에 반해, 사심은 현상 인식의 감각작용과 더불어 물욕(物慾)을 충족시키려는 욕망과 의지를 지각한 마음의 상태이다. 물욕은 대립과 분별의 사고에서 더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치우칠 확률이 높다. 그러한 측면에서 물욕에 의하여 발동되는 마음의 상태인 사심은 인성의 본질인 양심과 구별된다. 이 마음의 지각과 지향이라는 것을 주재함은 결국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을 살피는 한편 항상 깨어있는 마음가짐으로 지향할 바의 기준을 양심으로 삼아야 한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대부분은 표면상에서 발생하는 바람과 깃발에 대한 논의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수도를 하고자 하는 수도인이라면 이러한 표면상의 번민이나 고민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내면상의 본질에 자신의 중심을 세우고 삶에 있어 그것을 발휘하고자 하는 노력에 힘써야 할 것이다. 표면상에 흔들리는 마음을 수렴하여 천성을 지각하고 양심을 지향하는 마음가짐이야말로 항상 도를 생각하는 마음이자, 도를 실천하게 하는 근본이 된다. 도가 근본이 되어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 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주변적인 생각과 걱정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01 ????無門關????, 「非風非幡」, “六祖因風颺刹幡, 有二僧對論, 一云, 幡動, 一云, 風動, 往復曾未契理. 祖云, 不是風動, 不是幡動, 仁者心動. 二僧悚然.” 

02 한자경, 『‘成唯識論’에서의 識과 境의 관계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9), p.131, “‘유식무경(唯識無境)’은 대승불교 유식의 기본관념으로 일종의 유심(唯心)사상을 나타낸다. 유심사상은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으로서, 유식뿐 아니라 대승의 다른 종파들 역시 그와 같은 유심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화엄의 ‘삼계유심’과 ‘일체유심조’, 선종의 ‘견성성불’ 등은 모두 그러한 유심사상을 보여주는 예이다. 유식은 그러한 유심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03 한자경, 『심층마음의 연구』 (경기파주: 서광사, 2018), pp.146-147 참조.

04 같은 책, pp.51-52, pp.322-325 참조.

05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고 있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의식하지 않으면 대부분 감각은 인식되지 않은 채 지나치게 된다. 예를 들어, 노트북를 사용하는 중에 노트북에서 나는 소리를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끄고 난 뒤 갑자기 조용해지면 그때야 소리가 나고 있었음을 인지하는 경우이다.

06 한자경, 앞의 책, pp.41-48 참조.

07 교법 2장 10절.

08 『도전님 훈시』 (1986.4.14.), “기도란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여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는 정신을 모아서 단전에 연마하여, 영통의 통일을 목적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일념(一念)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성으로 소정의 주문을 봉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 시간을 잊지 않고 심고를 드리는 그 자체가 상제님을 항상 잊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모시는 지극한 영시(永侍)의 정신이니 기도를 모신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믿음과 기도는 옳은 정성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09 최영진, 「朱子 人心道心의 槪念과 分岐에 관한 분석적 탐구」, 『철학』 130 (2017), p.4, “주자는 마음이 인심과 도심으로 분기된다는 것에 대하여 ‘지각 근원이 다르다’라는 주장과 ‘지각한 대상이 다르다’라고 주장한다.”

10 『대순진리회요람』, pp.18ㆍ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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