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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주역(周易)』의 자강 불식과 자력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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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8 조회3,7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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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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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後悔)란 시간이 지난 뒤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경우에 겪는 사람의 정서적 반응이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뭔가를 하기 전에 하려는 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서야 한다. 사람은 지식이 완전하지도 않고 의지가 돈독하지도 않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은 후회 없는 삶을 바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무엇에 기대서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전근대인은 종교 사상에 의존하고, 근대인은 과학 기술에 의존하여 확실성을 가지려고 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는 확실성을 보증하는 창조주와 유일신 개념이 약했다. 이를 대신했던 것이 바로 『주역(周易)』이었다. 그런데 그 『주역』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어떻게 이를 믿고서 확실성을 가질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앞으로 이 의구심이 어떻게 풀려나게 될지 살펴보기로 하자.

 

 

『주역(周易)』 = 『역경(易經)』 + 『역전(易傳)』(또는 십익)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주역』이란 책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주역』은 주나라의 역이라는 뜻으로 『역』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주역』 또는 『역』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끊임없이 바뀌면서 변하는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주역』이란 책은 역경(易經)과 역전(易傳)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역경은 64개의 괘사와 64×6=384개의 효사가 나타내는 길흉과 의미를 밝히는 부분이고, 역전은 문언전·단전 상하·상전 상하·계사전 상하·설괘전·서괘전·잡괘전을 가리킨다. 단전·상전·계사전이 상하로 되어 있는데, 이를 나머지 4전과 아울러 십익(十翼)이라고 한다.
  경학사를 보면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고 한다. 즉 성인이 경을 짓고 현인이 경을 풀이하는 전을 짓는다는 뜻이다. 역경과 역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실제 작자 문제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지만 역전은 역경의 길흉과 의미를 읽어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오늘날 ‘경전(經傳)’이라 하여 하나의 단어로 취급하지만 기원을 따지고 보면 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격이 놓여 있는 것이다. 특히 역전을 십익으로 부르는 일이 재미있다. 십은 완전수이므로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는 뜻이다. 익은 날개라는 뜻이다. 우리가 역전의 날개를 타고 역경의 의미 세계로 날아간다는 뜻이다. 훗날 명나라의 탁월한 주석가 초횡(1539-1620)은 『노자』, 『장자』의 주석을 달고서 그 이름을 『노자익』과 『장자익』으로 지었다.(『노자익』은 이현주에 의해 『날개를 단 노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우리가 역전으로 역경을 본다고 해도 『주역』의 세계가 만만치 않다. 이를 도와주는 것으로 각종 『주역』의 주소(注疏)류 서적이 있다. 주는 논농사를 지을 때 논에 물을 대다는 뜻이다. 논은 경과 전에 해당되고 물은 풀이에 해당된다. 즉 논에 물을 대서 벼가 무럭무럭 자라듯이 경과 전에 풀이를 해서 의미가 술술 풀려나게 한다는 맥락이다. 주(注)로 의미가 분명하지 않으면 거기에다 소(疏)를 달게 된다. 소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어서 정리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역』을 읽어도 경이나 전, 주의 뜻이 뒤엉켜서 제대로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므로 주를 가지런하게 빗질해서 의미의 갈래를 내어 그 뜻이 분명해지도록 한다는 맥락이다. 물론 보통 사람은 『주역』의 경과 전 그리고 주와 소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므로 번역서와 해설서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공자의 『주역』 이해
  공자는 오늘날 『주역』의 성서에 커다란 기여를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그것보다도 공자가 『주역』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를 알아보자. 『주역』이 오경(五經) 중에서 중요한 문헌이므로 공자는 『논어』에서 『주역』을 인용하거나 풀이하는 글이 많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시경』과 『서경』은 원문을 인용하기도 하여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지만 『주역』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논어』의 한 구절에서 『주역』과 관련되는 언급을 하고 있다.
  “공 선생님이 뭔가를 예감한 듯 이야기했다. 나에게 연구할 수 있는 몇 년의 시간이 주어져서 50대에 변화의 기록을 공부할 수 있다면 심각한 잘못을 하지는 않을 텐데.”(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술이」17(168))
  이 말을 공자는 젊은 시절이 아니라 노년, 즉 죽음에 관심을 둘 즈음에 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평균 수명이 70~80살이지만 공자 당시 50살만해도 장수라고 하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주역』과 심각한 잘못[대과(大過)]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을 하고 있다. 이는 『주역』의 많은 효사에서 후회할 일이 있으리라는 ‘유회(有悔)’와 후회할 일이 없으리라는 ‘무회(無悔)’를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는 사실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주역』과 후회 여부가 밀접하게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을까? 사람은 제한된 정보, 통제되지 못한 욕망, 들쭉날쭉한 의지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나서도 자기 자신이 한심해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이러한 불리한 상태에서 당연히 일을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사람이 무언가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를 내리는 인격적 존재가 없다. 이처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면 후회한다”, 곧 “무엇을 하지 않으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점괘를 얻는다면 일을 추진하거나 억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중요한 사업이나 입시에서 대학의 지원을 결정할 때, 안 좋은 꿈을 꾸거나 불길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보통 “하지 말라는 뜻인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역』의 점괘는 일의 추진 여부와 관련해서 개인의 꿈이나 감각보다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했던 곳이다.
  주희(1139~1200)는 일찍이 인격적 존재로 여겨지던 천(天)을 리(理), 즉 객관적 가치 규범으로 해석하여 성리학을 정초시켰다. 그러한 그도 만년에 한탁주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아 상당히 다급한 상황까지 몰렸었다. 특히 그의 외우 채원정이 요인(妖人)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떠나는 등 도학(道學)의 위기가 나날이 극심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자는 『논어』에서 보이듯 당연히 천(天)을 찾아서 자신의 보증자로 생각하겠지만 주희는 죽서(竹筮)로 점을 쳤다. 이에 뇌산소과(雷山小過) 괘 제5효의 “공이 주살로 쏘아 굴속에 있는 그를 잡아야 한다”라는 점사를 얻고서 자신의 신변에 걱정할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때 『주역』 점을 치지 않고서 주희가 과격한 대응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가정이지만 주희는 후회할 일을 겪었을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주역』은 미래를 모르는 사람에게 후회할 일을 하지 않도록 막는 예방 백신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반대로 『주역』은 주저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서 과감하게 베팅을 던지도록 하는 가속기 역할도 했다. 이는 공자나 주희만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지성인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사실이었다.


 
자강-계몽의 자력 구원과 기도-믿음의 타력 구원
  사람이면 누구나 삶과 죽음, 현재와 미래,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신뢰와 배반 등의 갈림길에서 서성거리며 불안해한다. 이러한 불안의 고통에 대해 전근대에서는 종교가, 근대에서는 과학이 회답을 주었다. 동아시아 문화 중 유교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참으로 특이한 종교이다. 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완전하다는 성선(性善)을 전제한다. 맹자에서 성선과 천(天)의 유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있지만 주희에 이르면 성선과 인격적 존재의 유대가 단절되고 객관적 가치[리(理)]와 이어진다.(얼마 지나지 않아 리가 절대화되면서 다시 신격화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 성리학에서 리의 신격화는 이황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신유학자들은 천(天)마다 비인격적 가치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는 세계의 지성사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12세기의 사람이 자연의 위력과 인간의 한계를 안고서 초월적 신의 가호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로 극렬하지는 않았지만 민간 신앙의 성소를 파괴하는 등 부정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이렇게 보면 유가는 인간의 완전성을 바탕으로 수양을 통해 인간적인 단점과 세속적 욕망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사람은 초월적 존재의 은총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역』은 유가의 자력 구원에다가 사람이 갖는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광기를 억제하는 힘을 실어주었다.
  건괘 「상전」에 보면 “하늘의 움직임은 굳건하다. 군자, 즉 자기 주도적 존재는 건괘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 굳세어지면서 그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象曰: 天行健. 君子以自彊不息.) 하늘의 움직임은 음양의 기운이 번갈아 주도하면서 봄·여름·가을·겨울로 바뀌어가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은 감정에 따라 화냈다 웃었다 변덕을 부리지만 자연은 계절이 거꾸로 가는 바 없이 늘 그대로 그렇게 움직여간다. 예컨대 사람은 조금만 아파도 아프다는 핑계로 수업을 빼먹을 수는 있지만 해와 달은 1년 내내 게으름을 모르고 제 일을 한다. 『주역』에서는 하늘(자연)의 이러한 움직임을 굳건하다고 파악하고서 군자도 그것을 본받아 어디에 기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자신을 굳건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곤괘 「상전」에 보면 “땅의 형세가 곤이니 자기 주도적 존재는 곤괘의 이치에 따라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실어준다.”(象曰: 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 땅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품어주면서 동시에 일정한 시간 뒤에 되돌려준다. 하늘에 비해서 땅은 푸근하다고 할 수 있다. 군자도 땅의 후덕한 특성을 본받아서 스스로 세상의 모든 존재를 푸근하게 품어주는 역할을 다 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보듯이 천과 지는 굳건하고 푸근한 특징으로 형상화되고 있을 뿐이다. 천과 지는 사람의 세계에 개입해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그것에 따르지 않는 자를 심판하지 않는다. 이에 사람도 천과 지의 무제약적인 힘을 경외하며 자신의 희망과 욕망을 들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천과 지가 사람에게 부족한 점을 완전히 가지고 있지만 사람, 특히 군자는 자기 계발을 통해 천과 지를 닮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이 과정은 철저하게 사람의 힘에 결정되는 자력 구원이다. 이는 곤괘 육이 「문언전」의 “자기 주도적 존재는 경외감으로 자신의 내면을 곧게 하고 도의감으로 자신의 외면을 네모반듯하게 한다. 이로써 경외감과 도의감이 제 자리 잡게 되고 인덕이 외롭게 되지 않는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에 잘 나타난다. 군자는 외적 감시가 아닌 내적 감시를 통해 자신을 규율하고 도의에 바탕을 두고서 행동 하나하나를 단속한다. 이처럼 군자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적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서 자신을 완전한 존재로 빚어가고 있다.
  베이징 칭화(淸華)대학의 교훈이 “자강불식, 후덕재물”(自强不息 厚德載物)인데 교정에 이를 새긴 입석이 있다. 이는 『주역』의 의미 틀을 바탕으로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베이징에 갈 기회가 있으면 칭화대학 교정의 입석에 새겨진 여덟 글자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유일신은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를 믿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이 테마는 렘브란트 등 서양의 다양한 화가의 손에 의해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이삭은 두 사람이 나이 들어 본 아들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였다. 유학의 관점에서 보면 결과야 어떻게 되던 간에 사랑하는 자식을 제물로 요구하는 것 자체를 인륜을 저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과연 자신을 믿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느냐를 시험하기 위해서 지상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자식마저 선선히 내놓는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과 했던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리라는 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지 못하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앎과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에 맡기고 따르고 있다. 이를 동아시아의 맥락으로 보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특별한 존재에 의지해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본다. 타력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문화로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의심하고 욕망으로 제물 요구를 뒤로 미루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한 요구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또는 명령을 잘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문화는 종교 문화가 대체적으로 자력 구원의 특성을 지닌다. 이는 아무래도 맹자 성선 사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된 뒤에 불성론(佛性論)이 맹위를 떨쳤다. 이도 결국 부처나 조사와 같은 특별한 존재 또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개개인이 독자적으로 깨칠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맥락이다.
  서양은 하나님의 심판과 은총을 반영하는 재난(災難)과 방주(方舟)가 오늘날에도 재난 영화의 소재로 즐겨 재생되고 있다. 동아시아는 재난과 방주 이야기는 없고 지성감천(至誠感天)과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많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존재이지만 지성과 능력으로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인간이 진실한 태도를 간절하게 소망하면 통상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진다. 왕상부빙(王祥剖氷)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병든 어머니가 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효자로 이름난 왕상이 얼음을 깨고 온 몸으로 잉어를 잡으려고 하자, 깨진 얼음 틈으로 잉어가 뛰어나왔다. 이때 천(天)은 신이 아니라 천(天)·지(地)·인(人)의 세 축으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구성 요소이다.
  이제 『주역』을 숙명론을 강조하는 점서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주역』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유일신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주역』을 덜 읽는 이유를 알 만하다. 왜냐하면 서양으로부터 다양한 신이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신에게 기도해서 계시를 받으면 충분하므로 굳이 어려운 『주역』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대순회보>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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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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