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神道)란 무엇인가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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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규태 작성일2017.02.20 조회4,038회 댓글0건본문
박규태 (한양대학교 국제문화대학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신도의 역사
아마테라스를 정점으로 하는 이 신도신화는 전술했듯이 고대 야마토(大和)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신화이긴 하지만, 일본인의 신화적 상상력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세계의 제신화 가운데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조직적이고 치밀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신도 체계화의 한 요소로 간주될 만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도의 체계화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계기는 528년 긴메이(欽明)천황 때 백제로부터 불교가 공식전래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불교 전래와 더불어 일본 고유의 가미를 모시는 종교가 비로소 ‘신도’라고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 이전까지는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신도’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인이 불교라는 ‘타자’를 만나면서 최초로 ‘자기’로서의 신도를 자각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신도는 불교사상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체계화해 나간다. 이 과정을 일본 종교사에서는 통상 ‘신불습합(神佛習合, 신부쓰슈고)’이라고 한다.
이 신불습합은 통상 불교 중심 혹은 불교 우위의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불교의 부처(佛)를 신도의 가미와 구별하여 ‘호토케’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 호토케가 본체이고 가미는 그 화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일본에서는 ‘본지수적’(本地垂迹, 혼지스이자쿠)이라고 칭한다. 신불습합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이런 본지수적설은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부터 나타났는데, 최초에 그것은 일본 신도의 가미들이 불교 수행을 통해 해탈하여 호토케가 된다는 관념으로 등장했다. 이윽고 그것은 신도의 가미들이 불법을 수호한다는 관념으로 발전된다. 불법의 수호신으로서의 가미라는 이와 같은 관념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을 건립할 때 신도의 가미인 우사하치만(宇佐八幡)을 불법(佛法)의 수호신으로 모신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본 신도의 최고신인 아마테라스를 밀교의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일시하게 된 데에서 본지수적설이 그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여기서 아마테라스는 대일여래가 임시로 일본땅에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를 거치면서 본지수적설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신도의 가미들마다 불보살이나 권현(權現)과 같은 불교적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고, 나아가 본지수적설은 일본적 불교의 초석을 놓은 사이쵸(最澄, 767~822)와 구카이(空海, 774~835)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써 각각 산왕일실(山王一實) 신도설과 양부(兩部) 신도설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예컨대 사이쵸가 개창한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산왕일실 신도설에서는 신도의 가미들을 비롯한 삼라만상이란 모두가 영원히 존재하는 석가여래의 현현이라고 주장했는가 하면, 구카이가 개창한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양부 신도설에서는 금강계와 태장계의 대일여래가 가미들의 본체임을 주장했다. 이로써 신도의 가미들마다 각각의 본체로서의 불보살 혹은 권현의 호칭이 할당되었고,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92-1333)에 본지수적설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3~1392) 무렵에 수적인 가미가 본지인 호토케보다도 더 존귀하다는 ‘수고본하(垂高本下)’의 관념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불교 중심의 본지수적설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몽고의 침략이라는 시대상황에 부응하여 일본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면서 가미와 호토케를 분리하여 순수한 신도를 확립하려는 입장이 나타난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중세 이세(伊勢)신도와 요시다(吉田)신도이다. 이세신도는 이세신궁 외궁의 신관이었던 와타라이 이에유키(度會家行, 1256~?)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불교를 배척하고 신국사상을 내세워 향후의 일본 사상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俱, 1435~1511)에 의해 창시된 요시다신도는 이런 이세신도의 관점을 더욱 발전시켜 “신도야말로 모든 종교의 원류”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요시다신도는 일명 유일(唯一)신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요시다신도에 의하면, 일본에서 생겨나 뿌리내린 신도가 중국에서 가지를 뻗고 인도에서 꽃을 피웠으며 열매를 맺었는데, 그 열매가 떨어져 다시 원뿌리인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 불교라는 것이다. 이는 호토케가 본체이고 가미는 그 화신이라는 본지수적설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불교 중심의 기존 본지수적설을 뒤집어 엎은 요시다신도는 민간 신앙에 깊이 침투하는 한편, 신도계의 중심적 존재로서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도 모든 신도 행정을 관장한 중심 세력이 되었으며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까지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한편 에도시대에 들어와 막부가 주자학을 치세의 학문으로 권장하게 되자, 사회 제방면에서 유교적 경향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도 또한 유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된다. 가령 요시다신도의 정통을 계승한 요시카와 고레타리(吉川惟足, 1616~1695)라든가 이세신도를 계승한 와타라이 노부요시(度會延佳, 1615~1690)는 신도와 유교의 일치를 강조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유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齎, 1619~1682)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안사이는 요시카와로부터 요시다신도를, 와타라이로부터 이세신도를 전수받아 스이카(垂加)신도를 창시했다. 종래의 모든 신도설을 집대성한 스이카신도는 주자학적 논리에 토대를 두면서 거기에 음양도와 기학(氣學)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사이는 인간이 경(敬)에 극진하면 누구든 우주의 본체와 합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신도를 아마테라스의 도(道)라고 규정하면서 그 아마테라스의 후손으로 간주되어 온 천황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를 강조했다. 또한 그는 국체(國體)와 대의명분을 중시했는데, 이런 국가주의적 입장은 이후 미토가쿠(水戶學) 및 막말 근왕사상의 원동력이 되는 등 근세 및 근대사조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불교사상을 채용하여 신도를 체계화한 중세 요시다신도이건, 유교사상에 의거하여 신도를 조직화한 근세 요시카와신도이건, 혹은 주자학에 근거한 스이카신도이건, 거기서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된 신도란 그 내실을 들여다 보면 기본적으로 외래사상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외래 사상을 일체 배제하고 문자 그대로 오직 순수한 신도만을 내세우는 새로운 사조가 나타났다. 국학(國學, 고쿠가쿠)이 그것이다. 일본의 고대어 연구에 몰두한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1669~1736)와 『만엽집』연구에 일생을 바친 가모노마부치(賀茂眞淵, 1697~1769)를 거쳐, 30여 년간의 작업 끝에 대작 『고사기전』 44권을 펴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에 이르러 집대성된 국학은 이후 국체를 강조하여 막말 근왕지사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의 복고(復古)신도로 이어진다. 이들은 우부스나가미(産土神=氏神: 마을의 수호신)의 덕에 의해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에 의해 시작되어 아마테라스로 계승되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바로 신도이며, 거기에는 불교나 유교 등 외래사상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게 일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신도설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과 종교 엘리트들의 사상이었던 만큼 일반 민중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신도는 다른 한편으로 일본인의 세시풍속, 오카게마이리와 같은 민속적 종교운동, 신도계 신종교의 성립 등을 통해 일반 민중들의 삶을 규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중 오카게마이리에 관해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일본 신도의 센터라 할 만한 이세신궁은 원래 일반 민중들의 공납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이후 온시(御師)라 불리우는 신도 포교자가 전국에 이세신앙을 보급함으로써 각지에 이세강(伊勢講)이 조직되는 한편, 일반 민중들의 집단적인 이세신궁 참배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민중들의 이세신궁 참배는 에도시대에 이르러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이세마이리’ 혹은 ‘오카게마이리’라 한다. 1614년과 1624년을 기점으로 하여 에도시대에 걸쳐 약 60여 년의 주기로 반복적으로 발생한 오카게마이리에는 매번 수백만 명(1705년에 350만, 1771년에 200만, 1830년에 480만)에 달하는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춤을 추면서 이세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집의 어른들이나 직장 상사에게 알리지도 않고 불쑥 뛰쳐나와 여자는 남장을 하고 남자는 여장을 하는 등 일상으로부터의 파격적인 일탈을 감행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실로 봉건체제 하에서 억압된 민중의 에너지가 민속적인 신도신앙을 빌어 폭발한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1868년의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일본정부는 서구 근대문명의 흡수에 주력하는 한편 왕정복고를 추진하여 이른바 ‘진무(神武)창업’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정일치적인 고대로의 회귀를 표방했다. 이는 만세일계의 초대 진무천황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건국정신으로 되돌아가 온 국민이 일체가 되어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하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메이지 정부는 서세동점에 대한 위기감으로 국가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신도신화를 빌어 일본인의 정신적 아이덴티티를 확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고대 율령제 하에서 신도행정을 관장하던 기관인 신기관(神祇館)을 부활시키고 신도와 불교를 구별하고자 하는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 1868년)’을 포고하였다. 이로써 종래 신사에 있던 불교사원인 신궁사(神宮寺)가 폐지 혹은 이전되고 그 신궁사를 관장하던 승려와 별당직이 강제로 환속당했다. 또한 신사는 신기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불보살 및 권현 등의 신호(神?)가 폐지됨과 동시에 신사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과 불경 및 각종 법구 등이 제거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불교 자체를 근절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이와 같은 신불분리정책은 결과적으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과격한 ‘폐불훼석(廢佛毁釋: 절을 부수고 불상, 불경, 법구 등을 파손시킨다는 의미)’ 운동을 초래하고 말았다.
나아가 메이지정부는 1870년 이른바 ‘대교선포(大敎宣布)’를 발하여 신도로써 국민을 교화시키려는 신도포교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신사와 신직제도를 철저히 정비하여 신사와 신관을 모두 국가조직에 편입시킴으로써 명실공히 국가신도의 틀이 완성되었다. 이 무렵 종교계에서는 신사가 종교냐 아니냐 하는 논의가 일었는데, 그 결과 신도는 모든 종교(불교, 기독교, 교파신도 13파) 위에 자리매김되게 되었다. 이로써 국가신도는 일종의 초종교로서 국민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신도 체제는 1945년 패전과 더불어 미군정이 ‘국가신도,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 지원, 보전, 감독 및 홍보의 폐지에 관한 건(일명 ‘신도지령’)’을 일본정부에 통고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1945년 ‘종교법인령’(1951년 ‘종교법인법’으로 개정)이 공포되어 신도는 종교로서 재출발을 하게 되고 전국 신사의 합의에 따라 ‘신사본청’이라는 총괄적인 종교법인이 조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대일본사회와 신도
오늘날 일본에는 전국적으로 약 12만 개소의 신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사로는 이나리신사와 하치만신사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유형의 신사를 합치면 전체 일본 신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먼저 이나리(稻荷)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본을 여행하다가 붉은 색의 도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서 있는 ㅠ자 모양의 문)와 여우상이 있는 신사를 만나면 그것이 바로 이나리 신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래 ‘이나리’라는 용어는 도성(稻成) 즉 벼의 성장을 나타내는 일본어였는데, 그것이 수확한 벼(稻)를 쌓아(荷) 가미에게 봉납한다는 의미로 쓰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교토에 있는 후시미이나리(伏見稻荷)대사가 전국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인데, 이 신사는 711년 가야=신라계 도래씨족인 하타(秦)씨에 의해 창립되었다고 하며 이나리신은 이 하타씨의 우지가미(氏神)였다고 한다. 하타씨는 일본에 양잠 기술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직조업으로 거상이 된 인물인데, 긴메이(欽明)천황 때 장관으로 중용되기도 했다. 요컨대 이나리신은 원래 농경신이었는데, 근세 이후에는 특히 장사를 번창케 해 주는 상업의 신, 나아가 어업의 신, 가정의 수호신 등으로 그 기대역할이 확장됨으로써 현재 이나리신사가 일본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일본 기업의 대부분이 회사 부지 내에 조그만 신사를 만들어 이나리신을 모시고 있을 정도로 이나리 신앙을 빼고는 현대일본의 신도를 말하기 어렵다.
이 이나리 신앙 못지않게 하치만 신앙 또한 오늘날 일본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신도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가마쿠라(鎌倉)의 쓰루오카하치만궁(鶴岡八幡宮)이 무사들의 수호신사가 된 이래, 하치만신이 전국 각지의 신사에 모셔지게 되었다. 이 하치만신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일설에 의하면 제10대 오진(應神)천황이 바로 하치만신이었다고 하고,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하치만신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씨족의 조상신이라고도 한다. 총본산은 큐슈지방의 우사하치만궁(宇佐八幡宮)인데, 전술했듯이 하치만신은 일찍이 불교와 습합하여 하치만 대보살이라는 칭호로도 불려 왔다.
현대 일본인의 생활에 신사가 얼마만큼 밀착되어 있는가는 무엇보다 정월초에 행해지는 신도적 풍속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가령 정초에 많은 일본인들은 현관에 ‘가도마쓰(門松)’라는 소나무 장식을 하고 시메나와(注連繩)라 불리는 금줄을 걸어 가미를 맞이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하쓰모우데(初詣)라 해서 정초에 신사를 참배하면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 정해진 관례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새해가 되면 그 해에 길하다고 여겨지는 방각의 신사나 사찰을 참배한다. 원래 전통적인 일본인들은 섣달 그믐날부터 각자의 우지가미 신사에서 보내면서 지난 1년 동안의 부정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화되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가족 전체가 동네의 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하쓰모우데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국민적 행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황중이다. 그래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메이지신궁(明治神宮)과 같은 저명한 신사에는 정월의 사흘 동안만 수백만 명이 참배하는 등, 매년 일본국민의 70% 이상이 하쓰모우데에 참여한다고 한다. 나아가 세쓰분(節分)이라 불리는 입춘 전날에도 사람들은 액풀이를 위해 신사를 참배한다.
이밖에 오늘날 일본에서 장례식은 통상 불교식으로 하지만, 성인식과 결혼식은 신도식으로 거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인생의 중요한 매듭마다 신사를 참배한다. 가령 아이가 태어나면 일정기간(통상 남아는 32일, 여아는 33일)이 지난 다음 모친과 조모가 아기를 안고 신사를 참배하여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한다. 이를 ‘오미야마이리(御宮參)’라 한다. 또한 아이가 3세(남녀 공통), 5세(남아), 7세(여아)가 되는 해의 11월 15일에도 신사를 참배하는데, 이런 관례를 ‘시치고산(七五三)’ 축하연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다음 남자 25세와 42세 때, 그리고 여자 19세와 33세 때 액땜을 위해 신사를 참배하는 민속적 신도신앙도 아직 널리 행해지고 있다. 나아가 많은 일본인의 가정에는 신단(神棚, 가미다나)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통상 각 신사에서 배포하는 오후다(御札)가 봉안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 신도는 조상신이라든가 자연신에 대한 애니미즘적인 숭경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일본의 민간신앙 및 관행이 외래사상인 도교, 불교, 유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신사문화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오후다는 일종의 부적으로서 명백히 도교적 습속의 흔적에 해당된다. 오마모리(御守)라고도 불리는 이 오후다에는 해당 신사의 이름과 함께 가내안전, 화재안전, 교통안전, 입시합격, 장사번창, 치병, 기타 취직이라든가 연인 혹은 운수라든가 복과 장수 등을 기원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일본인들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오후다를 사다가 그것을 몸에 지니거나 또는 전술했듯이 집안의 신단에 안치한다든가 문 입구나 기둥 같은 곳에 붙여 놓기를 좋아한다. 그럼으로써 가미의 가호를 입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신단 앞에 정좌하여 가미와 조상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하루의 안녕을 기원드린다. 그밖에 입학, 진학, 졸업, 취직, 환갑 등의 날에 신단 앞에서 감사와 축하의 기원을 올리기도 한다.
개개인의 사적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공장, 고층빌딩 및 주택과 점포 등을 건축할 때 공사 안전과 무사 완공을 천신지기에게 기원하는 의식인 지진제(地鎭祭) 또한 신도식으로 거행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 또한 신도는 건축, 정원, 회화, 조각, 노(能), 가부키, 차(茶道)문화, 꽃꽂이, 칠기공예 등 일본문화의 저류에 흐르면서 일본인의 정신생활의 심층에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현대일본사회에서 신도는 굳이 특별한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문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일상적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맺음말
이처럼 생활문화와 따로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려운 신도의 정신성에 의하면, 진리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상적 현실 그 자체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는 현실을 넘어선 어떤 추상적 이념이라든가 보편적 법칙 혹은 불변성이나 영원성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릴 여지가 별로 없다. 다만 ‘지금 이곳’만이 그 자체로 진리일 뿐이다. 그래서 신도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도는 “바로 지금 현재 속의 신대(神代)”를 뜻하는 일본의 전통적 시간관념 즉 ‘영원한 지금(中今, 나카이마)’을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신도는 생(生)을, 그리고 불교는 사(死)를 담당해 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끝으로 신도란 과연 일본만의 고유한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를 되물어 보았으면 한다. 이는 신도라는 것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만 고유한 어떤 불변적이고 본질적인 특징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도를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종교시스템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으로 일본 역사상 신도라고 부를 만한 어떤 최소한의 연속성 즉 신기신앙(神祇信仰)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까지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도의 역사에서 이런 신기신앙의 구체적인 표출이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는 사실의 확인에 있다. 가령 이런 관점에 의하면, 상설 신전 등 건물을 갖춘 신사신도의 성립을 관료제와 부계제를 수반하는 율령제가 확립되고 우지가미(氏神) 제사가 출현한 8세기 중엽 이후부터 보아야 하며, 나아가 율령제 하에서 고대 신기제도가 확립된 10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오늘날 ‘신도’라 불리는 일본의 민족종교와 동일한 형태의 종교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대순회보》 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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