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대의 유교(儒敎) - 신유학(新儒學)의 발생과 북송오자(北宋五子)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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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631회 댓글0건본문
장재(張載, 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장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젊은 시절 남다른 기상과 자부심을 지녔던 그는 군사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상관이었던 범중엄(范仲淹)으로부터 유학자(儒學者)는 병가(兵家)에 마음이 쏠려서는 안 된다는 질책을 받고 『중용』을 비롯한 유가의 여러 경서(經書)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백가서(百家書)는 물론 불교와 도교의 교리까지 두루 연구하였다.
그러던 중 1056년에 서울[開封]에서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ㆍ정이 형제를 만나 『역(易)』과 도학(道學)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후로 그는 다른 학문을 버리고 육경(六經)에 몰두하여 『역(易)』과 『중용』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체계를 세우게 된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정몽(正夢)』ㆍ『서명(西銘)』ㆍ『횡거역설(橫渠易設)』 등이 있으며, 주돈이와 마찬가지로 높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성인(聖人)이 되려는 큰 뜻을 품은 채 성리학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장재는 우주의 구조가 본체인 태허(太虛)와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본체인 태허는 무형무상(無形無相)이며 기의 본래적인 상태로서 지극히 맑고 투명한 원기(元氣)이다. 그 기(氣)는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로 존재하며 활동하는데 그것이 모이면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형체를 잃고 다시 본래의 상태인 태허로 돌아간다. 장재는 태허가 곧 기[太虛卽氣]이지만 기 운동의 바탕이 되고 기를 질료(質料)로 하여 만물을 형성하는 것이 태허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태허야 말로 천(天)의 진실한 모습이며 그것은 그대로 마음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정이(程) 혹은 주희(朱熹)가 이(理)를 중심으로 이(理)와 기(氣)를 함께 인식했던 것과는 달리 장재는 기(氣)가 이기(理氣)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경우 이(理)는 기의 운동과 변화의 내재적 원리로서 작용하는 것일 뿐 어디까지나 기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우주론을 바탕으로 장재는 그의 심성론(心性論)을 전개하였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지니게 되는 기(氣)를 성(性)이라 하였다. 그는 이 성(性)을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즉 인간은 누구나 본체인 태허의 기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지극히 선(善)한 천지지성을 간직하고 있으나, 형체를 이룰 때는 기(氣)의 청탁(淸濁)으로 말미암아 선악의 구분이 있는 기질지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기질지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되고 우주의 본성인 천지지성이 가리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수양의 목적은, 기질지성을 변화시켜 본연의 천지지성으로 환원토록 하는 데 있었다. 또한 장재는 성(性)이 활동하여 나타난 것을 정(情)이라 하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을 마음[心]이라 하는데, 이 마음이 성과 정을 주재(主宰: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함)하는 것[心統性情者也]으로 보았다. 후에 주희는 이 말과 함께 장재의 본성론을 자신의 심성론을 구성하는 주요 명제로 삼게 된다.
한편 장재가 기질을 변화시켜 바르고 순수한 성[天地之性]을 회복하기 위해 제시한 방법은, 천지의 본질인 지극한 성(誠)을 본받아 내적으로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외적으로는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서 만물과 일체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이상은 “백성은 동포요, 만물은 짝이다.”(『서명(西銘)』)라는 말과, 신유학의 웅대한 규모와 정신을 잘 드러내 주는 다음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천지를 위하여 뜻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긴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성대를 연다.
爲天地立志,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 (『張子語錄』, 「語錄」 中)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 1033~1107) 형제는 이정(二程) 또는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북송 신유학의 중심축을 이룬 인물이다. 이들은 오랜 기간 낙양에서 학문을 닦고 강의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을 ‘낙학(洛學)’이라 하였다. 장재의 외척(外戚)이었던 정호, 정이 형제는 그와 학문적 교류가 있었고 소강절과도 교제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주돈이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는 늘 이정 형제에게 공자와 안회가 즐긴 것이 무엇인지 찾게 하여 그들을 계발하였다.
형인 정호의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이며 명도선생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스승인 주돈이에게 감화를 받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구도(求道)에 전념하였다. 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주부(主簿), 현령 등을 역임할 때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名望: 명성과 인망)을 얻었고 성품이 온화하여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가 좌천된 후에는 수십 년간 제자백가(諸子百家)와 불교, 도교를 연구했으나 끝내는 다시 <육경(六經)>으로 돌아와 체득한 바가 있었다.
한 살 아래인 정이의 자는 정숙(正叔)이고 호는 이천(伊川)이며 이천선생이라 불렸다. 수차례 대신들의 천거를 받았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철종(哲宗) 초에 사마광, 여공저 등의 추천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정문입설(程門立雪)의 고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형과 달리 엄격한 도덕관념과 근엄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였으며 반대 당(黨)과 대립하다가 귀양 가게 된 후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형제 중 정호는 천리(天理) 두 글자를 스스로 체득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천리는 완전무결한 것으로서, 인간을 초월한 원리인 동시에 인간과 만물의 이법(理法)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 천리에 따르는 것이 사람의 참된 길이며, 만물에 갖춰져 있는 이(理)가 바로 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천리를 담고 있는 것이 기(氣)이며 기는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그는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만나 만물이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데 그것의 교감정도에 따라 만물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였다. 또한 정호는, “형이상(形而上)은 도(道)요, 형이하(形而下)는 기(器)이다. … 기(器) 또한 도(道)요, 도(道) 또한 기(器)이다.”(『二程遺書』, 卷1)라고 하여 이(理)와 기(氣)를 별개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구체적 대상인 기(氣)에 내재되었을 때만이 이(理)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적인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에 비해 정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근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우주와 만물이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여기서 형체를 이루는 것이 기(氣)이고 형체 가운데 부여되어 있는 도(道)가 곧 이(理)라는 것이다. 정이는 무형의 이(理)를 우주를 총괄하는 근원으로 보았는데, 개개의 사물에 부여되어 있는 이(理)들 또한 근원적인 하나의 이(理)로부터 나왔다는 것[理一分殊]과 기질(氣質)의 청탁에 따른 만물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우주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인성론에도 반영되어 각기 다른 사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먼저 정호는 ‘생(生)을 성(性)이라 하고 성이 곧 기[性卽氣]요, 기가 곧 성[氣卽性]’임을 논하면서, 생(生) 이후의 성(性)인 기질지성(氣質之性)만을 인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늘이 부여한 이(理)는 선(善)하지만 기(氣)를 받아 태어난 인간의 성(性)에는 선악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성(性)과 정(情: 性이 발동한 것)을 통합하는 것이 심(心)이므로 마음 가운데에 이(理)가 있다[心卽理]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마음[五常] 중에서도 특히 정호는 인(仁)이 다른 것을 포괄한다고 하여 중시했는데, 그가 말한 ‘仁’이란 천지만물과 한 몸이 되는 근본적인 최고의 정신적 경지였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그는, 인욕(人慾)을 극복하고 도심(道心)을 간직한 채 동정(動靜)과 안팎의 구분에서 벗어나 평정심으로 만사에 임하는 ‘정성(定性: 성을 안정시킴)’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정이는 그의 형과 달리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늘이 부여한 성[天地之性]은 이(理)로서 지극히 선하나, 기(氣)에서 비롯된 성[氣質之性]은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이(理)에서 비롯된 것이고 기(氣)에서 비롯된 것은 어디까지나 재질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재질인 기(氣)의 청탁(淸濁)에서 벗어나 본성(本性)인 이(理)에 부합하는 것을 공부의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한 수양법은 경(敬) 공부와 궁리(窮理)였다. 경 공부는 성품을 기르는 것으로, 정제엄숙(整齊嚴肅: 정돈되고 엄숙함)과 주일무적(主一無適: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음)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각각의 사물에서 이치를 궁리(窮理)하여 진지(眞知)를 획득, 그것을 실천하면 기질을 변화시켜 성인(聖人)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정호가 자신의 마음을 밝혀 천리(天理)를 구하고자 했다면, 정이는 개개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총체적인 이(理)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엮은 『이정유서(二程遺書)』에는 누구의 어록(語錄)인지 분명치 않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심즉리(心卽理)의 입장을 취했던 정호의 학문은 육상산(陸象山, 1139~1192)과 왕양명(王陽明, 1472~1528) 심학(心學)의 근원이 되었고,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을 취했던 정이의 학문은 주자 이학(理學)의 선구가 되었다. 또한 이정(二程)에 이르러 이기(理氣)의 개념이 비로소 유학의 중심철학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심(心)ㆍ성(性)ㆍ명(命)ㆍ리(理)ㆍ천(天) 등의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여 유학의 철학적, 이론적 수준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순회보》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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