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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대의 유교(儒敎) -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朱子)의 생애와 사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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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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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자는 흔히 북송 성리학(性理學)의 집대성자라 일컬어진다. 그는 북송의 여러 성리학설을 정이(程)의 이(理) 철학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체계 내에 정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북송 성리학만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선진(先秦) 유학과 한당(漢唐) 유학은 물론 노장과 불교, 문학, 사학 등 거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집대성하였다. 중국 유학사에서 주자는 가장 저명한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며 송대 이후 그의 폭넓은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에 견줄만한 학자는 없었다.

  주자는 생애의 대부분을 복건성(福建省)의 민강(江) 유역 건양(建陽)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그래서 주자학(朱子學)이라 불리는 그의 학문은 주돈이의 염학(濂學), 이정(二程)의 낙학(洛學), 장재의 관학(關學)과 더불어 ‘민학(學)’이라고도 불렸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을 통해 주자의 학문이 가지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여조겸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에서는 북송 초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정리하였고, 『이락연원록』에서는 이정(二程)에서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학문의 연원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통서』, 장재의 『서명』·『정몽』 등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들의 사상을 자신의 학문 속에 끌어들였다. 또한 『주역본의』와 『역학계몽』을 지어 정이와 소옹(邵雍)의 역학(易學)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서(四書)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석과 자신의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사서집주(四書集註)』, 『사서혹문(四書或問)』 등 다양한 관련 서적을 저술하였다. 그가 이처럼 사서를 중시한 것은, 사서에 공맹의 언행이 담겨있고 성(性), 심(心), 인(仁), 의(義) 등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이(理)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 사서 중 『대학』과 『중용』은 각기 『예기(禮記)』의 한 장에 불과했으나 주자가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간행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 후 유학사에서 학문에 대한 논의들은 ‘오경(五經)’에서 ‘사서’ 중심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사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송대 이후 청 말기까지 중국의 공교육과 과거시험의 표준이 되었다.

  사서 외에도 주자는 『통감강목』을 편집하고 『시집전(詩集傳)』, 『주자가례(朱子家禮)』 등을 지었으며, 『효경』과 『소학』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또한 『예서(禮書)』 편찬을 주재하고 『서집전(書集傳)』의 편집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학·역사·과학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들을 남겼다. 이처럼 주자는 수많은 문헌들을 저술하고 편찬하면서 자신의 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그 중에서 주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기론·심성론·수양론과 주자가 벌였던 논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理氣論


  주자는 정이의 이본체(理本體)사상과 장재의 기본체(氣本體)사상을 이어 받아 그의 이기론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재의 기론이 축소, 변질되긴 하지만 정이가 이(理)에 치우치고 장재가 기(氣)에 치우쳤던 것과는 달리 주자는 ‘이’를 중시하면서도 ‘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이치, 조리, 규범 등으로서 헤아림이나 운동작용이 없는 것인데 반면, 기(氣)는 시간과 공간 내에 존재하는 형상(形象)이나 재료로서 헤아림이나 운동작용이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이’와 ‘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용하는 ‘기’ 속에 ‘이’가 이치와 조리로서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때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理氣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는[理氣不相雜] 관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기(理氣) 사이의 선후 관계에 대해 논하면서 처음에는 ‘이’가 먼저 있음으로 해서 ‘기’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선기후(理先氣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이러한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깨닫고 논리적인 의미에서 ‘이’가 먼저임을 말할 뿐, 실재에 있어서는 ‘이’와 ‘기’ 사이에 선후가 없다고 하였다.

  한편 주자의 이기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일분수(理一分殊)’사상이다. 정이에게서 비롯된 이 사상은, 이(理)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로서 모든 대상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치이지만[理一], 그 이치는 대상에 따라 서로 다른 구체적인 규범(충, 효, 열 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다르다[分殊]는 뜻이다. 이는 우주론적인 관점에서 본체인 태극(太極)과 만물의 성(性)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각각의 사물은 본체인 태극과 통할 수 있는 공통된 이치를 지니고 있으나, 만물의 성은 그 품부(稟賦: 선천적으로 타고남) 받은 기질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心性論


  주자는 이기론을 통해 우주의 본체와 사물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한 후 인간에게 눈을 돌린다. 그는 사람의 마음[心]이 성(性: 五常)과 정(情: 七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마음이 성과 정을 통괄한다[心統性情]고 보았다. 이것은 본래 장재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이에 대해 실질적으로 논의한 것은 주자였다. 그에 의하면 ‘성’과 ‘정’은 체용(體用)의 관계로서, ‘성’은 마음의 본체이고 ‘정’은 마음의 작용이 된다. 즉 마음은 사려(思慮)와 감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未發] ‘성’과 사려와 감정이 일어난 상태인[已發] ‘정’의 두 측면으로 존재하며 이를 포괄하고 주재하는 것 또한 마음이라고 하였다.

  마음의 본체인 성(性)에 관해 주자는 정이의 성즉리(性卽理), 곧 ‘인간의 본성이 바로 천리(天理)이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인간의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선한 품성을 지니고 태어나지만 육체를 지닌 인간은 기질의 영향을 받아 악한 품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그 품부 받은 기질의 맑고 탁한 정도, 바르고 치우친 정도에 따라 성인과 현인, 우인(愚人) 등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성’은 선한 본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아 변화된 것[氣質之性]이고 그 기질은 도덕 수양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인간 수양의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다.

  또한 주자는 인간의 마음을 도심과 인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서 도심(道心)은 이(理)의 발현인 도덕의식이고 인심(人心)은 기(氣)에서 비롯된 감성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심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광범위하게 가리키는 것이며 성리학(性理學)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대상인 사욕(私慾)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심은 다만 도심에 의해 제어되지 않으면 악(惡)으로 흐르기 쉬운 위태로운 것이므로, 주자는 항상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도록 자신을 주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修養論


  주자는 인간이 이상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길로 『중용』에 나오는 존덕성(存德性: 인간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수양방법)과 도문학(道問學: 학문을 통해 선한 덕성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두 길을 제시하였다. 존덕성이 경(敬)을 위주로 한 마음공부라면 도문학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사물에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敬)이란 늘 삼가고 조심하며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깨어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주의력을 자신의 내면에 집중시켜 늘 자신을 반성하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동정(動靜)에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마음의 공부이다.

  그리고 격물치지는 사물에 나아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의 지극함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적을 읽고 사물과 접촉하며, 도덕을 실천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개개 사물에 담긴 이(理)를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누적되면 어느 순간 활연관통(豁然貫通)하여 우주 보편의 원리[理]와 내면의 도덕성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주자는 특히 인식의 객관적인 방법으로서 성인의 말씀이 담긴 경전의 학습을 중시하였고, 그러면서도 실천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주자학의 대립과 전개


  주자 이전의 도통론(道統論)은 요·순을 시발점으로 삼았지만, 주자는 복희에서 하늘까지 소급하면서 체계적인 도통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도통론은 유학의 정신적 전통의 근원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으며, 공맹의 전통이 이정(二程)을 중심으로 송대의 도학자들에게 이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학문이나 학파와의 차별과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주자는 자신의 학문적인 정통성을 고수하고자 그들과 적극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 중에서 중화설을 둘러싼 장식과의 논쟁, 왕패론을 둘러싼 진량과의 논쟁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보겠다.

  먼저 중화설(中和說)은 주자와 장식(張, 1133~1180)이 마음의 존양(存養: 본마음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름)공부에 대해 토론한 것이다. 호상학파(湖湘學派)인 장식은 성(性)과 심(心)을 체(體)와 용(用)의 관계로 파악하고 마음의 작용인 희노애락의 감정이 드러난 상태를 잘 살피는 찰식(察識)을 통해서만 본성을 기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자는 처음에 장식의 학설을 따랐으나, 얼마 후 거기에 오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주자는 마음이 오로지 이발(已發: 情)만을 가리킨다는 장식의 주장과는 달리, 미발(未發: 性)과 이발을 모두 포함한다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미발의 상태에서 마음의 본성을 잘 살피는 함양(涵養: 성품을 기르고 닦음)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선행되어야 이발의 상태에서 실수가 적고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왕패논쟁은 주자가 영강학파(永康學派: 일의 결과와 실용을 중시하는 학파)를 대표하는 진량(陳亮, 1143~1194)과, 왕패(王覇: 왕도와 패도)·의리(義利)를 둘러싸고 5년간 서신으로 벌인 논쟁이다. 이들이 논쟁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은 한고조와 당태종이었다. 주자는 그들이 비록 세상에 큰 업적을 이룬 인물이긴 하지만 그들이 행한 바의 근본은 이욕(利慾)의 사사로움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왕도정치와는 다른 패도정치로 규정하며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진량은 이들의 행위가 순수한 천리(天理)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이룬 업적이 천하와 백성들에게 끼친 이로움이 큼으로 이 또한 인(仁)의 효용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왕패ㆍ의리의 병용(竝用)을 주장했으나 주자가 이를 철저히 배격했으므로, 이 논쟁은 서로간의 차별성만 확연하게 드러내었다.

  이와 같이 주자는 다른 학파의 학자들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사상체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에 의해 완성된 성리학은 ‘위학(僞學)의 금(禁)’이 해제된 이후 문인(門人)들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자의 문인들은 자신들이 유학의 정통을 이었다는 강한 도통(道統)의식을 지니고 정치참여와 서원교육이란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주자학을 남송 전역으로 전파하였다. 이후 주자의 사상은 중국의 교육과 문화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순회보》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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