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대의 유교(儒敎) - 주자학에서 양명학(陽明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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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528회 댓글0건본문
남송(南宋) 말에서 명(明) 초까지 유학의 흐름
남송을 대표하던 주자와 육상산의 학문은 그들의 사후(死後) 각각 그 명암을 달리하게 된다. 육상산은 당시에 상당히 큰 영향력이 있었으나 그의 사후 심학(心學)을 대표하던 상산의 학문은 침체되어 활력을 잃고 만다. 이에 반해 주자는 만년에 ‘거짓된 학문을 금한다[僞學之禁]’는 탄압을 받아 그와 그의 학문이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였었다. 그러나 주자 사후 해금(解禁) 조치와 더불어 신분이 회복되었고 문인(門人)들에 의해 주자학이 남송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따라 그의 학문은 더욱 활기를 뛰었고 국가의 공인을 받아 조정에서도 주자학을 존중하는 풍토가 보편화되었다.
이후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元)의 군대가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臨按)을 점령하면서 중원은 북방 이민족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원나라 초기에 남송의 유학자(儒學者)들은 최하층의 천민 바로 위의 계층에 속할 정도로 낮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원 조정에서는 자신들의 관습법에서 벗어나 앞선 한족(漢族)의 정치와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등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자 유학자들도 국가의 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조정의 신임을 얻었고 과거제의 실시를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가 과거의 정식 교과서로 채택되면서 주자학은 관학(官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원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중 오징(吳澄, 1249~1333)은 관학화되고 교조화된 주자학의 폐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그는 도덕주체의 자발성과 실천을 중시하는 육상산의 학문을 수용해 주륙조화(朱陸調和)의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주자학은 관학으로서 국가의 통치이념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학문의 대세는 여전히 주자학이었다.
이런 경향은 명나라 초기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명초의 학자들은 주자학의 가치체계를 굳게 믿고 사회의 여러 문제와 학술상의 난제들을 주자학이 제공하는 틀 내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주자학은 모든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주자가 말한 리(理)가 우주의 근본 원리임을 자명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우주원리를 근거로 전개된 도덕원리를 스스로 분명히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 진헌장(陳獻章, 1428~1500)이 나타나 사상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도 처음에는 주자학의 가르침[格物致知]에 따라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마음과 사물의 이치가 일치하지 않음을 경험한 뒤 정좌(靜坐)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자와 달리 찾아오는 이들에게 스스로의 마음에서 이치를 구할 것을 당부해 명대 심학(心學)의 새로운 학풍을 열어 놓았다. 명대의 사상은 그에 의해 비로소 앞 시대와 분기(分岐)를 이루며 독자성을 지니게 된다.
양명학의 형성과 전개
명대 중기에 이르면 황실과 환관, 지방 관리들의 토지 겸병이 심화되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이 증가하면서 유민들이 늘어나 농민봉기가 확산되었다. 또 각 지방을 나누어 맡던 왕족들의 반란은 이런 혼란을 가중시켜 명나라를 쇠퇴기에 접어들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은 지배체제에 대한 옹호와 관료들의 권익 증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적인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없었다. 또한 사상적 자율성과 자주성을 침해하는 주자학 일변도의 관학체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갈망하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다. 그는 절강(浙江) 여요(餘姚) 출신으로 양명동(陽明洞)에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양명선생이라 불렀다. 왕양명은 젊은 시절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병법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불교, 도교 등 유교 이외의 다른 학문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주자학을 신봉하여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는 어디에서 이치를 구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28세에 왕양명은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34세 무렵 당시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환관 유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 40대를 맞고 귀주성(貴州省) 용장역(龍場驛)에 유배되어 역승(驛丞: 숙박 업무를 담당함)으로 좌천되었다. 문화적 불모지이자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했던 용장에서 양명은 손수 물을 긷고 나무를 해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고난 속에서도 양명은 ‘성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란 의문을 품고 밤낮으로 정좌하고 사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 본성이 온전한데 바깥 사물에서 리(理)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임을 주장하게 된다.
얼마 후 유배에서 풀려난 양명은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과 소수민족의 봉기를 진압하고 왕실 귀족의 반란을 제압하는 등 장수로서 큰 공을 세웠으나 여러 차례 죽음을 넘나드는 어려운 정치적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관료 생활을 할 때에는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명이 제시한 명제는 육상산의 ‘심즉리’이나 상산과 달리 마음 밖의 이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학(大學)』의 ‘격물(格物)’을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구하는 것으로 해석한 주자의 학설을 부정하고,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마음의 사(事)로 해석하였다. 즉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바르게 해 마음의 본체[理]에 부합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격물에 대한 양명의 이해였다. 그가 말한 마음의 본체란 ‘양지(良知) ’인데 이것은 최고의 입법자인 동시에 리(理)의 구현자이며 천지 만물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이 마음의 움직임이 리(理)의 구현이란 생각은 지행합일론(知行合一論)을 이끌어 낸다. 왕양명의 지행합일론은 앎이란 행의 시작이고 행이란 앎의 완성이란 사상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는 앎과 행을 하나로 보고 참된 앎은 반드시 행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사물의 이치를 먼저 깨달음으로써 행할 수 있다는 주자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비해 지식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양지를 실현하는 것[致良知]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를 위해 양명은 주자학에서 제시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달리 구체적인 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는 사상마련(事上磨煉)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양명학에서 제시한 이념들은 주자식의 독서·거경(居敬)·궁리(窮理) 공부보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도덕적 본성을 중시한 것이다. 그것은 도덕을 실천하는 주체에 대해 강한 신뢰를 나타낸 것이었고 도덕 실천의 방법을 간단하게 해주었다. 이로 인해 양명학은 사대부가 아닌 일반 평민들에게도 도덕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넓혀주었고, 서민문화가 발전하고 상인 계급이 성장하던 명대 후기에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물의 이치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고 내면의 마음에서만 찾고자 했던 왕양명의 학문은 그의 사후 두 갈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극도로 강조하여 기존의 질서와 관념에서 벗어나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주창한 양명 좌파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점진적인 수양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해 나갈 것을 주장하며 다시 주자학에 접근했던 양명 우파이다. 이들 중 양명 좌파는 점차 대두되어 가는 서민문화의 풍조에 호응하여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강학활동을 펼쳐 명대 후기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규범과 예(禮)를 도외시한 체 자율과 주체성을 강조했던 그들의 사상은, 욕망을 인간 본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기존의 사회질서와 체제까지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양명학은 조정의 탄압과 함께 지식인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았고, 명대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대순회보》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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