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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대의 유교(儒敎) -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과 고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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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8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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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의 유학


  명나라는 만력제(萬曆帝, 1573~1620) 시대에 이르러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토지의 집중과 중소 지주층의 몰락, 농민의 궁핍화가 진행되고 여기에 대외군비(임진왜란)의 확대로 인한 증세(增稅)는 농민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환관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관료들과 자주 세력다툼을 벌여 정치적,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숭정(崇禎, 1628~1644) 연간에 이르면 농민 폭동이 자주 발생하고 그 규모가 확산되면서 점차 농민 반란의 성격을 띠었다. 또한 북방에서는 세력을 확장한 만주족이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명나라 말기의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혼란 속에서 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질적인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동림학파(東林學派)인데, 이들은 주자학과 양명학을 절충하는 입장에서 인욕(人慾)을 긍정했던 양명좌파를 비판하고 경세치용의 학문을 주장했다. 정치적으로는 환관 세력에 대립하면서 도덕적 각성을 통한 개혁을, 경제적으로는 부역과 세금의 공평한 부담을 주장했으나 정치적인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들이 주장했던 경세(經世)의 학문도 정치나 경제를 연구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후 크게 발전하진 못했지만, 명말 청초에 나타난 새로운 학문의 경향을 창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명나라는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군에게 수도가 함락되면서 패망하였고, 그 농민군이 다시 명나라를 압박해 오던 만주족에게 패하면서 중국은 결국 청조(淸朝)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학문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데서 시작된 역사에 대한 반성은,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에 머문 전대의 학문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당시의 학자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것은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 대한 해박한 연구를 기초로 정치ㆍ제도적 변혁을 추구하는 경세치용의 정신과 민족주의 정신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반청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이후 사회와 정치의 변혁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학문을 추구하게 된다.

  명말 청초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를 들 수 있는데 이들도 모두 반청운동 실패 후 청(淸)의 관료로 나아가지 않고 중화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며 학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들은 정치ㆍ경제ㆍ천문ㆍ지리ㆍ금석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문헌 자료에 바탕을 둔 고증과 박학(博學)을 중시했다는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명말 청초의 유교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이들 중 황종희(黃宗羲, 1610~1695)는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는 명대 사학(史學)의 비조(鼻祖)라고 추앙받을 만큼 명대사(明代史) 분야에서 불후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명대 유학자들의 학문적 계통과 사상을 정리ㆍ편찬한 『명유학안(明儒學案)』과 황제 전제 체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며 제도개혁론을 서술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들 수 있다. 그가 이처럼 명대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명대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멸망의 원인을 탐구하고 그것에 대한 반성과 제도적인 개혁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양명우파의 입장에서 마음을 본체이자 기(氣)로 규정하고 리(理)는 다만 기의 움직임 속에 들어있는 조리(條理)정도로 보았다. 정치적으로는 맹자의 영향을 받아 군주가 악하면 그 군주를 폐하고 새로운 군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민본사상을 더욱 강화하였고, 주자학에서처럼 군주의 도덕성에 의지하는 통치를 비판하고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을 중시했다.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젊은 시절 반청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공리공담을 일삼는 데 환멸을 느끼고 경세치용의 실학에 뜻을 두었다. 그의 학문은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중심에 두고 지리ㆍ풍속ㆍ제도ㆍ문물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포괄하고 있었다. 정밀한 연구를 위해서 널리 증거를 수집하는 박학과 실증을 중시했는데, 특히 민생과 실용을 염두에 두고 경학의 참뜻[治國平天下]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그 기초가 되는 음운학과 문자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니, 그가 쓴 『음학오서(音學五書)』는 중국 음운(音韻: 한자의 음과 운)의 변천을 밝힌 것으로 고대 언어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실증적인 학문관은 청대 고증학에 심원한 영향을 미쳐 그를 청대 고증학의 선구로 평가받게 하였다.

  왕부지(王夫之, 1619~1692)도 청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패한 후 반청운동의 기회를 엿보다가, 42세 이후에는 그 운동에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은둔하며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북송 장재의 기론(氣論)을 계승하여 실재하는 것은 오직 기(氣)뿐임을 주장하면서, 리(理)는 다만 ‘기’의 조리(條理)로서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리’나 ‘도’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기’에 비하여 ‘리’나 ‘도’를 우위에 두었던 송명 시대의 학자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또한 그는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을 강조하면서, 황제 이후 중국의 문명이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특정 제도를 만고불변의 가치로 생각하는 선왕주의 혹은 복고주의를 비판하고 문물과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왕부지의 사상은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170년 후 증국번(曾國藩) 형제에 의해 『선산유서(船山遺書)』로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청나라 말기의 학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증학의 흥기와 쇠락


  유학의 흐름은 크게 한대의 훈고학(訓學)과 송대의 성리학(性理學), 명대의 양명학(陽明學) 그리고 청대의 고증학(考證學)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고증학은 고전(古典)의 원초적인 형태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문헌이나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독특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한대의 훈고학과 비슷했기 때문에 청조(淸朝)의 한학(漢學)이라고도 불렸고, 학문의 목적을 고전 본래의 뜻을 밝히는 소박ㆍ진실에 두었으므로 박학(樸學: 질박한 학문)이라고도 하였다. 매우 치밀하게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을 밝히되 여러 다른 설(說)이 있을 때에는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증거 제시와 교감(校勘)등의 방법으로 고증(考證)하였다. 연구범위 또한 경학(經學)ㆍ사학(史學)ㆍ지리학(地理學)ㆍ금석학(金石學)ㆍ음운학(音韻學)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증학은 건륭제(乾隆帝, 1735~1795)시대 중기부터 가경제(嘉慶帝, 1796~1820) 시대에 이르러 ‘건가(乾嘉)의 학’이라 불릴 만큼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정치ㆍ사회적인 국면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통치자들은 학술과 문화를 중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미 강희제(康熙帝)때 명의 유신(遺臣)들을 모아 『명사(明史)』,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을 편찬한 바 있었던 청조에서는, 건륭제 때 이르러 『사고전서(四庫全書)』 7,100여 권과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만 권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한족 지식인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편찬 대상이 한족의 뛰어난 유산이었으므로 그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에서는 대대적으로 학술을 제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통치에 반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사상이나 글에 대해 가혹한 통제를 하는 ‘문자옥(文字獄)’과 금서(禁書)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활동은 제한되고 보다 객관적인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측면만이 공인되면서,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청초의 경세치용의 학풍과 반청의식은 점차 소멸되어갔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족 지식인들은 현실 정치에서 눈을 돌려 한대 훈고학으로의 복귀를 표방하며 실사구시의 방법과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고전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다. 청이 실시했던 편찬 사업 또한 정치ㆍ사회적인 문제와 관계없는 내용이면서 그들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고증학은 상당한 학문의 발전을 이루며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청대의 고증학은 유학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문성을 띄면서 발전하여 주목할 만한 많은 성과들을 남겼다. 그 배경에는 송ㆍ명대의 관념적ㆍ유심적(唯心的)인 학풍에 대한 배격과 탈정치적 성향, 그리고 기(氣) 철학에 바탕을 둔 객관적ㆍ실재적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고증학의 발전에 힘입어 사학ㆍ음운학ㆍ문자학 등 여러 분야의 학술들도 크게 발전해 오늘날 고대 문헌 연구에 필요한 학문적인 토대가 획기적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고증학자들은 경전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구가 되었던 고염무처럼 “도를 밝히고 나라를 구하려 한다.”는 정신과 경세치용의 목표가 없었다. 또한 현실과 괴리된 채 지나치게 고문(古文) 고자(古字)의 해독에만 매달려 경전이 지닌 본래의 뜻에서 일탈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청조 후기에 이르면 통치자의 사치와 관료들의 부패, 서양 세력의 침투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어려워지면서 정치ㆍ경제적인 위기가 사회 전반에 나타났다. 그러나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해 버린 고증학은 현실의 문제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즉 ‘박학(博學)을 통한 실천’이란 원래의 목표에서 실천은 결여되고 박학에만 머무르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학자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고서에만 파묻혀 있던 고증학을 등한시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대순회보》 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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