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儒敎) 2편 -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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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594회 댓글0건본문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王建, 재위 918~943)은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이 시기에는 불교 외에도 유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들이 큰 갈등 없이 상호 교섭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교는 특히 정치ㆍ교육적인 측면에서 그 주된 기능을 발휘하였다. 고려 초기에 유교적 정치이념을 정립하고 교육과 새로운 문화건설에 이바지 했던 그룹은 통일신라 말기에 능력 본위의 개방적인 사회를 추구했던 육두품 계열의 문인과 학자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학에 밝았으며 대부분 고려왕조에 흡수되어 새로운 사회건설에 이바지하였다.
통일신라의 유교적 전통과 학풍을 계승한 고려는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대에 이르러 호족에 짓눌렸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과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제(科擧制, 958)를 실시했다. ‘과목에 의한 선거(選擧)’라는 뜻의 과거제는 학식에 기준을 두고 인재를 선발하는 국가시험으로 유교적 정치이념의 확립이란 측면에서 문치주의(文治主義)의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 제도는 광종이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왕조 중 후주(後周)의 사신으로 왔던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당(唐)의 과거제를 모방해 만들었고 갑오개혁(1894)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에는 오경(五經) 중심의 명경과(明經科)보다 시(詩)·부(賦) 등의 사장(詞章: 시가와 문장)을 짓는 제술과(製述科)가 중시되었다. 그리고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풍조에 따라 무과(武科)는 따로 실시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고려의 국력이 약해지고 무신(武臣)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고려의 임금 중 제6대 성종(成宗, 재위 982~997)은 고려의 중흥을 이룬 수성(守成)의 군주이다. 그는 유교이념을 강력하게 추구하여 이를 정치와 제도 속에 구현한 인물이다. 그는 최승로(崔承老)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불교행사를 억제하고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화의 기틀을 확립했다. 이어 중앙집권체제를 운영할 관료를 양성하고자 지방 12목에 학교를 설치하고 수도에 대규모의 학사(學舍)를 지어 종합대학격인 국자감(國子監)을 창설하였다. 또한 송나라로부터 유교의 의식ㆍ제도와 관련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유학생을 파견하여 유교문화의 습득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성종의 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최승로의 시무책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지나친 중화주의적(中華主義的) 경향을 경계하고 민족의 특성과 주체성에 입각해 유교문화를 수용했다는 점과,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과다한 불교 행사로 인한 사회적 폐단과 경제적 낭비를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국자감 창설 이후에도 고려는 3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는 등 잇따른 변란으로 많은 서적들이 소실되고 재정난까지 겹쳐 관학의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당시 학자들 중 가장 명망이 높았던 최충(崔)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학(私學)을 세우고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학풍을 크게 일으켰다. 교육의 내용면에서는 종래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훈고학의 경향에서 벗어나 철학적ㆍ윤리적 경향을 띄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최충의 사학에 고무되어 11개의 사학이 더 생겨나게 되었으니, 이를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라 불렀다. 이들 사학은 귀족자제들의 과거급제를 위한 예비학교적 성격을 띠었고 고려 말기에 폐지되기 전까지 300년 넘게 부진한 관학을 대신해 문운(文運)을 열고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처음으로 사학을 열었던 최충을 ‘해동공자’라고 추앙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기도 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성리학의 전래와 전개
관학의 부진 속에서 사학이 흥기하긴 했지만 고려 말에 이르면 불교나 도교 등이 성행한 데 비해 유교는 너무나 쇠락하였다. 이런 현실에 대한 각성은 유교 부흥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안향(安珦)은 노(老)ㆍ불(佛)이 지나치게 허무한 공적(空寂)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유학이 학문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충렬왕 15년(1289)에 세자를 따라 연경에 갔다가 노불(老佛)에 대항할 새로운 유학인 주자의 저술을 접하고 이를 가져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안향에 이어 백이정(白正) 또한 원나라에 10년간 머물면서 성리학의 저술을 연구하고 귀국하면서 관련 서적들을 가져왔다. 성리학의 전래와 더불어 일어난 새로운 학풍은 많은 학자들이 학통을 이으면서 점차 융성해졌다.
당시에는 승려들의 세속적인 권위가 강화되고 사원(寺院)경제가 비대해져 불교계의 부패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이에 주자학을 수입한 신진 유학자들 사이에 배불론(排佛論)이 크게 대두되었는데 대체로 두 가지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다. 하나는 불교 자체는 인정하되 타락한 불교도의 비행과 그런 인물들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그룹이다. 다른 하나는 불교도의 비행뿐만 아니라 불교 자체를 부정하고 불교를 망국과 멸륜(滅倫)의 종교로 규정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가한 그룹이다. 후자에 해당하고 여말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정몽주와 정도전, 권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정몽주와 정도전은 여말선초의 격동기에 교리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입국의 이념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왕조 교체기에 대한 입장은 정반대였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그는 고려 말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대립 시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해야 한다는 화이론(華夷論)을 내세우며 친명파를 주도했다. 그의 중화(中華) 존중론은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유교 의리론(義理論)의 가장 중대한 규범이었다. 그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해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忠節)을 지키다 순사(殉死)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에 의해 충절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받았다.
그에 반해 실리와 현실을 중시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역성혁명을 부르짖으며 조선왕조의 건국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자신의 유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새 왕조의 사상적ㆍ제도적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가 수행한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 유교이념에 기반을 둔 사회제도의 틀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심기리편(心氣理篇)』과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적 전통을 개혁하기 위한 이론을 제공하여 유교이념의 정립 기반을 다졌다는 것이다.
권근(權近)은 정도전과 같은 시기에 고려왕조에서 벼슬을 하다가 조선왕조에 나아가 성리학의 체계화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정도전과 달리 비교적 순수한 입장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등을 저술해 한 시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40편의 도설[圖說: 도상(圖象)과 설명]로 구성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유학의 체계를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해 편찬된 입문서로서 초기 성리학의 이론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은 유교경전에 대해 주석한 저술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오경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규정하고 오경의 관계와 내용을 체용론(體用論)이란 독특한 시각에서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 초기 관학파와 사림파의 대결
조선왕조 건립 후 주로 관학인 성균관을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국가운영의 실무를 담당했던 이들을 관학파(官學派)라고 한다. 이들은 세종대에 설치된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세조 이후 여러 차례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공신(功臣)에 책봉된 자들이 대부분이며 조선 초기에 중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관학파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의 근본개념인 ‘리(理)’의 절대성에 대한 관념이 미약해 우주 자연을 논할 때 ‘리’보다 ‘천’을 더 많이 언급했다. 그리고 실천수양론의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정착하는 초기 단계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벽이단(闢異端: 이단을 물리침) 의식에 있어서는 불교나 도교처럼 이단으로 여겼던 사상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점이 주자학 일변도였던 사림파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관학파도 물론 성리학적 경세론(經世論)인 명분론ㆍ덕치주의ㆍ사대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이론을 현실에 고집스럽게 적용하기보다는 현실의 필요에 따라 실용적이고 탄력적인 적용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리학 이외에도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고, 성리학 서적뿐만 아니라 농서(農書)ㆍ의서(醫書)ㆍ지리서 등 실용적인 학문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외교문제에 있어서 사대(事大)라는 일정한 한계 속에서도 가능한 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관학파는 유교적 제도와 질서를 수립하는 데 노력함으로써 유교국가의 건설과 문화보급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러나 이들 또한 다른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전개에 따라 많은 문제점들을 낳았다. 왕실과 관권 중심의 지배체제는 경제적으로 성장하던 향촌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권력의 집중과 안정은 부패와 귀족화(貴族化) 경향, 가문세습적인 성향을 띄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견제하고자 15세기말 성종대에 이르면 향촌의 입장을 대변하고 주자학의 이념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려는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관학파와 대립하게 된다.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학문은 천리(天理)ㆍ인성(人性)ㆍ의리(義理) 등을 이론적으로 추구하기보다 그것의 실천을 더 중시한다고 해서 도학(道學)이라 불렸다. 의리의 실천을 중시하고 권력에 쉽게 영합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이들의 활동은 훈구(勳舊) 세력을 견제하고 문물제도 완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강력한 반발을 받게 되어 무오사화(1498년) 때 심각한 타격을 입고, 갑자사화(1504년) 때는 연산군의 광기로 양파 모두 숙청되었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 다시 관학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향촌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사림은 숙청을 당하면 퇴거했다가 학문을 심화한 뒤 다시 등장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16세기에는 양적으로 팽창한 사림파가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해 기득권을 형성한 관학파와 대립했는데 이는 시대의 요청에 사림파가 부응한 것이어서 그들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순회보》 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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