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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00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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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경원 작성일2017.02.20 조회2,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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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Robert Sullivan / 번역 이경원(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교수)


■ 본 고는 『Life』Dec. 1999, Vol.22, Issue13, Life Inc.
 pp.50~68의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먼저 나자렛 예수라고 하는 한 이상하고 매력적인 유대인 설교자의 짧지만 드라마틱한 삶으로 시작된다. 처음 예수를 만난 누군가가 그를 잊을 수 없었고 그가 죽은 후 10년 안에 그의 삶에 관한 글들이 나타나면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예수의 비범한 지혜와 자비, 사회에 관한 비판적인 생각들, 고집스러움과 운명론 등이 교차되는 시기 등을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예수의 철학은 새롭고 어려웠다. 즉 약한 자가 높아질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코트를 벗어주라는 등의 설명이다. 그 설교자의 죽음 이후 그를 따르던 사도들에 의해 설교되고 선교된 글들이 예수의 복음, 즉 신앙과 사랑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을 확산시켰다. 그러한 운동은 당시의 황제가 주목하는 데까지 성장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짓밟기로 결정하였으며 그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모세와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이전 12세기 또는 훨씬 그 이전에 살았던 모세는 헤브루인의 한 지도자였고 입법가였다. 모세5경에 따르면 성인 모세는 그의 신 여호와가 그에게 명하여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의 속박으로부터 이끌어 그들의 약속된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광경을 겪었다. 시나이 산 정상에서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모세는 그의 목표를 꿈에 그리면서 죽었다.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는 2년 혹은 3년간의 설교를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시의 율법을 넘어서는 중요한 원리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리를 말하였다. 

  2번의 천년기를 지난 후에 2억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크리스챤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이며 거의 20,000개 이상의 교파에서 신앙을 위한 놀랍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기독교는 시작 때부터 불법으로 금지되고 박해받으며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지면서 끊임없이 저항해 왔고 또 과학의 진보에 직면하여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것으로 선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동안 그 자체의 모습을 바꾸고 자신을 수정하였으며 심지어 전혀 새롭고 예측하기 힘든 방법으로 기독교를 위협해온 20세기말에서조차도 그것은 살아있다. 하버드대학의 목사인 피터 곰즈에게  “우리의 세기에 기독교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짧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생존에 능숙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이전이나 그동안 그리고 이후의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예언자와 설교자들 그리고 광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지속적인 운동을 가져다주진 못하였다. 이에 반해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 그리고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개종한 바리새인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아시아 주변국에 전파하였을 때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들었다. 로마에서의 바울의 순교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의 사도 베드로의 유사한 순교는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지니기 위해 살아남는 크리스챤의 이유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곧 크리스챤에 대한 보상이 현생에서 실현되지는 않으며 따라서 예수와 같은 운명의 순교야말로 영웅적인 크리스챤이라는 식의 종교에서 중심과제였던 것이다. 황제가 바뀌면서도 여전히 기독교 운동은 박해받았으나 그러한 운동은 계속 성장하기만 하였다.

 

■ 바울과 베드로는 누구인가?


  (현재의 터키지방) 타르소스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박해하는 바리새인으로부터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이후에 바울이 되었다. 그의 편지서한들은 기독교 신학의 정신을 대표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총애하는 제자였으며 최초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였다.
  기독교가 제국을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제국이 스스로 타락하였다. 더군다나 로마제국의 쇠퇴는 종교의 부흥에 결정적이었다. 4세기까지 기독교는 국가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나날이 힘을 얻고 있었다. 312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자신의 정복전쟁에 하나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현듯 그는 신의 의지에 의해서 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다음 해에 크리스챤에 대한 모든 탄압들이 로마에서 사라졌다.
  교회는 박해로부터 살아남았으며, 세기를 거치면서 분열, 스캔들 그리고 전쟁으로부터도 곧잘 살아남았다.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동쪽으로 갔으며, 반면에 로마교회-후에 로마 카톨릭이 되었다-는 그대로 머무르면서 기독교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때때로 그렇게 예수같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행진하기도 하였다. 소위 마녀사냥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만큼 정치적 권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종교재판은 널리 확산되어 있던 교회가 후원한 일종의 테러이자 살인에 해당한다. 세기가 거듭되면서 기독교는 헨리8세와 나폴레옹과 전쟁하곤 하였다. 기독교는 교황에 대한 암살과 교황에 의해 지시된 암살로부터도 살아남았다.(레오10세는 알퐁소 카디날 페트루치를 16세기에 목매달아 죽였다) 그것은 신학과 교리의 거대한 변화에서도 살아남았다.[교황 칼리스투스1세(재위217~222)때는 오늘날의 성직자들이 금욕과 낙태에 대해 자유로운 태도를 지녔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잘 견디고’, ‘살아남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누군가 전체적으로 기독교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운동이 수많은 시련들과 심지어 그 파격에 의해서 혜택을 입었다고 주장될 수 있다. 다양한 시기에 로마교회는 건널수 없는 간격이 형성되었던 무리들 내에서 아주 따돌려진 교파였으며, 조각 조각난 신앙들은 한편으로 기독교를 포기했던 개종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로마와 동방정교 사이의 분열은 실질적인 시기에 있어서 1054년에 공식화되었다. 16세기 초에 몇몇 ‘프로테스탄트’ 종교들을 이끌었던 종교개혁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교황의 권력과 싸우는 것이었으며, 당시 로마의 경향이 교회권력 구조 내에서 특권을 지닌 ‘사람’이 『성경』에 포함된 ‘말씀’을 지배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그것과 싸우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서유럽과 신세계 등지로 확산되는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들을 보게 되었고, 해가 거듭됨에 따라 거기서는 종교의 자유에 입각한 민주주의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 루터와 칼빈은 누구인가?


  독일인 마르틴 루터는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를 신봉하는 수도자였는데, 그는 로마 교황청의 사치와 타락에 반기를 든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1517년 교회의 대문에 붙여진 95편의 논제에 잘 반영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과 은총에 관한 이론과 사도바울의 편지에 기초를 두고 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가인 존 칼빈은 루터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며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설파했다. 칼빈주의는 독일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 16세기 후반까지 그것은 루터주의와 함께 개신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널리 확산되면서 모양을 갖추게 되었는데, 자유로운 형태를 띈 것도 있고(유니테리언 교파의 경우), 움츠린 상태로 남아있기도 하며(동방정교, 로마카톨릭의 경우), 새로운 형태를 띄거나(유타주의 몰몬교의 경우), 자리를 다시 잡는 것(영국에서 로드아일랜드로 옮겨온 침례교파의 경우 나중에는 남쪽에서 비옥한 땅을 찾았다)도 있었다. 찰스 다윈의 경우는 갈릴레오만큼이나 유사한 문제였지만 기독교의 발전을 멈출 수는 없었고, 성서역사학자 쟈로슬라브 페리칸의 말처럼 “19세기가 끝나갈 즈음 다음 세기는 진정한 ‘기독교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페리칸은 추가해서 말하기를 “정작 결과가 드러나자 20세기는 두 번의 세계전쟁을 치르고, 대부분의 역사적인 동방 기독교국가들에서 마르크스정부가 들어서며, 전례가 없는 힘으로 기독교인들의 전통적인 믿음과 역사적 확신을 뒤흔드는 도덕적 지적인 위기(나찌의 홀로코스트와 현대과학기술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을 포함하여)의 시대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그 운동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 어떻게?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의 힘은 그 메시지에 놓여있습니다.”라고 뉴욕시 유니테리안 총부 교회의 포레스트 처치 목사는 말한다.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의식을 파기하였고, 그 많은 율법들을 압축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설득력있는 철학-즉 고난에 처했을 때는 힘을 내는 메시지가 되고, 부유할 때는 자선을 베푸는-으로 인생에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해당하는 다음 세 가지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하였다. 즉 믿음, 소망, 사랑이다. 만일 뭔가 일어나고 있다면 현대사회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가치는 계속 증진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합리주의나 현실세계의 충격 등에 대해서 판단하고 고려되어지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로마대학의 기독교역사 교수인 안드레아 리카르디는 말하기를 “과거에 우리는 대다수 순응적인 기독교인이었습니다.”라고 하고, “20세기에 접어들어 거기에는 순응주의자들도 있지만, 살아있는 신앙과 살아있는 봉사의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회는 선택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태어난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보다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들은 아마도  의무감, 정의감, 예수안에서 또는 기술과 비인간성이 의미와 위안으로부터 삶을 박탈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 내에서의 믿음 등을 포함할지 모른다. 리카르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화된 세상 안에서 우리는 때때로 종교에서 안식처를 찾습니다”,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경우가 또한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은 성령강림운동(오순절 운동, Pentecostal movement)을 단순화와 진리 그리고 개인의 종교성과 영성에 대한 요구로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주의는 20세기 기독교의 두드러진 현상이다. (『성경』에서 언급한 이래로)1901년에 되살아난 그것은 주로 예배활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신비적 개념들, 기적들, 징표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종교적 경험 등을 감싸 안았다. 오늘날 그 성령강림을 부르짖는 단체는 적어도 1억3천만이나 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어떤 평가에서는 5억이상 될 것이라고도 한다.-어떤 단체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기독교분파를 대표하고 있다. 로마에 있는 미국신학대학원인 교황청 북미대학의 교장이자 역사학자인 몬시뇰 티머티 돌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00년의 기독교를 뒤돌아볼 때 우리는 항상 이 머리와 마음의 문제를 가져 왔고, 내가 생각하기에 성령강림주의는 바로 그 기본, 즉 기도의 중요성과 신앙의 힘에 대한 회귀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낡았다고 여기는 잘못된 교양 안에 근본적인 『신약성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성령강림주의가 제 3세계를 통해 확산되는 이면에는 -거기에는 또한 로마카톨릭 신앙의 전도도 두드러진 증가를 나타냈다.- 구 유럽세계의 기독교 영향력이 극적으로 감퇴하는 현상이 있었다. 성서역사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런던에서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그것은 전혀 강력한 것이 아닙니다. 서부유럽에서, 북유럽에서, 런던 등지에서. -즉 교회들은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영국에서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과는 대조적입니다.” 그 이유들은 다소 복잡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러니한 것이다. 미국이 그 자신의 나라를 정부가 충족시킬 수 없었던 요구에 종교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한 하나의 세속적인 사회로 건립한 반면에, 그 국민신분이 종교와 묶여져 있었던 국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소되어진 영성만큼 비국교도가 되었다. “오랫동안 우리의 영국 교회에서는 기도하는 토리(Tory)당을 보아왔습니다.”라고 암스트롱은 말한다. “여러분들이 기성종교에 반항하고자 했을 때 여러분들은 세속적인 이념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낙태는 합법화되고, 예배참석은 저조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 기독교의 면모가 교회의 좌석 수에 의해서 판단되어질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태평양 종교학교 교장인 윌리엄 멕켄리는 말한다. 즉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추종자라고 생각하지만 전통적인 교회들의 신자가 되기 위한 어떤 강제적인 요구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리고 아시아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나 영향력을 지닌 기독교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곳에서조차도 존재하고 있다. -즉 기독교 사상은 현재 세계문화를 형성하는 곳곳에 침투되어 있다. “기독교가 잘 한 것 중의 하나는 히브리 가르침 - 즉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 안에서 창조되어졌고, 모든 것은 평등하게 창조되어졌다-는 것을 대중화한 것입니다.”라고 프린스턴 대학의 종교학 교수이자 『신비한 복음들』의 저자인 엘리언 페걸은 말하고 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확신은 미국을 형성했습니다. 독립선언문에서는 평등은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명하지 않으며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서적 시기에 있어서의 노예들을 보십시오. 또한 기독교이전에는 의사들은 진료비를 지급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진료를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확신에서는 병든 자를 간호하고 죽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봉사였습니다. 그런 언급이 없이 우리가 병원이나 간호시설들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버드의 피터 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의 열망과 자각의 운동이 그 중심에 없었다면 어떤 시민권 운동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운동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가 보다 정의롭고 자비스러운 곳이 된 것은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문명을 어떻게 구하였는가』와 『유대인들의 선물』의 저자인 토마스 카힐은 이렇게 말하고, 급히 덧붙여 주장하기를, 아주 빈번하게도 기독교의 상층지도부는 현장에서의 기독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개인들은 그리스도가 그들 사이를 걸어다녔던 때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상층 지도부의 목사들은 오직 하나의 단체로서의 기독교 힘-예수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성취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독교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 즉 공식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공식적인 기독교는 그것의 가까운 경쟁자인 이슬람과 불교에 비해 수억이나 더 많은 머릿수를 가지고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진정으로 이러한 내용 -즉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집 없는 자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고통 받는 자를 편안하게 해주라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가에 관한 질문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그 결과들은 아주 산발적일 뿐이다.
  『신의 역사』의 저자일 뿐 아니라 이전에 수녀였던 카렌 암스트롱은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말한 궁극적인 선, 사랑과 관련하여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게 썩 좋지 못합니다. 서양기독교는 다른 신앙들에 대해서 아주 비관용적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천국에 도달해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본다면 몇몇 기독교인들은 아주 비참했을 것입니다. 즉 만일 당신이 천국의 담장을 넘어서 그 아래에서 불에 굽히고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없다면, 천국은 천국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선이고 사랑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그 이념이 아주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히틀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종교적 삶이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충격에 의해 하나의 통찰력을 주는 것으로 의미되는 그러한 역설들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암스트롱은 말하고 있다. 
  히틀러. 홀로코스트(대학살). 우리는 지금 기독교의 세 번째 천 년 지점에 서 있으면서 또한 우리는 편의상 많은 사람들이 악의 화신이라 불러왔던 이 최근의 예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신이 만든 세계에서 그러한 대학살이 가능했던가? 히틀러는 그의 죄가 용서되어 질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하는가? 역사적으로 반유대적인 사건들과 관련하여 기독교는 다소 공범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아직도 그 홀로코스트라는 용어의 정의에 대해서 동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암스트롱은 말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자혜로운 신에 관한 많고도 극히 단순한 견해들을 휩쓸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홀로코스트를 볼 때 여러분들은 신이 부재하는 위험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든 성스러움이 없어진 하나의 삶을 보게 됩니다. 아우슈비츠를 한번 보십시오. 그것은 무시무시하게도 한 세기 동안 유럽에 출몰했던 지옥에 관한 상상을 재현한 것입니다. 악취나는 공기, 조롱하는 웃음소리, 깡마른 몸들 - 그것은 독일 화가 보쉬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졌습니다. 지옥은 신학적으로 성(聖)의 부재 즉 성스러움의 완전한 상실로 정의되어 집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 즉 하나의 세속적인 현상들, 하지만 아마도 종교가 그것을 멈추게 하기엔 힘이 없는 어떤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신앙을 위해, 인간성을 위해 홀로코스트가 의미있어야만 하는 것을 흡수하기 시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코소보를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동방유럽에서의 성스러운 전쟁과 테레사 수녀의 사명을 포함하는 세계를 가진 새로운 천 년의 지점에 서 있다. 즉 역대의 교황들이 목회 지도자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같이 껴안고 있으며, 서부유럽에서 축소된 반면 러시아에서 그 자신을 다시 건설하고 아프리카로 돌진하는 기독교, 오순절 교회파들이 신의 찬미를 외치는 것, 기독교의 가치들이 조용하게 익명으로 문화들에 침투하고 개인의 의식을 빼앗는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결국은 거기에 짧지만 극적인 나자렛 예수의 삶이 있고, 그가 뒤에 남긴 강력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말씀 - 즉 어떤 법의 문자들-이 아닌 그 말씀 뒤에 놓여있는 이념을 말한다. 거기에는 가르침들과 혁명적인 언급들이 있다. 거기에는 도전하는 노력이 있다. 그는 대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더 잘하고 관대하며 용서할 것을 권한다. 그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관해서 말한다.
  여러 단체들이 생겨나고 그 중에 몇몇은 없어지며, 분파들이 그 중심부를 향하거나 그로부터 표류하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문자적인 진리 또는 영적인 충족을 추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부르짖었던 한 사람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가 도전했던 것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대순회보》 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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