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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儒敎)의 형성 -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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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3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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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孔子 : 기원전 551~479)의 자(字)는 중니(仲尼)이고 이름은 구(丘)이며,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추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중국은 주나라가 명맥만 유지한 채 강성한 제후국들이 서로 싸우는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공자의 집안은 본래 상(商 : 은나라)의 유민들로 이루어진 송(宋)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이주한 후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 공자는 젊은 시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창고지기나 목장 관리와 같은 천한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세속적인 향락을 자제하며 고대의 예(禮)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비록 몰락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공자는 어려서부터 제기(祭器)를 펼쳐놓고 놀이를 할 정도로 상나라의 제례문화에 익숙하였고, 그가 살았던 노나라는 주(周)의 문화가 잘 발달된 곳이기도 했다. 30살 무렵에 공자는 예의 전문가로서 세인들에게 관심과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노나라 군주의 후원으로 주나라에 유학하여 주례(周禮)를 더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주나라 문화의 위대성을 확신한 공자는, 노나라에 돌아온 후 주나라 문화의 총체로서 예를 연구하고 전수하는 데 전념하여 노나라 최고의 예 전문가가 되었다. 공자는 그가 가장 존경했던 주공(周公)03처럼 주의 문물과 제도를 되살려 현실정치에 실현하길 원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주나라의 문물제도는 하(夏)·은(殷)의 두 왕조를 본받았으니 빛나고도 찬란한지라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고 말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周)의 혈연 중심의 봉건 질서와 사회제도가 시간이 갈수록 쇠퇴해져 대부가 제후를, 제후가 천자를 위협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세 대부의 집안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예에서 크게 벗어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 회의를 느낀 공자는 한때 노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고자 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가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그는 노나라 수도의 서쪽에 있던 중도(中都)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이어서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로 승진하였다. 공자가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은 노나라의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들의 태도와 생활이 바로 잡혔다. 그러자 노나라의 강성을 우려한 이웃 제나라에서 모략을 꾸며 공자를 관직에서 물러나게끔 했다.
  그 뒤 공자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행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14년 동안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철환천하(轍環天下)].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이상을 펼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공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찬활동에 전념했다.
  공자는 육예(六藝)04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도 밝았기 때문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자 이전에 교육은 귀족과 관리들의 보호와 통제 하에서만 이루어졌으나, 공자는 신분과 재산에 상관없이 일반 백성들을 가르친 최초의 교사였다. 그는 배우고자 찾아온 제자들을 도덕적 자질과 실력을 갖춘 군자(君子)로 만들어 정치를 담당할 수 있게 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 중 72명이 육예에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한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귀신, 운명 따위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문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주로 언급했다. 여기서 밑바탕을 이루는 핵심사상은 바로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 공자의 말처럼 인류의 보편적 감정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달리 부모와 형제에 대한 효제(孝悌)의 마음이 중심이 되어 점차 타인에게로 확대되어 가는 사상이다. 그리고 인이 외면으로 표출된 것을 진정한 예(禮)로 보고, 종교의례나 계급적 질서관념에 머물던 예의 개념을 사람들이 행해야 할 보편적인 원리로 확대시켰다.
  또한 공자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대 경전에 대한 공헌이다. 그는 고대 문헌을 정리하여 육경(六經)이란 책을 편찬했는데, 이 책들은 후에 유가의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공자는 『논어』 「술이(述而)」편에서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 사람’이라고 했으나, 그는 단순히 전달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창적인 시각에서 고대 문화를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자의 학문과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국 각지로 전해졌고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에 의해 더욱 내용이 풍부해지고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그의 가르침이 중국과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仁)에 바탕을 둔 덕치(德治)는 비단 공자만의 이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꿈꾸었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삶의 양식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다운 삶을 추구해 온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투영되어 있다.

 

《대순회보》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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