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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儒敎)의 발전 - 맹자(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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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3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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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기원전 372~289)의 이름은 가(軻)이고 공자가 죽은 지 100여 년 뒤 추(鄒)나라(지금의 산동성 추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노나라 귀족 맹손씨(孟孫氏)이나 맹자 때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곤궁해졌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맹자가 장차 학자로서 크게 대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전한(前漢) 말의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烈女傳)』에는 이와 관련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유명한 일화가 실려 있어 잠깐 그 내용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그래서 맹자는 묘지 구덩이를 파고 곡(哭)을 하며 장례 치르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이를 본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 당장 이사를 하였는데, 하필 이사 간 곳이 시장 근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맹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이었다. 여기도 아이와 함께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한 맹자의 어머니는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맹자가 글 읽는 시늉을 하거나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아들과 함께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한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門人)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지며 스스로 공자를 이은 사람이라 자부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여러 제후국들이 자웅을 겨루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맹자는 공자처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遊說)를 하였다. 그는 사회의 혼란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백성들을 힘으로 복종시키는 패도정치(覇道政治)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참다운 군주의 길로 덕(德)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王道政治) 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후국들은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서로 이익을 다투는 상황이어서, 맹자의 사상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그도 공자처럼 70세 무렵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지으며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인 『맹자(孟子)』는 상ㆍ하로 나눠진 7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직접 쓴 부분도 있고 제자들에 의해 정리된 부분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의 중심사상은 인간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선(善)하다는 것[性善說]이다. 인간은 누구나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四端)’를 가졌기 때문에 사덕(四德: 仁, 義, 禮, 智)을 실현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도덕적인 마음 작용의 궁극적인 근거를 하늘에 두었는데, 이는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한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맹자는 도덕적인 인간 완성을 위한 수양 방법으로, 사단을 잘 기르는 일과 의로운 기운인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 욕심을 줄이는 일 등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맹자는 도덕성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면서 감각적, 생리적인 측면을 중시하던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물론 맹자도 인간에게 감각적, 생리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감각기관의 역할과 마음의 역할은 다르다고 보았다. 감각기관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小人)’이고, 그것을 넘어 마음의 본성에 따라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군자(君子)’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통치자나 통치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들어있는 선(善)의 요소를 완전히 발휘하여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길 바랐다.

  왕도정치의 시행은 도덕의 근원인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인 동시에 인간의 착한 본성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맹자는 유가의 성왕(聖王)들을 예로 들어 덕이 많은 사람만이 천명(天命)을 받들어 임금이 될 수 있고, 덕(德)의 유무는 백성들이 그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맹자의 민본주의(民本主義)는 더 나아가 군주가 잘못하면 군주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어, 훗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대순회보》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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