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儒敎)의 발전 - 순자(荀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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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587회 댓글0건본문
인간존재의 본질을 인(仁)으로 보고 덕(德)와 예(禮)를 중시했던 공자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나는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의 학통을 이어받아 인의(仁義)에 입각한 내면적 규범을 중시했던 맹자의 ‘덕치론(德治論)’이며, 다른 하나는 염옹(雍)과 자하(子夏)의 학통을 이어 외면적 규범인 예를 중시했던 순자의 ‘예치론(禮治論)’이다.
순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 조(趙)나라에서 태어난 인물로, 이름은 황(況)이고 자(字)는 경(卿)으로서, 손경(孫卿)이라고도 불렸다. 그의 생애와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원전 3세기경에 정치ㆍ학술 활동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녔던 순자는, 15세에 학자들을 잘 대우해 번창했던 제(齊)나라의 직하학파(稷下學派)으로 가서 유학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86년, 제나라 민왕이 영토 확장에 눈이 멀어 나라가 피폐해지자, 그곳에 있던 많은 학자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갔다. 순자도 이때 초나라로 떠났으나 나라가 안정을 되찾자 곧 다시 제나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60세 정도 되었을 때 순자는 그곳에서 최고의 사상가로 인정받았으며 국가의 큰 제사를 주재하는 좨주(祭酒) 벼슬을 세 번이나 지냈다. 그리고 한때 초(楚)나라의 실력자 춘신군(?~기원전 238) 밑에서 난릉(蘭陵 : 현재의 산동 창산현 난릉진)을 맡아 다스리기도 하였으나 그 뒤로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낸 책인 『순자』는 본래 323편이었으나, 한나라 때 유향(劉向, 기원전 77(?)~8(?))이 중복되는 부분들을 빼고 32편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대화체 형식의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논문식으로 되어 있는데, 표현이 소박하고 서술이 체계적이며 논증이 비교적 세밀한 것이 그 특징이다.
전국시대 유학의 거장이었던 순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인 염옹의 학설을 계승하는 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의 사상은 인(仁)ㆍ의(義)ㆍ예(禮)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시대의 발전과 전국시대 각 학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공자ㆍ맹자와는 다른 점들이 많았다. 특히 맹자학파의 유가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도가와 묵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 체계를 건립하였다.
순자의 핵심 사상은 인간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악(惡)하다는 것[性惡說]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온갖 쟁탈을 일삼던 전국시대의 혼란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는 사회가 이처럼 혼란한 이유를 이로움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본성에 인의(仁義)가 내재한다고 보았던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바탕을 둔 인간의 이기심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利)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은 사람들 간에 쟁탈을 조장하고 사양하는 법이 없게 한다. 또 외물(外物)의 자극에 오관(五官 :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반응하면 일신의 편안함과 식색(食色)을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다만 인간의 선(善)은 반성과 교육을 통한 후천적, 인위적인 노력에 의새 얻어진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록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는 했으나,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따라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점에서는 맹자와 관점이 같았다. 그는 교육과 예(禮)를 통해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을 바로 잡으면 개인과 개인은 물론 국가와 국가 사이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니, 이것이 바로 예치론(禮治論)이다. 여기서 그가 말한 ‘禮’는 유가의 도덕 가치로서의 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포괄적인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말이었다. 예를 사회의 통제수단으로 강조했던 순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33)와 이사(李斯, 기원전 ?~208)의 법가사상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순자 이전의 시대에는 하늘이 어떤 신비한 힘을 발휘하여 인간 사회의 일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에게 있어서 하늘이란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인간의 행ㆍ불행은 오직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고 보았다. 하지만 순자는 기우제나 제례와 상례, 점치는 행위 등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행위들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다스리고 삶을 장식하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순자의 사상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인간 중심의 현실적인 사고를 반영한 것이었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와 지성을 강조했던 순자의 사상은 중국 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그를 유물론(唯物論)사상의 창시자로 새롭게 평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주체로서의 인간 본성의 선함과 그 절대적 근원[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점, 예를 사회의 통제수단으로 강조했던 점은 순자 철학의 최대 약점이었다. 이로 인해 순자는 천(天)을 자연천, 상제천과 더불어 만물의 근원이며 변화법칙인 리(理)로 보았던 송명(宋明)시대 유학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 철학은 관념적인 사고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실적인 사고가 발전해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더욱 용이했을 것이다.
《대순회보》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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