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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대의 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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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6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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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經學)의 발생과 전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혼란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다양하게 전개 되었던 백가(百家)의 사상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유교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법가사상에 바탕을 둔 진(秦)나라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도량형 제도와 화폐를 단일화하여 경제를 통일시키고, 분서갱유(焚書坑儒: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땅에 묻음)를 단행하여 사상적 통일을 기했다. 그 과정에서 법가서(法家書)와 의학ㆍ복서(卜筮)ㆍ농업 등 실용성이 강한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전들이 불태워졌다. 그후 15년 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들은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

  한나라(기원전 202∼기원후 220) 초기에는 진나라가 행했던 강력한 통치가 사회의 위기를 불렀다는 반성 아래 무위(無爲)를 내세우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한 무제(武帝, 기원전 156~87)때는 왕조의 기초가 확립되고 흉노정벌 등 적극적인 정책들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도가사상을 대신할 새로운 통치원리가 요구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유교는 도덕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면서도 군주의 강력한 현실적 권력과 그것의 행사를 지지하는 이념을 지니고 있어 통치에 필요한 요건과 잘 들어맞았다.

  이때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가 무제에게 현량대책(賢良對策: 공자 이외의 학설을 모두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함)을 올렸는데, 그것이 채택됨으로써 유교의 이념이 현실정치에 반영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선포하고, 『역(易)』ㆍ『서(書)』ㆍ『시(詩)』ㆍ『예(禮)』ㆍ『춘추(春秋)』의 오경(五經)에 각각 박사(博士)를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로써 유교는 국교(國敎)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고, 이후 중국에서는 유교가 인간 교양의 핵심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한편 분서갱유 이후 진나라에서 시행되었던 금서령이 한나라 초기에 폐지됨에 따라 유교 경전의 원전(原典)을 복원하는 작업이 일어났다. 그 작업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문헌과 학자들의 기억에 의지하여 이루어졌는데, 정본(定本) 경전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관계로 다양한 학파들의 해석들이 존재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경전들은 당대 한나라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ㆍ정리되었기 때문에 금문경(今文經)이라 불렸고, 이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파를 금문학파라 하였다.

  이 시기 경학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경학자가 오경(五經) 중 특정 경서 하나만을 연구하였고, 더 나아가 하나의 경서에 대해서도 특정학파의 입장을 충실히 따랐다는 점이다. 그리고 천(天)이 인간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고대 중국인들의 믿음에 따라 자연의 여러 현상에 대해 종교적인 해석을 가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이 크게 유행하였다. 그 후 공자의 구택(舊宅) 벽 속에서 고문(古文)으로 기록된 경전들이 발견되어 전한 무제 말년에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를 고문경(古文經)이라 하였다. 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경전의 존재는 그 진위(眞僞)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한(前漢) 말부터 후한(後漢) 말까지 지속된 금ㆍ고문논쟁은 한대(漢代) 유교사회의 최대 쟁점이었다.

  금ㆍ고문논쟁은 단순히 경전의 문자가 다르다는 표면적인 사실보다 경전의 이해와 해석을 둘러싼 사상의 대립이란 본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금문학파는 공자(孔子)를 교육자ㆍ철학자ㆍ정치가로 이해하고 육경(六經)을 고대의 사료로 인정하면서도, 경전 문장 내의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그 속에 담긴 공자의 뜻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천인합일사상에 입각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음양오행설과 재이설(災異設), 참위설(讖緯說) 등의 신비사상을 흡수하여 경전을 해석하였다. 이에 비해 고문학파는 공자를 사가(史家)로 보고 그가 다룬 육경을 모두 역사적 자료로 여겼다. 그래서 육경의 순서를 시대 순으로 정하고, 경전 해석에 있어서도 문자의 훈고[訓: 자구(字句)의 해석]와 고증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하였다.

  금문파와 고문파의 대립은 학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전한 말기 고문학의 대표자인 유흠은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 8~22)나라를 세웠을 때, 이에 동조하여 고문경전인 『주례(周禮)』에 의거한 문물제도를 시행하였다. 얼마 후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후한이 다시 건국됨으로써 고문학파는 정치적으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학문적인 성격이 강한 고문파는 정치적인 부침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 성과를 꾸준히 축적하며 금문파에 대항하였다.

  당시에는 위서(緯書)의 사회적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이들의 대립에 있어서 위서사상의 유무가 크게 중시되었다. 고문파에서는 이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으나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고문학에도 위서의 내용이 있음을 강조하며 금문파와 대항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한의 경학을 대표하는 정현(鄭玄, 127~200)에 의해 금ㆍ고문 절충에 입각한 경(經)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짐으로써, 한대 유교(경학)의 종합적인 체계가 이루어졌고 금ㆍ고문논쟁도 일단락되었다.

  한대의 경학은 고금(古今)의 문자를 연구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경 해석을 통해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유교의 경전들은 정치ㆍ사회의 운용 원리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옛 성인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차원에서 종교적인 권위를 지닌 성전(聖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대 이후 노장사상의 유행과 불교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수당(隋唐)대에는 경학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그 와중에 당(唐)의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칙명에 의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함으로써 경전 해석에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경 해석에 한정적인 의미만을 부여함에 따라 경전이 가진 생명력을 감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대순회보》 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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