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대의 유교(儒敎) - 신유학(新儒學)의 발생과 북송오자(北宋五子)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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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3,104회 댓글0건본문
3백여 년 간 지속된 당나라(618~906년)가 무너지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불리는 정치ㆍ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의 조광윤(趙匡胤)이 정변을 일으켜 송(宋, 960~1279년)을 건국했다. 태조 조광윤은 번진을폐지하고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시행, 송나라 3백년의 기반을 닦았다. 그 중 960년부터 1126년까지를 북송(北宋)이라 부르고, 북방지역을 금(金)나라에 빼앗겨 양자강 이남으로 남하한 후를 남송(南宋, 1127~1279)이라 부른다.
북송 초기, 황제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변란을 방지하고자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억제하는 문교진흥(文敎振興)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당송 교체기에 이르러 유명무실해졌던 과거제도를 정비하여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유ㆍ불ㆍ도 삼교(三敎)를 모두 존중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선발된 인재들은 유교적 교양을 지닌 신진사대부였다. 이들은 당시에 번성하던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이론에 대항하는 가운데 기존의 유교가 지닌 이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불교와 도교의 핵심적인 사상을 흡수하여 새로운 활력을 모색하고 있었다.
북송 중기에 이르면 다방면에서 유교부흥운동이 일어난다. 먼저 문체에서는 고문(古文)운동이 일어나 당시에 화려했던 문장을 지양하고 소박한 고문에 담긴 내용에 더 충실하고자 했다. 이들은 문체의 혁신을 통해 현실적인 유용성을 지닌 성현의 가르침을 문장에 담고자 했다. 사학가들은 『춘추(春秋)』의 전통을 이어받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모으는 것보다 도리(道理)에 입각해 시비선악을 가리는 것을 더 중요한 임무라 여겼다. 경학 방면에서는 한당(漢唐) 이래 경전의 문구에만 매달려온 전통을 버리고 경전에 담긴 뜻을 밝히는 데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정통론과 관련해 무엇이 성인의 도(道)이며 어떤 계통을 통해 그것이 전해졌는가 하는 도통론(道統論)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내용의 유학인 신유학(新儒學: 일명 성리학)이 등장하게 된다. 신유학의 창시자들은 유학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들의 지적인 활동은 불교와 도교의 교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외래 사상인 불교와 도교의 번성에 위기를 느낀 그들은, 그 영향을 떨쳐버리고 공맹(孔孟)의 유학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우주론에 대항하는 새로운 우주론을 만들고, 유가의 윤리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천도(天道)가 어떻게 인성(人性)에 구현되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 시기 성리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북송오자(北宋五子)’라고 불리는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이다. 이들은 사람과 사물의 본성[性]과 우주 만물의 이치[理]에 대한 문제를 깊이 탐구하였으므로 그들의 학문을 성리학(性理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집대성되는 주자학(朱子學)의 선구가 되었다. 북송오자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이 시기 신유학이 가지는 사상적 특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주돈이(周敦, 1017~1073)는 자(子)를 무숙(茂叔)이라 하고 호(號)를 염계(濂溪)라 하며 그가 세운 학파를 염학(濂學)이라 한다. 주희가 그를 공자와 맹자 이후 천사백 년 동안이나 끊어졌던 성인의 도를 이은 인물로 평한 이래로, 주돈이는 북송 성리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가 있다. 그 중 『태극도설』은 송나라 초의 도사 진단(陳, 871~989)의 무극도(無極圖)에서 착안하여 『주역(周易)』을 바탕으로 태극도를 해설한 것인데, 신유학의 세계관과 우주관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먼저 무극(無極)·태극(太極)으로부터 음양과 오행을 거쳐 만물이 생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뒤 그에 대한 해설을 가하였다. 이것은 우주 만물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힌 일종의 우주생성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태극의 개념은 『주역』 「계사전」에서, 무극의 개념은 노자 『도덕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훗날 무극(無極)이란 개념의 실재성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여기에 오행설의 개념이 더해져 주돈이의 우주론이 형성되었다. 또한 그는 음양 이기(二氣)로 교감을 이룬 것 중 사람만이 우주에서 가장 빼어난 기(氣)를 받았는데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극치에 이른 존재를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이처럼 『태극도설』은 우주의 생성 변화와 인간의 윤리 도덕을 혼연 일치시켜, 자연과 인륜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통서』에서 주돈이가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법으로 제시한 것은, 인간 본래의 상태인 고요함을 유지해서 무욕(無欲)에 도달하는 주정(主靜)이었다. 그리고 『중용(中庸)』에 나오는 성(誠)의 개념도 중시했는데, 그는 誠을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의 근본이며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보았다. 즉 그에게 있어 誠은 유교적 도덕을 실천하기 위한 궁극적인 원천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주돈이의 수양론은 유가의 중용, 도가의 무욕청정(無欲淸淨), 불가의 적정(寂靜)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
소옹(邵雍, 1011~1077)의 자는 요부(堯夫)이고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이며 죽은 후에 강절(康節)이란 시호가 내려져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소강절이라 불렀다. 정치적으로는 왕안석의 변법에 반대하여 구법당과 친교하면서 시정(市井)의 학자로 평생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종일토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곤 해서 낙양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
젊은 시절 사방을 주유하다가 도가의 인물인 이지재(李之才)에게서 상수학(象數學)을 전수받아 『주역』을 상[象: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이면에 나타나는 조짐이나 낌새]과 수(數)로 풀이하였다. 당시에는 근 700년 가까이 왕필(王弼, 226~249)의 영향으로 역의 상수(象數)을 무시하고 의리(義理)만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소옹은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象으로 표현할 수 있고, 數의 계산으로도 예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상수(象數)로 8괘와 64괘의 순서와 방위를 나타내는 선천도(先天圖)을 창안하여 우주 발생의 도식(圖式: 그림으로 그린 양식)을 확립했다. 소옹에 따르면 모든 만물은 하나의 태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즉, 태극(1)→음양(2)→사상(4)→팔괘(8)…로 이어지는 분화과정을 거쳐 세상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인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치(G.W.Leibniz, 1646~1716년)가 이에서 착안해 2진법을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옹의 대표적인 저술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인데, 대체로 『역경』에 바탕을 두고 우주와 세상의 운행과정을 상과 수로 풀이 해석한 책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이론은 시간의 측면에서 끝없이 진행되어 가는 우주 운행의 시종(始終)과 성쇠(盛衰)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그에 따르면 1元은 하나의 우주년으로 이것을 주기로 낡은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전개된다고 한다. 또한 인식론을 다룬 『관물내외편(觀物內外編)』에서는 관물(觀物)을 중요한 개념으로 강조하였다. 관물이란 사물을 마음이나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리(理)를 통해 그 실상(實像)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모든 차별과 구별이 사라진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볼 수 있어 만물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소옹의 사상은 상수를 중심으로 도교적인 색채가 짙고 난해하여 후대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우주의 본원(本源)에 깔려있는 원리가 우주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그의 사상은 신유학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희는 소옹의 역학이 공자의 역학을 계승한 것으로 규정, 그의 학문을 “우주를 포괄하고 옛날과 지금을 시종일관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대순회보》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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