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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대의 유교(儒敎) -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자(朱子)의 생애와 사상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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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2,4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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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아들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보아라, 저것이 바로 하늘 천(天)이란다.”라고 하자 그의 아들이, “그럼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어요?”라고 되물어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북송(北宋) 시대에 일어난 신유학과 그 이전의 유학은 물론 문학, 사학(史學), 자연학 등 다방면의 학술과 사상을 자신의 사상체계 속에 집대성시켜 성리학(일명 주자학(朱子學))을 완성한 주희(朱熹)이다.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와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등이다. 남송 시대 복건성(福建省) 출신으로 고종(高宗) 건염 4년(1130년)에 태어나 영종(寧宗) 경원 6년(1200년)까지 살았다. 그의 사후 문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인 ‘문(文)’이 내려졌으므로 주문공(朱文公)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학식과 인품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주자(朱子)라고 일컬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남송(南宋) 초기와 중기로서, 금(金)나라에 의해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온 고종이 항주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한 직후 계속적인 금의 압박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당시 남송의 조정에서는 금에 대한 화친(和親)과 주전(主戰)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주자의 아버지인 주송(朱松)은 금과의 화친에 반대하다가 복건성 우계현위(尤溪縣慰)로 좌천된 후, 이를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때 주자가 태어났다.

  주자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꿈을 지닌 소년이었다. 5살에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운 주자는, 7·8세쯤엔 『효경(孝經)』을 일독(一讀)하고 그 책의 표지에 “이와 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썼다. 또 언젠가 친구들이 다리 옆에서 놀고 있을 때, 주자만이 단정히 앉아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팔괘(八卦)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10여 살 되던 해에는 『맹자』를 읽고 “성인은 나와 동류이다.[聖人與我同類者]”라는 말씀에 감동하여 자신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으리란 부푼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가 14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의 가족들은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복건성 북부 숭안현(崇安縣)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가세(家勢)는 풍족한 편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주자는, 정학(程學: 정호·정이의 학문)을 익힌 세 스승 밑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들은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여타 학문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당시 주자는 유교의 경전은 물론 선(禪)과 노장(老莊), 문학, 초사(楚辭), 병법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18세에 주자는 건주에서 실시된 해시(解試: 지방 예비시험)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본시험을 치러 330명 중 278등으로 과거에 합격했다. 이처럼 그의 성적이 저조했던 것은, 그의 학문이 과거를 위한 문장의 암기나 색채가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금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득세한 상황에서 대금 강경책을 주장하는 논지(論旨)의 답안이 좋은 점수를 얻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주자가 과거를 본 것은, 경제적인 자립과 홀로 남으신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서 였다.

  그로부터 5년 후, 주자는 천주(泉州) 동안현 주부(主簿)에 배정되어 임지로 가던 중 정이(程)의 삼대 제자인 이동(李侗, 1093~1163, 연평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후 몇 차례의 만남을 통해 주자는 연평으로부터 북송 이학(理學)과 심법(心法)에 관한 깊은 통찰을 전수받게 된다. 이로 인해 주자는 선(禪)과 노장(老莊)을 비롯한 다른 학문에서 벗어나 유학의 본령(本領)인 도학(道學)에 매진할 수 있었다. 훗날 주자가 죽림정사를 세우고 북송의 제현들을 배향했을 때 돌아가신 스승 이연평도 함께 모셨던 일은 결코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안현에 부임한 주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수행해 나갔다. 세금을 징수할 때는 현(縣)의 여러 곳에 고시(告示)하여 체납하는 사람이 없도록 했고 상인이나 재력가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매수하여 경작권마저 빼앗아버리는 사태를 철저히 막았다. 그리고 현의 학교를 정비하고 주민들 중 우수한 자를 학생으로 삼아 직접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가르쳤다. 또한 경사각(經史閣)이라는 도서관을 세우고 현에 남아있던 책과 못쓰게 된 책을 다시 복구해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예(禮)에 입각해 풍속을 교정하고 사회의 혼란을 방지코자 법률을 제정하는 등 동안현의 안정과 문화, 교육의 진흥에 진력(盡力)하였다.

  주자는 28세에 동안현 주부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약 20년간 현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록(祠祿)을 받는 사관(祠官)의 직책에 있으면서 학문연구와 저술, 강학(講學) 및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은거하고 있으면서도 경세(經世)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모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때로 주자는 황제에게 봉사(封事)을 올려 북방 정책과 사회기강 확립, 민생 안정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곤 했다. 34세 되던 해에 주자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 임안에 머물고 있을 때, 남헌(南軒) 장식(張, 1133~1180)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실제로 대면한 것은 두 차례에 불과하지만 남헌이 죽기 전까지 약 20년간 서신(書信) 왕래를 지속했다. 주자는 남헌과의 교류를 계기로 연평의 정적(靜的)인 존양(存養: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름) 공부에서 남헌의 동적(動的)인 찰식(察識: 살펴서 깨달음) 공부로 전환할 만큼 강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다가 그가 40세 때 채원정(蔡元定: 채침(蔡沈)의 아버지)과의 문답을 계기로 남헌의 사상이 동(動)에 치우쳐 있음을 깨닫고 다시 스승의 사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주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연평의 사상을 바탕으로 남헌의 사상을 접목시켜 성품을 기르는, 경(敬)을 위주로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居敬窮理], 새로운 학문의 방법론를 정립해 나갔다.

  40대에도 주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록관으로 있으면서 저술과 강학을 계속하였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이 시기에 그 골격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사서(四書)를 비롯한 그의 주요 저술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여졌을 만큼 학문적으로 가장 충실한 기간이었다. 이 때 그는 식견이 넓었던 친구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다. 『근사록』은 북송의 사자(四子: 주렴계,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의 저술이나 어록에서 발췌한 문장을 항목별로 정리한 도학의 입문서로서 지금도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서적이다.

  저술을 완성한 후 주자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신주(강서성 상요시) 아호서원(鵝湖書院)에서 같은 도학의 계승자이면서도 학문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육구연(陸九淵, 1139~1192, 호는 상산옹(象山翁)) 형제와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3일 동안 학문을 논하면서 각자의 소신을 밝혔는데 논의의 쟁점은 주로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육씨 형제는 먼저 사람의 마음에 이(理)가 있으므로 자신의 본심(本心)을 분명하게 밝힌 후 경서(經書)를 읽고 사물의 이치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주자는 옛 성현의 언행이 기록된 경서를 넓게 읽고 난 후 그것을 집약함으로써 이치에 통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육씨 형제는 주자의 방법이 너무 지리(支離: 흩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음)하다고 비판했고, 주자는 육씨 형제의 생각이 너무 간략하여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고 반박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 후 주자는 육구연과 한 차례 더 논쟁(무극이태극 논쟁)을 벌였는데 이처럼 그는 다른 학자들과 부딪치면서 자신의 사상적 윤곽을 더욱 뚜렷하게 정립시켜 나갔다.

  한편, 주자는 평생토록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황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면서 학문과 저술, 강학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49세인 1179년에는 가까운 지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근 20년 만에 남강군 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2년간 재직하면서 피폐한 지역의 감세(減稅)를 요청하고 장강의 제방을 수축했으며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는 그 대책마련에 고심하였다. 그리고 주민교화를 위해 북송의 제현(諸賢)들과 그 지역출신 인사들의 사당을 세웠으며, 백록동 서원을 재건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남강군의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주자는, 재임 중에 그가 시행했던 기근대책이 높이 평가되어 53세에는 다시 기아에 허덕이던 절동(折東) 지역에 파견되었다. 이전과 달리 주자는 백성들의 참상을 염려하여 지체 없이 임지로 달려가 관할지역의 피해현황을 파악하고 가뭄과 수해에 따른 기근대책을 마련하고자 분주했다. 그의 노력으로 백성들의 식량사정은 어느 정도 나아졌으나, 식량부족과 역병의 창궐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었다. 재임 중에 그는 기근에 대비키 위한 사창제도의 실시를 조정에 건의하였고 관내를 순시하여 조세(租稅)를 불법으로 징수하거나 공금을 횡령한 자들을 탄핵했다. 이들 중에는 가까운 인척이 조정의 실력자인 사람도 있어, 조정에서 주자와 그의 학문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절동에서 귀향한 주자는 공무를 멀리하고 『역학계몽(易學啓蒙)』·『효경간오(孝經刊誤)』·『시집전(詩集傳)』 등을 저술하며 사서(四書)에서 오경(五經)으로 연구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리고 무이산 계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학문 연구와 진흥에 온 힘을 기울이니 그의 제자들이 천하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이후 몇 차례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그가 중앙 관직에 진출한 것은 그의 나이 64세 되던 해였다. 새로 등극한 영종(寧宗)의 측근이 된 주자는 황제 스스로 유학에 힘쓸 것과 인사·행정·국방 등에 관한 의견을 올렸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종에게 학문을 강의했다. 그러나 그 기간도 잠시, 영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권신(權臣)들이 직언을 서슴지 않는 주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40일 만에 그를 파면시켰다.

  그리고 얼마 후 정쟁(政爭)의 와중에 도학이 위학(僞學)으로 몰리면서 성리학자들이 정부 요직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책도 모두 금기시 되었다. ‘경원위학(慶元僞學)의 금(禁)’으로 알려진 가혹한 탄압 속에도 주자는 강학과 저술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가까운 지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제자들 또한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갔다. 거기에다 40대 후반부터 시작된 각종 질병의 심화로 고통 받아야 했으니 그의 만년은 여간 불우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일생 동안 자신이 쌓아온 학문의 맥이 끊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예서(禮書)』를 편찬하고 『한문고이(韓文考異)』를 교정했으며, 69세에는 『초사집주(楚辭集註)』를 완성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대학』 「성의장(誠意章)」과 『초사』 한 단락을 고쳤으며 문인(門人)들에 대한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1200년, 71세를 일기로 주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을 접한 지인들과 제자들은 위학의 금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모여 단(壇)을 세우고 곡례(哭禮)를 행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주자가 사망한 지 2년 후에 위학의 금이 해제되고 8년 후에는 ‘문(文)’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의 품관이나 관직의 추증이 잇달아 신국공(信國公), 휘국공(徽國公) 등의 지위에도 추대되었다. 이후 ‘주자학(朱子學)’이라 불리는 그의 학문은 원·명·청대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관학(官學)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나라에 보급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순회보》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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