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의 길’로서의 유대교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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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규태 작성일2017.02.20 조회2,798회 댓글0건본문
글 박규태(한양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개혁 유대교 : 19세기 중엽 주로 독일과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유대교의 개혁주의 운동은 무엇보다 전통적 의식과 의례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한편 성서와 탈무드의 경직된 권위에 도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웃 시민들과의 연대감을 위해 기도할 때 히브리어 대신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라 말을 사용했으며, 음식물에 관한 율법 등도 무시했다. 또한 회당예배를 현대화하여 오르간을 도입하는가 하면, 남녀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좌석을 배치함으로써 예배 시 성별을 구분했던 종전의 관습을 폐지했다. 심지어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그리스도교의 주일 즉 일요일로 바꾸는 문제가 거론된 적도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개혁주의자들은 중세기의 고립과 격리를 넘어서서 현대세계에 적응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정통 유대교 : 정통주의자들은 랍비 시대 이후 히브리성서와 탈무드의 정신에 따라 경건과 성실 그리고 종교적 열정을 지닌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그런 <할라카>적 삶의 방식을 떠나게 되면 이민족에게 쉽게 동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혁 유대교와 세속문화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오늘날 이런 정통 유대교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이는 유대 전통이 지닌 풍부함과 역사적 교훈이 여전히 대다수의 현대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주의 유대교 : 보수주의자들은 히브리성서와 탈무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정통주의자들보다는 더 융통성이 있으며 개혁주의자들보다는 더 보수적이다. 그러니까 개혁 유대교가 좌파이고 정통 유대교가 우파라면 보수주의 유대교는 중도파쯤 될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통에 내포된 적극적인 요소들을 재발견하고자 시도하는 이 보수주의자들은 랍비적 유대교 정신의 본질이 예언자적 전통을 독특한 방식으로 각 개인의 삶 안에 되살아나게 하는 재해석의 방법론을 통해 성서의 가르침을 당대의 삶에 창조적으로 적응시키는 능력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상과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세 흐름은 공통점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 및 계약사상과 같은 전통적인 신학적 개념에 대한 입장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나아가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기본적으로 ‘거룩한 삶’의 이상에 있어 여전히 많은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다. 그런 ‘거룩한 삶’의 이상은 특히 안식일의 준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계절축제 및 출생의례, 성년식, 결혼식, 장례식과 같은 각종 통과의례에 이르기까지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되는 의례에서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의례들은 고대적 원형을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문화자원이라 할 수 있다.
⊙ 유대교의 의례
거룩한 하루의 기도 :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쉐마’라든가 ‘아미다 기도문’ 혹은 토라(모세 오경)나 예언서를 낭송한다. 여기서 쉐마란 “너 이스라엘아,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신명기 6:4-9)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기도문으로, 유대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기본신조 또는 전형적인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아미다 기도문은 유대 기도집인 <<시두르>>에 실려있는 공동기도문으로 서서 조용히 암송하는 봉헌기도의 성격을 지니는데, 그 중 ‘18가지 축복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에 비견될 만하다.
특히 창조자 하느님에 대한 찬양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기원하는 아침기도는 쉐마의 선포에 이어 출애굽 사건과 시나이산에서의 사건이 기록된 성서 낭송을 포함하여 구속자 하느님에 대한 찬미 및 종말론적 기원으로 끝난다. 다시 말해 경건한 유대인의 하루는 태초의 창조 사건과 출애굽에서 나타난 구속사건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토라(계명 혹은 율법)를 받은 사건 등이 일상을 뚫고 침투해 들어와 거룩한 시간으로 재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기도자는 ‘탈리트’와 ‘테필린’을 착용한다. 여기서 탈리트는 장방형의 겉옷으로서 사방에 달린 술장식이 특징적이다. 또한 테필린은 원래 고대 의상의 일부였다가 후에 의례 때 사용하게 된 성물함으로, 두 개의 조그만 장방형 상자로 되어 있고 그 안에는 길고 가느다란 가죽끈과 토라가 기록된 작은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거룩한 주간과 안식일 : 히브리어로 ‘샤바트’라 불리는 안식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로 여겨지는 욤키푸르를 제외하고는 유대교의 모든 축일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안식일의 의미는 첫째,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고, 둘째, 출애굽 사건을 상기함으로써 인간 역사에 개입하는 구속자 하느님을 기억하는 데에 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해가 지자마자 가정에 모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특별히 준비된 안식일 의상과 모자를 착용하고 가족들과 함께 촛불을 밝힌다. 가장은 손을 씻은 후 가족들에게 ‘할라’라는 안식일 빵을 나누어주며 ‘키두쉬’라 불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키두쉬는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안식일이나 축일이 시작될 때 포도주잔으로 축성하는 의식을 말한다. 안식일 당일인 다음날 토요일 오전에는 가족들이 함께 회당 예배에 참석한 후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토라에 대해 연구하며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일몰이 가까워오면 안식일을 마감하는 의식인 ‘하브달라’를 거행한다. 전통적인 유대인이라면 이런 안식일에는 전화를 받거나 자동차를 타는 일조차 삼갈 정도로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이 안식일이야말로 2천여 년 동안 이민족 틈에서 나라 잃은 유랑민으로 방랑하면서도 유대공동체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해 준 가장 견고한 안전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거룩한 한 해와 계절축제 : 신년맞이 대축제인 ‘로쉬 하샤나’, 이 로쉬 하샤나 기간중 마지막 날 24시간 내내 금식하는 ‘욤 키푸르’(속죄일), 욤 키푸르가 지난 뒤 닷새째 되는 날 초막을 짓고 거기서 지내며 광야생활 40년간 선조들을 지켜주었던 구속자 하느님을 기억하는 ‘수코트’(초막절), 이 수코트 절기가 끝난 다음날 회당의 성궤에서 토라 두루마리를 꺼내 행렬하는 ‘심하트 토라’(기쁨의 토라절), 기원전 165년 우상숭배를 강요한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를 몰아낸 후 마카베우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8일간 봉헌의식을 거행했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일인 ‘하누카’(봉헌절),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뒤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잔류했던 유대인들이 당시의 반유대주의적 세력에게 멸절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왕비가 되었던 유대인 에스델과 그녀의 친척인 모르드개에 의해 극적으로 민족적 재난을 피했다는 히브리 성서 <에스델서>의 설화로부터 유래된 ‘부림절’,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면서 문설주에 짐승의 피를 바르고 누룩 없이 만든 무교병을 쓴나물과 함께 나누어 먹는 ‘페사크’(무교절),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토라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샤부오트’(칠칠절),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기억하면서 회당에 모여 히브리 성서 <애가>를 낭송하며 금식하는 ‘아브달 9일제’ 등이 있다. 이 계절축제들은 대부분 원래 고대 근동지방의 농경축제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대교 특유의 역사적 의미가 첨가된 것으로서, 오늘날 행해지는 의례 형태는 주로 중세 이후에 그 관행이 확립된 것들이다.
거룩한 일생의 통과의례 : 유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남아인 경우 출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 의식을 행하고 히브리어 이름을 지어준다. 이 때 열 명 이상의 유대인 성인남자가 입회하도록 되어 있다. 유대법상 모친이 유대인이기만 하면 출생과 더불어 인종적으로 이미 유대인으로 인정받지만, 이와 더불어 할례를 받아야 비로소 계약의 백성으로 승인받는다. 부친만 유대인인 경우에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인종적으로 유대인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여아인 경우에는 출생 후 첫 번째 안식일날 회당 예배 도중 아기의 출생을 축복하는 간단한 의식이 행해지고 히브리어 이름을 지어준다.
할례를 받은 남아는 13세가 되면 계명 준수를 맹세하는 의식을 치룬다. 그럼으로써 그는 유대 공동체의 한 성원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며, 회당에서 테필린을 착용하고 토라를 낭송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년식이다. 한편 유대 결혼의식의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은 결혼기도문에 명백히 드러난다.
“…당신이 에덴 동산에서 첫 번째 남자와 여자에게 그랬듯이 이 사랑하는 한 쌍에게 완전한 기쁨을 허락하소서…지금은 파괴된 유다의 성읍과 예루살렘 시가에 즐거움과 환희의 소리가,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그리고 이 한 쌍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의 소리가 들려 나오게 하소서.”
주례자는 포도주 한 잔을 축성하면서 7가지 축복을 선포하는데, 그 중 전반부는 우주만물과 남녀 인간을 지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내용이고, 후반부에는 신부로서의 시온과 신랑으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결합될 것을 꿈꾸는 유대공동체의 오래된 소망이 짙게 반영되어 나온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가장 기쁜 날인 결혼식 때에도 성전을 파괴당하고 유랑하는 민족으로 지냈던 오랜 세월의 슬픔을 잊지 않으려 한다.
죽음 앞에서 : 죽음을 앞둔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고백한다고 한다.
“…제가 죽어야만 한다면 저의 죽음이 곧 당신 앞에 지은 저의 모든 악행과 범죄에 대한 보속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를 당신의 날개 안에 품어 주소서. 다가올 세상에 저의 몫을 허락하소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를 지켜주시는 이여, 저의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주소서.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오니 저를 구원하소서. 오, 진리의 하느님이시여.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의 삶은 쉐마의 선포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가족들은 시신을 땅에 묻은 후 마지막으로 카디쉬 즉 하느님의 이름을 축성하는 종말론적 기도를 암송하면서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를 기원한다. 결국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의 삶은 특정 개인만의 삶이 아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유대공동체의 집단적인 기억과 꿈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집단적인 기억은 태초의 창조사건, 출애굽으로 상징되는 구속사건, 그리고 시나이산에서 계명을 받은 사건 등에 대한 기억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의 모든 의례체계를 통해 지금도 면면이 살아 숨쉬며 유대인들의 포기할 수 없는 꿈으로 다시 피어나고 또 피어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러 측면에서 독특한 의의를 지닌 유대교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현대 유대인들에게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세속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과거 솔로몬의 왕국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전통적 유대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라기보다는 여전히 유대교적 이상 즉 ‘토라의 길’의 실현에 있다고 보여진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싸고 이들의 종교적 신념이 폐쇄적이고 자기방어적인 민족주의(시오니즘)에 고착되느냐 아니면 보다 개방적인 평화에의 길로 이어지느냐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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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박규태 : 서울대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학에서 일본종교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일본정신의 풍경’,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히메까지’, ‘일본을 강하게 만든 문화코드’(공저), ‘일본의 이해’(공저), ‘종교읽기의 자유’(공저), ‘종교 다시 읽기’(공저), ‘세계종교사’(공저) 등 여러 책이 있다.
《대순회보》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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