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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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항제 작성일2017.02.20 조회3,912회 댓글0건본문
김항제 (선문대학교 통일신학과 교수)
1. 시작하며
2. 창시자 문선명 선생
3. 통일교 주요교리
4. 통일교의 신조, 가정맹세
5. 통일교의 축복결혼
6. 통일교의 의례와 명절
7. 통일운동(Unification Movements)
8. 끝내며
1. 시작하며
2012년은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선생의 탄생 92년, 통일교 창교 58년, 통일교력 천기(天基) 3년,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선생의 영계 입적 성화(聖和) 원년이다. 따라서 통일교의 역사는 문선명 선생과 함께 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그 후계자들이 엮어가는 종교공동체로서의 통일교 역사는 시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시자 문선명 선생의 사상과 생애는 통일교인의 한사람이기는 해도 필설로 헤아려보기란 매우 어렵다. 문선명 선생의 사상은 깊이로 다가서기가 쉽지 않으며 생애는 넓이로 마주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생의 일관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일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나 이웃되는 종교인들을 위해 힘을 다해 소개하고자 한다.
2. 창시자 문선명 선생
2-1 성탄과 소명 그리고 깨달음
문선명 선생의 간략한 가계는 이렇다. 문경유(文慶裕) 선생을 부친으로 김경계(金慶繼) 여사를 모친으로 하여 태어난 8남매 중 차남으로 탄생했다. 선생은 1920년 음력 1월 6일에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平安北道 定州郡 德彦面 上思里) 2221번지에서 출생했으며 상사리는 서해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농촌 마을로서 당시로서는 부촌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 간의 친목이 매우 돈독한 마을이었다. 원래 선생의 조부(祖父) 때에는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3형제 중 막내 동생이 기독교 목사로서 항일독립운동에 평생을 앞장서면서 이 종조부와 선생의 할아버지가 뜻을 모아 전 재산을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비밀리에 바쳤기 때문에 선생의 성장기에는 가계를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문선명 선생은 16세 되던 해 4월 17일 부활절 날 아침 기도 가운데 홀연히 예수께서 나타나 인류 구원사업에 대한 엄중한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문선명 선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한 뜻, 곧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위하여 남이 모르는 공의의 노정을 걷게 되었다.
문선명 선생의 종교적 관심은 궁극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고난과 해방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외적으로 불어 닥친 민족의 고난을 세계의 불행으로 깨닫기 시작했고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창조이상과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따라서 선생은 인간과 세상에 만연한 죄악의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참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정말 인류의 구원을 위한 큰 깨달음이었다.
2-2 공생애의 출발과 세계기독교신령협회의 창립
일본 유학을 마친 문선명 선생은 귀국 후 인생의 근본 원리, 인간 구원의 근본 진리를 찾으신 후 영적 순례를 하던 중 1946년 6월 2일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일컫는 “평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길을 재촉하여 평양으로 갔으며 경창리에 있는 한 신도의 집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펴게 되었다. 계시를 받거나 신앙동지의 인도를 받아 식구(교인) 20여 명이 연결되어 최초의 개척교회이자 최초의 가정교회가 그 출범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명 선생이 집례하는 집회의 계속되는 발전에 기독교회의 박해가 뒤따랐다. 그들의 고소에 의해 8월 2일 평양 대동보안서에 구속되었는데 소명에 따라 남한에서 올라온 선생은 공민증이 없어 간첩임에 틀림없다는 공산당국의 혐의를 받았다. 혹독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러 풀려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가호로 기사회생했다. 그 후 북한의 종교말살 정책으로 1948년 2월 22일 ‘사회질서 문란죄’로 다시 구속되어 5년형의 언도를 받고 흥남감옥(공식명칭은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문선명 선생은 당시 최악의 수형 환경을 극복하는 데 정성을 들여 해마다 모범수 표창을 받았으며 수인들을 제자로 삼기도 했고 노동지옥으로 불리는 그 곳에서 영어의 몸으로 6·25 동란을 맞게 되었다. 동란 중 낙동강까지 진격해 온 북한군에 대한 유엔군의 반격으로 1950년 10월 14일 선생님은 기적적으로 출감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후 선생은 평양을 거쳐 1950년 12월 4일 옥중 제자와 청년식구 두 사람과 함께 남하했다. 1951년 1월 27일 부산의 초량역에 도착한 문선명 선생은 노동자수용소에 들어가 부두노동을 하면서 지내기도 하셨으며, 피난민촌 낯선 집 처마 밑에 은신하며 지낸 일도 있었고, 여기 저기 떠돌며 밥을 얻어먹는 일도 겪었다. 1951년 5월부터 후일 『원리강론』의 모본이 되는 진리의 책 『원리원본』의 집필에 열중하였다. 범일동(현재 범 6동 1513번지)에 단칸방의 토담집을 손수 짓고 8월부터 제자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집필을 시작한지 약 1년 만인 이듬해 5월 10일 오전에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를 밝힌 『원리원본』의 집필을 끝냈다.
그 후 상경한 문선명 선생은 1954년 5월 1일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였다. 새로운 진리의 선포와 함께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은 늘어갔으며 이 와중에 교수와 학생 20여 명이 퇴직 또는 퇴학을 당하는 소위 ‘이대ㆍ연대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내노라하는 지성인들이 문선명 선생의 제자가 되었으나 기성 기독교회의 박해로 드디어 7월 4일 경찰에 연행되었고 3개월 후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선생은 무죄 석방된 후 1955년 10월 7일 교회를 장충동에서 용산구 청파동으로 이전하고 더욱 활발히 활동을 전개해 나갈 채비를 갖추었으며, 이 청파동교회는 첫 번째의 협회 소유 건물로서 본부교회로 삼았다. 1957년 7월부터 일제히 시작된 하계 및 동계 개척전도에 힘입어 국내전도의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동시에 문선명 선생은 해외선교도 시작하였다. 1958년 당시 한국과는 미수교국이었던 일본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통일교로서는 최초의 해외선교였다. 뿐만 아니라 1959년에는 선교사가 미국으로 파송되어 본격적인 세계 선교가 시작되었다.
2-3 천주성혼식과 민족과 세계구원섭리
문선명 선생은 성탄 40주년의 해인 1960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한학자 여사와 마침내 하늘과 땅의 천주적 성혼식(天宙的 聖婚式)을 거행하였다. 그 후 문선명 선생은 제1, 2차 세계순회(1965, 1969)를 마치고 제1, 2차 세계순회 중에 성지 택정과 축복식을 거행한 데 이어 제3차 세계순회를 1971년 12월 5일부터 156일 동안 15개국 순회 노정에 올랐다. 그 후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복귀섭리가 시작되었고, 1976년 9월 1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머뉴먼트 광장 집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집회는 미국 건국 2백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미국에 내려지기를 희망하고 건국 3세기로 향하는 미국의 세계사적 사명을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일대 기념비적인 집회였다.
해방 후 40년 간 좌우익의 대립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어 온 한반도에서 문선명 선생은 1968년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신의 실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1980년대 들어서는 좌익과 우익의 이념을 넘어서는 두익사상(頭翼思想)으로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창설했다. 문선명 선생은 이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터전으로 하여 정치 이데올로기의 혼돈 속에서 헤매는 국민들에게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꾸준히 평화교육을 실시해 왔다. 천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통일운동을 주도해온 여세를 몰아 일본과 미국 등에서도 지속적인 평화운동을 확산하여 한반도의 통일운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문선명 선생의 생애가 모두 그러하지만 특히 1990년 고희를 맞으면서 세계적인 종교지도자요 이 시대의 선각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계평화와 인류구원을 위해 보다 구체적으로 활동해 왔다. 선생의 세계평화를 위한 발걸음은 1990년 4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역사적인 만남으로 이어졌다. 또한 문선명 선생 양위분은 1991년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는 문선명 선생이 고향을 떠난 지 무려 40년 11개월 만이었는데, 아직 생존해 있는 누님 및 일가친척들과의 눈물겨운 상봉이 있었고, 12월 6일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이 있었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난 이래 외롭고 쓸쓸한 개척의 길을 걸었고 40여 성상이 흐른 후 세계적 섭리의 승리기반을 가지고 환고향(還故鄕)한 선생이었다.
2-4 성약시대의 선포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설 그리고 하나님의 해방
1992년 문선명 선생은 참부모를 선포하시고 1993년 1월 3일을 기해 성약시대의 출발을 선포하였다. 성약시대는 하나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때이며 참부모에 의한 참가정의 구현을 통해 세계가 구원되는 시대다. 때문에 하나의 심정으로 완성한 이상가정들이 영원한 천국기지 마련의 토대를 이루는 시대가 출발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시대경륜은 새로운 미래를 열게 되었다. 선생은 세칭 통일교로 불리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Family Federation for World Peace and Unification)으로 바꿨다. 인류의 최대 소망인 세계평화와 통일이 종교만으로서는 가능할 수 없다는 시대경륜에서 취한 결단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최소단위인 가정을 바로 세우는 ‘참가정운동’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안이었다.
하나님의 해방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왕 되심으로 시작한다. 악의 주권을 없이하고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통해 하나님만이 인류의 왕 되시는 하나님의 시대경륜이 감추이지 않고 환히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로 하여 2001년 문선명 선생은 하나님의 왕권즉위식을 새로운 천년의 시작에 놓았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그동안 빛 가운데 숨어 계시던 하나님께서 지상에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내시는 순간이 하나님 왕권 즉위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왕권 즉위식을 통해서 이 땅에 착지하신 하나님을 이 땅에 모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조국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착하실 조국을 한국으로 정하는 ‘하나님 조국 정착 대회’가 있게 되었다. 선생은 하나님의 조국의 형태를 천주평화통일국(천일국)이라고 명명하였다. 천일국은 몸과 마음이라는 두 사람이 하나 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 곧, 영계와 지상이 하나가 되는 국가의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천일국 창건의 이상은 2013년 2월 22일(천력 1월 13일)을 기원절을 기해서 실현하고자 한다.
2-5 문선명 천지인참부모의 성화
문선명 선생은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섭리의 일환으로 평화유엔을 주창하고 여성시대의 선포를 통해 섭리적 주역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현실화하기 위해 아벨여성유엔을 창설한 것은 2012년 7월 16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해방의 섭리를 위한 마지막 힘까지 소진하고 ‘다 이루었다’하면서 2012년 9월 3일 영계에 입적, 성화(聖和)했다. 문선명 천지인참부모 천주 성화식은 2012년 9월 15일이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는 천지인참부모 한학자 영부인의 인도 하에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 <144호 2부에서 계속>
《대순회보》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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