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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대한 왕양명(王陽明)의 이해 – 양지설(良知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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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2.11 조회2,6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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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순사상에서는 인간 본성의 본질을 양심이라 규정하였다. 이는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本質)은 양심인데”01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난다. 하늘이 부여한(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 본래의 마음으로서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본연의 성질이 양심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심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라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심은 우리의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도덕적 문제의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양심에 대한 탐구는 인간이란 존재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도전님의 “우리도 무자기를 근본으로 하여 올바른 사람, 즉 완전한 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도인이 되면 원래의 천성과 본성으로 돌아가 인간의 양심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욕심도 사심도 없으며 유리알 같이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라 할 것입니다.”02라는 말씀을 되새겨 보면 그 중요성을 일깨우게 된다. 곧, 양심을 회복하는 일은 수도의 궁극적 목적인 도통을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양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충분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양심(良心)이란 말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맹자』다. 맹자는 인간은 본래 인의(仁義)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이것을 양심이라 했다.03 여기에서 ‘양(良)’은 ‘본래적이다’와 ‘선(善)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곧, 본래적이고 선한 마음이라는 의미다. 맹자는 이 양심의 기능적 측면으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말한다.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양능이다.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 그것이 양지이다. 어린아이라도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으며, 커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름이 없다.04

 

 

  인간은 후천적인 학습을 통하지 않고도 선을 지향하는 본래적인 앎과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양지·양능이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의 본래적 정감인 취선(就善: 선으로 나아감)의 가능성이 사람마다 그 본성에 강한 힘으로 내재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취선을 가능하게 해주는 추동력(推動力)이 바로 이 양지다. 사람은 부모를 보면 누구나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선천적이며 생각해보지 않아도 곧바로 발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것이 곧 양지의 힘이라는 것이다.

  맹자에게 있어 단지 도덕적 인식능력으로서의 양지 개념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왕양명(1472~1529)05이다. 양명은 “무릇 선·악의 기미와 참·거짓의 분별이라는 것을 내 마음의 양지를 버리고 또 어디에서 체험하고 살필 수 있겠는가?”06라고 말한다. 양명이 말하는 양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양심의 다른 용어로 양심이 갖는 지각(知覺)의 기능을 부각한 용어다.07 이 양지는 양명학의 핵심 개념으로 이에 대한 양명의 통찰을 ‘양지설(良知說)’이라 한다. 그의 말년인 56세에 이 설이 완성되는데, 양명의 사상체계 정수라 할 수 있다. 양지설은 유학전통 안에서 오늘날까지도 양심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학설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가 양심이란 존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양지는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이고, 양지의 본래 모습은 인(仁)

  양명학의 핵심 명제는 ‘심즉리(心卽理)’다. 이 ‘심(心)’은 맹자가 말한 ‘본심(本心: 인간 본래의 마음)’과 같은 의미인데, 양명은 때때로 ‘마음의 본체(心之本體; 心之體)’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것은 어떠한 감성적 욕망도 찾을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순수한 마음이다. 그리고 ‘리’는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심 = 천리 = 마음의 본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천’은 일반적으로 절대성과 보편성을 가지는 개념이므로 ‘천리’는 반드시 그리고 누구나 실천해야 할 도덕적 차원의 이치(예: 仁·義·禮·智·孝·忠·弟 등등)를 말한다. 따라서 ‘심즉리’란 우리의 본심 속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덕적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양명은 양지가 바로 이 마음의 본체라고 말한다.08 본체란 ‘본래의(또는, 참다운) 모습’이라는 뜻이므로 양지는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는 후천적 학습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는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명제에 바탕하고 있다. 양명은 여기에 대해 “하늘이 사람에게 명함은 곧 명(命)이니, 바로 본성이다.”09라고 하였고, “무릇 마음의 본체는 본성이고, 본성의 근원은 하늘이다.”10라고 하였다. 마음의 본체가 곧 인간의 본성이며, 이 본성은 하늘의 명(天命)에서 비롯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체인 양지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천명에 의해 내재하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양지가 이처럼 우리 마음의 본래적인 모습이라면 이 양지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양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개 양지는 천리(天理)가 저절로 명확하게 지각되고 드러나는 것으로 다만 진성측달[眞誠惻怛: 진실하고 (타인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곧 그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이 양지의 진성측달을 극진히 하여 부모를 섬김이 곧 효이고, 이 양지의 진성측달을 극진히 하여 형을 따름이 곧 제(弟: 공손함)이다.11

 

 

  양명은 진성측달이 양지의 본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진성측달의 마음을 극진히 한다는 것은 곧 양지를 온전하게 발현한다는 의미다. 양지가 온전하게 발현됨은 바로 ‘심즉리’의 리가 온전하게 구현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모를 섬김이 진정한 효라는 것이다. 양명은 이러한 논리 위에서 효와 제(弟)를 말하였다. 결국, 효·제를 비롯한 모든 도덕적 행위는 반드시 진성측달을 극진히 함으로써 그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진성측달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양명식 표현으로 인(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양지의 본 모습은 인(仁)이라는 것이다.

 

  

양지는 도덕 실천의 주체이며 도덕적 판단의 준칙(準則)

  한편, 마음은 어떠한 도덕적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배우지 않고도 그 구체적 도리를 자연히 알 수 있다고 양명은 말한다.

 

 

앎(양지)은 마음의 본체이며, 마음은 자연히 알 수 있다. 아버지를 뵈면 자연히 효도할 줄 알고 형을 보면 자연히 공손할 줄 알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자연히 측은해할 줄 아니, 이것이 바로 양지다.12

 

 

  이는 마음에 양지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뵈면 자연히 효도할 줄 알고, 형을 보면 자연히 공경할 줄 알게 된다. 우리가 어떠한 도덕적 사태를 마주하면 그 순간 저절로 도덕적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양지는 이처럼 도덕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인 것이다. 양명은 양지를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으로서 도덕 실천의 주체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양지는 어떻게 이처럼 그 도리를 알 수 있는가? 이것은 양지의 허령명각(虛靈明覺: 텅 비어 있으나 영명하여 명확하게 지각함)한 특성 때문이다. 양명은 마음의 허령명각이 곧 본연의 양지라고 말한다.13 이 영명한 지각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어떠한 도덕적 사태를 맞이하여 저절로 그에 합당한 도리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각능력은 어떠한 일의 시비와 선악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 대한 양명의 말을 살펴보자.

 

 

그대의 한 점 양지가 그대 스스로의 준칙이다. 그대의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서 그것은 옳은 것을 옳은 것으로 알고 그른 것을 그른 것으로 아니, 더욱 조금이라도 속일 수 없다. 그대가 다만 양지를 속이려 하지 않고 참되고 솔직하게 그것에 의지하여 행하여 간다면, 선은 곧 보존되고 악은 곧 제거될 것이다.14

 

 

  여기에서 양명은 우리가 스스로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양지가 그 기준이 되는 준칙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는 그 순간 양지는 이 생각의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안다는 것이다. 곧, 직각적(直覺的: 보거나 듣는 즉시 깨닫는)인 도덕적 직관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양지를 속임이 없이 양지의 판단에 의지하여 행동해 나가면 이것이 곧 선을 보존하고 악을 제거하는 길이 된다. 이것을 정밀하게 하는 것이 양명이 말하는 수양법이다. 이는 항상 도덕적 판단의 준칙이 되는 양지가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며, 이를 ‘치양지(致良知)’라 한다.

 

 

양지는 모든 사람에게 실재

  이러한 양지는 단지 도덕성이 훌륭한 몇몇 사람에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음을 피력한다. 이는 양지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실체(實體: 현실에 존재하는 물체)라는 뜻이다. 양명의 말을 들어보자.

 

 

양지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성인(聖人)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가 없고 천하와 고금(古今)의 사람이 똑같다. 세상의 군자가 오직 그 양지를 실현하는 데 힘쓴다면, 저절로 능히 옳고 그름(是非)을 공통으로 하고 좋고 싫음(好惡)을 똑같이 한다.15

 

 

  이러한 주장은 양명이 오랜 기간 자신의 내면에 대한 면밀하고 깊은 성찰을 통해 얻은 확고한 신념이다.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사람 사람마다 모두 이 양지가 실재하고 있음을 확신한 것이다. 양지는 이처럼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는 실체이기 때문에 양지를 실현(致良知)하고자 노력한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누구나 옳고 그름의 도덕적 판별과 좋고 싫음의 도덕 정감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양지에 대한 이상의 진술들은 왕양명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과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 진술의 논리성이 부족하고 특히 양지가 인간 보편의 실체라는 주장은 매우 선언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이는 양심이란 존재의 특성 때문이다. 일단, 양심은 형체가 없으므로 시각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하다. 나의 양심은 타인이 지각할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양심에 대한 각자 각자의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그 존재의 보편성을 확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그 체험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명과 같이 자신의 내면에 항상 깨어있는 양심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어떻게 양심의 실재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도전님의 말씀처럼 양심은 인간 본래의 천성으로 티끌만 한 사욕도 없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다. 이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삶으로 인간 도덕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윤리도덕을 숭상하는 우리 수도인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일 수밖에 없다. 무자기(無自欺)가 수도의 근본이지 않은가. 양심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일이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라 한다면, 우리에게 이 양심은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인간 보편의 양심은 우리 자신에게 무언(無言)의 목소리로 도덕적 삶을 촉구하고 있다.

 

 

 

 

01 『대순진리회요람』, p.19.

02 《대순회보》 12호, 「도전님 훈시」 (1989. 3. 17).

03 『맹자』 「고자 상」 8 참고.

04 『맹자』, 「진심 상」 15,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孩提之童無不知愛其親者,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

05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왕양명의 용장오도(龍場悟道)」(대순광장), 《대순회보》 123호 (2011년), pp.62-71’에 자세히 나와 있다. 양명이 이룩한 학문체계를 ‘양명학’이라 하며, 주자학과 더불어 신유학(新儒學)의 양대 사조를 이룬다. 그의 사상은 어록과 편지글을 모은 『전습록(傳習錄)』에 잘 나타나 있다. 양명학은 명대(明代) 사상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청나라에 들어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나라에는 1521(중종 16)년 무렵에 전래한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을 신봉하던 조선 왕조에서는 퇴계가 불교적이라고 비판한 이래로 줄곧 이단으로 배척받았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를 비롯하여 병자호란 때 강화를 주장했던 최명길(崔鳴吉)과 조선 말의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등을 꼽을 수 있다.

06 『전습록(傳習錄)』, 136조목, “凡所謂善惡之機, 眞妄之辨者, 舍吾心之良知, 亦將何所致其體察乎?”

07 진교훈 외, 『양심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양심의 의미-』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p.63 참고.

08 『전습록』, 152조목, “良知者, 心之本體.”

09 『전습록』, 127조목, “天命於人則命, 便謂之性.”

10 『전습록』, 134조목, “夫心之體, 性也. 性之原, 天也.”

11 『전습록』, 189조목, “蓋良知只是一箇天理自然明覺發見處, 只是一箇眞誠惻怛, 便是他本體. 故致此良知之眞誠惻怛以事親, 便是孝, 致此良知之眞誠惻怛以從兄, 便是弟.”

12 『전습록』, 8조목, “知是心之本體, 心自然會知. 見父自然知孝, 見兄自然知弟, 見孺子入井, 自然知惻隱, 此便是良知.”

13 『전습록』, 137조목, “心之虛靈明覺, 卽所謂本然之良知也.” 입이나 눈과 같은 신체 기관처럼 구체적 형태를 띠지 않은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마음을 이해하여 ‘허(虛)’라 하였고, 그 작용의 영명(靈明)한 측면을 ‘영(靈)’이라 하였으며, 이 ‘영’을 좀 더 구체화한 표현이 ‘명각(明覺)’인 것이다. 명각은 주로 도덕적 차원에서의 명확한 지각을 말한다.

14 『전습록』, 206조목, “爾那一點良知, 是爾自家底準則. 爾意念着處, 他是便知是, 非便知非, 更瞞地一些不得. 爾只不要欺他, 實實落落依着他做去, 善便存, 惡便去.”

15 『전습록』, 179조목, “良知之在人心, 無間於聖愚, 天下古今之所同也. 世之君子, 惟務其良知, 則自能公是非, 同好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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