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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9.08 조회3,1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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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근정전 당가

  

여주본부도장의 본전 4층 영대에 양위 상제님과 석가모니를 위시한 15 신위를 모신 곳에 한옥을 축소한 모양의 집이 있는데 이것을 닫집이라고 한다. 닫집은 상제님을 모시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봉강전과 대순성전, 그리고 각 방면 회관의 봉심전에도 설치되어 있다. 이 닫집은 전통적으로 불교의 사찰과 궁궐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의미와 유래를 통해 우리의 도장과 회관에 설치된 닫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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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좌(용상) 

‘사찰의 불단(佛壇)이나 궁궐의 용상(龍床)을 장식하는 조형물’을 닫집이라 하고 한자로는 당가(唐家) 또는 천개(天蓋)라 한다. 닫집의 의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닫집의 ‘닫’은 따로라는 옛말이니 닫집은 ‘집 안에 따로 지어놓은 집’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밖에도 천장에 달아맨 집이라는 뜻의 ‘달집’이 닫집의 어원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 닫집을 ‘닫는 집’이라는 의미로 보아 시각적인 단절을 통해 대상의 지위를 높이려는 것으로 보았다.01 하지만 닫집을 만들 때 불전의 건립과 같은 과정으로 별도의 제작과정을 거쳐 설치되는 것을 볼 때, 집안에 따로 지어진 집이라는 의미의 닫집이라는 해석이 합리적이다.

 

궁궐의 닫집

궁궐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지는 정전의 중심에 당가가 자리하고  있다. 궁궐의 당가는 임금이 대신들과 공식 업무를 집행할 때 사용하는 어좌(御座)인 용상을 장식하는 구조물이다. 당가의 용상의 방향은 전통적으로 자좌오향(子坐午向), 즉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게 설치되었다. 이것은 옛날 순(舜)임금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 정치를 한 것에서 근원을 찾는다. 그래서 남면한다는 말은 곧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닫집과 당가를 구분 없이 사용한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편의상 사찰의 것을 닫집이라 하고, 궁궐에 설치된 것을 당가라고 구분하였다. 당가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당(唐)나라 또는 중국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사찰의 닫집이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궁궐의 당가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임금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현실 정치의 공간이다. 임금은 당가의 용상에서 대신들에게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내리며, 또 대신들로부터 나갔던 왕명이나 민심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02 그러므로 당가는 궁궐의 중심이요 세상의 중심으로 최고의 권위를 나타내는 공간이었다.

당가의 구조는 기단인 좌탑과 지붕에 해당하는 천개로 구성된다. 당가의 기단인 좌탑에는 임금이 앉아 정무를 보던 용상, 용상의 등받이인 등널, 등널의 뒤를 감싸는 곡병(曲屛), 그리고 곡병 뒤쪽으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 등이 설치된다. 병풍의 형태로 제작된 일월오봉도는 한 폭의 그림에 천지의 이치를 담았다. 하늘을 상징하는 해와 달, 땅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봉우리,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붉은 소나무[赤松], 그리고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수와 물결치는 파도를 그려넣어 살아 있는 멈추지 않는 생동감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지붕에 해당하는 천개는 염우, 허주, 공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양한 길상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각종 상서로운 길상의 문양과 장식물들을 추가하여 임금의 권위와 유가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불교의 닫집

닫집의 원류는 고대 인도에서 왕이나 신분이 높은 귀족이 외출할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던 산개(傘蓋, Parasol)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03 고대에서 산개는 사용자의 권위와 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당시 산개를 사용한 것으로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를 짐작할 수 있으며 불교 경전에 산개를 공양하였다04는 기록에서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석가모니 입멸 후 진신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기 위하여 사리탑(stūpa)을 건립하고 그 위에 산개를 세워 부처의 존귀함을 상징하게 되었으며, 이후 법당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천장을 장식하는 조형물에서 지금의 닫집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한다.05 산개는 1세기 무렵 불교가 전파되면서 함께 중국에 전해졌고 여기에 장식성을 더하여 천개의 형태로 중국화 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천개의 원류로 볼 수 있는 것은 돈황막고굴, 윈강석굴 등의 석굴사원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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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사리함(감은사지 동탑)(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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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실-윈강석굴 유막감(帷幕龛)

 

우리나라 닫집의 초기 형태는 삼국시대 때 중국을 통해서 불교가 전해질 때 그 영향을 받아 장막(帳幕)이나 감실(龕室)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에 전해진 장막이나 감실과 같은 형태는 덕흥리 고분이나, 안악 3호 고분의 내부에 그려져 있는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통일신라의 경우는 당시 세워진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천개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사리함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닫집의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닫집은 산개나 일산에서 장막의 형태로, 다시 지금과 같은 한옥의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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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 3호분 벽화(한성백제박물관 소장) 

닫집은 전각과 달리 제작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시기나 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닫집이 전각을 세우는 것과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되는 것으로 보아 닫집의 제작연대는 그것이 설치되어 있는 전각의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옥의 건축 양식이 고려시대 주심포에서 점차 다포식으로 발전함에 따라 닫집도 정교하고 화려하게 바뀌어 갔을 것이다. 주심포 건축 양식은 다포식에 비해 단순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시대적 특징은 닫집을 제작할 때 그대로 반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곡사 하대웅전 닫집이나 봉정사 극락전 닫집에는 고려시대의 그러한 특징이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06

조선시대에 제작된 닫집은 대부분 보궁형(寶宮形)인데 초기에는 단층으로 제작된 것이 많고, 후기로 갈수록 2층과 3층으로 만들어져 화려하고 복잡한 형태로 변해 갔다. 조선 초기까지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안동 봉정사 대웅전 닫집, 강진 무위사 극락전 닫집, 청양 장곡사 닫집 등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닫집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보개형(寶蓋形), 운궁형(雲宮形), 보궁형으로 구분한다. 보개형 닫집은 우물천장[小欄斑子]07 위쪽에 사각[方形]으로 공간을 마련하여 그 속에 끼워 넣은 듯이 설치된다. 즉 우물천장의 속에다 설치한 모양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지은 법당에서 볼 수 있다. 보개형 닫집으로는 안동 봉정사 대웅전,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의 닫집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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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개형 닫집(강진 무위사) 

운궁형은 지붕을 생략하여 천장에 감춘 듯한 형태로 공포부터 아랫부분만을 제작하여 설치하거나 공포까지도 생략하고 허주(虛柱: 헛기둥)와 허주 사이에 평판(平板)이나 낙양무늬[落陽紋]를 끼워 간소하게 설치한다. 대표적인 운궁형 닫집으로는 청도 운문사 비로전, 서산 개심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등에서 볼 수 있다.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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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궁형 닫집(청도 운문사 명부전) 

보궁형은 공포 위에 지붕을 얹은 완전한 한옥 형태의 집모양을 법당 안에 천장과 별도로 독립되게 설치한다. 보궁형은 가장 많이 설치된 닫집으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궁형은 지붕의 모양에 따라 일자형(一字形), 정자형(丁字形), 아자형(亞字形), 중아자형(重亞字形) 등으로 구분하고, 또 지붕을 1층 형, 2층 형, 3층 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보궁형의 닫집에는 용이나 봉황, 선녀 등 다양한 조형물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보궁형 닫집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닫집처럼 단아하고 조촐함을 보이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상징적인 장식을 추가하여 더욱 섬세하고 화려하게 변해 갔다. 보궁형의 닫집은 이 밖에도 논산 쌍계사 대웅전, 완주 화암사 극락전,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 부산 범어사 대웅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09 우리 대순진리회의 영대(靈臺)에 설치되어 있는 닫집은 3층의 보궁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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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궁형 닫집(강화 전등사 대웅전) 

닫집은 집안의 집이라는 말처럼 닫집을 제작할 때는 전각을 짓는 기술이 모두 동원된다. 닫집의 구조는 좌대인 기단부,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부,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축부로 구분한다. 아랫부분인 좌대는 전각으로 치면 기초와 마루 등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불상을 모시는 좌대만 설치하거나 좌대 주변으로 난간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중간을 형성하는 축부에는 천장에 매달린 듯한 짧은 기둥인 허주(虛柱), 법당 마루까지 이어지는 기둥인 당주, 후불벽(後佛壁) 등이 있으며, 허주나 당주 사이에 낙양(落陽)을 설치하여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다. 지붕을 형성하는 옥개부는 서까레, 덧서까래, 추녀, 사래, 창방, 평방, 공포 등 전각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짧은 기둥인 허주의 끝에는 만개한 연꽃이나 연봉(蓮峯), 용두(龍頭) 등을 조각하여 열반의 꿈을 표현하였다.

닫집의 원형이 되는 일산이나 산개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불상을 모시지 않던 시기에 부처의 위엄을 대신하던 상징물이었다. 전각에 불상이 모셔진 이후에도 이러한 전통은 계속되어 불상의 머리 위 공간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였으며, 지금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으로 발전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닫집은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된 문화와 신앙심의 결정체이다. 궁궐 중심에 설치된 당가에는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신념이, 그리고 사찰의 닫집에는 석가모니와 같이 고해의 강을 건너 해탈과 열반의 꿈을 실현하려는 염원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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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님께서는 이 땅에 해원상생과 지상천국을 실현하기 위해 대순진리회 도장에 지상의 옥경인 영대를 봉안하시고 도통진경의 성전이라 하셨다. 우리 도장 본전 영대에 설치된 닫집은 삼계를 주관하시는 상제님과 상제님의 뜻을 받들어 천지의 운행을 담당하는 15신위가 모셔져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이 닫집은 보궁형으로 원위의 닫집과 15신위를 모신 닫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이 대순진리회 닫집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배병선, 『닫집의 건축사적 연구』, 문화재연구소, 1991.

허균, 『궁궐 장식』, 파주: 돌베게, 2011.

심대섭ㆍ신대현, 『닫집』, 서울: 한국불교진흥원, 2010.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제5권

김봉규, 「산사미학 4, 닫집」, 영남신문.

 

 

 

01 배병선, 『닫집의 건축사적 연구』, (서울:문화재연구소), 1991, p.3 

02 허균, 『궁궐 장식』, 「당가」, (파주: 돌베게), 2011년, p,34.

03 심대섭ㆍ신대현, 『닫집』 (서울: 한국불교진흥원), 2010년, p.18.

04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제5권 - ③무의행품(無依行品) 復以種種寶幢幡蓋, 香花伎樂, 而供養之.

05 설고운, 「닫집에 관한 고찰」 (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3), p,6.

06 심대섭ㆍ신대현, 같은 책, p,38.

07 소란반자는 궁궐이나 사찰과 같은 한옥 건물에서 천장을 마감하는 기법이다. 가로세로 격자로 틀을 짜고[小欄] 그 가운데 네모진 판(板)을 끼워 마감하는 기법이다. 우물마루처럼 ‘井’ 자를 여러 개 모은 것과 같다 하여 우물 천장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천장(天障, 또는 天井)을 반자라고 하는데 한자를 빌려 표기할 때는 한자의 의미 없이 ‘斑子’라고 쓴다.

08 김봉규, 「산사미학 4, 닫집」, 영남신문, 20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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