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신화(創世神話) (2) - ‘천지왕본풀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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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20 조회1,569회 댓글0건본문
제주(濟州)는 신화(神話)의 보고이자, 1만 8천 신(神)이 산다는 신들의 고향이다. 그리고 신들의 내력을 담은 신화가 많이 남겨져 있어서 신화의 수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기록된 것으로 최고라면 제주의 신화는 구비 전승되는 것으로 최고라 할 만하다. 더구나 제주신화는 신들의 근본(根本) 내력을 풀어가는 이야기를 무당[심방]01이 굿을 하면서 부르고, 굿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재현하기에 살아 있는 신화로 여긴다. 그래서 제주신화를 서사무가(敍事巫歌)02라 하고, 신들의 근본을 풀어내는 것이니 ‘본풀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주의 여러 본풀이 중에서 ‘천지왕본풀이’는 ‘창세가(創世歌)’와 함께 천지개벽, 일월조정, 인세 질서 정리라는 창세(創世)의 신화소(神話素)들이 짙게 배어 있어 우리 민족의 소중한 천지개벽신화(天地開闢神話)로 평가받고 있다. 누가 지었고 언제부터 전승됐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예로부터 무당굿에서 창세신(創世神)을 모시는 제차인 초감제(初監祭)03 배포도업침04 때 맨 앞 굿거리에서 구연되던 것이 전승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굿거리 서두에 천지조판(天地肇判) 이후 인세의 형성과 역사를 구연했던 이유는 창세를 주도한 신에 대한 제의에서 창세신에게 올리는 축원으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며 이는 창세신의 근본을 푸는 신화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절대자인 지고신(至高神)이 태초에 천지창조를 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문맥을 보면 ‘창세가’에서 미륵(彌勒)의 경우와 같이 천지창조 후의 주체자로서 옥황상제(玉皇上帝) 천지왕(天地王)이라는 존재가 보이고 있다. 곧 ‘창세가’처럼 천지왕 자신의 상위에 절대자인 지고신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지고신의 천지조판(天地肇判) 위에 천지왕이 미흡한 부분에 대한 창조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아래의 서술에서 그러한 면모들을 찾아볼 수 있다.
태초에 천지가 혼돈하여 하늘과 땅이 맞붙어 암흑 가운데 맷돌처럼 혼합된 상태였다. 갑자년(甲子年) 갑자월(甲子月) 갑자일(甲子日) 갑자시(甲子時)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을축년(乙丑年) 을축일(乙丑日) 을축시(乙丑時)에 땅의 머리가 축방(丑方)으로 열려 하늘과 땅이 금이 생기고 점점 벌어지면서 땅덩어리에는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이때 하늘에서 청(靑)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黑, 혹은 물) 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合水)되어 음양상통(陰陽相通)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별들이 생겨났으나 아직 암흑은 계속되었으며, 동쪽에서는 청(靑) 구름이, 서쪽에서는 백(白) 구름이, 남쪽에서는 적(赤) 구름이, 그리고 중앙에서는 황(黃) 구름이 오락가락 하였다. 이때 천황닭[天皇鷄]이 목을 들고, 지황닭[地皇鷄]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人皇鷄]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동방(甲乙東方)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고, 옥황상제(玉皇上帝) 천지왕(天地王)이 해 둘, 달 둘을 내보내어 천지는 활짝 개벽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천지의 혼돈은 바로 잡히지 않았다. 해가 둘이어서 낮에는 백성들이 더워 죽게 마련이고, 달이 둘이어서 밤에는 추워 죽게 마련이었으며, 초목이나 새와 짐승들이 말을 하고, 귀신과 인간의 구별이 없었다.
또한 우주의 기원, 시공간, 각종 천체 및 만물의 생성 과정은 우리 민족 고유의 의식에 중국에서 체계화된 우주생성론(宇宙生成論)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 이입되어 채록된 것으로 보인다. 하늘은 자시(子時)에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땅은 축시(丑時)에 축방(丑方)으로 열리고 사람은 인시(寅時)에 생겨났다는 것은 십이지(十二支)의 시간 순서에 따라 인세의 공간이 형성된 순차를 기술한 것이다. 하늘의 청(靑)이슬과 흑(黑)이슬이 합수(合水)되어 음양상통(陰陽相通)으로 만물이 생겨났다고 한 것과 목[木: 東靑], 화[火: 南赤], 금[金: 西白], 수[水: 北黑], 토[土: 中央黃]를 방위와 색깔에 맞추어 배열해 놓는 것은 음양오행설을 차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은 닭의 첫 울음을 통해서 여명을 알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상서로운 동물이라 하여 신조(神鳥)로 여겨왔을 뿐만 아니라 액(厄)을 없애고 복(福)을 부르는 축귀(逐鬼)와 벽사(辟邪)의 기능을 가진 동물로도 믿어왔다.05
다음으로는 천지왕과 총명부인이라는 부모 세대와, 대별왕과 소별왕이라는 자식세대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의 천지왕과 지상의 총명부인이 결연을 맺고 형제를 낳는다. 그리고 이 형제들은 각각 이승과 저승을 차지하여 인간 세상의 질서를 정리한다는 내용이다. 그 채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느 날 천지왕은 좋은 꿈을 꾼 후 지상으로 내려가 총명부인을 배필로 맞고자 했다. 총명부인은 자신을 찾아온 천지왕을 대접할 생각으로 부자인 수명장자의 집에 가서 쌀을 빌려 왔다. 하지만 마음씨 고약한 수명장자는 쌀에 모래를 섞어 주었다. 첫술에 돌을 씹은 천지왕은 수명장자와 그 아들 딸들의 악행을 전해 듣고 벼락장군 벼락사자, 우뢰장군 우뢰사자, 화덕진군 등을 대동하여 그의 집안을 일순간에 몰살시킨다. 며칠간의 동침 후에 천지왕이 하늘로 올라가려 하자 총명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어찌할지를 물었다. 이에 천지왕이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대별왕·소별왕이라 짓고, 딸을 낳거든 대월왕·소월왕이라 지으라고 했다. 그리고 박씨 세 개를 내주며 자식들이 자신을 찾거든 이를 심어 하늘로 뻗쳐 올라간 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도록 당부도 남겼다.
천지왕이 하늘로 올라간 후 총명부인이 아들 형제를 낳아 이름을 대별왕과 소별왕이라고 지었다. 형제는 자라나서 아버지를 만나고자 박씨를 심었다. 박씨에서 줄기가 돋아 덩굴이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이에 형제는 그 덩굴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천지왕을 만났다. 천지왕은 형인 대별왕에게 이승, 아우인 소별왕에게 저승을 각각 차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별왕은 욕심이 많아 이승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형에게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자가 이승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청했다. 동생은 먼저 수수께끼로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하자 한 번 더 하자고 졸라서 서천꽃밭에 꽃을 심어 더 번성하게 한 이가 이승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하였다. 꽃을 가꾸는 데 있어 대별왕의 꽃은 번성했지만 소별왕의 꽃은 번성하지 못했다. 이에 소별왕이 대별왕에게 잠을 자자고 하고는 대별왕이 잠든 사이에 몰래 대별왕의 꽃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자신의 꽃을 대별왕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잠에서 깬 대별왕은 꽃이 바뀐 것을 알았으나 소별왕에게 이승을 차지하도록 하고 자신은 저승으로 갔다.
소별왕이 이승에 와서 보니 해도 두 개가 뜨고 달도 두 개가 뜨고, 초목이나 짐승도 말을 하고, 인간 세상에는 악행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을 부르면 사람이 대답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소별왕은 형에게 이 혼란을 바로잡아 주도록 부탁했다. 대별왕은 천 근 활과 백 근 살을 가지고 해와 달 하나씩을 쏘아 바다에 던져 하나씩만 남기고, 송피가루 닷 말 닷 되를 뿌려서 짐승들과 초목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귀신과 인간은 저울질을 하여 백 근이 넘는 것은 인간, 못한 것은 귀신으로 각각 보내어 인간과 귀신을 구별하여 주었다. 이로써 혼란스러웠던 인간세상의 질서가 정리가 되어 태평하게 되었다.
이 단락은 크게 인간 세상의 질서 정리 과정을 천지왕이 행한 부분과 대별왕 ·소별왕이 행한 부분으로 나눠진다. 먼저 천지왕의 경우를 보자. 천지왕은 총명부인과 결연을 맺기 위해 내려온 후, 수명장자의 악행을 알고 이를 징치(懲治: 징계하여 다스림)한다. 수명장자의 악행을 징치하는 것은 분명 인간세상의 질서를 나름대로 확립하는 일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으로 보면, 단순히 악행을 일삼는 인간세상의 악인을 벌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천지왕과 총명부인의 결합을 방해하는 방해자의 제거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천지왕은 인간세상의 질서 부여자의 존재를 가능케 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최선의 조건을 마련하고자 한 조력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아들 형제가 이루어낼 인간세상의 확립을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반면에 대별왕과 소별왕은 인간세상의 질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인세차지경쟁을 벌인다. 이들의 인세차지경쟁은 이승과 저승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형제들이 택하는 방법은 수수께끼 시합과 꽃 피우기 경쟁을 한다. 먼저 수수께끼는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얼마나 깨닫는가의 문제로서, 이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 셈이다. 다음 꽃 피우기는 누가 이승을 맡는 게 적절한 지, 즉 담당자의 자격조건으로 주어지는 시험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창세가’의 미륵과 석가의 경쟁구도에서도 나타나듯이, 소별왕은 형에게 잠자기라는 속임수를 전제조건으로 제안한다. 이때 잠자기는 신화적 문맥으로는 원초적 질서의 혼란이나 뒤바뀜을 뜻한다. 이승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하고, 저승은 맑고 청랑한 세상으로 다스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각각을 다스리는 해당 인물의 정체성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내 소별왕은 자신이 자격조건이 부족함을 알고 형 대별왕에게 이승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기를 간청하며 되돌려준다. 이 과정에서 대별왕은 천 근 활과 백 근 살을 사용하여 해와 달을 비롯해 우주적 질서를 바로 잡아 나간다. 곧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인데, 매우 뜨겁거나 추워 살지 못하는 원초적 환경을 개선한 셈이다. 달리 말하면 우주적 질서 확립이 인간 삶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관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렇듯 ‘천지왕본풀이’에서는 절대적인 지고신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옥황상제(玉皇上帝) 천지왕이 천지창조에 주체적인 조력자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세의 질서 확립을 위해 지상신(地上神) 신격(神格)의 소유자, 즉 자신의 아들인 대별왕과 소별왕에게 이를 부여하여 인간 세상의 질서를 확립한다. 다시 말해서 천지창조의 최종적인 마무리는 신인의 성격을 지닌 지상신에 의해서 일월의 조정이라는 단계에 와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인세의 전체적인 구도는 천상신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마지막 마무리는 지상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천상신·지상신이 함께 창세의 주체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타 문화권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한국 문화만의 특징으로서, 하늘과 땅의 조화이자 신과 인간의 조화라는 우리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음을 보여 준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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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제주도에서는 무속적 사제를 통칭 심방이라 한다. ‘심’은 ‘잡다’라는 의미인 제주도 사투리 ‘심다’에서 온 것이며, ‘방’은 제주도 고유의 존칭대명사라는 것이다. 심방은 ‘신령을 붙잡은 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02 서사무가는 소설이나 설화와 같이 고유한 등장인물이 있고, 그 인물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줄거리를 갖추고 있다. 일명 ‘본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신의 유래를 설명하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또한, 무속신의 이야기이고 무속 의식에서 구연되므로 무속신화이며, 청중들 앞에서 악기 반주에 맞추어 줄거리를 노래한다는 점에서 구비서사시이기도 하다.
03 큰굿의 첫머리에 신들을 청해 들여 제장에 모시는 제사의 차례인 청신의례(請神儀禮).
04 굿하는 장소를 설명하기 위하여 천지혼합 때로 거슬러 올라가 천지개벽, 일월성신의 발생 등 자연현상의 형성과 국가의 형성 등 인문 현상의 형성을 노래하여 내려오는 것을 말한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원래 제주도에서는 초감제 굿거리에서 천지개벽신화가 불려지는데, 천지개벽과 일월성신의 창성(創成)에 관한 이야기는 ‘베포도업침’에서 구송되고, 인세시조에 관한 이야기는 ‘천지왕본풀이’로 구송되었다고 한다. 이 두 서사무가가 무당에 의해 새롭게 재현되면서 ‘베포도업침 - 천지왕본풀이’로 복합된 신화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05 십이지의 동물 가운데 열 번째인 닭은 시간상으로 하루 중 오후 5∼7시, 일 년 중 8월을 가리키고 방향은 서쪽을 나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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