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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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7 조회1,729회 댓글0건본문
산등성이에 피어나는 운무(雲霧)가 온 마을을 휘감은 이른 새벽녘. 한복을 곱게 여며 입은 어머니는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안고 마을 어귀 솟대 앞에 서서 비손01한다. “집안 식구들의 건강과 만복이 깃들고, 힘들여 지은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신령님께 비나이다.”라고 말이다. 그런 비원(悲願)을 헤아리기라도 한 것일까. 긴 장대 위에 앉은 새가 “내 당신의 바람을 하늘에 대신 전하리다!”라고 하듯, 하늘로 목을 길게 빼고 금방이라도 비상의 나래를 펼칠 듯하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애틋한 향수를 간직한 솟대신앙은 그 연원이 오래된 민속신앙으로서 한국인의 생활과 삶 속에 밀착되어 왔다. 솟대02는 장대나 돌기둥 위에 나무나 돌로 만든 새의 조형물을 앉힌 것으로, 마을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간(神竿) 또는 조간(鳥竿)을 말한다. 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기원함과 동시에 개인이나 가정의 복을 빌거나 재액구축(災厄驅逐: 재앙과 액운을 몰아서 내쫓음)을 위해서도 모셔졌다. 그 기원은 농경 생활이 정착된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매우 오랜 역사성을 지니며, 그 분포도 만주, 몽고, 시베리아, 일본 등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솟대의 신체(神體)는 ‘장대’와 ‘새’라는 두 요소로 구분된다. 이중 새를 떠받친 장대는 지상과 천상의 통로이자, 우주의 중심이 되는 신목(神木)을 상징한다. 또한 신이 머무르는 신성한 곳임을 드러냄으로써, 성(聖)과 속(俗)의 공간을 구분하는 경계표로서의 의미도 함께 숭앙되고 있다. 단군신화에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檀樹)를 이용한 것과 한옥에서 성주신(城主神)을 모신 대청마루 위의 상량(上樑)이 집안의 중심이 된다는 것 등이 솟대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한편 신목[우주목(cosmic tree)]은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1986)03의 주장처럼, 세 가지 차원의 세계를 이어주는 세계축(axis mundi: 우주축이라고도 함)과 관련되어 있다. 세계는 천상의 세계, 중간(혹은 지상)의 세계, 지하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상계와 지하계는 다시 여러 층으로 나눠진다고 한다. 이중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 중간계이고, 여기서 신목이 세 가지 차원의 세계를 이어주며 통로 구실을 하는 세계축의 상징성을 띤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축의 의미를 지닌 솟대는 초자연적 존재가 지상으로 하강하는 교통로가 되기 때문에 신들을 불러 모으는 매개체이고, 신목 자체가 갖는 신성성 때문에 성역에 잡귀를 막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우리 민간신앙에서도 마을이 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세계의 중심지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장승과 함께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우고 성역화하였으며, 또한 그것이 액(厄)이나 살(煞) 및 잡귀의 침입을 막는 수호적인 기능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솟대신앙을 이해를 함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왜 새를 올려놓았으며 그 새는 어떤 새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새의 이미지는 숱한 상징적 의미를 지녀 하늘과 땅 사이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신조(神鳥)나 신령한 존재, 신의 사자 등으로 여겼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신화04나 신라 탈해왕신화05에 새가 등장하는 것도 그런 까닭 때문이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변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큰 새의 깃털로 꾸미는데, 이는 죽은 이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바라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본향인 하늘로 돌아간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이때 사람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새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 발상 속에서 솟대에 얹혀 신성시된 새는 까마귀와 오리다. 대부분 오리가 그 주류를 이룬다. 여기서 까마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로 발이 셋 달린 삼족오(三足烏)로도 통용된다. 이 까마귀는 태양에서 살고 있어 해신을 상징하고, 하늘의 뜻을 전하기에 천신의 사자이기도 했다. 발이 셋인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관념인 삼신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세 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고조선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솥의 세 발이 천계의 사자, 군주, 천제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았다. 태양의 자손이라 스스로 자부하던 고구려가 이 삼족오를 나라의 상징으로 여겼던 까닭이 그러한 연유에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 새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오늘날 민간에서는 경남 해안지역 일부와 제주도에서만 까마귀를 솟대의 새로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리06가 솟대의 새로 상정된 것은 일반 새가 갖는 상징적 측면에다 생명 에너지의 근원인 물의 새라는 점 때문이다. 오리가 갖는 물의 이미지는 비와 천둥을 지배하는 새라고 믿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경민에게 오리는 비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숭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물을 지배하기 때문에 화재를 막아 준다고도 믿었다. 오리가 있는 마을은 강이나 바다로 여겨지기 때문에 불의 신이 오다가 멈춘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는 철새로서 계절의 변화를 알려 주기도 한다. 철새는 일정한 계절을 주기로 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찾아오는데, 이 주기성으로 이승과 저승, 인간과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신비로운 새로 여겨졌다. 가야의 고분에 오리형 토기가 함께 묻힌 것도 오리가 영혼을 실어 나르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홍수는 농경민의 삶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는데, 오리가 홍수를 지배하는 신력(神力)을 소유한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밖에 곡신(穀神)과 다산성(多産性)을 지닌 존재로서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오리가 사람의 앞일과 해야 할 바를 인도하여 주며, 인간의 바람을 하늘에 전하는 축원(祝願)의 전령자라는 의미가 후대 사람들의 심성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람이 생로병사와 같은 자연적인 삶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바람을 신에게 기원하려고 했지만,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직접 신을 만나서 문제를 호소하고 곧바로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신의 영적인 힘을 부여받은 사자(使者)로서의 제삼자인 새의 중개를 필요로 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신의 뜻이 오리라는 신의 사자를 통해서 현재화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리를 축원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꼭 그렇게 되리라 믿고 그대로 행동하면 그 기대 대로 이뤄진다는 피그말리온효과07처럼 말이다.
이렇듯 솟대는 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을 지켜 주고 풍농을 안겨 주며, 나아가 개인의 소망을 하늘에 올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동으로 세운 마을신앙의 상징물이었다. 더욱이 솟대가 자리한 곳은 신의 강림처이자 거룩한 공간이며, 세계의 중심이라는 세계축의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후대에 내려올수록 점차 역사의 표면에서 위력을 잃어 갔고, 마을신앙 대상물로서의 외형적인 양상마저 변모했다. 그러한 면들을 주신(主神)인 상당신(上堂神)이 아닌 하당신(下堂神)이라는 신격(神格)에 머무르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상당신은 주로 마을의 뒷산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주신인 산신(山神)이며, 하당신은 마을의 입구가 되는 고갯마루나 동구 밖에 모셔진 솟대와 장승, 선돌, 돌탑, 당산나무 등이 해당된다. 곧 가신[家神, 혹은 가택신(家宅神)]에 있어서 성주신이 주신이고, 그밖에 업신, 문간신, 측신 등이 하위의 신에 머문 것과 같은 것이다.
고대에는 솟대에 대한 의례 행위가 제천의식에 준한 의미와 규모로 진행되었지만, 후대에 오면서 간소하게 고사를 지내거나 동제(洞祭) 뒤에 간단히 모셔지고 있다. 반면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복을 빌거나 재액구축 및 풍농을 기원하는 제의로 강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는 인간이 우주 안의 자연 질서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전제되고, 그 삶 속에서 스스로 풀기 어려운 개인적 차원의 사사로운 문제를 신의 영력을 빌려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곧 솟대의 중개를 통해 신과 만남으로써 인간은 개인과 마을의 안녕을 빌고 그들의 문제를 풀어나가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민족은 시작부터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天孫)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매개체인 솟대를 더욱 친근하며 밀접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네 어머니들이 정성어린 마음을 솟대에 담아 비손하는 모습을 통해, 솟대신앙이 한국인들의 삶과 정서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참고문헌
M. 엘리아데 지음, 박규태 옮김, 『상징, 신성, 예술』, 서광사, 1977.
김세철, 『솟대신앙의 커뮤니케이션적 특성과 의미』, 학술지 언론과학연구 5권, 2005.
이부영,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한길사, 2012.
이창식, 『전통문화와 문화콘텐츠』, 역락, 2008.
이필영, 『솟대』, 대원사, 2003.
이희근, 『우리 민속 신앙 이야기』, 삼성당, 2002.
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한국민속대사전』, 민족문화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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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간소한 상을 차리고 손을 비비며 빌어서 잡귀를 풀어먹이는 가장 간단한 의식이다. 손으로 비빈다는 뜻에서 ‘비손’이라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02 지역과 풍습에 따라 솟대를 솔대, 소줏대, 화줏대, 벼줏대, 갯대, 고릿대, 진또배기 등 다양하게 불린다. 그리고 솟대의 명칭으로 나오는 솟· 솔·소 등은 모두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며, 조선 초기의 문헌에는 등(騰)이나 용(湧)을 ‘솟’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몽고와 만주어인 soro, so, sor가 용목(聳木), 고간(高竿)을 뜻한다는 것으로 보아 옛 사람들이 소대·솟대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로 음역하여 ‘소도(蘇塗)’로 표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03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종교학자이자 문학가로 인도철학자 다스굽타 문하에서 인도철학을 연구하여 『요가: 불멸성과 자유』를 썼다. 그 외에 『우주와 역사』, 『성과 속』 등 수많은 저술을 통해 종교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기조를 이루는 것은 지구사회의 출현에 대응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역사·문화의 차이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기반을 신화·상징·의례 등의 연구로 입증하였다.
04 주몽(동명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낳은 알을 금와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들판에 버리자,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 주었는데 그 알에서 주몽이 나왔다는 탄생신화다.
05 신라 남해왕 때,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노파가 어느 날 갯가에서 까치들이 무리지어 날며 우짖는 것을 보고 가까이 가 보니 배 한 척이 있었는데 배 안의 궤짝에서 탈해가 나왔다는 탄생신화다.
06 시베리아 솟대의 오리는 원초적 바다 깊이 잠수하여 부리에 진흙을 물고 돌아왔고 그것을 가지고 창조주가 대지와 인간을 형상화했다는 이야기가 중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다. 또 시베리아의 다른 신화에서는 신이 까마귀 혹은 다른 새를 보내어 창조된 땅이 얼마나 큰지 살펴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07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추남 조각가 피그말리온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 그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의 조각상에 대한 사랑에 감동하여 여인상에 생명을 주었고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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