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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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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일 작성일2020.08.15 조회2,5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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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패전을 맞아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최후

 

 

출판팀 김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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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植民)의 뜻은 ‘어떤 나라가 자국민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켜[植] 경제적 개발과 정치적 지배를 행하게 함’이다. 우리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에서 돌아간 일본인이 민간인 71~72만 명, 군인 20~21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90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을 떠나며』(이연식 지음)는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패전 후 어떻게 떠났는지 그들이 회고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다루고 있다. 그들의 경험담인 만큼 그 과정과 모습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또한, 그동안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적었던 탓인지 몰라도 이 책에는 처음 접하는 역사적 사실이 많다. 어떻게든 조선에 남으려는 일본인이 많았다는 점, 해방 후 1주일 동안 경찰서 등 공공기관과 개인을 대상으로 조선인의 집단행동이 발생했는데 일본인보다 이들의 수족 노릇을 한 조선인 피해자가 많았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이 책은 수도인들에게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일본인에 대해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공사 2장 4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내용으로 이 책을 읽어도 좋을 듯하다.    

  일본에게 승리한 후, 연합군인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한과 북한에 들어왔는데, 이들의 정책에 의해 일본인이 본토로 돌아가는 방식이 크게 달랐다. 이에 따라 한반도를 떠날 때까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요약해 보았다.

 

 

패전을 맞이한 조선의 일본인 

  조선의 일본인들은 3·1운동 이후 긴 세월 동안 풍요와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이 시기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는 조선을 본래부터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전 직후, 상당수 일본인은 조선인들이 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는지 심지어 자신이 왜 조선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해외에서 패전을 맞이한 자국민에게 최대한 그곳에서 버티라고 지시했다. 최소 630만에서 70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해외 일본인을 받아들이기에는 원폭과 공습으로 본토가 심하게 피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8월 15일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조선에 살던 일본인 지도층은 밀선을 타고 본토로 재빠르게 돌아갔다. 이에 따라 보통의 일본인들은 스스로 내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전국적으로 은행 예금의 대량 인출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조선을 떠나는 남한 거주 일본인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듯이 보이자 조선에 머무르려는 일본인도 늘어갔다. 조선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를 내렸고, 본토에 돌아가도 환대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9월 12일 경성YMCA가 마련한 조선어 강습회로 몰려갔다.

  하지만 미군정이 일본인의 일괄 송환 방침을 발표함에 따라 잔류 가능성은 사라지고, 본토 귀환 시 소지금은 1인당 1,000엔(현재의 1,000만 원)으로, 화물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으로 제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세화회(日本人世話會)’라는 민간 조직을 만들어 자국민의 원활한 귀환을 돕도록 하였고, 본토에서 공수해온 현금으로 미군정에 로비하여 유리한 귀환 환경을 창출하고자 했다. 11월 중순 비로소 송환이 시작되고, 남한의 일본인들이 모두 자국으로 돌아간 것은 1946년 3월이었다.

  조선인에게 일본인에 대한 마지막 인상은 살상과 파괴로 새겨졌다. 패전의 충격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현역병, 제대군인, 경찰 출신자 등의 일본인들은 울분·허탈감을 조선인에게 표출하여 상해를 가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퇴각이나 무장해제 단계에서 무기를 폐기하면서 식량과 일용품까지 불사르거나 바다에 던져버렸고(이러한 모습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업가들은 미군정이 임명한 조선인 관리인이나 밀항 브로커와 손잡고 생산 기계를 망가트려 솥으로 만들어 파는 등 현금 확보를 위해 물자를 방매하는 과정에서 산업시설을 파괴했다. 이때 처분된 각종 공·사유재산이 극소수 사람들에게 집중됨으로써 사회적 부의 왜곡된 분배가 이루어졌다.

 

 

북한 거주 일본인의 대탈출 

  소련 점령 당국은 북한에 진주하자마자 일본인의 이동을 전면 통제한 가운데 18~40세에 이르는 일본군을 시베리아 등지로 보내 각종 노역을 시켰다. 종전 후, 소련은 자국의 경제 복구를 위해 노동력 확보가 시급했던 것이다. 관료, 경찰, 사법 관계자들은 일반인과 분리하여 수용한 뒤, 그중 일부는 군인과 함께 타지로 압송하거나 투옥했다. 식민 지배를 주도했던 6~7만 명 정도가 압송ㆍ투옥ㆍ억류된 것이다. 또한, 일본인 주택을 접수하고 그들을 수용소 혹은 유곽(遊廓) 지역 등에 집단으로 억류시켰다.

  1945년 겨울로 접어들어 더 이상 내다 팔 것이 없어진 일본인 가정이 늘어나면서 조선인 유흥음식점에서 허드렛일을 하거나 소련군을 상대로 접객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여성들이 등장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간 여교사도 있었다.

  1945~46년 동절기에는 일본인 대규모 수용 시설에서 집단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 아사히신문 평양 지국장을 지낸 무라 쓰네오는 영양실조와 혹한 등으로 함경도 중심의 동북 지역에서 약 12,000명, 평안도 중심의 서북 지역에서 약 7,500명가량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다. 북한에서 돌아간 일본 사람들은 귀환 과정을 ‘지옥으로부터 탈출’로 묘사하는데, 패전 초기와 남하 과정에서 겪은 성폭력과 함께 이 사건이 지옥으로 기억되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겨울을 지낸다면 일본인 전체가 몰살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인들은 1946년 봄부터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생산 설비를 자국으로 반출하려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소련이 일본인 송환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점과 송환에 찬성하는 조선인의 여론이 높아진 점이 탈출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는 타지로 끌려가고 부녀자와 노약자가 주류였던 북한 거주 일본인은 수백 명씩 집단을 이루어 도보나 밀선을 이용해 남한으로 탈출한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1947년 초까지 이어졌다.

 

 

  위와 같이 뜻밖에 패전을 맞이한 조선 일본인들의 귀환 방식은 어느 나라가 진주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미군이 들어온 남한의 일본인은 최소한이라고 할 수 있는 재산만 가지고 돌아갔고, 소련군이 들어온 북한의 일본인은 탈출이라는 형태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돌아갔다. 

  역사 인식과 관련된 내용 하나를 덧붙이면, 일본의 해외 귀환자들은 스스로 전쟁 피해자 또는 희생자로 생각한다. 귀환하는 과정에서 시련을 겪었고, 이들의 재외 재산을 대외(연합국) 배상 차원에서 국가가 처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산 피해는 국가의 잘못이고 책임이지 전쟁으로 인한 피해라고 할 수 없다. 1945~46년 동안 북한 거주 일본인의 남하 탈출을 주도한 이소가야 스에지의 인식은 이러한 귀환자들과 크게 다르다. 그는 일본 귀환자의 시련은 근본적으로 일본 정부의 무모한 침략 전쟁과 가혹한 식민 지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즉 저자의 해석대로 거기에 직간접으로 일조해온 응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라며 과거를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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