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차경석의 행적으로 본 성경신의 의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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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병무 작성일2018.10.19 조회5,163회 댓글0건본문
차경석의 행적으로 본 성경신의 의미 고찰*
연구위원 류병무
대순진리회의 신조(信條)에는 사강령(四綱領)과 삼요체(三要諦)가 있다. 신조란 종지(宗旨)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제시된 신앙의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실천방법론에 해당한다. 사강령은 안심(安心)·안신(安身)·경천(敬天)·수도(修道)이며, 삼요체는 성(誠)·경(敬)·신(信)이다. 강령(綱領)이란 구천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실천 수행하기 위한 훈전(訓典)이 되는 대원칙을 말하며, 요체(要諦)란 실천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몸에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자세이다. 이로써 수도인이 성경신의 자세로 안심, 안신, 경천, 수도를 행해 나가는 속에서 종지인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성경신이 없는 수도는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으므로 수도인에게 성경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으로 치닫고 있는 선천의 한계 상황에 위기를 느낀 신성(神聖), 불(佛), 보살(菩薩)들의 하소연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는 1871년 인간의 몸으로 강세(降世)하시어 9년간의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를 보시고 화천(化天)하셨다. 이 기간에 상제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종도인데, 그 종도 중에서 성경신이 지극하다고 상제님께서 인정한 사람이 차경석이다. 지극한 성경신으로 상제님께서 달리 써볼까 생각했던 종도 차경석은 스스로 동학신명 해원공사의 두목을 자청한다. 상제님께 지극한 성경신을 행했지만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는 사심(私心)으로 인해 결국 해원공사의 두목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경석의 행적 변화과정을 통하여 성경신의 변화를 살펴보며, 수도인들 자신의 현재 성경신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차경석의 행적
차경석의 본명은 윤홍(輪洪), 자(字)는 경석(京石)이며 월곡(月谷)이라는 호(號)는 상제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것이다.01 그는 이조 고종 17년 경진년(1880) 음력 6월 1일 전북(全北) 고창군(高敞郡) 부안면(富安面) 용산리(龍山里) 490번지에서 출생하였다.02 부친은 중필(重弼)이니 자는 치구(致久)이고 모친은 밀양 박씨다.
차경석은 매우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부친의 출생지인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대흥리(大興里)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동학에 입교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혁명운동에 가담했으며 전쟁 당시 정읍(井邑)에서 농민군을 일으켜 전쟁을 치루는 등 농민군 내 핵심 간부의 위치에 있었다.03 전쟁에서 패한 차치구(車致九, 1851∼1894)는 정읍군 소성면 광조동에 있는 최제칠 집에 은신해 있던 중 어느 밀고자의 고발로 잡혀 사형을 당하였다.04 이때가 1894년 12월 29일, 농민군이 일본군에 밀려서 참패 당했을 무렵이다. 차경석은 15세의 소년으로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직접 업어다가 대흥리에 묻었다고 한다.05 부친의 시신을 무사히 모셔와 장사를 지낸 차경석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06 동학농민혁명을 재건하려는 세칭 영학계(英學契)07에 관심을 가졌고, 영학계의 흥덕군아(興德郡衙) 공격 제의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그 후 차경석은 22세에 일진회(一進會)에 가입08하여 전라남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냈다. 하지만 일진회가 이완용(李完用, 1858∼1926)과 결탁하여 일제의 조선침략 앞잡이 노릇을 하므로, 차경석은 이들과 헤어져 송병준, 이용구 등을 축출하고 천도교(天道敎)를 창시한 손병희(孫秉熙, 1861∼1922)를 좇았으나, 손병희와도 뜻이 맞지 않아 새로운 길을 찾던 중 상제님을 만나게 되었다.09 이때가 1907년,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차경석이 상제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07년 5월이며 전북 원평 부근 용암리(龍岩里) 앞 주막에서였다.10 차경석이 이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용암리 수침막의 주막에서 상제님을 처음 배알한 것이다. 상제님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는, 그 비범하심을 알고 자신의 소송 서류에 관한 상제님의 판단을 여쭙게 된다.11 소송은 이기겠지만, 피고(被告)의 열한 식구 살길을 끊게 되므로 그것은 대인으로서 차마 할 일이 아니라는 상제님의 충고를 듣고는 소송 서류를 불사른다. 그리고 상제님의 언표(言表)에 감동한 차경석은 상제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스승으로 섬기기를 청한다. 상제님을 따르면서, 차경석은 상제님의 중요한 공사 과정에12 참여하게 된다.13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일진회원인 안내성,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박장근 등이 상제님을 추종하였다.14 차경석은 상제님께 수부(首婦)로 이종매(姨從妹) 고부인(高夫人)을 천거하기도 하였다.15
1909(신축)년 6월 24일 사시(巳時)에 상제님께서 화천(化天)하시자, 상제님을 믿던 종도들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다.16 하지만 차경석은 김형렬, 박공우, 김자현, 김갑칠, 김덕찬과 함께17 상제님을 구리골 앞의 큰 골 장탯날 기슭에 초빈한다. 그리고 상을 마친 후에 상제의 부친을 모시고 객망리에 가서 모친을 조문하고 다시 정읍 대흥리에 가서 상제께서 간수하신 현무경을 옮겨 적는다.18
상제님 화천 후,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차경석 역시 상제님에 대한 회의가 생겨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1년 자신의 이종누이였던 고부인이 상제님 탄강기념치성 도중 상제님의 영에 감응(感應)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1911(신해)년 9월에 많은 교인들은 고부인에게 상제님의 가르침이 이어졌다고 보고 고부인을 교주로 하는 증산계열 신종교 최초의 교단을 형성한다.19 교단을 창립할 때, 고부인을 도운 차경석은 점차 종단운영의 실권을 담당하면서 동문 이치복 등과 함께 포교활동에 전력하였다. 날로 입교자의 수가 격증(激增)하자, 차경석은 자신이 교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인 1909년 1월 3일에 상제님이 자기에게 교통을 전수한 일이 있다고 주장20하면서 교단 내외의 일체 권한을 전담하여 실제적인 교주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21 점차 교단을 장악한 차경석은 고판례가 1918년 7월 강응칠(姜應七) 등 일부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자 교단의 제1인자가 되었다.
보천교의 교세가 점차 커감에 따라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게 되자, 차경석은 1919년 피신처인 강원도 울진군 서면에서 채규일과 김홍규를 불러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확대하여 60방주로 조직할 것을 명령한다. 같은 해 10월 경남 함안군 병곡면 덕기리(德基里) 대황산(大篁山)에서 ‘24방주제’를 확대 개편하는 ‘60방주제’를 정하고 60방주를 선임하는 고천제(告天祭)를 행하였다.22
총독부가 전국의 교인 검거를 명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1921년 1월부터 8월까지 수많은 교인을 체포하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차경석은 경남의 함양·안양 등지의 교인 집을 전전하며 제2차 고천제를 계획한다. 1921(신유)년 9월 24일, 경기도 경찰부와 정읍 함양 등지의 경찰이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는 가운데 차경석은 경남 함안군 서하면 우전리 덕유산 남쪽 기슭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제단과 풍성한 제수를 갖추어 각도의 ‘정리’와 3백 60군의 ‘포장’, 그리고 60‘방주’를 합하여 1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고천제를 행하였다.23 이 때 차경석은 장차 새로 세우게 될 나라의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교명(敎名)을 ‘보화교(普化敎)’24라 선포함으로써 한 교단의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이라는 나라의 황제 지위에 등극함을 하늘에 고한다. 이 행사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차경석의 신통묘술과 제위등극에 대한 신망이 더욱 두터워지고 이것이 급격한 포교의 증가로 나타나, 1918년에서 192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보천교에 입교한 자가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25
1924(갑자)년부터 차경석은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에 성전(聖殿)인 호천금궐(昊天金闕)을 세우고 방주공실 50여 동이 건립하였다.26 이를 둘러싼 도참적인 해석은, 차경석이 십일전(十一殿)공사의 완공과 더불어 무진(1928년), 기사(1929년)년 간에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교도들에게 유포되기에 이른다.27 결국 이러한 소문은 일본 경찰에게 민심을 자극하여 소동을 일으킨다는 판단으로 이어져, 경찰은 십일전 성령봉안식(聖靈奉安式)의 무기한 연기를 명하였다.
차경석은 처음에는 상제님을 옥황상제로 받들어 그의 권화(權化)를 절대시 하였으며, 보천교를 창교한 이후 그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것은 오직 상제님의 신조라고 믿고 내심 상제님께서 천지공사에 예정한 대로 자기의 교중에 도통문을 열어 많은 도통군자가 나와 줄 것으로 확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28 따라서 차경석은 상제님의 교통을 받아 교단을 꾸려나가면서 새로운 교리를 세우기보다는 상제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서 입교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강성상제하감지위(姜聖上帝下鑑之位)’라는 지방(紙榜)을 써 붙이고 맑은 물을 올리며 고천(告天)하였다.29 그리고 신앙목적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인 상제님30의 신도(神道)적 권화에 의한 ‘신화도통(神化道通)’과 천지공사 예정에 의한 ‘후천선계조화정부(後天仙界造化政府)’의 개벽에 참여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차경석이 지녔던 상제님에 대한 믿음은 1921년 60방주의 수련공부에서 한 사람의 도통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심복이라고 믿었던 간부들이 점차 배교하여 자기에게 대항하고, 또한 국내를 풍미했던 천자등극설이 끝내 민중의 무수한 모욕과 조소의 대상이 되자, 점차 흔들리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경석은 상제님의 권화를 의심하고 심지어 상제님을 옥황상제라고 믿는 신앙대상의 기본문제까지도 회의를 품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처음 창교할 때 포교 선전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또한 모든 교인들의 태을주 수련공부도 상제님이 사람을 기만한 사술로 단정했다. 이어 차경석은 1928년 1월 4일[무진설법], 많은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송주(誦呪) 수련을 금지하고 유교에 따르는 정좌수심법(靜坐修心法)을 행하라고 교지를 내렸다.31
차경석이 새로이 믿으라는 고성(古聖)은 유교의 조종(祖宗)인 공맹(孔孟)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의 무진설법 직후에 연중(年中) 7대 치성(七大致誠)이 정월 1일, 정월 3일, 춘분, 추분, 동지, 하지, 8월 15일로 정해졌다. 차경석은 보천교의 교조인 상제님이 교통을 전수해 줬다고 보는 정월 3일은 치성일에 넣고 상제님의 탄강일과 화천일은 치성에서 제외한 것이다.32 차경석의 이와 같은 신로의 변경33은 그때까지 상제님의 신권을 믿어오던 교인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내부로부터의 균열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34
차경석은 성전 봉안식의 실패로 보천교 위축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일제와 전략적인 타협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5년 이전까지 민족운동에 대한 경향성이 다분히 있었으나, 시국대동단(時國大同團)의 결성으로 친일적인 성향을 띠게 됨으로 지식인들과 일반 대중들에게 사이비(似而非)종교라는 인식과 보천교에 등을 돌리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1936년 병자년 윤 3월 10일, 차경석은 그의 나이 57세에 그토록 원했던 독립된 나라의 천자(天子)가 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35
차경석의 성경신
차경석이 상제님을 따른 기간은 1907년 5월부터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1909년 6월까지이다. 불과 2년이 조금 넘을 뿐이다. 하지만 동곡약방에 머물면서 화천하실 때까지 상제님께서 공사의 많은 부분을 차경석 종도를 대동하시고 보셨다. 차경석의 성경신 정도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전경의 내용에 조금 전할 뿐이어서 그것을 통해 차경석의 성경신 정도를 정확히 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직접 차경석이 성경신이 지극해서 달리 써볼까 했다고 말씀하셨으므로36 부족하게나마 차경석의 성경신을 전경 구절을 통하여 추론해 보았다.
상제님께서 1907년 12월 25일 의병의 혐의로 고부 경무청에 압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37 다음 해인 1908년 2월 4일 경칩일에 출옥하신다.38 당시는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병과 출동하였으며, 또한 의병을 가장하여 노략질하는 비도(匪徒)도 있었으므로 의병의 혐의로 체포된 자는 시비를 불문하고 총살되는 실정이었다.39 상제님과 함께 신경수의 집에 있다가 압송된 종도 이십여 명40은 자신들도 의병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공포로 벌벌 떨었으며, 일부는 자신들이 옥에 갇힌 것에 대해 상제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41 무신(1908)년 원조에 경무관이 죄수들인 종도들에게 주식을 한 상씩 나누어 주기에 모든 종도는 “주식을 나누어 주니 이제 죽이려는 것이로다. 우리는 상제를 따르다가 결국 죽게 되는도다.”라고 한층 상제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42 무신(1908)년 정월 십일에 석방된 종도들은 상제님의 출옥을 기다리지 않고 모두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고부에 와서 상제님의 출옥을 기다려 객망리 본댁으로 모신 사람이 바로 차경석이었다. 이외에도 경석이 손수 가물치를 잡아 회를 쳐서 상제님께 올리기도 하고,43 상제님께서 절사를 가르치신 이후에 김형렬과 차경석은 가절과 제사를 당하면 반드시 상제님께 공양을 올렸으며,44 상제님을 업고 공사를 받들기도 하였고,45 상제님을 섬긴 후부터 집안 일을 돌보지 않아 집안 형편이 기울어질 정도로 상제님을 따르는 일에 열중하였다.46
상제님께서 화천하자 종도들은 탄식하여 “허망한 일이다. 상제의 돌아가심이 어찌 이렇게 허무하리오.”라고 믿을 수가 없어 눈물만 흘렸다. 상제님의 화천이 많은 종도들에게 낙심(落心)과 배신감(背信感)을 안겨 준 것이다. 그래서 여러 종도들이 떠났지만 차경석은 김형렬, 박공우, 김자현, 김갑칠, 김덕찬 등과 함께 남아서 상제님의 치상을 지켜보았으며47 치상 후에도 차경석은 김형렬과 함께 상제님의 부친을 모시고 객망리에 가서 모친을 조문하였다. 이러한 차경석의 행동에서도 다른 종도들과 다른 성경신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차경석은 일시적으로 상제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지만 교단을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상제님에 대한 권화를 절대시하였다.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이어가던 차경석은 혁세제민(革世濟民)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상이 수포화되고 신축성전에서의 영위봉안식까지 금지당하게 되자 상제님에 대한 신권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48 결국 차경석은 무진설법을 통하여 상제님에 대한 모든 믿음을 폐(廢)하고 신로(信路)를 변경하기에 이르며, 상제님의 탄강일과 화천일에 대한 치성을 7대 치성일에서 제외시킨다. 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믿음의 변화 과정을 통하여 보면, 차경석이 지녔던 상제님에 대한 지극한 성경신이 결국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고자 했던 사심에 의하여 변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경석의 야망과 해원공사
차경석이 지녔던 욕심은 상제님을 모실 때부터 이미 그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차경석은 상제님을 따르며 차츰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 보인다. 물론 처음부터 차경석이 가진 야망을 아신 상제님께서는 그가 마음을 경계하도록,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49란 글을 써서 벽에 붙이시며 항상 마음에 두게50 하셨다.
상제님께서 음양도수를 조정하는 공사51를 볼 때 차경석은 열두 점을 찍는다. 그 이유를 물으시니, 차경석은 열두 제국에 아내 하나씩을 두어야 만족하겠다고 대답한다. 또 상제님께서 각자의 소원을 물으셨을 때 그는 “유방백세를 못하면 유취만년이 한이로다. 열지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한다.52 유방백세(流芳百世)는 ‘향기가 백대에 걸쳐 흐른다’는 뜻으로,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명예를 얻고자 함이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란 ‘남긴 냄새가 1만년이나 간다’는 뜻으로 더러운 이름을 오래도록 남겨 놓음을 이르는 말이다.53 즉,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하지 못하면 그것은 더러운 이름을 오래도록 남겨 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차경석은 자신이 황제가 되지 못하면 한이 되니 자기가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땅을 나누어 달라[裂地]는 뜻이었다. 이는 그가 과거에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라고 한 말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천자가 되기를 꿈꾸는 그의 허욕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재주가 뛰어나고 성경신이 지극해서 달리 써보려고 했던 차경석에게 화천하시는 순간까지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무진(1909)년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해이다. 화천하시기 전까지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는다”.54는 경고와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냐”55고 나무라신다. 여기서 말하는 정가는 정감록에서 말하는 ‘구원자인 정씨로 오는 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차경석이 정씨(鄭氏)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비결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천자를 도모하게 되는 것56에 대한 나무람이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차경석의 잘못된 행동과 무모한 욕심을 꾸짖으신 것이다.57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이 차천자로 등극하기 위해 이용한 정감록에 대하여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58라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 겨레에서 정감(鄭堪)을 없앴는데도 세상에서 정감의 노래가 사라지지 아니하기에 혹시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이제 그 살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59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이 계룡산(鷄龍山)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을 묻기에 상제께서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60”고 이르시며, 계룡산(鷄龍山) 건국의 비결에 대해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61라는 말씀을 통하여 정감록이 옳지 않음을 알려주셨다.
상제님의 바람과 달리 차경석은 천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차경석에 대하여 상제님께서는 그를 동학신명을 해원해 주는 공사의 두목으로 쓰신다. 다음은 동학신명의 해원 공사에 대한 전경의 내용이다.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광찬·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 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공신·황응종·신경수 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 주시고 또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十二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 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62
역도(逆度)란 도수(度數)에 벗어나는 것으로 ‘역행(逆行)’ 또는 ‘역천(逆天)’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일천한 지식과 욕심을 내세워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거스르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기 생각대로 행동을 하거나 불평불만을 가지고 도수(度數)대로 돌아가는 판도에 따르지 않는 자이다. 이런 역도를 행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욕심을 내세워 왕후장상을 꿈꾸는 자들이고 도의 일이 마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처럼 억지를 부리고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을 털어 놓는다. 이들을 풀어 두어야 후천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
본래 동학(東學)은 보국안민을 위해서 일어난 농민혁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목적과는 다르게 마음속으로 왕후장상을 바라면서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원한이 창천하여 그대로 두면 후천에 정사(政事)가 어지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신명들을 해원해 주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할 두목이 필요하다. 차경석의 부친도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으며 경석도 십이제국을 자청하므로 모든 동학 신명을 경석에게 붙여 보내 왕후장상의 해원을 해 주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에 차경석은 차천자를 꿈꾸며 고천제를 행한다. 이때 장차 세우게 될 나라의 국호와 교명을 정하며 스스로 한 교단의 교주와 나라의 황제 지위에 등극함을 하늘에 고한 것이다. 보천교에서는 을축(1925)년부터 본소 내 건물을 착공하기 시작하여 4년 뒤인 1929년 겨울에 2만여 평 부지에 40여 개의 건물이 들어서는 웅대한 교전을 준공했다. 소위 대궐(大闕)이라 부르는 정문은 보화문이라 쓰고, 서울 광화문(光化門)을 본떠 층루로 만들었다.63 중앙에는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을 모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십일전(十一殿, 136평)이 있었다.64 규모에 있어서 십일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 길이는 100자였으며 광이 50자였고 기둥이 24자였다. 경복궁 근정전 건물이 정면 5칸, 측면 5칸 건물임을 감안할 때 궁전 건축을 참고하면서 규모면에서 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짓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65 또한 십일전의 기와는 중국 황제만이 쓴다는 황금기와를 썼다고 하니 그는 우리나라 왕을 넘어 십이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은 열망을 표현했다고 본다.
상제님께서 “홍 성문(洪成文)이 회문산(回文山)에서 27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27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66라고 하신 의미는 바로 27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차천자라고까지 불린 차경석에 대한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67
대순진리회에서의 성경신의 의미
『대순진리회요람』68에서는 성(誠)을 “도가 곧 나요, 내가 곧 도라는 경지에서 심령을 통일하여 만화도제에 이바지할지니 마음은 일신을 주관하며 전체를 통솔이용하나니, 그러므로 일신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마음에 있는 바라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니 정성이란 늘 끊임없이 조밀하고 틈과 쉼이 없이 오직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름이다.”라고, 경(敬)을 “경은 심신의 움직임을 받아 일신상 예의에 알맞게 행하여 나아가는 것을 경이라 한다.”라고, 신(信)을 “한마음을 정한 바엔 이익과 손해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과 의지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를 통하되 사시와 주야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을 경과하되 강하와 산악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한 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을 신이라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대순지침에서는, 성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이 한결같이 상제님을 받드는 일이며,69 경은 지성봉축에 변함이 없고 양면이 없어야 하며,70 신은 수도자의 믿음에 관한 것으로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 난도자가 된다71고 하여 성경신의 대상이 상제님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성은 기심(欺心)이 없어야 하며, 경은 예절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며, 믿음은 의심을 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즉, 포덕·교화·수도 및 모든 일이 성·경·신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성경신으로 해원상생을 이루고 생사 판단도 결정되는 것이다.72 복록(復祿) 성경신, 수명(壽命) 성경신인 것이다.
성(誠)의 자원(字源)적인 뜻은 ‘言’과 ‘成’을 합한 데 있다. 즉 ‘말한 바(言)’을 반드시 ‘이루도록(成)’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진심의 뜻을 담고 있다.73 또 중용에서는 “성은 하늘의 도(道)요, 성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다.”74라 하여 성(誠) 자체는 하늘[天]의 도(道)로서 모든 사물이 참되어 일관되게 존재하게 하는 진리(眞理)이며, 이 진리를 체득하고자 매사에 정성을 드리고 노력해 나가는 것이 사람(人)의 도리라는 것이다. 유학(儒學)에서 성은 하늘의 이법(理法)인 동시에 인간 마음의 참모습을 말한다.75 그러므로 성은 기심(欺心), 즉 속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훈회(訓誨)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에서 “마음은 일신의 주이니 사람의 언어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 사심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요,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다. 원래 인성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성 그대로의 본심인 양심이 바로 성(誠)인데, 성의 본체에 물욕에 의한 역심이 발동되면 그것이 사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으로 돌아가 상제님을 한결같이 받들어야 할 것이다.
성(誠)이 내면적인 마음의 거짓 없는 자세라고 한다면 경(敬)은 밖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예의를 갖추는 실천자세가 된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마음으로는 성심(誠心)으로 수도하며, 행동으로는 경(敬)을 위주로 함으로서, 마음과 몸이 항상 일치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敬)이란 모든 예의범절을 갖추는 데 근본이 되며, 수도인에게 있어서는 상제님을 믿고 수도하는 데 있어 지성봉축(至誠奉祝)에 변함이 없고 양면(兩面)이 없는 자세를 말한다.
상제님께서는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농가에서 추수한 후에 곡식종자를 남겨두나니 이것은 오직 토지를 믿는 연고이니라. 그것이 곧 믿는 길이니라.”76라고 말씀하셨다. 농부가 뿌리면 반드시 거둘 수 있다는 토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결실에는 믿음이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도전님께서는 ‘훈시’77를 통하여 “무릇 성이라 하는 것은 정성을 뜻하며, 경이라 하는 것은 공경을 말함이며, 신이라 하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믿음이 없으면 정성과 공경도 있을 수 없으며 안심(安心), 안신(安身)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는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야 하는 공부이니 먼저 상제님의 진리를 완전히 앎으로써 믿음이 확고해질 것이며 안심, 안신이 될 것입니다. 이때 거짓이나 가면가식(假面假飾)은 있을 수 없게 되어 각자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수도 생활을 하게 되며 안심, 안신으로 상제님을 모시게 되니 모두가 목적하는 바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땅을 믿기 때문이며 가을이 올 줄 알기 때문인 것처럼 모든 일은 이 믿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라고 성경신의 의미에 대해 하명(下命)하시었다.
상제님에게 지극한 성경신을 행했던 차경석은 차츰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결국 상제님에 대한 신로[信]를 변경하기에 이른다. 성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이 한결같이 상제님을 받드는 일이며, 경은 지성봉축에 변함이 없고 양면이 없어야 하며, 신은 수도자의 믿음에 관한 것으로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 난도자가 된다고 하신 도전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이것은 상제님에 대한 지성봉축[敬]에 변함이 생긴 것으로,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는 양심의 발로에서 나온 마음[誠]이 아니라 물욕에 의한 사심에 의하여 나온 마음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해원공사의 우두머리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마음으로의 성경신이 아닌 욕심에 의한 성경신은 그것이 비록 지극하다 할지라도 수도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도통(道通)을 향한 길이 아니라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욕통(慾通)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차경석도 열두제국을 꿈꾸는 마음으로 상제님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던 부귀와 권세를 일시적으로 누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상제님을 저버리며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인간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 큰 병에 걸리느니라. 이제 먼저 난법을 세우고 그후에 진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하라. 사곡한 것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 되니라. 이제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하여 마음에 먹줄을 겨누게 하고 사정의 감정을 번갯불에 붙이리라.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사곡을 행하는 자는 지기가 내릴 때에 심장이 터지고 뼈마디가 퉁겨지리라. 운수야 좋건만 목을 넘어가기가 어려우리라.”78고 교훈하셨다. 이제 차경석의 성경신을 통하여 수도인들은 각자 자신의 성경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마음이 아닌 순결(純潔)한 마음으로 상제님의 천지(天地) 공정(公廷)에 참여할 때에, 우리의 성경신이 수도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순회보> 163호
* 본 글은 대순사상학술원에서 발간한 『대순사상논총22집』에 수록된 「성경신의 의미고찰」의 내용을 회보에 맞게 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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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홍범초, 『범증산교사』(서울: 한누리, 1988), p.60 ; 박종렬, 『차천자의 꿈』(고양: 장문산, 2001), p.28 참조.
02 안후상, 「차월곡(車月谷) 출생에 관한 소고」, 신종교연구 2 (2000), pp.59∼62 참조; 『범증산교사』, 『보천교지』는 차경석이 전라도 흥덕군(興德郡) 부안면(扶安面) 호암리(壺岩里)에서 출생하였다고 보고 있다. 홍범초, 앞의 책, p.60; 보천교중앙총정원,『보천교지』(진주: 동양인쇄소), 1964, pp.387∼388 참조.
03 차경석의 부친인 차치구는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손화중(孫華仲, 1861∼1895), 김개남(金開男, 1853∼1895) , 최경선(崔景善, 1859∼1895) 등과 함께 장령(將領)을 맡고 있었고, 특히 동학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고을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정읍 지역의 집강소를 맡았다고 한다. [김상기,『동학과 동학란』(서울: 대성출판사, 1947), pp.99∼102 참조.]
04 안후상은 전쟁에서 패한 차치구(車致九, 1851∼1894)가 정읍군 소성면 광조동에 있는 최제칠 집에 은신해 있던 중 관병이 이를 알고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을 가함에 스스로 붙잡혀 사형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후상, 『普天敎運動 硏究』(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2), pp.6∼7] ; 하지만 전경에는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경석의 부친이 해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교법 3장 15절 참조.]
05 안후상, 앞의 글, pp.7∼9 참조.
06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서울: 대흥기획, 1992), p.237 참조.
07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최익서(崔益瑞, 1858∼1918)를 중심으로 조직된 계이다. 영학은 기독교를 말하는 것으로 고부(古阜)는 물론 흥덕(興德), 고창(高敞), 장성(長城), 영광(靈光), 무장(茂長), 함평(咸平) 등 7개 지역에 계가 조직되어 갑오년에 있었던 농민혁명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08 일진회가 조직된 것은 1904년으로 차경석의 나이 25세일 때이다. 하지만 차경석이 22세에 일진회에 가입하여 전라남북도 순회관을 지냈다고 차경석 관련 기록에는 적고 있다.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서울: 대흥기획, 1992, p.237 참조) 이것은 일진회의 전신이 동학에 실패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을 계승한 것에서 보아 이와같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09 홍범초, 앞의 책, pp.60∼61.
10 행록 3장 37절 참조.
11 차경석이 상제님을 배알할 무렵, 차경석의 아우 윤경이 주판례란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주판례의 부친인 주종호는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권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경석 일가가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알고 시집보낸 딸을 불쌍히 여겨 다른 사람이 소작하던 논을 사위 윤경에게 넘겨주었다. 이로 인하여 시비가 일어 송사(訟事)가 일어났는데, 이 송사는 소작 관리권을 가진 주종호가 자기의 권한으로 논을 사위에게 소작하도록 준 상황이었으므로 경석 일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12 중요한 공사 과정으로는 포정소를 정하는 공사(교운 1장 27절 참조)와 포덕소를 정하는 공사(교운 1장 54절 참조) 등이 있다. 공사 과정에서의 포정소 명명은 차경석이 상제님을 신인으로 받들어 그의 천지공사에 의하여, 이 땅에 후천선경이 수립될 때에 그 포정의 권한이 자기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장차 등극이라는 허망한 꿈을 꾸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이강오, 「普天敎, 韓國新興宗敎資料篇 第一部 : 甑山敎系各論에서」, 『전북대학교 사대논문집』8 (1966), pp.12∼13 참조)
13 교법 3장 13절 참고.
14 교운 1장 21절.
15 교운 1장 26절.
16 이강오, 앞의 글, p.13 참조.
17 행록 5장 36절 참조.
18 행록 5장 37절.
19 고부인이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설할 때는 뚜렷한 교명을 제시한 바 없지만 그 교도들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세간에서 태을교(太乙敎)라 부르게 되었다. 홍범초, 앞의 책, p.33.
20 차경석이 주장하는 교통 전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집지를 허락한 날부터 의관을 갖추셨으며(행록 2장 23절 참조), “상제께서 어느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30리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하시고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라.” 또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권지 1장 11절 참조)라는 구절에서 찾고 있다. 차경석은 남조선 뱃길을 자신이 세운 보천교(普天敎)가 가는 길이 남조선의 운수와 같이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상제님께서 차경석과 박공우 두 종도에게 만나야 할 사람임을 밝히시고 강세하신 신로와 인연, 장차 행하시고 이루실 일을 말씀하시고 이 일이 동학신도들이 바라마지않던 ‘참동학’임을 설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홍범초, 앞의 책, pp.64∼65 참조) 하지만 차경석이 주장하는 내용인 전경 권지 1장 11절의 내용은 차경석보다는 박공우에 더 많은 비중이 있어 보인다. 대순진리회에서는 박공우에 대한 공사를 박씨 성으로 오시는 도전님과 관련된 공사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
둘째, 상제님께서 1909년 정월 어느 날, 차경석의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이라는 글을 쓰고 백색 병에 물을 넣고, 양지에 “길화개길실 흉화개흉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이라는 글과 ‘병세문(病勢文)’이라는 글을 써 말아서 병 속에 넣은 다음 병마개를 막아두고 그 병이 놓인 앞에 백지를 깔고 백지 위에 현무경을 놓아두었다는 것에 근거한다.(박종렬, 앞의 책, pp.90∼95 참조) 이 일이 있는 다음 날, 차경석의 아우인 차문경(車文京)이 술을 마시고 상제님을 “역적질을 한다.”고 고함을 치며 비방한다. 이 비방이 천원 병참에 전해져서 군병들이 출동하려고 하자, 상제님께서 이 일을 미리 아시고 차경석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고 바로 비룡촌(飛龍村) 차윤경의 집으로 떠나신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3일 새벽에 고사를 지내도록 하셨는데 마침 이 일이 있어났으므로 다시 차경석에게 “내일 자정에 문틈을 봉하고 고기를 굽고 술병의 마개만 열고 심고하라. 이것이 곧 고사니라.”(행록 5장 1절, 2절. 참조)고 이르신다. 차경석은 3일 새벽에 명하신 대로 고사를 끝낸다. 차경석은 이일을 상제님께서 자신에게 ‘교통전수(敎統傳授)’를 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차경석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이 상제님으로부터 교통을 전수하였다는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차경석은 후에 자신이 주장하는 교통 전수일은 인정하면서 상제님을 스스로 부정하며 신로를 변경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채지가의 「초당의 봄꿈」에서는 ‘조개는 백기되고 차돌은 흑기된다 정지변에 마주앉아 천하통정 하였으니 너도한점 나도한점 허허실실 누가알까’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정읍 사거리를 중심으로 신태인의 보천교와 구태인의 무극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황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차경석은 차돌인 흑기로, 조정산 도주님은 조개인 백기로 묘사되고 있다.
21 이강오, 앞의 글, p.14.
22 같은 책, p.99.
23 홍범초, 앞의 책, p.89 ; 박종렬, 앞의 책, p.103.
24 이상호는 차경석에게 총독부에 제시할 교명을 물었고, 차경석은 보화교로 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보화교라고 하면 생소한 이름으로 총독부로부터 반일단체 결성이라는 의혹을 받을까 염려해 고천제에서 선포한 ‘보화(普化)’의 머리글자와 당시 공인된 종교인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을 제출하였다. 이상호의 이런 독단에 의하여 교단에서 정한 교명인 보화교 대신 보천교라는 이름이 일제당국에 전해졌고,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 교단을 보천교로 부르게 되었다. [이정립, 『증산교사』(김제: 증산교 본부, 1977), p.90 참조.]
25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1922년경 보고서에 따르면 백만교도로 교세가 확장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26 이강오, 앞의 책, p.250 참조.
27 물론, 이때의 등극설도 정감록 비결의 ‘진사(辰巳)에 성인출(聖人出)’이라는 귀절에 부합시켜 나타난 하나의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보인다. 이강오, 앞의 책, p.250 참조; 박종렬, 앞의 책, p. 161 참조.
28 박종렬, 앞의 책, p.249 참조.
29 박종렬, 앞의 책, p.93 참조.
30 대순진리회에서는 도주(道主)님께서 상제님의 신격(神格)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라고 밝혀주셨다. [대순진리회 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大巡眞理會要覽)』(여주: 대순진리회 출판부, 2010), pp.6∼7 참조; 『전경』, 교운 2장 32절 참조.] 하지만 상제님을 따르는 다수의 다른 교단에서는 상제님을 옥황상제님으로 보기도 한다.
31 박종렬, 앞의 책, p.93.
32 같은 책, p.117.
33 이정립, 앞의 책, pp.181∼190 참조.
34 박종렬, 앞의 책, pp.249∼250 참조.
35 보천교중앙총정원, 『교전(보천교)』(00: 문화사, 1981), pp.534∼535 참조.
36 공사 2장 19절 참조.
37 행록 3장 55절, 56절 참조.
38 출옥한 종도들은 제각기 집에 돌아갔으나 경석은 고부에 와서 상제의 출옥을 二월 四일 경칩일(驚蟄日)까지 기다려 상제를 맞이하여 객망리 본댁으로 모시고 형렬은 상제께서 출옥하심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고 동곡으로 돌아갔도다. (행록 3장 64절)
39 행록 3장 58절 참조.
40 행록 3장 55절 참조.
41 행록 3장 58절 참조.
42 행록 3장 62절.
43 행록 4장 51절.
44 교운 1장 45절 참조.
45 행록 5장 32절 참조.
46 행록 4장 30절 참조.
47 이때에 여러 종도가 떠나고 김 형렬·차 경석·박 공우·김 자현·김 갑칠·김 덕찬 등 여섯 사람만이 상제를 지켜보니라. 부친이 고부 객망리 본댁으로부터 동곡에 오시고 형렬은 뜻밖의 변을 당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 종도들이 궤 속에 간수하였던 돈으로 치상을 끝내고 남은 돈을 본댁으로 보냈도다.(행록 5장 36절)
48 홍범초, 앞의 책, p.160.
49 교법 3장 15절. 아방궁(阿房宮)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이 위수(渭水)의 남쪽에 지은 궁전이며, 동작대(銅雀臺)는 후한 말기 건안(建安) 15년에 조조(曹操, 155∼220)가 세운 누대(樓臺)로 하남성 임장현의 서남쪽 16km에 있는 업성(業城)의 옛터가 그곳이다.
50 교법 3장 15절.
51 상제께서 어느 날 후천에서의 음양 도수를 조정하시려고 종도들에게 오주를 수련케 하셨도다. 종도들이 수련을 끝내고 각각 자리를 정하니 상제께서 종이쪽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 하노라. 각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점을 찍어 표시하라.”고 이르시니 종도들이 마음에 있는 대로 점을 찍어 올리니라. “응종은 두 점, 경수는 세 점, 내성은 여덟 점, 경석은 열두 점, 공신은 한 점을 찍었는데 아홉 점이 없으니 자고로 일남 구녀란 말은 알 수 없도다.”고 말씀하시고 내성에게 “팔선녀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물으시고 응종과 경수에게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나 어찌 감당하리오.”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후천에서는 새로운 기력이 나지 아니하리까.”고 되물으니 “그럴듯하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무슨 아내를 열둘씩이나 원하느뇨.”고 물으시니 그는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니 이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다시 “그럴듯하도다,”고 말씀을 건네시고 공신을 돌아보시며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요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 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고 하시고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 하라.”고 분부하셨도다. 공신이 말씀대로 봉행하였느니라. 상제께서 이 음양도수를 끝내시고 공신에게 “너는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분부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고 일러 주셨도다.(공사 2장 16절)
52 상제께서 十一월에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시면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상제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상제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1장 54절)
53 유방백세는 옛날 중국 동진(東晉)의 대장군이었던 환온(桓溫, 312∼373)에게서 나온 고사이다. 환온은 강력한 병권을 바탕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제위에 있던 사마혁(司馬奕)을 무능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사마욱(司馬昱)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가 간문제(簡文帝)인데, 간문제는 즉위한 지 불과 2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환온은 간문제가 죽을 때 자신에게 황제 자리를 넘길 줄 알았으나, 간문제는 그를 새 황제의 보정대신(補政大臣)으로 임명해버렸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망에 빠져있던 환온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밤에 베개를 만지작거리며 측근들에게 “이미 후세에 명성을 남기지 못했으니, 만년 동안 오명을 남기는 것을 되풀이해도 부족하도다.(旣不能遺芳後世 不足復遺臭萬載).”라고 한탄하였다. ‘유방백세 유취만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대순회보》 138호,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74)- 포덕소공사」, 2012, pp.20∼21.]
54 교운 1장 51절.
55 행록 5장 34절.
56 《대순회보》 68호, 「27년 동안의 헛도수」, 2007, pp.17∼29 참조.
57 《대순회보》 149호,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85)- 상제님의 화천과 후인산조개유보」, 2012, pp.21∼22.
58 예시 65절.
59 권지 2장 29절.
60 교법 3장 39절.
61 교법 3장 40절.
62 공사 2장 19절.
63 김재영, 앞의 책, p.163.
64 같은 책, p.164.
65 같은 책, p.166.
66 예시 1장 53절.
67 《대순회보》 68호, 「돋보기 - 27년 동안의 헛도수」, 2007, pp.25∼27 참조.
68 대순진리회 교무부, 1969.
69 『대순지침』, p.51.
70 『대순지침』, p.52.
71 『대순지침』, p.53 참조.
72 『대순지침』, p.54.
73 『 한한대자전』, , 민중서림 3판, 2010.
74 『中庸』, 20.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75 성(誠)사상을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중요하게 강조한 학자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다. 그는 성을 하늘의 참된 이치이며 마음의 본체라고 보았다.
76 교법 2장 45절.
77 《대순회보》 4호, 「도전님 훈시- 복록 성경신, 수명 성경신, 천지 성경신」,
78 교법 3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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