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상생의 이념으로 바라본 삼강오륜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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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호 작성일2018.10.19 조회4,759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이재호
목차 Ⅰ. 머리말 |
Ⅰ. 머리말
『전경』에 상제님께서 삼계를 대순하신 이유는 천도와 인사의 상도(常道)가 어그러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셨다.01 여기서 말하는 상도란 동아시아 전통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용어로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윤리적 도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常道)란 신명계를 포함한 하늘과 인간사에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추구해야 할 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인사의 상도에 속하는 개념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전국(戰國)시대의 『맹자』에서 오륜이 먼저 나타나고, 그보다 후대인 한대(漢代) 동중서가 삼강을 주장하게 된다. 오륜은 선진(先秦)시대에 장자(長子: 맏아들) 우선의 ‘종법제(宗法制)’02가 느슨하게 사회를 규율하고 씨족의 민주적 유대와 따뜻한 혈족의 인정이 남아 있던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반면, 삼강(三綱)은 종법제가 사회를 전제적(專制的)으로 규율하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던 한(漢)제국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삼강은 사람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이라는 일방적인 권위주의의 틀로 규정하지만 오륜은 사람이 관계 유지를 함에 있어 쌍무적(雙務的: 쌍방 책임)인 부담을 지고 노력하는 것이다.03
삼강오륜은 2,000여 년이 넘는 동안 동아시아 사회에서 윤리규범으로 작용하여 왔다. 그러면서 그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신분제 사회에서 관료체제 유지를 위해 일반 백성들을 교육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온 것이다. 근대 중국에서는 삼강오륜의 해독을 홍수나 맹수에게 당하는 피해에 비유할 정도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반세기가 넘는 동안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삼강오륜은 더 이상 우리가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는 낡은 윤리규범이 되어 버렸다.
이 글에서는 삼강오륜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인 색깔을 제거하고 그것이 가지는 윤리규범 본연의 입장에서 접근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농경문화와 신분제도가 존재한 왕조 체제의 사회에서 관료 조직의 체계와 일상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윤리규범으로서의 삼강오륜이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양존음비(陽尊陰卑)의 음양론을 바탕으로 중국의 한나라와 송나라에서 공고화되는 과정과, 중국을 거쳐 조선에서 삼강오륜이 어떻게 적용되고 변용되어 가는지 알아볼 것이다.
대순사상에서는 ‘수칙(守則)’ 2번에서 삼강오륜을 일상생활의 윤리규범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대순사상의 삼강오륜이 조선시대에 강조했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포함한 내용이라면 이 시대에 필요한 윤리규범이라는 공감대를 전혀 형성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부정적 측면의 내용들은 시대에 맞게 대순사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재해석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러한 의미부여에서 가장 큰 틀은 대순진리회가 추구하는 상생의 이념이다. 인류 평화의 원리인 상생의 이념으로 대순사상의 삼강오륜을 바라볼 때 가장 큰 특징은 음양합덕의 음양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음과 양 각각이 고유한 덕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원리를 기반으로 한 윤리규범을 말한다.
대순사상에서는 삼강의 덕목인 충·효·열을 국가 사회를 유지하는 큰 강령(綱領)으로 규정하고 있다. 강령이란 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이므로 충·효·열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큰 줄기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삼강의 덕목은 대순사상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또한 행복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화목을 위해 요구되는 부부 관계에서는 오륜의 부부유별(夫婦有別)인 예도(禮道)를 강조하고 있다. 인간을 속박하는 윤리가 아니라 산업화·도시화·정보화 사회에 맞는 윤리규범으로 삼강오륜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대순사상의 핵심적인 양대 원리인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으로 해석해야 인간관계 윤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Ⅱ. 전통 윤리로서 삼강오륜의 성립과 변용(變容)
1. 관계윤리에서 출발한 오륜
유학에서 오륜은 인간의 사회적 결합 방식을 다섯 가지로 유형화하고, 그에 따라 각각의 경우에 알맞은 각자의 몫을 설정하여 제시한 것이다.04 오륜은 친족을 중심으로 한 농경 사회의 윤리 규정으로 정립된 것이다. 그 다섯 가지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오륜’ 개념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전적(典籍)은 『맹자(孟子)』와 『중용(中庸)』이다. 그런데 『서경(書經)』에는 오륜의 원형으로 추측할 만한 ‘오전(五典)’·‘오교(五敎)’·‘오상(五常)’ 같은 개념들이 서술되어 있다.05 송대(宋代)의 주자(朱子)에 와서도 이 개념들을 오륜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오륜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서경』에 나타난 관련 구절을 살펴보자.
삼가 오전(五典)을 아름답게 하라 하니 오전이 잘 지켜졌고, 백규(百揆: 요순시대에 영의정에 해당하는 자리)의 직책을 맡기니 백규의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사대문에서 제후들을 맞이하게 하니 사대문이 화목하였으며, 커다란 숲속에 들여놓았으나 열풍(列風: 맹렬한 바람)과 뇌우(雷雨: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옴)에도 길을 잃지 않았다.06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설(契)이여! 백성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않고 오품(五品)을 지키지 않소. 그대를 사도로 삼으니, 삼가 오교(五敎: 다섯 가지 가르침)를 펴서 인심을 너그럽게 하시오.”07
첫 번째 인용문은 순임금이 왕이 되기 전의 상황이다. 요임금이 순에게 ‘오전(五典)’을 아름답게 하라는 명을 내렸고, 순이 그 명을 잘 받들어 시행하니 백성들이 ‘오전’을 잘 지켰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순임금이 왕의 자리에 오른 뒤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순임금은 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하는 사도(司徒)라는 직책을 ‘설’이라는 신하에게 맡긴다. 그러면서 설에게 ‘오교(五敎)’의 가르침을 잘 알려서 백성들의 인심을 안정시키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오전(五典)’과 ‘오교(五敎)’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유가(儒家)의 서적에서 오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맹자』에서 인륜이라고 언급한 다섯 가지 내용이다.
후직이 백성들에게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을 가르쳐서 오곡을 심고 기르게 하니, 오곡이 익고 백성이 길러졌다. 사람은 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먹는 것을 배불리 하고 입는 것을 따뜻하게 하여 편안히 거처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를 근심하여 설로 하여금 사도로 삼아 인륜으로써 가르쳤으니,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으며, 군신간에는 의로움이 있으며, 부부간에는 구별함이 있으며, 장유간에는 차례가 있으며, 붕우간에는 믿음이 있는 것이었다.08
『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중용』에서는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곤제(昆弟)·붕우(朋友)의 다섯 가지 인간관계를 대표적으로 내세우고, 천하의 ‘오달도(五達道)’라는 말로 오륜을 표방하고 있다. 다만 『중용』에서는 가족 밖의 사회에서 연장자와의 관계문제를 대표하는 오륜의 ‘장유(長幼)’ 대신에 가족 내 형제끼리의 관계문제인 ‘곤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다르다.
『맹자』와 『중용』에서 제시한 오륜의 규범은 한대(漢代) 유학이 관학화(官學化)되면서 일반 윤리로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중국 유학사에서 『맹자』 이후 오륜이 사상적으로 특히 강조된 것은 송대(宋代)의 사마광(司馬光)과 주자에 의해서이다. 맹자와 주자는 ‘인륜(人倫)’ 혹은 ‘오교(五敎)’란 말로 오륜을 표현하고 있다. 주자는 ‘백록동서원학규(白鹿洞書院學規)’ 첫머리에서 ‘오교’를 강조하였다.09 이와 같이 오상(五常)·오전(五典)·오교(五敎) 등으로 쓰인 ‘오륜’이라는 말은 중국 명대(明代)의 선종(宣宗)이 『오륜서(五倫書)』를 편찬하면서 처음 사용하였고, 그 다음 황제인 영종(英宗)이 널리 보급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2. 통치이념으로 성립된 삼강
1) 삼강 윤리의 성립 과정
``삼강이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된다.’는 의미이다. 삼강에서 강(綱)은 벼리를 뜻한다. 벼리는 그물의 코를 꿰어 연결한 굵은 줄이며, 그물을 던져서 벼리를 잡아당기면 그물 전체가 딸려 오는 중심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군신·부자·부부의 관계도 마치 그물에 있는 벼리와 그물코의 관계에 비유하여 그 관계를 ‘강(綱)’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삼강은 오륜과 짝을 이루어 한대(漢代) 이후 동아시아 사회의 근본 윤리로 강조되어 왔다. 오륜 가운데에서도 특히 군신·부자·부부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 삼강(三綱)이다. 이것은 동중서(董仲舒)가 정립한 이론이다.
인간관계의 기본 윤리인 『맹자』의 오륜 개념이 한대(漢代) 동중서의 통치이념인 삼강 이론으로 정립되는 과정 사이에는 유가인 순자(荀子)와 법가(法家)인 한비자(韓非子)가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 순자의 사상에는 오륜의 보편적 윤리성과 삼강의 일방적 윤리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고, 한비자에 와서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윤리성이 강조되는 흐름으로 변화되어 간다.10 이러한 경직된 윤리성은 혼란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았던 순자보다 조금 후대에 살았던 한비자가 통일 제국 진(秦)나라의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더 효율적인 요소라는 필요성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순자의 사상을 기록한 『순자(荀子)』 「군도(君道)」편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노릇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사륜(四倫)’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오륜과 비교해서 붕우간의 도리는 빠져 있다. 순자는 “이 도리들은 한편에서만 지키면 어지러워지고, 양편 모두가 지켜야만 잘 다스려진다.”11고 하여 ‘사륜’의 윤리 덕목들이 쌍방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륜적 사유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임금이란 나라의 최고 지위이고, 아버지란 집안의 최고 지위이다. 최고 지위자가 한 사람이면 다스려지고, 두 사람이면 어지러워진다.”12라고 하여 군신과 부자 사이에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논리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순자의 사상에서 후대에 나오는 삼강의 일방적 윤리성이 이론으로 태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자의 제자였던 한비자는 순자의 ‘사륜’보다 좀 더 일방적인 존비(尊卑)의 논리에 치우친 ‘삼사론(三事論)’을 제시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섬기고[臣事君],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고[子事父],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婦事父], 이 세 가지가 순조로우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세 가지가 순조롭지 못하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13라고 하였다. 진시황 때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아버지가 비록 무도할지라도 아들이 감히 아버지를 섬기지 않을 것이며, 임금이 비록 은혜롭지 않다고 할지라도 신하가 감히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리오?”14라고 하였다. 동중서의 삼강에서 나타나는 임금·아버지·남편의 절대적인 권리가 신하·아들·아내를 향해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관계윤리는 사실상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나라에서 활동한 한비자와 여불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삼강이란 단어는 한대 초기 동중서의 저서인 『춘추번로(春秋繁露)』에 나온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인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은 『춘추번로』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동중서보다 후대에 작자미상으로 편찬된 『예기(禮記)』의 위서인 『함문가(含文嘉)』15의 ‘군위신지강(君爲臣之綱), 부위자지강(父爲子之綱), 부위부지강(父爲婦之綱)’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한(後漢)의 역사가인 반고(班固)가 편찬한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도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처강(夫爲妻綱)이란 용어가 『함문가(含文嘉)』에서 나왔다고 서술하고 있다.16 삼강과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처럼 한대를 거치면서 정립되었다.
오륜이 인간 본성의 발로에 의한 관계윤리라고 한다면, 삼강은 통치 기준에 입각한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삼강의 성격은 오륜과는 다른 시대적 요구와 역사적 배경에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강 윤리의 원형이 나타나고 있는 『한비자』나 『여씨춘추』가 성립된 시기는 진시황의 전제 군주제가 행해지던 시대이다. 삼강의 윤리를 확정한 동중서의 시대는 한무제(漢武帝)가 통일된 한(漢)제국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유교로써 사상의 통일을 꾀하고, 정치적으로 봉건제(封建制)를 군현제(郡縣制)로 교체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던 때이다. 삼강의 윤리는 이와 같이 새로운 질서와 강력한 통치 체제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17
또한 삼강과 오륜의 배열순서를 보면 오륜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의 부자관계를 먼저 강조하고 있고, 삼강에서는 군신관계를 강조한 군위신강(君爲臣綱)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씨족의 유대와 혈족의 인정(人情)이 남아 있던 전국시대의 오륜 개념에서는 가족 관계가 우선이었다면, 통일 국가 한제국이 출범하면서 지배 계층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는 논리에서 탄생한 삼강 개념에서는 국가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양존음비(陽尊陰卑)의 음양론에 기초한 삼강
그물에서 그물코를 통제하는 것은 벼리이다. 그러므로 벼리는 중추이며 핵심이다. 중요한 것은 이때 벼리가 둘일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둘 이상의 복수가 존재할 때 항상 벼리는 하나이기 마련이며 나머지는 이 벼리에 종속되는 존재들이다. 벼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동등한 인격이나 존엄성을 전제하기는 쉽지 않다.18 이러한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관계윤리의 밑바탕에는 통일제국의 통치이념에 필요한 이론을 세운 동중서의 양존음비(陽尊陰卑)의 음양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삼강 윤리는 음양론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음양이란 개념은 원래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햇볕이 드는 곳 혹은 산의 남쪽을 양이라 하고,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곳 혹은 산의 북쪽을 음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에서 음양 개념이 시작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까지도 음양으로 규정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아울러 음양은 하나의 짝을 이루어 세상의 만물과 만사에 대한 인식과 설명의 틀로 쓰였다. 한대에 오면 음양 개념이 유학의 도덕관념과 결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19 한대 동중서가 쓴 『춘추번로(春秋繁露)』에 나오는 도덕개념과 결합한 음양론을 살펴보자.
이것으로써 보면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한 것이다. 그러므로 날(日)을 세는 것은 낮에 의지하고 밤에 의지하지 않으며, 한해를 세는 것은 양에 의지하고 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음은 의(義)에 달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장부(丈夫)가 비록 천하더라도 모두 양이 되고 부인(婦人)이 비록 귀하더라도 모두 음이 된다. … 음양은 사람을 다스리는 법이다. 음은 형벌의 기이고 양은 덕의 기이다. … 천수(天數)는 양을 존중하고 음을 존중하지 않으며, 덕에 힘쓰고 형벌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20
여기서 양은 귀하고 음은 천하다고 하고, 양과 음에 귀천(貴賤)과 존비(尊卑)의 차등을 두고 있다. 동중서의 양존음비(陽尊陰卑) 내지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음양론은 그의 사상 전반에 깔려 있는 기본 개념이다. 동중서의 이런 자연에 대한 위계질서 관념을 인간 사회에 투영한 통치 이념은 그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데 실질적인 이론으로 한무제에게 주목받았고, 한무제는 재상이었던 동중서의 사상을 수용하여 유교를 국교로 삼는다. 동중서는 이러한 차등 질서에 입각한 음양론을 바탕으로 삼강의 이론을 전개한다.
음이란 양과 합하는 것이다. 아내란 남편과 합하는 것이며, 자식이란 아버지와 합하는 것이며, 신하란 군주와 합하는 것이다. 만물이 합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합하는 것에는 각각 음과 양이 있다. … 군주와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의(義)는 모두 모든 음과 양의 도(道)에서 취한 것이다. 군주는 양이 되고 신하는 음이 되고, 아버지는 양이 되고 아들은 음이 되고, 남편은 양이 되고 아내는 음이 된다. 음의 도는 홀로 행하지 못하니, 그 시작에서는 마음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그 끝마침에는 공로를 나누어 얻지 못하고 겸(兼)하는 바의 의(義)만 있다. 이런 까닭에 신하는 공로를 군주와 함께 하고, 자식은 공로를 아버지와 함께 하고, 아내는 공로를 남편과 함께 하고, 음은 공로를 양과 함께 하고, 땅은 공로를 하늘과 함께 하는 것이다. … 왕도(王道)의 삼강(三綱)이란 가히 하늘에서 구할 수 있다.21
동중서는 음과 양은 합해져야 가치를 발휘한다고 보았고, 음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음[신하·자식·아내]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먼저 양[군주·아버지·남편]이 앞에서 시작하여 이끌어 가고, 음이 거기에 맞게 순순히 따르면 공로를 함께 겸할 수 있을 뿐이다. 신하는 충(忠)으로, 자식은 효(孝)로, 아내는 열(烈)로 군주·아버지·남편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은 양을 존중하지 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말에, 오직 천자만이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는다고 하였다. 천하 사람들은 천자에게서 명을 받으며, 한 나라는 군주에게서 명을 받는다.”22 인간 세계의 모든 도덕과 질서의 근원은 하늘이고, 그 하늘로부터 명을 받는 사람은 천자이다. 백성들은 하늘의 명을 직접 받을 수 없고, 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군주에게 예속된 존재이기에 군주와 동등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통일제국의 사회구조를 음양의 이론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종속적이고 위계적인 사회구조에 맞는 음양이론이 정치적 목적으로 전개되면서, 가족단위에서도 부위자강(父爲子綱)의 가부장제(家父長制)와 부위부강(夫爲婦綱)의 남성중심의 전통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것에는 분명 동중서의 윤리사상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없다. 동중서의 사상이 긍정적 측면들도 있지만, 그의 사상으로 인해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관계윤리의 범위는 제한받고 말았다.
3. 삼강오륜의 변용(變容)
지금까지 전통적인 삼강오륜의 윤리규범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성립과정을 살펴보았다. 오륜과 삼강은 한대를 지나면서 삼강오륜으로 결합하여 동아시아 전반의 윤리 전통으로 서서히 확립되었고, 수(隋)ㆍ당(唐)을 거쳐 송대(宋代)에 이르면 정치적으로 백성들의 위상은 더욱 낮아지게 되고 신분제도는 상하의 종적인 엄격함을 띠게 된다.
송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사마광(司馬光)은 제자백가 가운데 ‘선왕의 도의 올바른 방법’을 파악한 사람으로 순자를 인정하고 맹자를 비판하였고, 성인의 도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것은 위계질서의 원리인데 맹자의 역성(易姓)혁명론은 이것을 무시하도록 만든다고 하여 맹자를 비판한다.23
사마광은 군신의 의리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인륜이며,24 어떤 경우에도 군주의 지위를 박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25 그리고 자식에게 군주직이 세습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맹자처럼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일개 필부(匹夫, 그것도 나쁜 필부) 수준일 뿐이라면 방벌(放伐)이 정당하다’26라거나 ‘군주가 큰 과오가 있으면 간언하고, 반복하여도 듣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바꾸어버린다’27는 역성혁명적인 요소는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28
주자가 주석한 『맹자집주(孟子集註)』 「이루(離婁) 상」을 보면, 주자는 자신보다 앞 시대의 성리학자인 나종언(羅從彦)과 진관(陳瓘)의 말을 언급하고 있다. 진관은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자식이 부모를 시해하는 것은 “항상 그(군주·아버지)의 잘못된 곳이 있음을 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29고 생각하였다. 나종언은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30고 하였다. 성리학이 이러한 논리를 긍정하는 것을 삼강과 연결시켜 생각하게 되면 ‘천하에는 옳지 못한 군주가 없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군주나 부모의 뜻에 절대 복종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처음부터 군주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정신을 마비시킨 것이다. 이것을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적용시킬 때,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신하·자식·아내의 독립적인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다.31
주자 이전의 북송(北宋) 성리학자들인 소강절(邵康節),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등은 사마광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보수적인 사마광의 이러한 윤리사상이 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정이천의 사상을 위주로 성리학을 종합한 주자에게서도 당연히 이러한 측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자학의 모든 이론이 왕권중심의 존군론(尊君論)적 입장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신분론에 대한 주자학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이다.32
중국의 윤리적 전통이 이러한 흐름으로 전개되었다면, 조선왕조에서는 삼강오륜의 이론을 백성들의 도덕 교육에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종 10년(1428)에 경남 진주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존속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세종은 이 사건을 형벌로써 다스렸지만 그것보다는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그해에 아버지인 태종대에 발행한 『효행록(孝行錄)』을 재간행하도록 신하들에게 명한다. 그러나 『효행록』에 실린 내용들이 모두 중국의 사례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4년 후(1431)에 『효행록』의 핵심 내용과 우리나라 사례를 첨가하여 집현전에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고, 세종 16년(1434)에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33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상민과 노비]은 거의 한문을 몰랐으므로 문맹률이 상당히 높았다.34 그래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내용을 알 수 있게 『삼강행실도』에는 여기에 실린 인물들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한문과 한글로 그 사실을 설명하고, 시(詩)나 찬미하는 문장(贊文)을 붙여 그 사실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까지 출판역사상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다. 책 이외의 다른 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출판은 국가권력의 상징이었다. 조정에서는 지방 수령들이 『삼강행실도』의 보급에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살펴서 근무평가의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의 구체적인 제도가 바로 효자ㆍ열녀의 포상이었다. 효자ㆍ열녀를 배출하는 집안은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여러 가지 이익과 명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35
조선 왕조는 삼강에 대해 정치적으로 세밀하게 교화를 시행하는 한편, 이 삼강의 윤리를 어겼을 때는 엄격한 처벌을 가하였다. 신하가 임금에게 항거하면 역적으로 본인은 참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중벌을 내렸고, 아들이 부모를 죽이거나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면 이를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 하여 본인은 처형되고 처자는 노비가 된다. 강상죄인이 생긴 고을의 수령은 파면되었으며, 그 고을은 강등되어 많은 불이익이 뒤따랐다.36 이렇게 백성들의 윤리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삼강오륜이 활용되면서, 그 본질이 서서히 변용(變容)되기 시작한다. 그 변용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 세종 때의 효에 대한 사례를 살펴보자.
황해도 감사가 공문을 올렸는데, “옹진(甕津)에 사는 백정(白丁) 양귀진(梁貴珍)이 나이 바야흐로 9세가 되었는데, 그 아비 인길(仁吉)이 오랫동안 급질(急疾)을 앓고 있더니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바로 낫는다는 말을 듣고 손가락을 잘라 구워 먹였던바, 그 병이 즉시 나았다 합니다.” 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효행을 표창하고, 부역을 면제시키라고 명하였다.37
위의 사례는 세종 때 단지(斷指: 손가락을 자름)를 하여 효자나 효녀로 『세종실록』에 기록된 사건이다. 세종 2년(1420)에 전라도 고산현(高山縣: 전라북도 완주군)의 효자 유석진(兪石珍)의 단지 사례가 나중에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면서도 실리게 된다. 하지만 『삼강행실도』에 실린 중국의 효자 사례에서는 단지를 찾아볼 수 없다. 조선의 효자 및 열녀 사례에서만 단지가 실려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내세운 유교 윤리는 효자·열녀가 되기 위해서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효자편에 단지 이야기가 실린 이후, 효자임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단지 행위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거의 모든 효자는 단지를 실행했다.38
『삼강행실도』에 실린 조선의 열녀 사례 역시 효자의 사례와 다르지 않다.
남양(南陽) 사람 종실(宗室) 단천령(端川令)의 아내 유씨(柳氏)는 남편이 악질(惡疾)을 앓자 다리의 살을 베어 남편의 병을 치료하였습니다.39
위의 사건은 『명종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효자의 사례와 같이 단지나 할고(割股: 허벅지 살을 베어냄)와 같은 잔혹한 신체 훼손의 방법이 열녀의 모델로 제시된 것이다. 세조대 이후 주로 열녀의 단지가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역시 세종 때 『삼강행실도』의 보급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당시에도 신체를 훼손하는 행위로 인하여 효자나 열녀로 포상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며 지나친 일이라는 반대 의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흐름은 부모와 남편을 위하는 마음에 무게 중심을 두고 이러한 행위를 지지하는 쪽으로 흘러간 것이다.
조선시대에 삼강오륜과 함께 강조한 윤리규범이 삼종지도(三從之道)40와 칠거지악(七去之惡)41이다. 여자가 따라야 하는 세 가지 길인 삼종지도는 여자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아버지나 남편, 혹은 자식을 따라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 가지 조건인 칠거지악은 일반적인 도덕규범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경우, 종족의 보존과 가문의 번성에 해를 끼치는 경우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열악한 지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악습(惡習)들이다. 삼종지도를 잘 따르고 칠거지악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조선시대 여성들의 윤리 규범이었고, 열녀로 인정받는 길이었다.
이상으로 삼강오륜의 변용과정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변용(變容)이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이든 조선이든 통치 이념에 필요한 삼강이 강조되었고, 오륜은 삼강에 포함되어 삼강이륜의 내용으로 바뀌는 부분이다. 조선후기인 정조(正祖)대에 『오륜행실도』가 발행되지만 『삼강행실도』의 압도적인 보급을 따라 가지는 못하였다. 또 하나는 삼강오륜이 정치적으로 관료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윤리규범으로서의 본질이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183호 2부에서 계속>
<대순회보>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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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교운 1장 9절 참조.
02 중국 서주(西周)시대에 적장자(嫡長子: 장남)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대종(大宗)이 되고 다른 아들들은 분봉(分封)되어 소종(小宗)이 되도록 규정한 사회제도에서 비롯된다. 주나라는 왕실의 안정과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봉건제를 실시하고 이와 함께 종법제를 실시했다. 종법제는 왕위 계승 문제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체제의 확립과도 관련이 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03 신정근, 『철학사의 전환』 (파주: 글항아리, 2012), pp.542~543 참조.
04 이상익, 『유가 사회철학 연구』 (서울: 심산, 2001), p.146.
05 일반적으로 『서경(書經)』과 『맹자(孟子)』의 편찬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서로 시간적인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경』은 춘추전국시대의 내용만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하ㆍ상ㆍ주에서 전승되어 오던 정치적인 사건과 고대 문화의 원류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전국시대 인물인 맹자의 언행을 위주로 기록한 『맹자』보다는 『서경』에 서술된 ‘오전(五典)’ 개념을 ‘오륜’의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06 『書經』, 『虞書』, 舜典: 愼徽五典, 五典克從, 納于百揆, 百揆時敍, 賓于四門, 四門穆穆, 納于大麓, 烈風雷雨弗迷.
07 『書經』, 『虞書』, 舜典: 帝曰, 契, 百姓不親, 五品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在寬.
08 『孟子』, 『滕文公』 上: 后稷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 人之有道也, 飽食̖ 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09 『朱子大全』 卷七十四,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右五敎之目. 堯舜使契爲司徒, 敬敷五敎, 卽此是也. 學者學此而已, 而其所以學之之序, 亦有五焉, 其別如.
10 안외순, 「오륜과 삼강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본 유가정치사상」, 『동양철학연구』 제44집 (2005), p.193 참조.
11 『荀子』, 「君道」 참조.
12 『荀子』, 「致仕」 참조.
13 『韓非子』, 「忠孝」 참조.
14 『呂氏春秋』, 「恃君覽」 참조.
15 『예위함문가(禮緯含文嘉)』라고도 하는 이 책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해 많은 유교 경전이 사라진 이후, 길흉화복을 점치고 미래 예언의 내용을 담고 있는 참위설(讖緯說)과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편찬된 한대(漢代)의 위서(緯書)들 중의 하나이다.
16 『白虎通義』, 「三綱六紀篇」 참조.
17 『유교대사전』, p.605 참조.
18 안외순, 같은 논문, p.191 참조.
19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서울: 예문서원, 2002), pp.72-73 참조.
20 『春秋繁露』, 제43 「陽尊陰卑」 참조.
21 『春秋繁露』, 제53 「其義」 참조.
22 『春秋繁露』, 제41 「爲人者天」 참조.
23 피터 K. 볼 지음, 심의용 옮김, 『중국 지식인들과 정체성』 (서울: 북스토리, 2008), p.539 참조.
24 『溫國文正司馬公文集』, 「疑孟」, 孟子將朝王 참조.
25 『溫國文正司馬公文集』, 「疑孟」, 齊宣王問卿 참조.
26 『孟子』, 「公孫丑 上」 참조.
27 『孟子』, 「萬章 下」 참조.
28 안외순, 같은 논문, p.198 참조.
29 『孟子集註』, 「離婁 上」 朱子註: 常始於見其有不是處耳.
30 『孟子集註』, 「離婁 上」 朱子註: 天下無不是底父母.
31 정인재, 『도덕성 회복을 위한 동양철학의 한 시론: 인륜의 현대적 해석을 중심으로』, 「철학윤리교육연구」 제10권 제21호 (1994), p.113 참조.
32 안외순, 같은 논문, pp.199-200 참조.
33 그 후에 중종 13년(1518)에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간행하고, 광해군 3년(1617)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俗三綱行實圖)』를 간행하고, 정조 21년(1729)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간행하기에 이른다.
34 조선 후기인 1690년대 경상도 대구 지역의 양반 비율은 7.4%, 상민의 비율은 49.5%, 노비의 비율은 43.1%였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노영구 옮김, 『양반』 (서울: 강, 2006), p.256.] 이로써 조선 전기의 양반과 일반 백성들의 인구 비율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35 김용옥, 『효경한글역주』 (서울: 통나무, 2009), pp.116-118 참조.
36 『유교대사전』, 1990, p.606 참조.
37 『세종실록』 세종 22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1월 17일(갑오) 2번째 기사.
38 강명관, 『열녀의 탄생』 (서울: 돌베개, 2009), p.283 참조.
39 『명종실록』 명종 8권, 3년(1548 무신 / 명 가정(嘉靖) 27년) 10월 10일(신해) 3번째 기사.
40 한대(漢代)에 편찬된 『의례(儀禮)』에서 여자의 덕으로 제시된 세 가지 일을 말한다. ①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를 따르고, ②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③ 남편이 죽고 나면 자식을 따라야 함을 말한다.
41 한대에 편찬된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나오는 남편이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 가지 조건이다.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③ 음탕한 것. ④ 질투하는 것.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 ⑥ 수다스러운 것. ⑦ 도둑질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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