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에 대한 인물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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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주우 작성일2018.10.10 조회5,032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김주우
목차 Ⅰ. 서론 |
Ⅰ. 서론
『전경(典經)』은 강증산(姜甑山) 구천상제님께서 진멸지경에 빠진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신 천지공사(天地公事)에 관한 기록이다.01 천지공사라는 종교적 행위는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상제님의 말씀 가운데는 기성 종교인 유불선의 경전(經典), 전해지는 이야기나 속담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의 기록이나 그들의 시(詩)가 있다. 특히 역사적 인물들의 시에 관해서는 그 작자나 제목을 밝혀 놓으셨는데, 간혹 작자들이 남긴 문헌을 살펴보아도 그 출처를 찾지 못하는 시들이 있다.
『전경』에 “상제께서 … 또 다시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를 외워 주시니 다음과 같으니라.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有江南楊進士 (권지 2장 27절)02라고 하셨다. 이 구절은 상제님께서 남원 양진사의 만사(輓詞)를 종도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말씀하신 남원 양진사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는 말씀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이거나 혹은 세월의 부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전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03
따라서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양진사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다. 먼저 양진사라는 인물의 성격에 대해 접근해 보기로 한다. 만시에서 양진사와 대구(對句)를 이루는 이백과 령에 대해 알아본다. 그리고 ‘남원 양진사의 만사’가 갖는 의미를 통해 인물의 성격을 파악한다. 다음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남원 양진사로 추측되는 인물을 고찰한다. 이에 기존 문헌에 밝혀진 양사언(陽士彦)과 시를 통해서 확인된 양석룡(楊錫龍)의 인물성격을 비교하였다. 양진사라는 인물을 고증하기 위해 그들이 남긴 문집(文集)과 인물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더 나아가 관련인물에 관하여 면담 조사를 병행하였다. 본고에서는 앞서 주지한 바와 같이 양진사라는 구체적인 인물을 밝히는 데 있다. 이에 만사에 담긴 의미와 상징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지 못한 것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미리 구하는 바이다.
Ⅱ. 남원 양진사의 인물 성격
남원 양진사에 대해 다양한 추측들이 가능하다. 먼저 양진사를 언급하기 이전에 그와 관련성이 있는 사람들은 만시에 나온 ‘시중이백(詩中李白)과 주중령(酒中伶)’이라 할 수 있다. 이백(李白, 701~762)은 두보(杜甫)와 더불어 중국 당나라 때 최고의 시인(詩人)일 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받들어 왔다. 그 이름은 백(白)이요, 자는 태백(太白)이다. 그는 철저한 방랑자로서 바람처럼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꿈과 열정으로 살아간 인물이다. 이백은 현재 약 1천 수의 시와 수십 편의 산문을 남겼다. 이백은 그 이름 말고도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다. 적선(謫仙), 시선(詩仙), 주선(酒仙) 또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04 이백은 ‘주선’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술에 관련하여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유작(遺作)에는 술을 주제로 한 시가 2백 수나 된다고 하니 그의 술에 대한 예찬을 짐작할 수 있다.05
유령(劉伶, 생몰미상)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와 서진(西晉)의 시인으로 자는 백륜(伯倫)이다. 패국(沛國)의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해서는 『진서(晉書)』에 ‘그는 키가 6척이었으나 용모는 못생겼다. 말수가 적었고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으나 완적(阮籍)과 을 만나고는 기쁘게 마음이 통하여 친구로 사귀었다. 늘 우주를 좁게 여기고 만물을 가지런히 보아 호방한 기상을 지녔다.’06라고 짧게 평하고 있다. 생전에 글이 많았을 것이나 현재 「주덕송(酒德頌)」 한 편이 남아 전한다. 그의 생애는 술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뒷날 흔히 취락(醉樂)을 말할 때면 으레 유령을 들곤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07 이와 같이 이백과 유령은 성격이 호방하고 어떤 곳에 구애됨이 없는데, 그 바탕에는 술을 즐겼다는 역사적 인물들이다. 양진사 또한 그들처럼 술을 잘 마시고, 문장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로 은연 중에 비교되는 인물이다.
「남원 양진사의 만사」에서 양진사라고 하면 전라북도 남원과 관련성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양(楊)씨 성(姓)을 가진 진사(進士)라는 일반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좀 더 세부적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는데, 그것은 남원이라는 지명과 양진사라는 호칭 그리고 만사 등의 상호 연관성에 주목하여 인물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남원이라는 지명을 붙인 이유는 그 인물의 실체를 확연하게 드러낸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원은 인물의 출생지나 살았던 지역을 나타낼 수도 있고, 다른 경우는 성씨의 본관(本貫)이 남원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은 호칭법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08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동족여부를 가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이다.09 이러한 사실에 전거해 본다면 남원이라는 명칭은 양진사의 본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늘날 양씨(楊氏)는 남원(南原)·밀양(密陽)·중화(中和)·청주(淸州) 등을 본관으로 하는 가문들이 있다.10 양진사는 이와 같은 본관 중에서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가문의 진사를 지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사(進士)는 조선시대 때의 관직(官職)이 아니고, 소과(小科)의 하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稱號)였다. 조선시대의 과거과목은 문과의 대과(大科)와 생원(生員)·진사의 소과(小科)가 있었다. 소과인 생원시·진사시는 사마시(司馬試) 또는 감시(監試)라고도 부르며, 합격자는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되고 또 하급관리로 등용될 길도 마련되었다. 이를테면 소과인 진사시는 부(賦) 1문제, 고시(古詩)와 명(銘)과 잠(箴) 중에서 1문제를 치르는 문과의 예비시험인 셈이다.11
조선시대 법제 상으로는 천민(賤民: 재인, 광대, 백정)이 아닌 이상 그리고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과와 예비시험인 생원·진사시는 양반이 아니고서는 거의 합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12 그렇기 때문에 양반사회인 조선에서 그들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직을 획득하여야 했고, 이에 가장 좋은 길은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지방 거주 사족이 문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울과 지방 사족(士族)간의 관직 진출의 격차는 더욱 커져 갔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지방 사족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마시이다.13 따라서 양진사가 진사라는 지위를 갖게 된 배경은 문과에 급제하기 위한 수순이었거나 아니면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처럼 양진사가 진사시에 합격하여 양반 지위를 얻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유추하면 그는 시(詩)와 문장(文章)에 능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만사(輓詞)는 만장(輓章)과 같은 말로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14이다. 즉, 죽은 자를 애도하고 애통한 마음을 시를 지어 헌사하였는데, 그렇게 지어진 시를 흔히 만시(輓詩)라고 한다. 이런 사적이고 자발적인 감정의 발로로서의 만시는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를 기리는 도망시(悼亡詩), 동기의 죽음을 애도한 곡형제시(哭兄弟詩), 자식의 죽음을 애도한 곡자시(哭子詩), 벗과 동료의 죽음을 애도한 도붕시(悼朋詩) 등을 대표적 유형으로 들 수 있다. 그 외에 스승, 군주, 노비 등이 자주 찾을 수 있는 대상이다.15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독특한 유형인 자만시(自挽詩)가 있다.16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면 양진사의 만사는 어떤 특정 인물이 양진사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이다. 그 특정 인물이란 형제, 제자, 친구 중에 한 명일 것이다. 물론 지은이가 양진사 본인일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양진사라는 인물이 남긴 문집이나 그와 연관된 인사들 중에서 저작인 만시를 검토하면 만사의 저자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남원 양진사의 만사는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양씨 성의 진사에 대한 애도시’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양진사는 이백과 유령처럼 술 마시는 것을 즐기고, 문장 또한 뛰어난 사람으로 도가적 은자(隱者)와 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모습을 미루어 봤을 때 그는 본인 스스로 은일(隱逸)의 삶을 지향했거나 후대로부터 그러한 평가를 받은 인물일 것이다.
Ⅲ. 남원 양진사의 인물 고증: 양사언과 양석룡의 성격비교
남원 양진사라는 인물에 대해 일각에서는 양사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양사언의 『봉래집』에는 「남원 양봉래의 자만시」라는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17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면 『전경』의 「남원 양진사의 만사」는 양사언의 시가 아니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남원 양진사는 양사언이 아닌 다른 사람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양진사로 널리 알려진 양사언과 또 다른 인물인 양석룡을 비교함으로써 양진사의 성격에 부합되는 인물 고증이 가능할 것이다. 이에 그들의 인물 성격을 출생과 본관, 관직, 사우관계, 문장과 만사로 구분하여 비교한다.
1. 출생(出生)과 본관(本貫)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은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서예가로 유명하지만 생애와 행적에 대해 자세히 전하는 기록은 없다.18 다만 「봉래양사언선생묘갈(蓬萊楊士彦先生墓碣)」이나 『청주양씨대동보(淸州楊氏大同譜)』에서 기록된 바를 중심으로 전기를 이해할 수 있다. 『청주양씨대동보』에 따르면 양씨(楊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원(元)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른 양기(楊起)가 원나라 순제의 명을 받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충령왕비)를 배종(陪從)하여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에 들어와서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양씨(楊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고려의 충선왕(忠善王)이 그를 상당백(上黨伯)에 봉하고 관적(貫籍)을 하사(下賜)하였다. 상당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그런 연유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淸州)로 삼게 되었다.
양기의 후손인 양치(楊治, 1400~1485)는 세종조에 김종서(金宗瑞)를 도와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북방을 지켰던 인물이다. 그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가 타살되고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포천의 천주산 아래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청주양씨의 후손이 포천에 거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양치의 손자인 양희주는 문화 유씨와 결혼하여 양사언과 양사준, 양사기 삼형제를 낳았다. 양사언은 조선 중종 12년(1517)에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그의 호들은 도가적 색채가 드러나는데, 봉래는 금강산에 매료되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양석룡(楊錫龍, 1800~1879) 또한 가계와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남원양씨대동보(南原楊氏大同譜)』에 따르면 남원양씨의 시조는 양경문(楊敬文)으로 고려시대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소목(昭穆)19을 빠뜨렸고 다만 9세 양이시(楊以時)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민왕 때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낸 양이시를 중조로 삼는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용재기(濟用財記)』에서도 양이시는 남원 사람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남원에서 여러 대에 걸쳐 세거(世居)해 온 토착 성씨로 알려져 있다.20
고려 말 우왕 때 양이시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었던 아들 양수생(楊首生)이 사망하게 되었다. 그때 양수생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원 교룡산 아래 남편의 옛집에서 양사보(楊思輔)를 낳았다. 이후 남원에 왜구가 쳐들어 왔고, 그 난리를 피해 지금의 순창군 동계면(東溪面) 귀미리(龜尾里)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성장한 양사보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음사(蔭仕: 문과를 거치지 않고 얻은 관직)로 벼슬길에 나가 함평 현감을 지내는 등 남원 양씨의 가문을 일으켰다.
양사보의 16세손인 양석룡은 지복(志馥)과 어머니 평강 채씨의 장남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현 옥제리에서 출생하였다. 양석룡의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字)는 운익(雲翊), 호(號)는 호은(壺隱)이다. 그의 호는 ‘술병에 숨어 살았다’는 뜻인데 워낙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은자(隱者)와 같은 삶을 동경하여 스스로 그 호를 지어서 불렀다.21
2. 관직(官職)
양사언은 그의 나이 24세(1540)에 「단사부(丹砂賦)」를 지어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후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1546년에 문과에 「사기책(士氣策)」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함흥부윤(咸興府尹) 등을 거쳤는데, 그가 떠난 고을마다 주민들은 그의 공적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양사언은 1560년에 평창군수(平昌郡守)에 제수되었고, 갑자년(1564) 정월에는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 다시 내직(內職)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종부사정(宗簿寺正)이 되었으나 외직을 자원하여 철원(鐵原)·회양(淮陽)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그는 말년인 1586년에 안변부사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효제(孝悌)로 교화(敎化)하여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북방의 병란(兵亂)을 대비하고 군초(軍草)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한 상황을 극복하는 등의 예지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묘소)의 화재로 인하여 그해에 해서(海西: 현재 황해도 지역)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곳에서 1588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2
양사언은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40여 년간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는 당대 현실에 대하여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저항이나 술에 만취된 채 시대를 비방하고 세상을 경시하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다만 관직에 있으면서도 속세에서 일탈하여 물외(物外)에서 한가하게 자적(自適)한 생활을 갈구하였다.23
양석룡의 관직생활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남원양씨대동보』에 ‘만년에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하여 철종 9년(1858)에 59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장의(掌議)로 뽑혀 수학하였다.’라는 기록뿐이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따르면 생원진사시에 ‘철종(哲宗) 9년(18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2위’를 했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또 일찍이 여러 제자들이 그의 가난함을 민망히 여겨 전라도 부안의 현감(縣監)을 시키려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양석룡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어찌 말(斗)만한 작은 고을 하나로 소인을 대감이라 하겠는가? 빈천을 편안히 하여서 내 뜻대로 살겠다.(豈以斗小一邑, 稱小人于大監乎, 寧貧賤以肆志)”라고 하니 여러 재상들이 그를 더욱 높이 여겼다는 일화가 전부이다.
3. 사우(師友) 관계
양사언이 교유한 인물들은 모두 고향인 포천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신분적 한계가 활동의 범위를 적지 않게 제약했다고 여겨진다. 양사언은 격암 남사고(南師古),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24 이는 남사고의 문하생인 양사언의 공부한 내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 문사들과 교류를 통해 그의 삶과 시서(詩書)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양사언과 교류한 인물로 먼저 동년급제자이고 포천 출신인 허엽(許曄, 1517~1580)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허엽의 권유로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유명한 이달(李達, 1539~1612)과 친분이 두터웠다. 이달과 양사언은 금강산을 함께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다. 이때 두 사람은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여 양사언이 스스로 ‘봉래선인(蓬萊仙人)’이라 하고 이달을 ‘이적선(李謫仙)’이라 칭하였다. 그 밖에 교유한 인물은 임진왜란의 승병장인 청허(淸虛, 호는 휴정), 화암상종사(花巖尙宗師) 등의 승려들도 포함된다.25 이처럼 양사언의 호방한 기질 만큼이나 사우관계에 있어서도 다양한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이에 조경(趙絅, 1586~1669)은 묘갈에 “원정이 배태하여 이인이 태어났네. 속세나 방외를 가리지 않고 그 정신 마음껏 노닐었네(元精胚胎 篤生異人 方之內外 遊斯其神).”라고 하여 양사언의 자유로운 경지를 평하고 있다.
양석룡의 초년시절에 대한 사우관계는 찾을 수 없다. 그의 「호은진사공행장(壺隱進士公行狀」26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양석룡은 중년에 상경하여 서울의 명사들과 사귀는 한편 당시 세도가인 장동(壯洞)의 안동 김씨의 집안에서 김씨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로는 영의정을 지낸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을 비롯하여 좌찬성 김병기(金炳冀), 예조판서 김병필(金炳弼), 이조판서 신석희(申錫禧) 등이다.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하였다. 술에 취하면 서울 장안을 쓸고 다니다가 아무 데나 쓰러져 눕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은 평소와 같이 술에 취하여 거리에 쓰러져 누워 있는데 순라군(巡邏軍)이 그를 발견하고 연행하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호남의 양진사가 서울 달에 취하여 죽었노라(湖南楊進士 醉死長安月).”이라고 쓴 쪽지를 주면서 그것을 상부(上府)에 전하라고 하였다. 순라군이 그것을 보고하자, 이것을 상부에 있던 정승이 “호남의 양진사가 서울의 달에 취하여 누워 있노라(湖南楊進士 醉臥長安月).”고 고쳐서 그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양석룡이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세우니 여러 재상들이 말리지 못하고 모두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한(漢)나라의 소광(疏光)27과 같은 영광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또 당시의 아이들은 송나라 아이들이 군실(君實)이를 외우듯이 그의 이름을 외웠다고 전한다. 군실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字)인데, 그는 인망이 높아 아이들도 ‘군실’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다녔고, 하인이나 종들까지도 그 성명을 알고 있었다.28 양석룡 또한 당시의 사대부뿐만 아니라 길가의 아동, 주막의 할머니 등 모든 이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양석룡과 교류한 사람들이 직위가 높은 사대부들이며 또 당시의 고관들이 그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를 알 수 있다.
4. 문장(文章)과 만사(輓詞)
양사언의 삼형제는 중국의 미산(眉山)의 삼소(三蘇, 소식의 父子)에 비유될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양사언은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에 서얼 가운데 출세한 현인(賢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신분상의 제약을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극복한 입지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시(詩)·서(書)에 뛰어난 재주를 겸비한 인물로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29
양사언의 저술 및 작품으로는 그의 아들 만고(萬古)가 초고를 바탕으로 수집·편찬하여 간행한 『봉래시집(蓬萊詩集)』이 전한다. 당시 사람들은 시를 평하여 “신선의 흥취가 나타나 있고 세속에서 벗어났다(仙標拔俗)”고 하였다. 양사언의 시를 주제별로 분류하면 자연·명승지 57편, 술회(述懷) 57편, 차운(次韻) 44편, 증시(贈詩) 43편, 제시(題詩) 15편, 송별(送別) 14편, 만사(輓詞) 13편, 제진(製進) 12편, 교분(交分) 10편 순으로 자연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작품과 자신의 회포를 노래한 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30 그가 남긴 13편의 만사 중에는 자기 자신을 애도한 만사 즉, 자만시는 찾을 수 없다.31 양사언에 대한 만사는 그의 친구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이달(李達)의 문집인 『손곡집(蓀谷集)』에 있다. 이달은 「곡양봉래(哭楊蓬萊)」 “知是人間尸解身 蓬萊海上東歸路 疑有碧桃千樹春.32”라는 시를 통해 양사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양석룡은 『호옹집(壺翁集)』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로서는 그의 글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호은진사공행장(壺隱進士公行狀)」에 따르면 “양선생은 문장으로 세상에 울려 재상들의 스승이 되고 벗도 되었다. 양석룡은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남달라서 천자문을 배우는 데 한 달 남짓 걸렸을 뿐만 아니라 재예(才藝)가 뛰어나고 학문이 출중하였다. 젊어서 공부할 때 문장이 익어가기가 벌레가 나뭇잎을 먹어 가듯하여 표(表)와 시(詩)에 능통하였다”라고 한다. 또 이조판서인 신석희는 “선생은 활달한 풍(風)이 뛰어나서 젊어서부터 벼슬한 집의 명사(名士) 사이에 놀았다. 업(業)은 이미 송현(宋賢)의 종학(種學)을 이루었으며 뜻도 주학(朱學)을 이었기에 사대부들이 모두 함께 놀기를 원했다”라고 스승을 평가하였다. 이러한 후대의 기록과 평가를 감안한다면 양석룡이 남긴 문집(文集)을 확인할 수 없지만 학문의 경지와 문장이 훌륭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원양씨대동보』에서 양석룡의 자만시는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귀향할 때 한성우판 신석희, 판서 김병필, 영상 김병국, 영상 김병학 등이 쓴 송별시 몇 편과 영상 김병학이 쓴 한 편의 만시가 있다. 그가 만년에 순창의 귀미로 돌아와 지내다가 향년 69세(1868)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고 만사(輓詞)를 지어 조의를 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김병학이 지은 만사(輓詞)가 유명하다.
김병학은 「挽楊上舍」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哭湖南楊上舍 芳草雨蕭蕭”33라고 슬픔을 애도하였다. 이 시의 제목이 ‘만양상사(挽楊上舍)’인데, 이 상사(上舍)란 진사(進士)와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제는 ‘양진사의 만사’이다. 이 만사는 『전경』의 ‘남원 양진사의 만사’와 비교된다. 두 시의 차이는 又哭湖南楊上舍와 又有江南楊進士(『전경』)로 몇 글자의 착간이 나타난다.
Ⅳ. 맺음말
남원 양진사라는 인물을 고증하기 위해 양사언과 양석룡에 대해 고찰하였다. 두 사람은 조선시대 전기와 말기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로 시(時)와 문장(文章)에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차이만큼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삶과 역할은 확연히 달랐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양씨(楊氏)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양사언은 청주, 양석룡은 남원이 본관이다. 관직생활 또한 차이를 보인다. 양사언은 진사시와 문과를 급제하고, 7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여 품계가 통정대부(정3품)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에 반하여 양석룡은 진사시에 합격한 것이 전부였으며 제자들에 의해 현감의 관직을 제의받지만 사양하고 진사라는 신분만을 유지했을 뿐이다. 양사언은 남사고, 이지함 등과 사승관계를 유지하지만 그의 제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마도 40여 년간의 관직의 책무를 수행하는 한편, 또한 끊임없이 탈속을 꿈꾸며 승경(勝景)을 찾아 나섰던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이미지는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추수(追隨)를 받게 된다. 그러나 양석룡은 스승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제자들이 영상(領相)과 판서(判書) 등의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제자들의 힘에 따라 좋은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이백과 유령처럼 그 성격이 호방하여 얽매임이 없고, 술을 대단히 좋아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양사언과 양석룡은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생존 당시에 이미 그 명성이 대단하였다. 하지만 삶의 태도에서 보여지듯이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각인시키려는 욕구는 없었다. 그들이 남긴 자만시는 찾을 수 없고, 사후에 친구나 제자들이 지은 애도시만 있다. 이달(양사언의 친구)이 쓴 만사와 김병학(양석룡의 제자)이 쓴 만사가 유명한데, 특히 김병학이 쓴 만사는 『전경』의 「남원 양진사의 만사」와 비교하여 내용에서 몇 자의 착간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양진사라는 인물은 본관이 남원이고,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이 없이 진사로 불린 양석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남원 양진사의 만사」는 조선말기 영의정이었던 김병학이 쓴 만시이다.
<대순회보>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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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교운 2장」은 천부의 계시로 종통을 계승하신 조정산(趙鼎山) 도주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02 시는 이백이고 술은 유령이라. 청산에 들어가니 적막할 뿐이도다. 강남 양진사가 또 떠나가니 자고새 우는 방초 길에 비는 부슬부슬 내린다.
03 상제님 화천 이후에 기록된 『증산천지공사기』나 『대순전경』의 자료를 살펴보면 『증산천지공사기』에는 양진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대순전경』의 초판에 … 南原 楊進士의 自挽詩를 외우시니 이러하니라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有江南楊進士 (제12장 화천 20절)라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그 후 2판도 내용은 같다. 그러나 3판에 … 南原 楊蓬萊의 自挽詩를 외워주시니 이렇하니라 “詩中李白酒中伶 一去靑山盡寂寥 又有江南楊進士 라고 하여 ‘양진사(楊進士)’가 ‘양봉래(楊蓬萊)’로 구체화되었다.
04 이창룡, 『이백』, 건국대출판부, 1994, p.13 참조.
05 안금란, 「이백의 음주시 연구」, 순천향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p.1.
06 「유령전(劉伶傳)」,『이십오사(二十五史)』2, 상해고적출판사, 1995, p.1404.
07 이종은, 「죽림칠현과 죽고칠현의 대비적 고찰」, 『한국학논집』17집,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1997, p.49.
08 박성호, 「본관의 소멸과 통합 현상에 관한 연구」,『동방학』12집,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2006, p.194. : “옛 문헌을 볼 때 어떤 인물에 대한 내용 중에 ‘OO人’이라고 기록된 것을 쉽지 않게 대하게 된다. 이때 OO에는 인물의 본관을 기재하고 있다.”
09 가평이씨 대종회(http://gapyeonglee.kr), 뿌리탐구.
10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1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12 장재천,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시험문화의 고찰」,『한국사상과 문화』39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7, p.131.
13 박진철, 「조선시대 지방 거주 사족의 사회적 지위 유지 노력과 사마시」,『이화사학연구』41집, 이화사학연구소, 2010, p.142.
14 표준국어대사전(http://www.korean.go.kr).
15 안대회, 「한국 한시의 죽음 소재」,『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p.51. ; 안대회, 「한국 한시와 죽음의 문제」, 『韓國漢詩硏究』3, 태학사, 1995, p.53.
16 임준철, 「조선시대 자만시의 유형적 특성」, 『어문연구』38권,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0, p.379.
17 김탁, 「증산 강일순이 인용한 한시 연구」, 『월간 천지공사』82호, 범증산교 연구원, 1997, p.17.
18 양사언은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석봉(韓石峯)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書藝家)로 불렸다.
19 표준국어대사전(http://www.korean.go.kr) :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20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21 교육자·향토 사학자인 양만정(楊萬鼎)씨의 증언.
22 홍순석, 「봉래양사언선생묘갈」, 『양사언의 생애와 시』, 강남대 출판부, 2001, pp.358~362.
23 홍순석, 「봉래 양사언의 시 연구」, 『동양학』30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0, p.91.
24 최해종, 『근역한문학사』, 청구대학, 1958, p.289.
25 홍순석, 『양사언의 생애와 시』, 강남대 출판부, 2001, pp.32~44 참조.
26 『남원양씨대동보(南原楊氏大同譜)』, 회상사, 1998, pp.426~431 참조.
27 소광(疏光)은 중국 한나라 선제(宣帝) 때 태자의 스승인데 훗날 태자가 황제가 되면 엄청난 권력과 명예를 누릴 수 있는데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떠났다고 한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소광의 처신을 높이 여겨 모범으로 삶고자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일찍이 중국에는 이소산금(二疎散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임동욱, 『고사성어 대사전』, 시대의 창, 2008 참조.)
28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중국 북송(北宋)의 정치가ㆍ학자로 자는 군실(君實)이다. 소식(蘇軾,
1037~1101)이 지은 「사마온공독락원(司馬溫公獨樂園)」의 내용 중에 “ … 兒童誦君實 走卒知司馬 持此欲安歸(아이들도 선생의 자 ‘군실’을 외우고, 하인들도 선생의 성 ‘사마’를 안다. 이런 명성을 지니고서 선생은 어디로 가시려는가) …”라는 내용이 있다.
2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지음, 『국조인물고』14집,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3, pp.35~39.
30 홍순석, 『양사언의 생애와 시』, 강남대 출판부, 2001, p.47 참고.
31 13편의 만사는 차손곡만현학(次蓀谷挽玄鶴), 곡남시백(哭南施伯), 남참판만사(南參判挽詞), 부인만(婦人挽), 폐비신씨만(廢妃愼氏挽), 퇴계선생만사(退溪先生挽詞), 외숙모유씨만(外叔母柳氏挽), 백생원만사(白生員挽詞), 우인제문(友人祭文) 등이 있다.
32 한국한시학회, 『한국한시작가연구5』, 태학사, 2000, p.378. : “인간 세상에 내려온 신선인 줄 본래 알았으니 슬퍼하며 부질없이 수건을 적실 필요 없네. 그대 동녘바다의 봉래로 돌아가는 길에는 벽도화 수천 그루가 활짝 핀 봄이리라.”
33 시는 이백이고 술은 유령이라. 청산에 들어가니 적막할 뿐이도다. 호남 양상사(진사)가 또 떠나가니 자고새 우는 방초 길에 비는 부슬부슬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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