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대천일해에 무근목이 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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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8.10.11 조회4,737회 댓글0건본문
차선근(대순종교문화연구소)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 있고
가지는 열두 가지 잎은 三百六十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日月)이 희도다.
九·十월 세단풍(細丹楓) 바람 잡아 탄금(彈琴)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를 일삼더라.”01
이 시조는 상제님께서 1908년이 저물어가는 겨울, 교동(校洞)02에 있는 문공신의 집에 들르시어 그에게 외워주신 것이다.
이 시조의 깊은 의미, 그리고 상제님께서 이 시조를 통해 전하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글은 단지, 이 시조와 관련이 있는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는 데 목적을 둔다. 구체적으로는 시조의 출전 확인, 시조의 자구(字句)가 가지는 외형적인 뜻, 그리고 이 시조를 외워주신 시점을 전후한 문공신의 행적을 살피는 것이다.
1. 시조의 종류
시조라는 것은 삼장(三章) 즉, 3·4·3·4글자로 이루어진 초장(初章), 3·4·3·4글자로 이루어진 중장(中章), 3·5·4·3글자로 이루어진 종장(終章)이라는 정해진 틀에 얹히기 마련이다. 삼장의 모든 글자 수를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장의 첫 세 글자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시조를 평시조(平時調)라고 하는데, 시조에는 이 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다.
우선 평시조 2개 이상을 한 묶음으로 하는 시조는 연시조(聯時調)라고 부른다. 평시조의 초장이나 중장 가운데 어느 하나가 무제한으로 길어져 있고 종장은 평시조와 같은 형식의 시조도 있는데, 이것을 엇시조(旕時調)라고 한다. 또 초장이나 중장이 무제한으로 길고 종장마저 길어져 있는 형식의 시조도 있으니, 이것을 사설시조(辭說時調)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시조의 종류를 염두에 두면서, 상제님께서 외워주신 시조를 삼장으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초장)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있고
가지는 열두 가지 잎은 三百六十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日月)이 희도다.
(중장) 구시월 세단풍(細丹楓) 바람잡아 탄금(彈琴)하니
(종장)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를 일삼더라.
이 시조는 초장이 3·4·3·4글자의 형식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다. 따라서 엇시조에 해당한다.
2. 시조의 출전
이 엇시조 가운데 초장의 한 부분이, 18세기 초엽에 이형상03이 편찬한 시조집인 『악학습령(樂學拾零)』04에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大川 바다 가온 리 업슨 남기 나셔
(큰 바다 한 가운데 뿌리 없는 나무가 났으니)
가지 열 둘이요 닙흔 삼 예순이라
(가지는 12개요, 잎은 360개로다)
그 남게 여름이 열니되 다만 둘이 열녓더라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데, 다만 두 개만 열리더라)
영남대학교 심재완(沈載完) 교수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조들을 모아 편찬한 『정본시조대전(定本時調大全)』에 따르면, 이 시조의 작가는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다.05 김춘택의 약력을 소개하자면, 그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이다. 그의 집안은 서인 노론의 중심 명문가였으며,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그의 작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도 오르지 않았으나,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정본시조대전』에는 김춘택의 또 다른 시조가 전하는데, 이 시조는 속세의 지저분한 일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의 인생철학을 잘 보여준다.
낙양성리(洛陽城裏) 방춘화시(方春和時)에 초목군생이 개자락(皆自樂)이라. (낙양성 안에 봄이 찾아드니 초목과 만물이 모두가 기뻐하노라)
관자(冠者) 오륙인과 동자 육칠 거느리고 문수중흥(文殊中興) 백운봉(白雲峰) 등림(登林)하니 천문(天門)이 지척이라. 공북(拱北) 삼각(三角)은 진국무강(鎭國無疆)이오. 장부의 흉금에 운몽(雲夢)을 삼켰는 듯 구천은폭(九天銀瀑)에 진영(塵纓)을 씻은 후에 행화방초(杏花芳草) 석양로(夕陽路)로 답가행휴(踏歌行休)하야 태학(太學)으로 돌아오니 (갓 쓴 이 오륙 명과 동자 육칠 명을 거느리고 문수중흥의 백운봉에 올라보니 하늘의 문이 지척에 있도다. 북쪽의 삼각산은 나라를 지켜주는 장한 것이로다. 장부의 가슴에 묻혀있는 부질없는 꿈을 구천은폭 폭포수에 깨끗이 씻어낸 후, 살구꽃 향기로운 풀냄새 나는 석양 비친 길로 장단 맞추어 노래하며 가다 멈추다 하면서 성균관으로 돌아오니)
증점(曾點)의 영귀고풍(詠歸高風)을 미쳐 본 듯하여라.06 (증점의 영귀고풍07을 마치 보고 온 듯하여라.)
하지만 당대의 혼란한 시국은 인간세상을 멀리하고 자연과 벗 삼고 싶었던 김춘택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숙종 때인 1689년에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는 충격적인 상황을 맞자 왕가의 인륜이 무너졌다고 생각한 김춘택은 폐비복위운동을 앞장서 벌이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고 제주 등지에서 유배당하는 생활을 한 끝에 한(恨)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170년이 지난 1886년에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은 고종에게 김춘택을 이조판서로 추증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김춘택은 선정(先正)의 후손으로서 경서(經書)에 대한 학문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으니, 그가 저술한 『주자시설(朱子是說)』 및 『설학강리(說學講理)』를 보면 그 연원과 학문의 경로가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문장이 풍부하고 의론이 정직하여 가난한 선비로 있으면서도 재상의 후보에 올랐습니다. 융성하던 숙종 때 외척으로서 왕실과 연결되어 의리를 주장하고 풍속과 교화를 수립했는데, 여러 간사한 자들의 모함에 빠져 세 번 옥에 갇히고 다섯 번 경상도의 바닷가에 귀양 갔습니다. 갑술년(1694)에 중전(인현왕후)께서 다시 회복되실 때 남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몰래 도와주었고, 그 뛰어난 충성심과 바른 의리로 윤리와 기강을 부지하였으니, 백 대에 걸쳐 영원히 말할 만합니다. 그러한 학문이 있고 지조를 지니고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높이고 표창하는 데 빠진 것은 실로 조정의 흠사(欠事)이니, 특별히 정경(正卿) 벼슬을 추증하는 동시에 시호(諡號)를 주고 체천(遞遷: 4대 봉제사 받는 것이 끝나 신주를 옮겨 모시는 일)하지 않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08
이와 같이 김춘택은 사후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고종은 그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면서 2년 뒤에는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도 내려 주었다.09
김춘택이 ‘大川 바다 …’로 시작하는 시조를 언제, 또 어떤 배경이나 의도에서 지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본시조대전』에도 이 시조의 작가가 김춘택이라는 사실만 적혀있을 뿐이다. 다만, 이 시조의 주제가 인현왕후의 폐출과 같은 당대의 정치적인 현안이나 세상사에 대한 김춘택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 혹은 자신이 처한 처지를 노래한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은 분명하다.
이 시조의 초장을 보면, 큰 바다에 뿌리 없는 나무가 생겨나서 서 있다는 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이 나무는 뿌리(근본)가 없는 나무에 불과했지만 홀로 서서 큰 바다라는 주변의 척박한 환경을 오롯이 이겨내고 12달 360일을 외롭게 버텨 가지를 뻗치고 잎을 피워내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법이건만, 그래도 이 나무는 갖은 노력 끝에 열매 2개를 맺는다. 다만 가지와 잎을 만들며 애쓴 그간의 노고를 생각하면 열매가 2개라는 것은 좀 실망스럽기는 하다. 여기에서 이 시조가 지닌 키워드가 외로움과 고독, 불초함, 강인한 불굴의 의지와 노력, 그리고 성취, 하지만 약간은 아쉬움이라는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필자는 이 시조가 나타내는 외로움, 이겨내려는 의지 등의 정서가 유배로 점철된 그의 일생과 관련이 있다는 점, ‘뿌리 없는 나무’라는 어휘가 유배를 당한 불초한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특히 큰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다는 표현이 그의 유배지였던 제주도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시조는 그가 제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춘택은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면서 고고하게 살고 싶었으나 당쟁에 말려 거의 한평생을 불우하게 지냈다. 그는 외롭고 힘든 유배지 생활을 겪으면서 『주자시설』과 『설학강리』라는 두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당대의 천재로 불릴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그이고 보면, 고작 두 권에 그친 저술은 아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춘택은 이런 그의 한(恨) 많은 일생을 이 시조로 읊어 낸 것일지 모른다.
상제님께서 외워주신 엇시조 가운데 초장의 한 부분은 출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다른 중장과 종장은 특별히 출전이랄 게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중장의 ‘구시월 세단풍’이나 ‘탄금’, 종장의 ‘귀촉도 불여귀’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흔히 즐겨 쓰는 문구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현재까지 찾을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한다면, 상제님께서는 김춘택의 시조와 당시 문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문구를 종합하여 하나의 엇시조를 만드신 듯하다.
3. 시조 자구(字句)의 외형적인 뜻
① 상제님께서 외워주신 엇시조의 초장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있고 가지는 열두 가지 잎은 三百六十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日月)이 희도다’는, 김춘택 시조의 초장과 중장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종장은 ‘뚜렷이 일월이 희도다’10로 대체하고 있다.
초장의 전체적인 의미는 큰 바다에 뿌리 없는 나무가 떠 있는데, 이 나무는 근본도 모르는 불초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홀로 서서 큰 바다라는 주변의 척박한 환경을 오롯이 이겨내고 12가지와 360잎을 피워내었으니, 거기에서 일월의 밝음과 고결함이 드러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② 이 엇시조의 중장 ‘구시월 세단풍(細丹楓) 바람잡아 탄금(彈琴)하니’는 9월과 10월의 시원한 단풍 바람으로 가야금을 탄다는 의미이니, 마치 풍류를 노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시월 세단풍’이라고 하면, 구월과 시월에 드는 고운 단풍이라는 뜻으로 당장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얼마가지 않아 곧 저물고 흉하게 되고야 말 것임을 암시하는 속담이다.11 따라서 지금은 시원하고 아름다우며 즐겁지만 곧 좋지 않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게 중장의 전체적인 의미이다.
③ 이 엇시조의 종장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歸蜀道不如歸)를 일삼더라’는 구월과 시월의 곧 시들어버릴 단풍바람으로 가야금을 켜 보니, 그 가야금 소리는 귀촉도가 우는 소리인 ‘불여귀’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귀촉도란 두견이(혹은 접동새)를 말한다. 두견이는 뻐꾸기과의 새로 낮에 활동하는 주행성 조류이다. 대개 귀촉도를 소쩍새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소쩍새는 올빼미과의 새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조류이며 두견이와는 생김새도 다르다. 흔히 두견이(귀촉도)가 우는 소리를 ‘불여귀’라고 표현하는데, 그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촉나라 망제(望帝)의 전설이 있다.
중국의 『촉왕본기(蜀王本紀)』, 『화양국지(華陽國志)』,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등에 전해지는 민담에 따르면, 옛날 촉(蜀)나라에 이름은 두우(杜宇), 제호(帝號)는 망제라는 임금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지나고 있을 때, 강에 빠져 죽은 듯한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났다. 망제가 그에게 물으니 “저는 형주에 사는 별령(鱉靈)으로 잘못해서 강에 빠졌는데, 어떻게 흐르는 강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망제는 하늘이 자신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 준 것이라 생각하고는, 별령에게 집과 벼슬을 내리고 장가도 들게 해 주었다. 별령에게 딸이 생기고 장성하자 그는 그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장인인 별령에게 모든 나랏일을 맡긴 채 밤낮으로 별령의 딸과 놀았다. 그 사이에 별령은 국권을 장악하여 망제를 내 쫓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타국으로 쫓겨난 망제는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온종일 울다가 지쳐서 죽었다. 한 맺힌 망제의 영혼은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돌아가고 싶다는 뜻인 ‘불여귀(不如歸)’를 울부짖었으며, 목청이 터져 흘린 피는 두견화 즉 진달래꽃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두견이는 ‘촉혼(蜀魂)’ 또는 ‘원조(怨鳥)’, ‘두우(杜宇)’, ‘귀촉도’, ‘망제혼(望帝魂)’ 등으로 불린다.12
두견이의 울음소리는 시끄럽고 둔탁한데, 가만히 들어보면 상당히 구슬프게 들린다. 두견이의 울음소리에서 촉나라 망제의 애끓는 울음소리를 연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두견이의 울음소리, 즉 귀촉도가 ‘불여귀’ 하고 우는 소리는 예로부터 동양 시가문학에서 슬픔을 표현할 때의 도구로 많이 활용되었다.
따라서 이 엇시조의 종장은 단풍바람으로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는 지난날을 후회하는 가슴 절절한 슬픔과 애끓는 한(恨)을 말하는 소리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상제님께서 외워주신 이 엇시조의 전체적인 맥락이 아닐까 싶다.
???? 지금까지 서술한 초장과 중장, 종장의 외형적인 모티브를 다시 요약해보도록 한다.
첫째, 초장은 뿌리 없던 나무가 큰 바다 한가운데서도 홀로 우뚝 서서 고난을 싸워 이겨 가지와 잎을 뻗어 내었으니 참으로 훌륭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중장은 9월과 10월에 들어 그 나무 사이로 부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단풍바람에 가야금을 연주하며 한껏 멋을 부려보지만, 정작 구시월 가을의 단풍바람은 곧 시들어버릴 암울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종장은 그 나무 단풍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는 즐거움의 소리가 아니라 귀촉도가 ‘불여귀’ 하고 우는 슬픔과 후회, 한탄의 소리라는 것이다.
이 외형적인 모티브는 필자의 주관적인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확정적인 해석은 결코 될 수 없다.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전하신 말씀은 상징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자구의 해석에만 매달릴 경우 자칫 그 진의를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이 엇시조의 외형적인 모티브를 짐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어떤 다른 심오한 뜻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상제님께서 “이제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13 “대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편하리라. 닥쳐오는 일을 아는 자는 창생의 일을 생각하여 비통을 이기지 못하리라.”14고 하신 것과 연관시켜서, 이 엇시조는 후천 가을이 도래하지만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많은 중생들의 한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4. 문공신의 공사 참여와 1908년 겨울 이후 그의 행적
① 이 엇시조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자료로서 문공신의 자취, 특히 1908년 이후 그의 행적을 살펴보도록 한다.
문공신은 1879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용남(用南)이고 결혼한 뒤에 공신(公信)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5 일찍이 그는 천주교와 동학에 차례로 입문하여 열렬히 활동하였으나 마음에 차는 것이 없자, 1907년 가을 무렵에 21일 동안 관운장에게 기원하는 모종의 주문을 읽었다. 마지막 날 저녁이 되자 ‘남쪽으로 가라’는 글이 허공에 보였고, 마침 얼마 안 있어 어떤 사람이 남쪽 순창 회문산 밑에 이인(異人)이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문공신은 즉시 집을 나서 회문산으로 향했고, 순창 농암마을16의 한 주막에서 종도들과 같이 계시는 상제님을 뵙게 되었다. 당시 상제님께서는 사흘 동안 그곳에 머물고 계시던 중이셨다. 상제님의 언행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 본 그는 신심(信心)이 생겨 종도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때 상제님께서 “이 좌중에서 누가 천 냥을 내어놓겠느냐?” 하시니, 그가 나서며 흔쾌히 공사에 쓰일 비용 1000냥을 올렸다고 한다. 문공신은 400여 석 정도의 재산을 지니고 있었으니17 대략 300마지기 정도의 논을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당시는 서른 마지기만 가져도 하인 서너 명은 넉넉히 부리는 중농(中農)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문공신은 천석꾼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읍면 단위에서는 최고 부자 축에 속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너 달 동안 문공신은 상제님을 추종하면서 마장군 공사,18 후천 음양공사,19 역도 조정 공사,20 물화상통 공사,21 천지개벽시대 전쟁 공사22 등 여러 공사를 적극적으로 받들었다.
② 1907년 12월 하순, 문공신 집이 있는 교동에 머무시던 상제님께서는 천자신(天子神)과 장상신(將相神)을 불러들여 백의군왕과 백의장군 도수를 보시고자 하셨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관액을 겪고 백의종군했던 일화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백의군왕·백의장군 도수를 보려면 필연적으로 관액이 따라야 했다. 마침 교동의 면장과 이장이 세금을 걷으려 왔는데, 상제님께서는 다짜고짜 그들에게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나뇨!” 하고 외치셨다. 물론 이것은 공사에 필요한 관액을 불러들이기 위함이셨다. 세금을 걷으러 왔다가 ‘천하를 바로 잡을 것’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들은 면장은 크게 놀라 ‘이 사람들이 무언가 나라를 뒤엎을 큰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즉시 고부 경무청에 달려가 고발하였다.
이로부터 상제님과 문공신을 비롯한 21명의 종도들은 1907년 12월 25일 밤에 체포되고 고부 경무청에 감금되어 고초를 당하는 고부 화액을 겪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의 활동이 활발했고23 의병의 혐의를 쓰면 사실 여부에 상관이 없이 바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종도들은 벌벌 떨었다. 종도들 가운데 문공신은 순검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죽을 위기까지 갔다가 상제님의 처방 덕분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상제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종도들에게 “비록 몇 십 만 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 지라도 일호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 말라.”는 말씀을 하셨고, 과연 얼마 안 가서 종도들은 설날 아침에 주식까지 잘 얻어먹고 1908년 1월 10일에는 모두 석방되었다.
고부 화액을 겪기 전에 상제님께서는 혈심을 가지지 않으면 이 공사를 받들기 힘들 것이라고 종도들에게 미리 다짐을 받으셨다. 하지만 김형렬과 김자현을 제외한 나머지 종도들은 고부 화액을 겪은 뒤로는 상제님을 원망하고 모두 떠나버렸다.
고부 화액이 끝나고 백의군왕·백의장군 공사가 마무리된 후, 상제님께서 문공신의 집에 들르시니 문공신이 불쾌한 말투로 “일전에 고부 음식점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외상으로 달린 주식(酒食) 대금을 갚으라고 독촉을 해 왔는데, 고부 화액 때 가지고 가셨던 백목(白木)과 돈으로 그 음식 값을 갚지 않으시고 왜 다른 곳에다가 다 흩어버리셨나이까?”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상제님께서 종도들과 함께 고부 경무청으로 압송될 때, 상제님께서는 고부 용두리의 주막에서 돼지를 잡아 종도들, 순검들과 함께 나누어 드신 일이 있으셨다. 이제 그 주막 주인이 음식 값을 받고자 수소문하다가 종도들 가운데 돈이 좀 있다고 알려진 문공신에게 그 비용을 청구하였던 것인데, 문공신은 고부 화액을 겪은 뒤로 상제님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공사에 쓰였던 음식 값을 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문공신은 상당한 재산가였지만 상제님을 따른 지 불과 몇 달 만에 공사를 받드느라 거의 전 재산을 소비한 터였으므로 음식 값을 낼 돈조차 없기도 했다. 지난 고부 화액 때 상제님께서는 120냥이나 되는 돈과 백목을 고부 경무청의 순검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신 일이 있었는데, 음식 값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돈이 궁했던 문공신은 그 돈으로 음식 값이나 갚아야 했었다며 상제님께 불평을 했던 것이다. 사실 그 돈은 문공신이 상제님께 공사에 드는 비용으로 쓰시라고 올린 것이기도 했다.
상제님께서는 문공신에게 “네 말을 들으니 그러하리로다. 순창 농암에 사흘 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 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 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너를 주인으로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 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돈을 따 보지도 못하고 제 돈만 잃고 바닥이 난 후에야 개평을 뜯어가지고 새벽녘에 본전을 회복하는 수가 있음을 말함이니라. 고부에서 음식 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그때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면 달리 주선이라도 하여 주었으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에 할 수 없이 그는 상제님께 “일이 그와 같을진대 그만두사이다.” 하고 아뢰었다.
믿음이 부족했던 문공신은 고부 화액 이후로 상제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거둘 길이 없었다. 그는 박장근, 이화춘과 함께 상제님에 대한 불경한 패설을 일삼았다. 그러자 그해 3월에 이화춘은 의병에게 죽임을 당했고, 박장근은 의병에게 매를 맞아 뼈가 부러졌다. 상제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문공신에게 마음을 바로 잡지 않으면 천노(天怒)를 받을 것임을 훈계하셨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문공신은 고부화액 때 생겼던 병이 재발하였고, 그 병이 점점 심해져 이제는 거동도 못하고 드러눕게 되었다. 방법이 없던 문공신은 옆집에 사는 황응종으로 하여금 동곡으로 가서 상제님께 자신의 병이 낫게 해 주시도록 부탁을 드리게 했다. 그러나 상제님께서는 좀 기다리라는 말씀만 전하게 하셨다. 황응종으로부터 상제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문공신은 불끈 화가 나서 아무런 약도 쓰지 않고 그냥 누워만 있었더니, 병은 더욱 심해져서 이제는 아예 몸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못한 황응종이 다시 동곡에 계신 상제님을 찾아뵙고 사정을 아뢰니, 상제님께서 “그를 죽게 하여서야 되겠느냐. 찹쌀 아홉 되로 밥을 지어 먹이라.”고 이르셨다. 황응종은 급히 돌아가서 문공신에게 상제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였더니, 문공신은 곧 병이 나아 일어날 수 있었다. 그제야 황공스러운 생각이 든 문공신은 동곡에 계신 상제님을 찾아 배알하였고,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허물을 뉘우치고 습성을 고치지 아니하면 앞날에 난경이 닥쳐오리라.”고 다시 타이르셨다.
『전경』이나 다른 종도들의 구전(口傳)을 참고하면 1908년 여름의 이 이후로 문공신은 상제님께 세배를 드리러 가는 등 가끔 상제님을 뵙기는 했지만,24 더 이상 전처럼 상제님의 공사를 적극 받든 것 같지는 않다. 1908년이 끝나가던 겨울, 상제님께서 주로 집에 머물고 있던 문공신을 직접 찾아가셔서 그에게 “대천일해에 무근목이 떠있고 ….” 하는 엇시조를 외워주셨던 일, 그리고 상제님께서 1909년 3월에 종도들에게 태을주를 가르쳐주시자25 문공신이 그 태을주를 태인 화호리 숫구지26에 퍼뜨렸고 상제님께서 그것을 거두셨다는 일화가 전해질 뿐,27 문공신이 상제님을 따라다니며 열성적으로 공사에 참여한 정황은 어디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심지어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직전에 전 종도들에게 소집령을 내리셨으나28 여기에도 황응종의 모습은 보이지만 그 옆집에 살았던 문공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29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문공신은 태을주를 외우는 등 나름의 수도 생활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가 한때 상제님의 종도였다는 사실 때문에 상제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사람들 몇몇이 그를 찾아가 받들었고, 이로써 그를 중심으로 잠깐 작은 교단이 형성된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교단에는 특별한 교명이나 교리, 가르침이 없었고 곧 소실되었다.
요약하자면, 문공신이 전 재산을 들여 상제님의 공사를 적극 받든 기간은 1907년 가을부터 약 반 년이다. 고부 화액 이후로 한때 상제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가졌지만, 1908년 여름 이후로 다시 마음을 다 잡았으며 상제님께서 화천하실 때까지 때때로 상제님을 뵙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상제님을 추종하며 공사를 받들지는 않았다. 다만 상제님께서 태을주를 가르치신 이후로 태을주 수련에는 적극적이었다.
③ 1908년 겨울 이후의 문공신 행적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그가 도주님의 통사동 재실을 습격한 배후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니라 이 좇는 무리들에게 도주께서 말씀하시길 “임술년 섣달에 이르면 납월도수에 북현무도수(北玄武度數)가 닥쳐서 금전이 아니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 하시고 소액의 금품을 남겨 놓으셨도다. 좇던 무리 중 한 사람이 문공신과 합세하여 야밤에 재실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끝에 상제의 성골과 약간의 금품을 훔쳐가니 섣달 그믐 새벽 두 시였도다.30
문공신은 자신의 심복 부하인 김정우(金定雨)를 도주님 문하에 거짓 입도케 하여 잠입시킨 뒤, 그와 내통하여 야밤에 장정 20여 명을 데리고 통사동 재실을 습격하였다. 그 무리들은 도주님 부친의 팔을 부러뜨리는 등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고 상제님의 성골(聖骨)과 현금을 강탈해 갔다.31 이 강도사건을 파악한 대전 경찰서는 문공신과 김정우 일당들을 잡아들였다. 김정우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문공신은 재판에 부쳐져 여러 해 감옥살이를 한 끝에야 풀려나왔다. 이 사건 이후에 문공신은 더 이상의 별다른 행적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1954년에 죽었다.
문공신은 상제님의 성골을 받들고 공사를 보시던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성골을 들고 만주로 가실 것이라는 헛소문을 듣고, 상제님의 성골은 반드시 한반도에 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런 범행을 꾸몄다고 한다.32 비록 이 사건이 납월도수·북현무도수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문공신이 잘못된 유언비어를 믿고 행동한 것은 그 자신의 불찰이요, 자신의 심복을 거짓 도인으로 위장시켜 타인을 속인 것도 수도인으로서는 바른 행위가 아니며,33 더욱이 야밤에 도주님의 부친을 비롯한 여러 도인들을 상하게 하고 상제님의 성골과 도인들의 성금을 강탈해 간 것은 한때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라고 넘기기에는 힘든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그가 한때 상제님에 대한 불경한 패설을 일삼은 것과 함께 그의 수도 인생 최대의 오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상제님께서 문공신에게 외워주신 엇시조 이해
상제님께서 문공신에게 외워주신 엇시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이 엇시조의 외형적인 모티브는 홀로 우뚝 서서 고난을 이겨내고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곧 스러져 갈 것이니 결국에는 슬픔과 후회, 한탄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문공신은 당시에는 나름 수도에 열심이었으나 결국에는 강도사건을 일으킴으로써 큰 덕화 손상을 일으키는 과오를 저질렀다. 따라서 필자는 엇시조의 내용과 문공신의 삶은 상당히 닮아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하지만 『전경』 전체를 보면, 종도들이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또는 가르침에는 이해하기 힘든 종교적 상징이 가득 하다. 그러한 고로 상제님의 말씀을 살필 때는 그 자구 의미에만 매달리는 편협함에 빠져서는 안 된다. 즉 상제님께서 문공신에게 외워주신 엇시조의 외형적인 모티브를 살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그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유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상제님께서 문공신에게 이 엇시조를 외워주셨기는 하지만, 이것이 문공신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문공신이 상징하는 어떤 다른 인물(혹은 다른 그 무엇)에 대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박공우 관련 공사는 실제 ‘박공우’라는 인물에 대한 공사가 아니라 ‘박공우’가 상징하는 제3의 인물(도전님)에 대한 공사이며, 수부 관련 공사 역시 차경석의 이종매인 고수부나 김형렬의 딸인 김수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공사가 아니라 수부가 상징하는 제3의 인물(도주님)에 대한 공사였다. 상제님의 공사가 대개 이런 식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 엇시조는 문공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문공신’이 상징하는 어떤 다른 그 무엇에 대한 공사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대순회보>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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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경』 행록4장 38절.
02 지금의 전북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교촌마을. 원래 이 마을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교동 혹은 교촌이라고 불렀다. 문공신과 황응종, 신경수가 이 마을에 살았다.
03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조선후기의 문신. 성주, 동래, 제주, 영광 등 여러 고을의 목민관으로 부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쌓아 명망이 높았다.
04 보물 제652호. 총 1,109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작가가 알려진 시조가 595수, 알려지지 않은 시조가 514수이다. 동국대학교 김동준(金東俊) 교수는 『악학습령』이 1728년에서 1733년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형상 원저, 김동준 편저, 『악학습령』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 1978), p. 8 참조.
05 심재완 편저, 『定本時調大全』 (일조각, 1984), p. 214.
06 앞의 책, p. 123.
07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의 포부를 물었더니, 모두 정치적 야망을 말했다. 그런데 오직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은 “늦은 봄에 옷을 갈아입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공자도 “나도 증점과 같다.”고 했다. ‘증점(曾點)의 영귀고풍(詠歸高風)’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귀공명과 속세의 일을 잊고 자연과 벗 삼아 사는 유유자적한 삶을 말한다.
08 『조선왕조실록』 고종 23권, 23년(1886년) 12월 4일 1번째 기사.
09 앞의 책, 고종 25권, 25년(1888년) 11월 7일 3번째 기사. “이조판서를 추증한 김춘택에게 충문(忠文), … 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10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흰색’은 출산, 상서로운 징조, 가을, 의리, 깨끗함, 밝음, 고적(孤寂), 절개, 결백, 충절, 청렴, 청정, 죽음, 소박미 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문인들은 시조를 통해 흰색을 주로 고결함, 순결함, 맑음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뚜렷이 일월이 희도다’는 밝음, 고결함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상징사전』 1 (동아출판사, 1996)의 「흰 색」(임영주) 참조.
11 『민중엣센스국어사전』 (민중서림, 2006)의 「구시월」 참조.
12 『Naver백과사전』의 「두견새설화」, ≪충청매일≫ 2005년 5월 11일자의 「두견이 슬픈 노래 소리」(백운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의 「두견이」(이성우) 참조.
13 『전경』, 행록5장 24절.
14 앞의 책, 교법3장 46절.
15 이하의 내용은 「고부 화액」, 『대순회보』 125호, pp. 12~17; 「매화공사와 문공신을 타이르심」. 『대순회보』 127호, pp. 16~17을 발췌·요약한 것이다.
16 지금의 전북 순창군 쌍치면 종암리.
17 홍범초, 『범증산교사』 (범증산교연구원, 1988), pp. 267~268 참조.
18 『전경』, 공사2장 2절.
19 앞의 책, 공사2장 16절.
20 앞의 책, 공사2장 19절.
21 앞의 책, 공사2장 23절.
22 앞의 책, 공사2장 25절.
23 당시 전라도는 일본군 토벌대에 붙잡힌 평민 의병장들이 103명이나 될 정도로 의병 활동이 매우 활발한 지역이었다. 구본창, 『패자의 역사』, 도서출판 정한PNP, 2003, p. 171 참조.
24 『전경』, 행록5장 11절.
25 앞의 책, 교운1장 20절.
26 지금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숙구지 마을.
27 『전경』, 공사3장 28절.
28 “상제께서 동곡약방에 가셔서 모든 종도들에게 六월 二十일에 모이라고 통지하셨도다.” 앞의 책, 행록5장 20절.
29 앞의 책 행록5장 21절부터 행록5장 36절에 따르면, 상제님의 소집령에 따라 동곡약방에 모인 종도들은 김형렬, 김갑칠, 김자현, 김덕유, 류찬명, 박공우, 신원일, 이치화(이치복), 이공삼, 최덕겸, 채사윤, 차경석, 황응종이었다. 이 외에 김경학, 김송환 등도 있었다는 설이 있다.
30 앞의 책, 교운2장 24절.
31 『증산교사』는 이들이 강탈한 현금을 만여 원(지금의 6억 원에 해당), 『무극대도교개황』은 3800엔(지금의 7600만 원에 해당)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도주님을 따르던 도인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무극대도교개황』의 서술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정립, 『증산교사』 (증산교본부, 1977), pp. 96~97; 『無極大道敎槪況』 (일본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p. 5 참조.
32 『범증산교사』, pp. 27~272.
33 상제님께서는 남을 속이지 말 것을 누누이 경계하셨다. “남을 속이지 말 것이니 비록 성냥갑이라도 다 쓴 뒤에는 빈 갑을 반드시 깨어서 버려야 하나니라.” 『전경』, 교법1장 57절; “죄 중에 노름의 죄가 크나니라. 다른 죄는 혼자 범하는 것이로되 노름 죄는 남까지 끌어들이고 또 서로 속이지 않고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같은 책, 교법1장 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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