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예시 34절의 공사(公事)에 대한 해석과 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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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병만 작성일2018.10.16 조회5,030회 댓글0건본문
예시 34절의 공사(公事)에 대한 해석과 그 의의
- 한글 상용(常用)이라는 측면에서 -
연구원 박병만
▲ 글을 몰라 벽보[방(榜)]의 내용을 궁금해 하는 백성들을 재현한 미니어쳐 ("세종이야기" 전시관)
목차 Ⅰ. 머리말 Ⅱ.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 Ⅲ. 한글 상용 공사 Ⅳ. 한글 상용 공사의 의의 Ⅴ. 맺음말 |
Ⅰ. 머리말
언어는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 상징기호(symbols)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모든 사물에 그 기호를 사용하여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이 가지는 내면의 개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이것이 언어이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생각을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많은 정보를 얻기도 한다. 이로써 인간은 언어에 기초한 문명을 일구었다. 문명사회에서 언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언어가 없는 세계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언어는 영구적이고 고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며 끊임없이 변하여, 그 모습을 바꾸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라지기도 하며 새롭게 창조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 지구 상에는 현재 약 3,500~5,000개의 언어와 55개의 문자가 쓰이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가 같은 반면 우리나라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까지 언어는 고유한 우리말을, 문자는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의 생활을 했다. 이 영향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는 고유어와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한자어가 약 70%를 차지한다. 그런데 한자를 한글로만 기록하게 되면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아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어생활에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선구적인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이 한글전용(專用)01을 주장한 이래로 몇 차례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는 등 정부에서는 학교 교육 등에서 한자 사용을 폐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사회에서는 계속 한자를 사용하여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하였고, 아직도 우리 사회는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에 대한 찬반논의가 계속되고 있다.02
그렇지만 197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신문03이나 교과서, 관공서의 문서 등 일상의 문자는 한글전용이다. 우리가 한글전용의 문자생활을 하게 된 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1443)한 이래로 50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이다. 이 얼마나 오랜 세월인가?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어려웠던 한글전용이 왜 이제야 생활화하게 된 것일까? 여기서 “자신이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도 능히 사물을 기록하리라”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그 요인을 천지공사(天地公事)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제께서 하루는 자신이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도 능히 사물을 기록하리라 말씀하시고 옥편을 불사르고 이어서 천수경·사요(史要)·해동 명신록(海東名臣錄)·강절 관매법(康節觀梅法)·대학과 형렬의 채권 문서 등을 모조리 불사르셨도다. 이것을 종도 김 형렬이 지켜보았느니라.(예시 34절)
그러나 예시 34절 자체에 드러난 구체적 의미나, 『전경』에서 이 구절과 관련한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는 한계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핵심 단어(Key word)가 ‘문자’이고 불사르신 것들의 공통점이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아울러 50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글을 상용하고 있다는 현실을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어 나가듯이 하여,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상용하게 하신 공사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한글 상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그 가능성을 밝혀 보고자 하는데 그 의도를 두었다.
이 구절의 내용을 과연 ‘한글 상용 공사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이 글의 핵심논제이다. 그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그 동기에 대한 조명과 그 창제 시점을 기준으로 전후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생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상제님 당시의 문자생활 측면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구절이 한글 상용 공사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나아가 한글 상용 공사라는 가정 아래 이 공사가 우리 삶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의의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천지공사의 특성상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너무 많고, 특히 이 구절은 해석의 근거가 부족하여 다른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먼저 밝힌다.
Ⅱ.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자
1.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이전
우리나라는 고대에 많은 나라가 존재했는데, 이들 나라가 서로 역사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대립과 결합을 하면서 언어권도 형성 발전되어 왔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언어권으로는 부여어·고구려어·옥저어·예어·발해어·고려어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남방 언어권으로는 삼한언어·백제어·신라어 등으로 분화 계승 발전되었을 것이다.04 하지만 당시의 언어들이 어떠했는지는 지금 알 수 없고, 다만 오늘날 한글의 아주 예스러운 모습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그 언어를 기록한 문자가 후대에 전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문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한자로 우리말을 기록한 문헌을 통해 그 언어를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이것이 향찰(鄕札)·이두(吏讀)·구결(口訣)문자이다.05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래한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국과 중국의 교류 역사를 통하여 그 전래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한 무제(漢武帝)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이후에 한자가 처음 들어왔을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4세기에서 6세기경에 중국 역대 왕조와 교류해 왔기 때문에 한자는 끊임없이 한반도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세기에 당(唐)의 법률을 받아들이고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로 고치는 등의 변혁은 모두 한자가 전래하여 통치계층에서 사용된 시간의 축적이 상당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므로 늦어도 6세기에는 통치계층에서 한자를 널리 문자로 사용했으리라 추측된다.06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한글의 고어(古語)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였고,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던 문자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한자를 통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일부 해결하기는 했지만, 한자는 배우고 익혀 쓰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로 말미암아 대다수 백성은 문자생활에서 소외되었고 일부 계층에서만 한자를 사용하며 언문불일치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2. 훈민정음 창제와 그 동기·목적
세종(1397~1450)은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각종 제도를 정비해 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한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聖君)이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라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겼는데 직접 훈민정음 창제에도 몰두하였다. 궁내에 집현전과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언, 이개, 이선로 등의 학자로 하여금 창제를 위한 제반 연구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세종 25년(1443) 12월에 훈민정음이 완성되고 3년 동안 더욱 검토하고 보완하여 세종 28년(1446) 9월에 훈민정음 28자를 온 천하에 반포하게 된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임에도 창제의 과정과 경위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해 학계에서도 뚜렷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간의 논의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백성의 실생활 향상과 사회의 도덕 기강 확립에 도움이 되는 편찬 사업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종은 아마도 백성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07 둘째는, 한자· 한문 더 나아가서는 중국어까지도 스승 없이 쉽게 배울 수 있게끔 운서(韻書)에 한글로 음을 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후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이 나올 무렵에는 이미 고유어도 기록할 수 있게끔 그 용도가 확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08 셋째는, 우리 문자의 부재(不在)에 따른 백성의 생활에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09 이 목적은 『훈민정음』 및 『훈민정음 언해본』10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어제(御製)서문에 그 목적을 밝혔다는 사실로 볼 때 아마도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대다수 백성이 글을 모르다 보니 조정에서 내리는 포고문이나 시책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이것을 악용한 중간계층의 불합리한 착취에서 오는 문제점 등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고 백성과 직접 소통하며 그들의 의식을 일깨워 신권(臣權)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창제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탄생한 훈민정음은 바람 소리, 개 짖는 소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소리를 문자로 적을 수가 있는 소리글자로서, 우리말을 자유롭게 글로 적을 수 있는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생활을 비로소 가능하게 했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한, 지구 상의 문자들 가운데 가장 자연과학적이고 논리성을 두루 갖추었으며, 인간이 발음할 수 있는 음성적 특질에 따라 만들어진 세계 유일의 문자체계라고 세계의 석학들이 극찬하는 언어이다.11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인류 문화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최상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이다.
▲ 훈민정음 언해본으로 벽한면을 장식한 서울 세종로 "세종이야기" 전시관
3. 한글의 역사
먼저 한글의 명칭을 살펴보면, 세종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고 약칭 ‘정음(正音)’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중국의 문자인 한자·한문을 높이고 상대적으로 낮추어 속된 문자라는 의미와 토박이말이라는 뜻의 ‘언문(諺文)’12이라 주로 불렀다. 이 외에도 ‘암클’(여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글), ‘아햇글’(아이들이 쉽게 배우고 애용하는 글), 초성과 중성을 합하여 글자가 이루어진다 하여 ‘반절(反切)’ 등의 명칭이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국민의 자각의식이 높아지게 되면서 ‘국문(國文)’이라 부르다가 1910년대에 와서 주시경의 영향으로 ‘한글’13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이후로는 훈민정음이나 국문을 모두 한글이라 표기할 것임)
한글의 보급은 『해례본』의 간행으로 시작되었고, 세종과 세조가 그 보급을 위해 사서언해(四書諺解)와 불경언해(佛經諺解) 편찬 등 여러 시책을 펼쳤지만 쉽게 보급되지 않았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자를 중심으로 한 문자생활에는 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거나 법적인 효력을 갖는 문서에는 한글사용이 배제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이들 문서를 한자로만 표기하여 실려 있고, 법령의 편람(便覽)으로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백헌총요(百憲摠要)』 등에서 한글 문서의 무효를 문서로 밝힌 사실로써 공문서에서의 한글사용은 금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경국대전』에는 하급관리인 녹사(錄事) 선발에서 한글 글씨의 시험과 『삼강행실도』의 한글로의 번역, 간행이 규정되어 있다. 이는 한글 사용이 공적인 문자생활에서는 금지되었으나 백성의 교화를 위한 목적 등으로는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빈(妃嬪)이 왕에게 올리는 글이나 왕비가 내리는 언문교서(諺文敎書) 등에도 한글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비주류 문자로서 16세기 전반까지 미미하게 사용되다가 그 후반에 들어 한글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14 이때 여성에 의한, 또는 여성을 상대한 한글 편지가 이전보다 널리 성행하였다. 17세기 이후로는 더욱 널리 보급 사용되었고,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한글이 문자생활의 주역으로 될 기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청과의 사대(事大)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을 확정한 갑오개혁(1894)을 계기로 고종은 ‘법률과 칙령은 국문(한글)을 전용(專用)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나 국·한문혼용도 허용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공문서가 순한문(純漢文)으로 만들어지는 등 이 칙령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08년[융희(隆熙) 2] 공문서를 한글전용이 아닌 국·한문혼용으로 규정15하였다. 이것은 한글전용일 경우에 붙여야 할 한역(漢譯)이 번거롭고, 오랜 문자생활 전통이 국·한문혼용으로 기울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법령과 실제 문자생활의 괴리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16
1906년에 한글교육이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고, 한글전용의 신소설과 근대 신문에서의 한글사용의 활성화는 한글의 교육과 보급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한글은 수난을 겪었다.17 이후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 들어 ‘한글 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시행하고, 학교의 한자교육도 폐지18하는 등 정책적으로 한글전용을 시행하여 1970년에는 공문서는 물론 민간 간행물에서도 한글전용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적인 추세에 힘입어 1970년대 이후로 서적, 신문, 문서 등 일상에서 한글전용의 문자생활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Ⅲ. 한글 상용 공사
1. 시대적 배경(문자생활 측면에서)
갑오개혁은 한글의 변천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세종의 한글창제 이후로도 한자에 밀려 공문서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서 공식문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다가 고종의 칙령으로 비로소 그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갑오개혁은 조선 국가운영 체제의 일대 혁신을 단행하는 계기가 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변화를 모색했다. 신분차별 제도와 노비문서의 폐지, 인신매매금지, 과부 재혼 허락, 과거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등용법 제정 등 유교적 사회질서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하지만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자주적 역량이 부족했고 개혁 자체가 일본의 조선침략이라는 의도에서 타율적으로 실행되었으며,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보수세력의 반대로 개혁은 명목상에 그치고 말았다. 이 영향으로 상제님께서 예시 34절의 공사를 행하시던 1902년19 무렵에도 역시 한자가 문자생활에서 대세를 이루어 대다수 국민은 문자생활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사실은 1896년에 처음 발간된 <독립신문> 창간호에 실린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의 논설에 잘 나타나 있다.
“… 각국에서 사들이 남녀무론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 능통 후에야 외국글을 배오는 법인데 죠션셔 죠션 국문은 아니 배우드래도 한문만 공부 까에 국문을 잘 아 사이 드물미라. … 이 글이 죠션 인민 들이 알어서 백를 한문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귀쳔이 모도 보고 알아보기가 쉬울터이라 한문만 늘써 버릇고 국문은 폐 까게 국문만 쓴 글을 조선 인민이 도로혀 잘 아러보지 못고 한문을 잘알아보니 그게 엇지 한심치 아니리오. … 그런고로 졍부에서 내리 명녕과 국가 문젹을 한문으로만 쓴즉 한문못 인민은 나모 말만 듯고 무 명녕인줄 알고 이편이 친이 그 글을 못보니 그 은 무단히 병신이 됨이라…” 20
여기서 그는 조선의 인민들이 한문만 주로 공부하여 한글을 아는 사람이 드물고, 정부에서 명령이나 문서를 한문으로만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다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에 <황성신문>에 실은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의 일부를 보아도 역시 한문이 주를 이루어 한자를 모르는 대부분 백성이 읽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 强硬신 皇上陛下 更對며, 何面目으로 二千萬同胞 更對리오. 鳴呼痛矣라 我二千萬 爲人奴隸之同胞여. …”(을사늑약을 강력하게 반대하신 황제폐하를 어떻게 다시 대면하며, 무슨 면목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면하리오. 오호 가슴 아프도다! 우리 이천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버린 동포여!)21
그리고 배재학당(1885), 이화학당(1886)을 시작으로 한문 중심의 전통교육방식을 버리고 근대적 교육을 시행하던 근대학교들이 많이 설립되었는데, 1908년에 이르러서는 학교 수가 5,000여 개에 학생이 20만 명에 달했다. 이 무렵인 융희 3년(1909)에 내부(內部)22에서 출판을 허가한 『간이상업부기학(簡易商業簿記學)』이란 교과서도 그 시대적 상황을 가늠케 한다. 표제(標題)는 한문, 본문은 국·한문혼용으로 쓰여 있어 한자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상업부기를 익힐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혈(血)의 누(淚)』(1906), 『귀(鬼)의 성(聲)』(1908), 『추월색(秋月色)』(1912) 등의 신소설이 수십 편 발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글전용 문장이었다. 하지만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내려가는 한문 문장의 표기방식이었고 제목이 거의 한자이며 문장에 난해한 한자어가 많이 들어 있었다. 이는 오랜 한자 사용 습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전히 소수 식자(識者)층만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신소설과 더불어 <독립신문>, <제국신문>(1898) 등은 한글전용으로 한글 보급과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1898), <대한매일신보>(1905) 등과 함께 한일강제병합(1910)과 함께 폐간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 들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이 발행 되지만 기사 제목이 한자식 표기였고 세로쓰기의 한문표기 방식이었으며 국·한문이 혼용되어 일반 백성이 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23
2. 한글 상용 공사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글의 논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해석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해석은 이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인간의 언어 발설은 반드시 타인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일단 『전경』이 상제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화해서 단정하면, 당시의 종도들은 그 구절들이 이해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상제님께서 종도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궁극적 의미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그것은 상제님 당시의 시대적, 개인적 상황을 비롯한 총체적인 대화의 배경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우리가 복합적으로 정확하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알기 어려운 의미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극복하는 과정이 곧 해석이요, 이해이다. 언어는 반드시 논리적이지는 않으며, 언어는 느낌이다. 논리도 느낌의 반복적 정형일 뿐이다. 언어는 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의 총체성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24 따라서 예시 34절을 논리적인 정합성만을 따져서 해석할 수만은 없다. 반드시 시대적 상황과 아울러 『전경』의 전반적인 맥락과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대의(大義) 등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서재필의 논설에서 보듯이 예시 34절의 공사를 행하실 당시에 한글을 알아보지 못하는 국민이 상당수였고, 문자생활에도 순한문이나 국·한문혼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상제님께서 이 공사를 보신 것이다. 그러면 이 구절이 그 의미가 충분하게 드러날 정도로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이 내용이 ‘한글을 일상에서 주로 사용하게 하는 공사로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먼저 “자신이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도 사물25을 능히 기록하리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아래 ①과 같이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말씀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문자로써 사물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므로 특별히 해석할 여지가 없다.
① 자신이(상제님께서)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 사물을 능히 기록
→ 일반적 상황
그런데 여기서 ‘서투른 데가 없이 익숙하게 잘 한다’는 뜻의 부사어 ‘능히’가 있는 문장에 보조사 ‘도’가 붙으면 그 의미는 사물을 능히 기록하지 못하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표현이거나, 우리는 알지 못하고 상제님만이 아시는 전혀 새로운 문자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물론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고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할 확률이 가장 높아진다는 뜻이다.
② 자신이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도 사물을 능히 기록 → 사물을 기록하지 못하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표현 또는 새로운 문자
사물을 기록하지 못하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표현이란 말은 상제님께서 알고 계시는 문자로써도 사물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 상황을 전제하는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 문자를 가지고도 사물을 능히(잘) 기록하지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인데, 앞으로는 잘 기록할 수 있게 되리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상제님께서 알고 계신 문자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이 무슨 현실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먼저 상제님께서 알고 계시는 문자가 무엇이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문자를 다 알고 계셨을까, 아닐까?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자. 사실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기도 하다.
‘현실’이라는 부분도 구체적으로 단정하긴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천지공사가 상제님께서 강세하실 무렵 천지인 삼계(三界)의 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삼계에 걸친 공사라 하여 그 범위가 꼭 삼계 전반에 걸친 것은 아니었다. 작게는 우리나라 또는 특정 신분이나 계층 등에 국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당시 문자생활이라는 측면에서의 현실을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당시 우리나라의 문자는 한자와 한글이었으니, ‘상제님께서 알고 계시는 한자와 한글로도 사물을 잘 기록하지 못하는 게 당시의 현실’이라는 말씀이 된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분명 한자와 한글 모두 원활하게 사용하셨을 터이니 상제님께서 처하셨던 현실로 이해할 수는 없다. 여기서 천하창생(天下蒼生)을 위해 천지공사를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상제님이 아닌 창생(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자는 그 글자의 특수성26 때문에 주로 지식계급이나 통치계급의 전유물로 사용되었고 중국에서조차도 일반 국민의 언어 표현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한글 역시도 국민의 상당수가 한글의 자·모음 25자27도 잘 모르고, 설령 안다고 해도 충분히 숙달되지 않아 사물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상제님의 현실이 아닌 일반 백성의 이러한 문자생활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한자나 한글로도 일반 백성은 사물을 잘 기록하지 못하였는데, (일반 백성이) 앞으로는 잘 기록하게 되리라.
그리고 다음 구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여러 서적28과 채권 문서 등을 모조리 불사르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불사르신 것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바로 ‘한문’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사르신 행위에 대해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29 앞에서의 해석과 관련하여 이해하면 반드시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책을 만들고 문서를 작성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공사는 한자·한문 위주의 문자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없애고 한글만으로도 문자생활이 충분히 가능하게 하신다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만약 전혀 새로운 문자를 통해 사물을 기록하게 하는 공사였다면, 당시에 한글도 사용하는 문자였으니 불사르신 서적 중에 아마도 한두 권 정도는 한글 서적도 포함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으로의 해석은 그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인심(人心)과 속정(俗情)을 살피고자 주유하셨고, 청춘과부가 수절하는 폐단을 없애고자 행하신 과부 개가나 이름 없는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萬古)의 쌓인 원을 풀어 주는 등의 공사를 행하셨다. 이렇듯 해원(解冤)을 위주로 하여 천지공사를 통해 창생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신 상제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시 문자생활 측면에서 대다수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어찌 모른 척하셨겠는가? 이러한 천지공사의 대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도 역시 한글 상용 공사라고 추정할 충분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결과론적으로 보아도 이 공사 이후 1906년 보통학교령에 의해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글교육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 한글의 보급과 사용이 활성화되었다는 점. 일제의 강점기 모든 학교의 국어과를 폐지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는 등 한글이 수난을 겪었다. 그 속에서도 조선어학회30의 주도로 한글날 제정(1926),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1933), 한글 『큰사전』 발행(1947) 등 한글사용 규정을 마련하고 연구와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국민의 문자로 확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점. 우리 언어의 특수성 때문에 국·한문을 혼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정부는 꾸준한 정책을 추진하여 한글전용의 문자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비록 예시 34절이 구체적 의미를 단정하기에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시 한글 상용 공사라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한글 상용 공사의 의의
여기서 단순히 다수 백성이 겪는 문자생활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이 공사를 행하셨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아마도 복합적으로 여러 가지 의도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가 문명의 아주 중요한 근간이요 수단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시 34절이 한글 상용 공사라는 가정 아래 이 공사가 우리 생활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의의를 알아보자.
언어는 부와 권력을 가지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에서 성서(聖書)는 라틴어로만 기록되어 있어 라틴어를 아는 사제들만이 하늘의 음성을 평신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라틴어는 가톨릭교회의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고려 때부터 과거(科擧)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는데, 당시의 문자가 한자였으니 한자·한문을 공부해야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상인들도 거상(巨商)이 되어 부를 축적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복잡한 장부를 작성할 한자를 익혀야 했다. 그런데 한자·한문을 공부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들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상당한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일반 백성에게는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아 결국 부와 권력은 일부 계층에 한정되어 세습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신분질서가 고정화되어 신분이동이 불가능해지고,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폐습과 어우러지며 신분과 남녀의 차별31이 심화하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병폐를 낳았다. 하지만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한글의 상용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교육의 기회를 보다 균등하게 제공하고 개인의 노력으로 부와 권력을 가질 길을 훨씬 넓혀 주었다. 따라서 기득권계층의 부와 권력 독점이 허물어져 신분질서가 파괴되고,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로 말미암아 남녀의 차별이 사라지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복리를 추구해 나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들도 능력만큼 욕망을 갖게 되고 기득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견제가 필요하다. 왕조시대였던 조선도 왕권으로 그 특별한 계층의 무절제한 욕망과 무분별한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것은 어리석고 가난하고 천한 백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無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자생활이 가능해 지면서 무지에서 벗어나 의식이 깨이고 자신들의 힘을 조직화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여러 시민단체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 실례로 특권계층의 무절제한 욕망과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있다. 그래서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국민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삶을 이뤄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를 통해 오랜 세월 축적된 많은 지식을 익히고 유익한 정보를 얻으며, 그것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 서적, 신문 등의 활자 매체와 인터넷의 발달로 문자는 더욱 중요시되는데, 한글은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다는 장점으로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매우 낮은 수준32이다.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과 더불어 이러한 영향으로 세계 2위의 교육수준을 가진 나라33 가 되었다. 이것은 민족적 잠재력과 함께 여러 분야에서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토대가 되어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막강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고, 국민 대다수 삶의 질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의 힘이고 바로 한글 상용의 성과일 것이다.
이 외에도 언어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의 근간이 되므로 한글 상용은 우리 사회 전반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부와 권력의 독점욕에서 비롯한 남존여비, 반상의 구별, 신분의 차별 등과 같은 불합리한 폐단들이 문자생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를 상등국(上等國)으로 만드신다든지,34 천하를 크게 문명화하고자 하신 상제님의 뜻35 역시 문자생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문맹률이 높은 상태에서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한글 상용이라는 단순한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복합적인 상제님의 뜻과 연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부족의 고유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려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 부족"관련 부스(서울 세종로 "세종이야기" 전시관)
Ⅴ. 맺음말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예시 34절은 그 의미의 해석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의 내용을 한글 상용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했던 것은 이 구절의 핵심 단어가 ‘문자’였기 때문이다. 문자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근간이 된다. 따라서 문자생활의 혁신적인 변화 없이는 삶의 변화 역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곧 문자를 일반 대중이 자유스럽게 사용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상제님께서 없애고자 하셨던 남존여비, 반상의 구별, 신분의 차별 등과 같은 불합리한 폐단들이 쉽게 사라질 수는 없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폐단의 원인이 그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와 맞물려 있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원인이 문자생활의 불평등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점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이 불평등이 사라지게 된 원인인 한글 상용이란 측면에서의 접근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자생활의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나라 언어와 문자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을 토대로 천지공사의 대의와 공사 당시 문자생활의 현실, 예시 34절에 대한 해석의 개연성 등을 총체적으로 고찰하여 이 구절이 한글 상용을 위한 공사로 해석이 가능함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공사 이후 정부의 꾸준한 정책에 힘입어 한글 상용이 현실화되었다는 점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국·한문혼용을 주장하는 반대여론 속에서도 한글 상용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과 가까운 중국과 인도의 예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중국36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막강한 국가권력으로도 아직 간체자(簡體字) 개혁 이후로 지방 방언들의 사용에 의한 병폐를 없애지 못하고 있고, 인도37 역시 아직도 언어 통일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단순히 근대화에 따른 학교 교육의 대중화 등과 같은 요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 공사의 결과에 의한 한글 상용은 우리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독점, 신분과 남녀의 차별 등의 병폐를 없애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사회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또한 우리 삶의 전반에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삶의 질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상등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인간 삶의 바탕을 이루는 문자생활을 상제님의 여러 공사와 아울러 총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천지공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우리 삶에서 문자의 중요성을 재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어와 문자는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사의 흐름이 천지공사의 도수에 따라 새 기틀이 열려간다는 점38을 생각해 보자. 그러면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와 문자도 우리나라에서 한글이 상용화된 것처럼 천지공사의 대의에 따라 인간 삶의 여러 측면과 맞물려 일반 대중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라 여겨진다.
<대순회보> 148호
[참고 문헌]
『전경』.
『대순전경』6판.
『대순회보』137호, 「왜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인가?」(이광호)
강길운, 「훈민정음 창제의 당초 목적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55~57』, 1972.
김남돈,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에 관한 국어학사적 고찰」, 『한국 초등학교』11권 제1호,
서울교육대학교 초등교육연구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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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연,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대한 연구』,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논문, 1992.
최영애, 『한자학강의』, 통나무, 2000.
<조선일보> 창간기념호.
<중앙일보> 2012년 11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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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글전용’은 문장에서 한글만을 쓰게 한다는 것으로 정책적(政策的)ㆍ강제적인 의미가 짙고, ‘한글 상용’은 한글을 일상에서 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02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한자를 혼용해 쓰지 않으면 언어생활에 불편이 따른다는 등의 이유로 국ㆍ한문 혼용을 주장하는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가 국어기본법 등에 초ㆍ중ㆍ고등학교의 국어 교과에서 한자교육을 배제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내용의 헌법소원을 2012년 10월 22일 청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12년 11월 3일 <중앙일보>에 한글전용과 국ㆍ한문혼용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다룬 기사가 실렸다. 1921년 한글전용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한 이후로 지금까지 이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03 신문의 경우는 <한겨레신문>이 1988년 창간부터 한글전용을 시작하였고, 나머지 일간지들은 일부 단어에 한자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한자 점유율을 축소하여 200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한글을 전용하고 있다.
04 김이종, 『한국의 정신 한글 역사 연구』, 한국문화사, 2009, p.3.
05 향찰은 신라 때 발달한 우리말 표기법으로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국어문장 전체를 적었다. 이두는 한문을 국어문장 구성법에 따라 배열하고 이에 토를 붙인 것으로 신라 때부터 사용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구결은 한문문장의 의미를 명확히 하거나 읽기 쉽게 하려고 중간 중간에 끼워 넣는 우리말 요소를 말한다.
06 최영애, 『한자학강의』, 통나무, 2000, p.31 참고.
07 이성연,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대한 연구』,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논문, 1992. pp.67~69 참고. 이 시기에 『농사직설』(1429), 『향약구급방』(1430), 『효경』(1431), 『소학』(1431), 『삼강행실도』(1432) 등의 서적이 편찬되었다.
08 강길운, 「훈민정음 창제의 당초 목적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55~57』, 1972, p.21 참고. 명(明)은 건국 후 원(元)의 지배 하에서 혼란스러워진 발음을 바로 잡고자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만들었는데, 이에 세종도 우리식의 한자음을 중국과 통일하기 위해 한자음을 우리의 언어(훈민정음)로 표기한 『동국정운(東國正韻)』(1448년)을 간행했다.
09 김남돈,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에 관한 국어학사적 고찰」, 『한국 초등학교』11권 제1호 서울교육대학교 초등교육연구소, 1999, p.10 참조. 김남돈은 그 동기와 목적을 앞의 두 가지와 불교의 보급, 국가의 체면 등이라고 정리하였다.
10 세조 5년(1459)에 세조가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을 언해(諺解)하여 간행한 책이며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담아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
11 『대순회보』137호, 「왜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인가?」(이광호) 참고.
12 ‘언(諺)’ 자는 ‘상말, 속담’이란 의미가 있는데, 중국의 한문은 ‘높은 글, 진문(眞文)’이고 우리글은 ‘속되고 수준이 낮은 글’이라는 사대주의(事大主義)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13 ‘한’은 ‘하나, 크다, 바르다’의 뜻이 있으니 ‘큰글, 바른글, 누구든지 쓸 수 있는 한 가지글, 한나라[韓國]의 글’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김이종, 앞의 책, p.100.)
14 이 시기에 1세기에 걸쳐 여러 방면의 정음문헌이 간행 보급되었고, 가사와 소설문학의 진전으로 정음 사용의 영역이 확대되었으며, 여성에 의한 정음 사용이 보편화하는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안병희, 「훈민정음 사용에 관한 역사적 연구-창제로부터 19세기까지-」, 『동방학지』46ㆍ47ㆍ48 합집, 연세대학교, 1985, p.819 참조)
15 1월 25일 내각회의 조회내용: 各官廳의 公文書類 一切히 國漢文을 交用고 純漢文이나 吏讀나 外國文字의 混用을 不得홈.
16 안병희,앞의 논문, pp.808~809 참조.
17 광복당시 문맹률이 무려 77%에 달했다는 통계가 이를 말해주는데, 정부가 한글강습회를 실시하여 이를 44%(1947년 8월)로 줄였다.
18 1969년에 폐지되었다가 1971년 다시 부활하였다.
19 『전경』에는 구체적 명시(明示)가 없어 공사를 행하신 시기를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대순전경』(6판, p.22)에서는 신약전서를 불사르시고 그 뒤에 이 공사를 행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약전서를 불사르신 사건이 행록 1장 27ㆍ28절에 임인년(1902)의 일이라고 했으니 그 시기가 1902년이라 할 수 있다.
20 김이종, 앞의 책, pp.208~209 재인용.
21 위의 책, p.210 재인용.
22 내무아문[內務衙門: 1894년에 이전의 이조(吏曹)와 내무부(內務府), 제중원(濟衆院) 따위를 합쳐서 지방 행정까지 총괄하도록 만든 관아]을 1895년(고종 32)에 내부로 그 이름을 고쳤고, 1910년에 폐지되었다.
23 實業의 實地(제목): “朝鮮五百年實業이未發達얏다稱야도現狀의實業보다十分優勝바이오現狀數十 年來實業이極發達얏다稱하야도 ….”(<조선일보> 창간기념호, 1920. 3. 9. 사설) - 한문 문장처럼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읽기도 매우 불편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24 김용옥, 『도올논어1』, 통나무, 2000, pp.139~148(Eugene A. Nida and Charles R. Taber,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 Published for the United Bible Societies by E. J. Brill, Leiden 1974 참조) 참조.
25 우리 일상의 일과 주변의 물건, 그리고 자연현상 등을 아울러서 사물(事物)이라 한다.
26 한자는 그 글자 수가 5~6만 자 이상이고, 글자 하나에 그 뜻이 수십 개에 달하는 글자도 수두룩하다. 이러다보니 문자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중국의 대학 교수들도 1만 자를 채 알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문맹률도 80%이상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20세기 유명한 작가 노신(魯迅, 1881~1936)은 “한자가 없어지지 않으면 중국은 필시 망하고야말 것이다”(漢字不滅, 中國必亡)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중국은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간체자(簡體字)로 문자개혁을 하기에 이른다.(최영애, 앞의 책, pp.18~22 참조)
27 한글창제 당시에는 28글자였으나 도중에 ㆆ,ㅿ,ㆁ 세 글자가 소멸되었고 지금은ㆍ자도 사라져 24자를 사용한다.
28 * 옥편(玉篇): 543년에 중국 양나라의 고야왕이 편찬한 자전.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당나라의 손강(孫强)이 내용
을 더하고 송나라의 진팽년(陳彭年) 등이 다듬고 고친 것이 오늘날 전한다. 모두 30권.
* 천수경(千手經): 천수관음의 유래와 발원, 공덕을 말한 불경. 원래 이름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
심다라니경(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經)』.
* 사요(史要): 역사의 대강을 기록한 책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책이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조선왕조 개국 이래의 명신의 사적(事績)을 도학(道學), 사업(事業), 충절(忠節)로 분류하
여 엮은 책. 조선 효종 때 김육(金堉)이 엮었으며 17책이다.
* 강절관매법(康節觀梅法): 소강절의 관매수(觀梅數)에 대한 내용이 담긴 점술서적.
* 대학(大學): 『사서(四書)』의 하나로 원래 『예기(禮記)』의 한 편이었으나 주자(朱子)의 교정으로 하나의 독립된 책이
됨. 증자(曾子)의 작이라고 전함.
29 『전경』에 상제님께서 무언가를 불사르신 구절이 대략 30여 회 나온다. 대부분이 종이에 여러 가지 글을 쓰셔서 불사르신 부분이며, ‘증서’나 ‘사명기’ 등의 물건을 불사르신 내용도 몇 구절 등장한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신명계에 무언가를 알려 공사로써 정하시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사 자체의 의미도 알기 어려운 측면이 많아서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무엇이라고 확언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30 1908년 국어연구학회로 창립되어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됨.
31 여성은 근본적으로 사회진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여성의 역할도 자녀양육, 육친봉양, 가사 등으로 한정지었으며, 한자를 배울 수 있는 것도 극소수 양반이나 상인계층에 국한되었다.
32 우리나라 문맹률은 1.7%[2007 ~2008년 기준, 15세 이상 인구. 70대 20.2%, 60대 4.6%, 50대 0.7%, 40대이하 0% - 국립국어원, 2009년 발표-]이다. 전 세계 평균은 18%이고 선진국 평균이 2.3%, 세계 1위 쿠바(0.2%) 등에 이어 17위이다. -세계개발계획(UNDP), 2007~2008년 통계-
33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발표에 의하면 핀란드에 이어 한국이 2위이다. - <국민일보>, 2012. 11. 27. -
34 “…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와야 할지니 …”(예시 29절)
35 “이 세상에 학교를 널리 세워 사람을 가르침은 장차 천하를 크게 문명화하여 삼계의 역사에 붙여 신인(神人)의 해원을 풀려는 것이나, …”(교운 1장 17절)
36 중국은 고대부터 지방 방언의 차이가 있었고 지금은 크게 7대 방언권으로 나뉜다. 북경을 중심으로 한 만다린어에 바탕을 둔 보통화를 공용어로 쓰는데, 국민의 1/3은 보통화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만다린어, 상하이어, 광동어 등은 차이가 많아 별개의 언어로 들릴 정도이다. 따라서 북경 방송에서는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 말을 자막처리 하여 방송하고 있다.
37 인도는 다언어 국가의 전형이며 역사적ㆍ사회적ㆍ문화적 이유로 30여 개에 달하는 언어 영역으로 구분된다. 공식 언어는 인디어와 영어이고 각 주(州)마다 별도의 공식 언어를 추가로 인정하고 있다.
38 예시 16절 참조.(“상제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도수로써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어 물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으셨으니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게 되니라”)
* 올린이 주 : 옛 한글체가 웹상에서 표기 되지 않는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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