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상제님 강세지에 대한 공간적 의미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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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인규 작성일2018.10.16 조회4,819회 댓글0건본문
연구원 박인규
목차 Ⅰ. 서론 Ⅱ. 우리나라로 오신 의미 Ⅲ. 전라도로 오신 의미 Ⅳ. 모악산 금산사에 임어하신 의미 Ⅴ. 결론 |
Ⅰ. 서론
대순진리회의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님이시다. 구천상제님께서는 무상한 지혜와 무변의 덕화와 위대한 권능의 소유주이시며 삼계대권을 주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 하느님께서 원시의 신성·불·보살들의 호소와 청원으로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우리나라 전북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에 30년을 머무셨으며 1871년에는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하셨다. 존귀하신 상제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심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제님의 강세가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전 세계 가운데 바로 우리나라로 강세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가운데 전라도 모악산 금산사에 임어(臨御)하셨으며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라는 특정한 지역으로 강세하셨다. 일반적으로 세계의 여러 종교에 나타나는 최고신이나 절대자의 특성은 무소불위성(無所不爲性), 전지성(全知性), 편재성(遍在性), 초월성(超越性), 내재성(內在性), 무한한 사랑, 공평무사성, 영원성 등이다. 이중 편재성이라 함은 절대자께서 어느 곳, 어디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뜻하며 또한 그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의미한다. 공평무사성과 이 편재성의 원리에서 볼 때 상제님께서 특정 지역에 오신 이유에 대한 설명과 해답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상제님 재세 시의 종도들도 하필 힘없는 약소민족인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경』에는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에 대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전경』 말씀을 근거로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와 의미 그리고 전라도와 모악산 금산사를 선택하신 이유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상제님께서 여러 지역 가운데 그 지역을 선택하신 이유와 의미를 인간의 부족한 지혜로 충분히 헤아리기는 어렵다. 다만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뜻을 헤아려보고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글의 Ⅱ장에서는 먼저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오신 의미와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Ⅲ장에서는 전라도 지역으로 강세하신 이유를 전라도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서 추측해보고자 하며, 탄강하신 마을인 객망리의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의 마지막인 Ⅳ장에서는 모악산의 풍수적 의미와 금산사가 가진 종교적 의미, 그리고 모악산 금산사로 임어하신 이유와 의미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Ⅱ. 우리나라로 오신 의미
1. 무명의 약소 민족
상제님께서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는 먼저 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제님께서는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고 말씀하셨다. 즉 많은 나라 가운데 무명의 약소 민족인 우리나라를 먼저 도움으로써 만고에 쌓인 원을 푸시겠다는 말씀이시다.
원을 푸는 것, 즉 해원(解冤)은 대순사상의 핵심이며 해원상생은 대순진리회의 종지 중 하나다. 『대순진리회요람』의 취지에서는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대도(大道)의 진리(眞理)로써 신인의도(神人依導)의 이법(理法)으로 해원(解冤)을 위주(爲主)로 하여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보은(報恩)으로 종결(終結)하시니 해원(解冤) 보은(報恩) 양원리(兩原理)인 도리(道理)로 만고(萬古)에 쌓였던 모든 원울(冤鬱)이 풀리고 세계(世界)가 상극(相克)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지리니 이것이 바로 대순(大巡)하신 진리(眞理)인 것이다.”라고 하여,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해원을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해원·보은의 양원리인 도리로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라고 밝히고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 세상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다고 보셨으며01,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이른 주된 원인을 ‘상극에 의한 원한’이라고 진단하셨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푸는’ 02 것을 위주로 하는 천지공사를 하셨으며,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원은 상극지리에 의해 발생하며 천지인 삼계를 채웠다고 하셨다. 삼계 중 인간 세계의 원을 살펴본다면 세상을 강자와 약자로 양분할 때 그것은 주로 약자의 영역에서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중 여성에게, 지배와 피지배층에서는 피지배층에게서, 강국과 약소국의 관계에서는 약소국에게 원과 한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19세기 말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 다투어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힘없고 약한 많은 나라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폭압에 식민지 신세로 전락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제님께서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무명의 약소 민족’중 하나인 우리나라를 먼저 도와 원을 풀어주려 하심이다. 즉 상제님께서는 강대국이 아닌 약소국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오셔서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무하시고, 이로부터 만고의 원한을 푸시는 해원공사의 시작점을 삼으신 것이 아닌가 한다.
2. 인(仁)을 지닌 나라
상제님께서 활약하시던 당시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극에 달하였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앞다퉈 동양으로 진출하여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경』에서 이와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제 동양(東洋) 형세가 그 존망의 급박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으므로 상제께서 세력이 서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공사를 행하셨도다. (공사 1장 13절)
‘이제 동양 형세가 위급함이 누란과 같아서 내가 붙잡지 아니하면 영원히 서양에 넘어가리라.’깊이 우려하시사 종도들에게 계묘년 여름에 ‘내가 일로 전쟁(日露戰爭)을 붙여 일본을 도와서 러시아를 물리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예시 23절)
또 상제께서 ‘이제 서양 사람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양을 붙잡음이 옳으니 대신문(大神門)을 열어 四十九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예시 24절)
상제님께서는 서양세력이 전면적으로 동양을 침략하고 잠식하면서 동양문명이 존망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당시의 국제 정세를 진단하셨다. 실제 20세기 초 당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상태였다. 먼저 동남아시아 지역은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포르투갈이 나누어 식민지배하고 있었으며 중국은 러시아,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이 청 제국을 분할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의 외세에 의한 지배과정은 아편전쟁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은 아편전쟁(1839~1842)의 패배로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고 5곳의 개항장을 개방했었다. 이후 청 제국의 권위가 점차적으로 약해지면서 각지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심각한 것이 태평천국의 난(1850~1864)이다. 이 난과 농민 반란인 염군(捻軍)의 반란만으로 2,500만 명이 죽었다. 이처럼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자 서구 열강들은 청 왕조가 붕괴하기 직전이라 생각하고 중국 제국을 앞다퉈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아무르 강 유역과 연해주 등을 강탈했으며 프랑스는 조공국이었던 인도네시아를 영국은 주룽반도와 버마를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수도 베이징을 불태우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였으며 온갖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이런 서양 열강들의 특성에 대해서 상제님께서는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03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04라고 하셨다. 즉 서양문명은 자연에 대한 정복성, 인종차별성, 잔인성, 침략성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동양문명이 영원히 서양에 지배되어 결국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세력이 동양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공사를 행하셨다.
주목할 점은 이 공사를 일본을 통해서 처결하셨다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일본에게 ‘일시천하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주셨으며05 그들이 백호 기운을 띠고 있다고 말씀하셨다.06 이렇게 기운을 붙여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물리치게 하셔서 그들의 남하를 막으시고 49일을 한 도수로 하여 동남풍을 불어 일으켜 서양 세력을 꺾으셨다. 이를 “범이 새끼 친 곳은 그 부근 마을까지 돌보아준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피란하는 길이로다.”07라고 비유하셨다. 범은 곧 백호 기운을 띤 일본이며 새끼 친 곳은 일본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우리나라라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처럼 일본에게 기운을 붙인다고 하시며 다만 그들에게 못 줄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仁)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인을 우리에게 붙여주시며 잘 지키라고 하셨다.08 또한 인을 가진 우리나라는 장차 좌상에서 득천하하며09 상등국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0 이 외에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공사로 조선 신명을 서양에 건너보내시는 공사11, 오선위기 공사12, 우리나라를 상등국으로 만들기 위해 서양 신명을 불러오시는 공사13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서양 세력을 꺾는 공사와 일본공사, 우리나라와 관련된 여러 공사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공사들의 핵심부에 우리나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일본과 우리나라와 맺힌 척을 풀기 위해 일본에게 우리나라를 맡기시고 그들에게 잠시 동안 기운을 붙이셨지만, 우리나라에게는 어질 인(仁) 자를 지키라는 대임을 맡겨주셨다. 우리나라는 상제님으로부터 어질 인 자를 받은 세계의 유일한 나라인 셈이다. 이 인(仁)은 본디 군자의 온전한 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내 몸처럼 아끼는 마음이다. 전 세계가 화평해지려면 여러 다른 나라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어진 덕성을 지닌 나라가 상등국이 되어야 한다. 곧 인 자를 우리나라에 붙이심은 우리나라를 기점으로 장차 전 세계를 화평하게 하시고 전 세계 사람을 구하는 광제창생의 대의를 완성하시기 위해서일 것이다.
3. 신명접대를 잘하는 조선
상제님께서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의 종교적인 특성을 추가할 수 있다. 관련 구절로 “조선과 같이 신명을 잘 대접하는 곳이 이 세상에 없도다. 신명들이 그 은혜를 갚고자 제각기 소원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받들어 줄 것이므로 도인들은 천하사에만 아무 거리낌 없이 종사하게 되리라.”14라고 하신 말씀을 들 수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전 세계의 모든 나라 중 우리나라가 가장 신명을 잘 대접하는 나라이며 대접을 받은 신명들이 은혜를 갚고자 하는 나라이다. 반면 서교는 신명의 박대가 심하며 그로 인해 장차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15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신명을 잘 접대하는 여부가 성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모사(謀事)는 재천(在天)하고 성사(成事)는 재인(在人)16이라는 말씀처럼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인간에 의해 마무리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상제님께서는 신명 대접을 잘하여 신명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광구천하와 광제창생의 천지공사를 행하시기 편하셨을 것이라 여겨진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 신명을 잘 대접하였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종교사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종교학자 정진홍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 문화는 무속 → 불교 → 유교 → 기독교를 경험하면서 그 내용이 풍부해졌으며 끊임없이 변천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는 무속을 ‘하늘과 힘의 실재’, 불교를 ‘미토스의 발견’, 유교를 ‘로고스의 전개’ 그리고 기독교를 ‘테오스의 경험’이라고 표현하였다. 무속은 질병이나 가뭄 등의 일상의 문제를 제천 등의 의례를 통해 기능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지만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는 일상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그것을 초월하려고 한다. 또한 불교에는 수많은 부처와 보살들의 이야기가 있으며 육도윤회론(六道輪廻論) 등을 통해 인간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한다. 이런 불교의 신화적 요소(미토스)는 분명 그 이전 우리나라에 없었던 종교문화였다. 불교가 초월성과 신비적 요소가 강하다면 유교는 이성(로고스)를 강조하며 현실문제에 합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유교는 경학(經學)을 통해 이성적 규범을 마련하였고 예학(禮學)의 성립을 통해 의례를 규정하고 규범화하였다. 하지만 유교가 경직화 되면서 민중들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고 조선 말기 민중에는 각종 무속신앙과 참위, 비결서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한국 종교문화에 큰 충격을 준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기독교의 분명한 유일신 사상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에 의해 가려진 종교성을 크게 일깨웠다.17
우리나라는 이렇게 민족 고유의 무(巫)와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와 불교와 같은 경전(經典)종교, 그리고 서양의 기독교를 경험하면서 그 종교문화가 풍부해지며 포용성이 넓어졌다. 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여 우리나라의 종교 지형을 엘리트층과 일반 대중으로 양분할 때 엘리트층의 유교는 벽이단론(闢異端論)과 음사론(淫祀論)을 통해 불교와 무속을 억압하며 그들과 섞이지 않으려는 반혼합주의(Anti-Syncretism, 反混合主義)를 고수하였다면 대중들이 신앙하였던 불교, 무속, 도교는 서로 혼합되는 양태를 보였다.18 즉 한국의 종교문화에는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흐름과 함께 유교처럼 자신만이 옳고 다른 종교는 잘못되었다고 보는 독단적인 흐름이 존재하였다. 돈 베이커(Don Baker)는 성리학의 이런 특성이 기독교와 유사하다고 하였다.19 이 성리학이 비록 불교와 무속을 탄압하였지만 많은 예제(禮制)를 마련하여 종교 의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은 1년 중 굉장히 많은 날짜를 국행의례와 각종 의례에 참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성리학적 엘리트들과 달리 대부분의 민중들은 특정 종교를 고수한 채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으며 중층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시대 말에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한 선교사 헐버트는 한국인의 종교적 중층성을 지적하며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에는 영혼숭배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바라본 한국인은 종교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며 생활에서도 종교성이 깊게 배어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한국인들은 ‘영혼숭배자’ 곧 무속이 짙다고 말했다. 외국인으로 『한국종교사』를 저술한 제임스 헌틀리 그레이슨(Grayson, James Huntley)도 한국인들의 종교 심성의 밑바닥에는 무속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에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이 중층적으로 겹쳐있다고 한다.20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민속과 종교를 연구한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은 『조선의 귀신』에서 한국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미륵, 제석, 옥황상제, 칠성, 관성제군, 조왕, 산신 등 여러 종교와 문화에서 유래된 많은 신명을 섬기며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21
이상 한국의 종교문화를 살펴볼 때 지배층에서는 유교적 종교 의례를 통해 천지신명에게 끊임없이 정성을 드렸고 일반 대중들은 많은 신명들을 섬기고 모셨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여러 종교적 내용을 소화하며 그 포용성을 넓혀왔으며 뛰어난 종교적 감수성을 계발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신명들을 잘 접대하였고 높은 영적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우리나라로 강세하신 것이라 추측된다.
4. 명산인 조선강산
상제님께서는 우리나라가 비록 무명의 약소 민족이지만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는 동학가사인 ‘궁을가’22의 구절을 인용하시며 우리나라가 하나의 큰 명산이라고 말씀하셨다. 풍수사상에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처럼 아주 뛰어난 인물은 영묘(靈妙)한 땅에서 태어난다. 우리나라가 명산이므로 도통군자가 이 기운을 받아 나온다고 하시며 “도는 장차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응기하여 일만이천의 도통군자로 창성하리라.”23고도 말씀하셨다.
도통군자를 창성하게 하는 금강산 이외에도 부모산으로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을 말씀하셨으며 네 명당인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의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의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 장성(長城) 손룡(巽龍)의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 태인(泰仁) 배례밭(拜禮田)의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을 통해 공사를 행하시기도 하셨다. 그 밖에도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우리나라 여러 각 지역의 기운을 쓰셔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구절이 많이 나타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땅에는 천지기운을 돌려잡을 수 있는 대운이 서려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천지의 대운이 깃들어 있는 우리나라 땅에 강세하셨을 것이다.
한편, 상제님으로부터 청국명부로 임명을 받은 김일부(1826~1898)는 간방(艮方)인 우리나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역학에서 우리나라는 간방에 해당되는데 일찍이 공자는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서 “만물이 끝나고 만물이 새로이 시작하는 때에 간방보다 그 이치에 있어 더 번성할 곳이 없다(終萬物 始萬物 莫盛乎艮)”고 하였다. 이는 곧 새로운 후천 세상의 도래에 있어 우리나라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김일부가 편『정역』에 의하면 선천이 억음존양의 시기였다면 다가오는 후천은 음양의 조화와 율려가 이루어지는 조양율음(調陽律陰)의 시대라고 한다. 또한 후천시대에는 윤년과 윤달이 없어지며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서고 1년이 360일이 된다고 한다. 이런 천지개벽의 시기에 우리나라는 지구의 주축부분에 위치하여 지구의 중심부가 된다고 한다.24
김일부 외에도 많은 영명한 이들이 우리나라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심지로 지목하며 한국의 밝은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25 곧 우리나라는 후천을 여는 개벽을 준비하기로 정해진 천장길방(天藏吉方)한 자리이며 도통군자가 출현할 명산이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우리나라로 강세하신 것이다.
Ⅲ. 전라도로 오신 의미
1. 원과 한이 많은 땅
지금까지 상제께서 우리나라로 오신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왜 하필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 가운데 전라도로 오셨는지 그 의미와 이유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는 체제의 성향에 반(反)하는 면이 강하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전라도는 중심부가 아닌 소외된 주변부로 인식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런 이미지는 선사 이래 전라도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대 이래로 한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전라도의 중심 세력들은 역사의 대세나 지배층의 핵심에서 이탈하였었다.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처럼 중앙에 강력한 왕권이 있어 지방을 통제하는 시기에 각 지역 세력들이 중앙 정계에 어떠한 형태로 참여하느냐에 따라 그 지역의 위상은 차이가 나게 된다. 하지만 전라도의 경우 고대로부터 살펴보면, 먼저 백제에 편입된 마한 세력이었고, 통일신라에 합병된 백제였으며, 고려에 병합된 후백제, 조선 개국에 소극적이었던 전라도의 친고려 세력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도 반골 성향의 야당 세력으로 남아 있던 대다수의 호남 지식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들은 모두 각 시대의 역사적인 주도 세력이 아닌 말하자면 패자편이었고 비주류였던 셈이다.26
호남에 대한 중앙정부의 차별과 배제가 공식화된 것은 고려 태조 26년(943)에 제정되었다는 <훈요십조>에서 비롯된다. <훈요십조>의 제8조의 내용은 ‘차현 이남 공주강 밖(車峴以南 公州江外)’ 지역의 산형과 지세가 반대 방향으로 달리므로 그 지역의 인물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제8조는 고려 태조가 제정한 것이 아닌 고려 후대에 날조되고 첨가된 것이라고 하며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의 지역도 호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27 그 날조 여부가 어찌되었든 조선 시기의 『성호사설』, 『택리지』, 『정감록』 등의 저서에서는 그 지역을 호서·호남 지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책들의 논의로 훈요 제8조는 더욱 힘을 얻게 되고 드디어는 호서·호남 사람들에 대한 기피와 편견을 확대 심화시켰다.
호남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진 것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정여립의 역모사건28 이후이다. 당시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로 많은 호남사림들과 일부의 승려들이 연루되어 목숨을 잃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기축옥사로 호남은 반역향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 중앙으로의 정치적 진출이 차단당하게 되었다. 선조도 이를 인정하며 “멀리 있는 만도 백성들아 짐의 말을 들을지어다. … 생각하여 보니 지난 기축년의 역변 이후에 도내에 걸출한 인물들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골짜기에 외롭게 홀로 향기를 품고 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에 감추게 되었도다. … 이제야 난을 당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도다.”29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전라도는 많은 이들이 유배되어 생활하는 지역이었다. 조선 영조 38년(1762) 당시 전라감사는 “본 도에 유배된 자가 너무 많아서 주객(도민과 유배자)이 함께 굶어 죽을 지경이므로 가능하다면 타도로 유배자들을 옮겨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다.30
조선 말 고종 때의 인물인 황현(黃玹, 1859~1910)은 19세기 조선의 정세와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오하기문(梧下紀聞)』이라는 저서에서 “인재의 보고이며 절의로 이름이 높던 호남이 변하여 천향(賤鄕)이 되고 인재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것이 이미 오래”31라며 탄식을 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황현의 호남에 대한 언급을 좀 더 살펴보자.
호남은 우리나라 남쪽의 울타리로 산천의 경개가 뛰어나고 물산이 풍요로워 온 나라가 먹고 입는 자원의 절반은 호남에 의지하고 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재주가 명민하고 잘 숙달되어 옛날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지략이 있는 선비들이 종종 배출되었다. … 세상에서는 호남은 인재가 많고 절개와 의리를 숭상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실로 거짓이 아니다.32
재주가 뛰어난 인재들의 진출이 막혀 벼슬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선비들은 갈 곳이 없었으므로 드디어 서로 어울려 산림의 문하로 들어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학자로 자부하였다. … 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그 욕심을 채워줄 만하였다. 무릇 이곳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양이나 돼지처럼 여기면서 마음대로 묶고 빼앗았으며 일생동안 종과 북을 치면서 사방에서 빼앗았다. 이리하여 서울에서는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을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 호남 사람들은 재주가 있었으나 천하게 되었으며 원망이 깊어져 장차 죽게 되었는데 난을 꿈꾸는 간사한 자들이 이를 빌미로 선동하였다. 이때 동학의 무리가 되어 쏠려가는 것이 마치 장터에 모여드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도로부터 좌도의 산골짜기까지 동학도가 없는 고을이 없었는데 그 수가 수십 만이나 되었다.33
위의 글에서처럼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하고 많은 충의지사들을 배출한 인재들의 보고였지만 차별과 배제 그리고 끊임없는 수탈을 받아왔다.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조선 말엽 전라도 민중들은 희망을 잃고 원과 한만 가득 쌓이게 된 것이다.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고 무명의 약소민족인 우리나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는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 중 가장 원과 한이 많은 전라도 지역으로 강세하신 것이라 추측된다.
2. 유불선의 기운이 있는 땅
상제님께서는 선·불·유의 법술에 대해 말씀하시며 “오늘날은 동서가 교류하여 판이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여져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능히 바로 잡지 못하리라.”34고 하셨다. 또한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35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유·불·선의 도통신과 그 법이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중요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상제님께서는 유·불·선의 가르침이 잘 전수되어 내려온 전라도로 강세하신 것이라 사료된다.
먼저 전라도의 유교에 대해서 살펴보자. 조선 전기의 지배 이념으로 성리학이 채택된 배경을 규명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사림의 존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그중에서 ‘호남사림’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아예 논외로 처리되거나 기호사림의 범주 속에 포함되어 이해되어오고 있다. 다시 말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정점으로 한 사림 계보에 대한 후대인들의 인식이 호남사림의 존재 의의를 가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호남은 분명히 뛰어나고 걸출한 선비들의 고장이었다. 호남사림은 전라도를 기반으로 중종(中宗)대에 성립되어 성장한 사림이다. 그 이전 세조의 즉위에 반대하여 이 지역에 낙향한 인물들이 있다. 대표적인 가계로 광주의 충주 박씨, 담양의 문화 유씨, 장흥의 진주 정씨, 고흥의 여산 송씨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박상(朴祥), 최산두(崔山斗), 양팽손(梁彭孫) 등이 있다. 이 중 최산두는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며 문하에 김인후(金麟厚)와 유희춘(柳希春) 등을 가르쳤다. 이는 김종직(金宗直), 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맥이 최산두에게 이어져 호남사림의 맥을 잇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후 정철(鄭澈), 백광훈(白光勳), 최경회(崔慶會) 등이 그 맥을 이었다.
이처럼 16세기 초반에 형성된 호남사림은 도학을 실천하며 절의를 중요시하였다. 이런 경향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에 많은 의병들이 이 지역에서 봉기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 의병의 성격이 타 지역의 경우와 같은 자기 지역을 보전하는 것보다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호위하는 일면이 강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6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모두 호남인들이었으며37, 전라도야말로 자타가 공언하는 충절의 고장이었다고 전한다.38 즉 호남인들이야말로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고 더 애국적이고 충의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호남인들의 충절은 유교 사상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전라도의 선도에 대해서 살펴보자. 『전경』 행록 1장에는 상제님께서 인신으로 강세하신 지역에 대한 설명이 있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전라도 일대에는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리는 봉래산(蓬萊山)·영주산(瀛洲山)·방장산(方丈山)의 세 산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삼신산은 『사기(史記)』 「열자(列子)」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발해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산(神山)을 가리키며, 선인들이 살며 불로불사의 약이 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이 삼신산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세상이 말하는 삼산은 모두 우리나라에 있으니 금강산을 봉래, 지리산을 방장, 한라산을 영주라 한다.”고 하였다.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으로 보는 것 외에도 예로부터 호남의 삼신산으로 불린 세 산이 있었다. 부안의 변산이 봉래산이고, 고부의 두승산이 영주산이며, 고창에는 이름 그대로 방장산이 있다.
즉 호남에 삼신산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선도적 경향이 깊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삼신산 외에 ‘선인포전(仙人布氈)’, ‘신선봉(神仙峰)’, ‘선망리(仙望里)’ 등이 상제님 강세지의 선도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지명상의 명칭 외에도 이 지역은 오랜 선도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선도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들과도 관련이 깊다.
한국 선도의 연원은 고조선과 삼신산 탐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단군신화에서 보듯 고조선은 선도가 성행한 나라였다. 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밀려 많은 백성을 이끌고 마한으로 건너와 왕이 되었다고 한다.39 즉 마한 지역에 고조선의 선도 문화가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삼신산을 찾는 해상루트의 중심이었다. 이 시기동안 중국의 여러 제왕들은 삼신산을 찾는 해상탐사대를 우리나라 서부 지역으로 끊임없이 보냈다.40 그들이 찾던 삼신산이 호남의 삼신산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전북의 민중들이 변산·두승산·방장산을 삼신산으로 보았던 점에서 이 지역에 선도의 기풍이 농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문헌이나 출토된 유물 등을 통해서 이 지역의 옛 왕조인 백제에서 신선사상이 유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무녕왕(501~523 재위)릉에서 출토된 구리거울이나 1993년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를 볼 때 백제는 국가적으로 신선사상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무왕 35년(636)에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을 본뜬 섬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신선사상의 기풍이 전북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것은 분명하다.
이 선도의 기풍은 조선 중엽에 중흥되었다. 신선사상 혹은 선도의 중흥은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특히 전북 지역이 그 중심이었다.41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신선 최치원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그 핵심에는 그가 고군산(古群山)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설화가 있다. 조선 중엽에 민간에 널리 유포된 소설인 『최고운전』에 따르면 그는 천상에서 잠시 인간계로 귀양 나온 신선으로 용왕을 만나기도 하고 중국의 황제를 굴복시키기도 한다. 이 책에는 최치원의 신선적 면모, 선도의 초월의식, 도술적 요소가 고루 나타나 있어 선술과 신선세계에 대한 지역민들의 동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부안 변산에서는 허균(許筠)이 암자에 거쳐하며 도사 남궁두(南宮斗)와 교류해 우리나라 선도 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남궁선생전』과 『홍길동전』을 저술하였다. 근처에는 남궁두가 승천하려다가 떨어져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는 장소도 있고 방장산 자락의 장성은 실존인물인 홍길동의 고향이기도 하다. 두승산 자락 서산리에는 조선 단학의 대가인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이 태어나 살았다.
권극중은 전북 고부 사람으로 진사시에만 합격하였고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수련과 학문에만 열중하는 은둔적 삶을 살았다. 그는 유교 교육을 받았지만 유교를 넘어 단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단경(丹經)의 왕’으로 불리는 『주역참동계』를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나름의 내단사상을 구축하여 『참동계주해』를 남겼다. 권극중은 조선 시대에 이미 내단 이론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권극중을 단학과 방술의 대가로 지목했으며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증보해동이적』에서 그를 ‘우리나라 단학 이론의 개창자’로 평가하였다. 권극중은 당시 남궁두 등의 내단 수련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남궁두를 권극중의 외가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42 즉 남궁두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선도수련이 17세기에 와서 권극중의 내단사상 연구로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권극중이 상제님 모친의 9대 선조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친께서 권극중이 살았던 서산리에 근친가 계실 때 상제님께서 탄강하셨다. 서산리는 비록 터만 남았지만 권극중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을 정도로 그는 이 일대에 깊은 정신적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전라도 지역은 오랜 선도의 전통을 지녔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도적 기풍이 농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상제님께서 조선 단학의 대가인 권극중이 살았던 서산리에서 탄강하심은 선도와의 관련성이 매우 깊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라도 지역과 불교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자. 전라도는 불교 문화재의 보고라고 불릴 만틈 수많은 국보, 보물급의 불교 문화재와 주요 사찰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사적으로도 나말려초에는 장흥의 보림사와 곡성의 태안사로 대표되는 선종이, 고려시대에는 송광사의 수선사와 강진의 백련결사라는 두 결사 조직이 핵심역할을 하였다. 또 통일신라 말의 당나라 유학승으로부터 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당대의 불교 사상을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불교문화와 사상이 전라도 지역에서 융성하였지만 이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불교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다. 이 미륵신앙과 관련해서는 Ⅳ장에서 좀 더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3. 손바래기 마을
금산사 미륵금불에 30년 동안 임어하신 상제님께서는 갑자년에 최제우에게 내린 천명과 신교를 거두시고 신미년 음력 9월 19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 강씨가에서 탄강하셨다. 이 객망리는 손바래기라고도 하였으며 상제님께서 탄강하시기 이전에는 선망리(仙望里)43라 하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상제님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로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44
탄강하신 객망리는 곧 ‘손님을 바라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개벽 이래 인류가 대망해온 가장 귀중한 손님45이시므로 ‘객망리’라는 지명은 이에 합당한 것이다. 이 ‘손님’의 의미와 관련하여 상제님께서는 종도 차경석과 대화에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46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나는 동쪽에서도 손님이요 서쪽에서도 손님이며 천지에 집이 없는 손님이다.”라는 뜻이다. ‘천지에 집이 없는 손님(天地無家客)’이라함은 천지 어디에도 구애됨과 속박됨이 없이 신통자재하신 상제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47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 어디에도 집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천지 우주 자체가 상제님의 집이요 몸이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객망리 주변의 지형과 지명을 살펴보면 먼저 호남의 삼신산인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이 있다. 방장산(方丈山)으로부터 내려오는 산줄기에 망제봉(望帝峰)과 영주산(瀛洲山)이 솟아있고 그 뒷기슭과 함께 선인포전(仙人布氈)을 이룩하고 있다.48 선인포전이란 신선들이 모전(毛氈)49을 펼치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혈처가 ‘삼십육대장상지지 삼성인당대출(三十六大將相之地 三聖人當代出: 정승과 장군이 36대 동안 이어지고 세 성인이 당대에 나옴)’의 대혈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이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50 망제봉이란 상제님을 대망(待望)하는 봉(峰) 또는 상제님을 바라보는 봉의 의미이다. 망제봉(望帝峰)의 산줄기가 쭉 이어져 시루산이 솟아있고 그 동쪽 들에 객망리가 있다. 이렇듯 주변의 산세가 상제님을 기다리며 모시는 형상을 보이며 지명도 그에 상응하고 있다.
또 주변의 지목할 지명으로 이평(梨坪)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 부정리(扶鼎里)51와 그 옆 골짜기인 쪽박골52이다. 객망리가 상제님과 관련이 있다면 부정리는 그 지명이 정산(鼎山)이신 도주님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부정리 옆 쪽박골은 박성(朴姓)이신 박우당(朴牛堂) 도전님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객망리와 부정리가 고갯길을 사이에 두고 있어 마주보지 않음은 상제님과 도주님께서 인신으로는 직접 만나시지 않았음과 비유되며 부정리 옆에 쪽박골이 있음은 도주님의 제자로 입도하셔서 도주님을 모시다가 종통을 이어받으신 도전님에 비유된다. 이렇듯 도는 여합부절이라 종통의 진리가 그 지명으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모악산 금산사에 임어하신 의미
1. 어머니산인 모악산
『전경』에 의하면 상제님께서는 탄강하시기 전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30년 동안 머무셨다고 한다. 이 금산사는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이후 한국 불교의 미륵신앙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금산사가 위치한 산은 모악산(母岳山)으로 풍수지리가들에 의하면 모악산은 생명을 잉태하는 큰 기운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모악산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 오교구산(五敎九山)이 성행할 때 모악산에 삼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전라북도의 대표적 명산 모악산(母岳山, 801m)은 노령산맥의 서단부에 위치하며 호남평야와 전라북도 동부 산간지대의 경계가 된다. 행정구역으로는 완주군 구이면과 김제시 금산면에 속한다. 모악산에는 금이 많아 주변의 금산면과 금구면을 흐르는 원평천, 두월천은 사금을 채취했던 곳이다. 『금산사지(金山寺誌)』에서는 모악산은 옛말로 ‘큰 뫼’라는 뜻을 지닌 ‘엄뫼’라고 하였다. 한자를 사용하면서 ‘엄뫼’는 모악산이 되었고 ‘큰 뫼’는 ‘큰’을 소리나는대로 바꿔 금(金)으로 ‘뫼’는 산(山)으로 고쳐 금산이라는 절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한편 정상 서쪽에 있는 쉰질바위라는 커다란 암반의 모습이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같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53 ‘어미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악산은 곳곳에 생명의 근원인 물을 베풀어 준다. 동으로 구이저수지, 서로 금평저수지, 남으로 안덕저수지, 북으로 불선제·중인제·가마제 등 사방으로 호남평야를 온통 적시는 어머니의 젖꼭지 같은 역할을 한다.
풍수지리가들은 우리나라 전체 지도에서 본 모악산의 위치가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궁에 해당한다고 한다. 모악산은 산자락이 굵고 짧으면서 험준하기도 하지만 성정은 부드러운 산으로 그 형세는 큰 황소 한 마리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풍수형상론으로 볼 때 와우혈(臥牛穴)에 해당한다.54 모악산 내의 수왕사(水往寺)는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볼 수 있다. 곧 수왕사는 생명력의 근원인 물의 기운이 솟구치는 곳이며 이름도 그 기운에 상응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풍수학자 김상휘에 의하면 풍수지리상 모악산를 중심으로 내혈과 외혈이 있다고 한다. 먼저 내혈은 사신사(四神砂)이며 수왕사를 중심으로 네 개의 사찰인 금산사, 대원사(大願寺), 주석원(呪錫院), 장파사(長波寺)이다. 동쪽은 대원사, 서쪽은 미륵사상을 근본으로 한 금산사가 있으며, 남쪽에는 장파사가 북쪽은 신인종 총본산 다라니절(주석원)이다. 모악산 사신사찰은 모악의 기맥을 보호하고 흐름을 안정적으로 소통시켜 준다고 한다. 수왕대는 사신사찰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풍수가들에 의하면 이 터의 기운이 대단하여 모악산 전체의 맥을 자처할 만하다고 한다. 새 세상을 여는 최상의 기운이 금산사 삼존 미륵불에 있다면 수왕사는 미륵이 지상에 이르는 원초적인 기운을 모아 놓고 있다는 것이다.55 그리고 모악산의 외혈은 진안 마이산, 합천 해인사, 지리산 천왕봉, 회문산, 운장산으로 그 기운이 열려있다고 한다.56
모악산은 오랜 세월동안 전라도 사람들의 정신적 거점지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모악산을 신비의 영산으로 여기며 이곳에 산신이 있다고 믿었다. 제일 높은 곳은 국사봉으로 그 밑은 무제봉과 수왕대가 있으며 가뭄 때에는 해달봉에서 전라감사가 기우제를 지냈다. 모악산 근처 김제평야는 호남의 곡창지대로 이 지역의 생명터였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관가에서 수확량을 조사하여 온갖 세금명목과 횡포로 농산물을 수탈해갔다. 끊이지 않는 횡포로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관군과 싸우거나 수확한 식량을 짊어지고 모악산으로 도망쳐 들어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모악산은 관군들의 손에서 벗어나 있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고통받는 민중을 끌어안는 어머니와 같은 산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악산은 풍수적으로도 새 세상을 여는 큰 기운을 가진 산으로 오랜 세월 동안 전라도 민중들에게 중요한 산이었다. 상제께서는 이 모악산을 회문산과 더불어 부모산이라고 말씀하셨다.57 상제님께서 모악산 금산사에 임하신 것은 이름 그대로 어머니산인 모악산이 가진 기운을 쓰셔서 후천 선경을 여시고자 함일 것이다.
2. 미륵신앙의 중심지인 금산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금산사는 상제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하시기 전에 30년 동안 머무신 곳이다.58 이곳에 머무시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셨다. 이 금산사는 미륵도량으로써 599년(백제 법왕 1) 또는 600년(백제 무왕 1)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창건설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35년 경 중관 철면(中關鐵面)이 편찬한 『금산사사적』이다. 1943년 『금산사지』를 편찬한 김영수(金映遂)는 “599년 법왕의 자복사(資福寺)로 터를 열기는 하였지만 당시의 사찰 모습은 소규모로 대가람의 체모를 형성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중창을 개산(開山)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송고승전』에서는 진표를 창건주라고 소개하고 있다.
금산사는 창건 이후 진표율사에 이를 때까지 이미 유식학을 전문으로 하는 도량이었다. 7세기 중후반 활동한 신라의 유명한 유식학승인 의적(義寂)이 금산사에 머물기도 하였다.59 이 유식사상은 미륵신앙과 깊은 상관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4세기부터 미륵 신앙이 성행하기 시작하여 5~6세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거쳐 수(隋)에 이르렀다. 특히 유식 법상종의 대가인 현장(玄奘)이 도솔상생(兜率上生)의 신앙을 고취함에 이르러 미륵신앙은 그 제자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고 이에 따라 미륵상을 조성하는 예도 빈번해졌다. 그의 제자 규기(窺基, 632~682)는 미륵상을 만들고 매일 그 앞에서 보살계를 외웠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때문에 미륵신앙을 법상종 종도(宗徒)들의 고유한 신앙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고, 이러한 관습은 우리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금산사도 유식학과 미륵신앙의 전통을 개산(開山)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지속해왔다.
금산사가 본격적인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확정해놓은 이가 진표율사이다. 그는 이곳 도량을 대규모로 중창함으로써 거찰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진표의 금산사 중창에 대해서는 「발연사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진표는 27세 되던 상원 원년 경자(760)에 쌀 29두를 쪄서 말린 후 양식을 만들어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갔다. 진표는 미륵상 앞에서 3년 동안 계법을 구하여 부지런히 수행했지만 수기를 얻지 못함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더니 문득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석단 위로 올려놓았다. 다시 대원을 발하여 3년을 기약하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몸을 돌에 두들기면서 참회하기를 3일 만에 팔이 부러지면서 떨어져나갔다. 7일째 밤에 이르자 이를 가엾게 여긴 지장보살이 손에 금석(金錫)을 흔들면서 와서 가호하니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드디어 가사와 하나의 발우를 주었는데 진표는 그 신령스러움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하였다. 만 3·7일이 되자 천안통을 얻어 도솔천중이 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세존이 앞에 나타나 손으로 진표를 쓰다듬으며 “훌륭하도다. 이처럼 계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지극히 참회하니 훌륭한 대장부로구나.”라고 하였다. … 진표는 교법을 받고 금산사를 중창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을 때 용왕이 나타나 옥으로 된 가사를 바쳤다. 스님은 용왕이 거느린 8만 권속의 호위를 받으면 금산사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몇 일만에 절이 완성되었다.”
다소 내용상의 차이는 있지만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모악산 남쪽의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이 살던 못으로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 때 한 조사(祖師)가 몇 만 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터를 닦아 그 자리에 대전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大殿)의 네 모퉁이 뜰아래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며칠 만에 지었다는 위의 설화와 다르게 역사 기록에서는 금산사 중창이 762년부터 766년에 이르는 기간에 이루어진 대역사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진표율사의 금산사 중창과 관련된 기록 외에도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중창 과정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전하고 있다.
…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수계를 받은 진표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금산사로 갔다. 그는 금산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할 원력을 세웠다. 경내를 둘러보던 진표는 사방 둘레가 1km나 되는 큰 호수에 눈이 머물렀다. 진표는 그 곳을 메우고 불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돌과 흙을 운반하여 못을 메꾸려고 하였지만 연못은 메꿔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진표는 지장보살과 미륵불의 가호 없이는 불사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 백일기도를 하며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에게 기도하였다. 백일이 되는 날 미륵불과 지장보살은 진표 앞에 강림하여 “이 호수는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바위나 흙으로 호수를 메꾸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숯으로 메꾸도록 해라. 또 이 호수물을 마시거나 목욕을 하는 사람에게는 만병통치의 영험을 내릴 것이니 중생의 아픔을 치유하고 불사를 원만 성취토록 해라.”고 계시하였다. … 어느 날 경상도에서 한 문둥병자가 숯을 한 짐 지고 금산사에 도착했다. 그는 지고 온 숯을 호수에 넣고 불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다음 생에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기를 발원했다. 기도를 마친 문둥병자는 호수물을 마시고 막 목욕을 끝내는 순간 미륵부처님을 친견하였고 몸이 깨끗하게 나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신도들은 잠시나마 진표 스님을 의심한 것을 참회하며 너도나도 숯을 지게에 가득히 지고 금산사 호수로 모여들었다.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다. 금산사 호수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호수물은 며칠 안가서 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수주일이 지나자 호수는 아주 메워져 반듯한 터를 이루었다.
호수가 다 메꾸어지던 날 해질녘, 한 청년이 새로 다져진 절터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에 왔으나 호수물이 다 메워진 것이다. 진표는 미륵장육상을 받치고 있는 쇠로 된 좌대에 손을 얹고 미륵부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다. …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그 청년은 건강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금산사를 찾았다. 이 소문이 전국에 퍼져 갖가지 소원을 지닌 사람들이 또 금산사로 모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좌대에 손을 얹고 소원을 기원하여 가피를 입었으나 불효자나 또는 옳지 않은 일을 기도한 사람들은 손이 좌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 60
위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근대에 채록이 될 정도였던 것을 볼 때, 이 설화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널리 퍼졌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즉 많은 민중은 금산사를 미륵이 직접 현신하여 그 계시로 지어진 신성한 장소로 그리고 그곳에 계신 미륵이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곳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악산 금산사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중심지로서 그 중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 미륵신앙은 죽어서 미륵이 계시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생(上生)신앙과 먼 미래에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교화할 때 인간세계에 태어나 용화삼회(龍華三會)에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하생(下生)신앙이 있다. 학계에서는 하생신앙이 먼저 성립되었고 보충적으로 상생신앙이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인간의 일생은 짧고 미륵의 출세가 아주 먼 미래로 여겨지므로 죽은 후 미륵이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의 곁에 있다가 미륵이 하생할 때에 같이 하생하여 삼회(三會)의 설법에 참여한다는 것이 곧 상생신앙이다. 이 상생신앙은 우선 도솔천의 왕생을 목표로 하고 도솔천의 왕생을 위해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불교 사찰은 불교 경전을 근거한 불국의 세계와 그 교리를 상징한다.61 금산사 사찰의 양식은 미륵경전을 근거로 하는 미륵상생신앙과 미륵하생신앙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미륵상생신앙과 관련된 것은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있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다. 원래 방등계단은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하는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런 예는 양산의 통도사와 개성의 불일사 등지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그러나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통도사 계단과는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통도사의 계단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계단이지만 금산사의 계단의 경우 그 기단 주변의 난간과 난간 주변의 사천왕 등의 상을 살펴볼 때 미륵이 계신 천상의 도솔천궁(兜率天宮)을 상징한다. 미륵상생신앙은 계율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계단과의 관련성이 있다. 진표율사도 계율을 중요시 하였으며 그의 계법은 도솔천에 왕생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도솔천궁을 상징하는 방등계단이 용화삼회의 설법장으로서의 미륵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도솔천궁이 천상에 용화삼회의 설법장이 지상에 있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62
한편, 미륵전은 미륵하생신앙을 상징한다. 그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통층으로 이루어졌다. 즉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는데 안에는 높은 4개의 기둥 중앙에 미륵삼존불과 협시보살 2기가 봉안되어 있다. 불단 아래의 거대한 솥은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어 왔다.
3. 금산사 미륵전
위에서 금산사에 대한 기록과 전승된 이야기 그리고 미륵신앙의 중심지로써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서 금산사에 머무르셨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대순지침』에는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은 미륵불과 솥의 양산(兩山)의 진리(眞理)를 밝혀 주신 것이다. “금산사도 진표율사가 용추(용소)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놓은 위에 미륵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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