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동학(東學)의 유교적 전헌(典憲)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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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윤 작성일2018.10.17 조회4,981회 댓글0건본문
동학(東學)의 유교적 전헌(典憲) 고찰
- 수운의 유교적 사유구조를 중심으로 -
연구위원 김태윤
목차 Ⅰ. 이끄는 말 Ⅱ. 수운과 상제님 기획 비교 Ⅲ. 수운의 유교적 사유구조와 한계 Ⅳ. 맺는 말 |
Ⅰ. 이끄는 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상제님으로부터 살아서는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았으며 사후에는 선도종장(仙道宗長)과 일본명부(日本冥府)로 임명된 인물이다. 『전경』에는 수운과 관련된 구절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 점은 수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상제님께서 행하신 천지공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운의 구도(求道)는 당시 시대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격동의 조선말, 그는 유교 지배체제 붕괴와 외세 침입을 지켜보면서 참담한 세상을 건질 해답을 절실히 찾고 있었다. 치열한 구도 끝에 1860년 4월 5일 상제님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은 뒤 동학(東學)을 펴게 되었다. 동학을 통해 수운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이 다가옴을 선포하고 상제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어야만[侍天主], 지상신선(地上神仙)이 되어 후천에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상제님께서는 수운이 유교의 전헌(典憲)01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교운 1장 9절은 유교가 마테오리치와 수운에게 목표에 대한 제한요소가 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02 마테오리치가 유교의 폐습으로 인해 지상천국 건설에 실패를 했다고 볼 때 유교는 외부적 한계 요소가 된다. 그러나 수운의 경우는 조선 말 유교사회에서 존재하는 유교적 규범이라는 외부적 한계 요소로서 유교도 있겠지만, 수운의 유교적 사유라는 내부제한 요소로서의 유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상제님께서는 동학의 강(降)03을 제우강(濟愚降)이라 평가하시고 진정한 강(降)인 천강(天降)은 뒤에 있다고 말씀하셨다.04 또한 수운의 동학과 달리 상제님의 대도를 담고 있는 참 동학의 의미와 그 참 동학을 펼칠 대선생(代先生)이 갱생(更生)한다고 말씀하셨다.05 이런 구절을 종합해 볼 때, 유교의 전헌을 넘지 못했다는 상제님 말씀은 상제님의 천지대도가 유교적 측면으로 일정부분 치우쳐 상제님께서 의도하는 진정한 가르침인 참 동학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06
지금까지 동학과 유교와의 관련성을 둔 기존의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동학이 유교를 계승했다거나 발전시켜 유교와의 차별성이 있다는 부류로 나뉜다.07 그러나 수운 역시 전통사상의 흐름 속에서 살아왔었고 유교적 가치를 공유한 지식인으로서 사유구조 내면에 유학이라는 사상이 어느 정도 기반 되어 있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런 점을 고려해 이글은 내부적 제한요소로서 유교라는 측면에서 동학과 유교의 전헌과의 관계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에 본 글은 수운의 사유구조에 어떻게 유학이 내재되어 있는지 살펴 동학에 내재한 유교의 전헌이 어떠한 성격으로 표출되는지 알아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수운의 유교적 사유구조를 인식, 진단, 목표, 방법이라는 기획(企劃)의 측면08에서 살펴볼 것이다. 기획(企劃)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얻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파악한 후 문제를 해결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운과 상제님의 기획을 비교·고찰해 봄으로써 그 한계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잘 드러날 것이다.
Ⅱ. 수운과 상제님 기획 비교
일반적으로 특정종교를 이해할 때 그 종교를 창시한 사람의 삶과 사상에 주목하게 된다.09 창교자(創敎者)는 당시의 시공간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그 시대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문제발생 원인을 찾아 진단(診斷)을 내리며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10 이 점들을 파악하기 위해 창교자 언행을 기록한 경전(經典)을 통해 그의 사고구조를 유추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에 수운과 상제님 기획을 비교하기 위해 수운의 기획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상제님 기획은 『전경』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11
1. 수운의 기획
(1) 문제 진단과 목표 자각
수운은 학문적으로는 퇴계 계보를 이은 부친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1840) 밑에서 성리학을 배워 영남학파 학문의 기초를 다지며 자연스럽게 유학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13세 때 울산 박씨와 결혼을 했지만 4년 후 부친의 별세와 화재로 전 재산을 날려버리게 되자, 1844년(21세)부터 10년간에 걸쳐 행상을 하면서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유교 사회의 기본 질서가 전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발견했다.
수운이 현실 속에서 인식한 문제점은 유교 질서의 해체였다. 군신부자(君臣父子)의 강륜이 무너져 유교의 생명이 다해 요순(堯舜)이 다시 와도 회복될 수 없다는 인륜(人倫)의 무질서였다. 또한 당시 기독교가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는데,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이 기독교세력인 영국의 무력에 굴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독교의 허구성과 서양문명이 병들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수운은 전국을 떠돌면서 얻게 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러한 문제의 근본요인은 공경하고 두려워 할 구체적인 믿음의 대상 없이, 각기 자신의 이익만 따라 살아가는 마음인 각자위심(各自爲心)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각자위심이라는 진단을 통해 수운이 모든 문제의 시발처(始發處)를 인간의 내면으로 삼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즉, 수운은 당시 모든 문제의 근원을 국내의 정치적 문란, 국외의 제국주의적 수탈이라는 구조(構造)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주어진 구조에서 어쩔 수 없이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내면에 우선적 가치를 두었다. 문제점을 양산시키게 된 구조에 대한 고민보다는 인간 내면의 욕심을 다스리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수운은 10년 방랑을 끝내고 구도의 뜻을 세운 뒤 1855년(乙卯年) 3월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찾아온 스님으로부터 책 한 권을 보게 된다. 책의 내용이 유도와 불도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치에 맞지 않자 수운은 깊이 탐구한 끝에 기도(祈禱)에 관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접한 후부터 그는 하늘[天]을 도덕의 기준이 되는 리(理)라는 개념에서 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독서를 통한 사색(思索)과 궁리(窮理)라는 유교의 공부법에서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방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구도에 정성을 다하던 중 수운은 1860년 4월 5일 상제님을 만나는 신비한 종교체험을 겪게 된다. 조카 최맹윤(崔孟胤, 1827~1882)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후 상을 잘 물리고 난 뒤 몸과 마음이 이상해졌다. 곧 집으로 돌아와 대청에 오르자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며 상제님을 만난 것이다.
뜻밖에도 이해 4월 어느 날 나는 마음이 아찔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병이라 해도 무슨 병인지 알 수 없고 말하려고 해도 형용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 어떤 선어(仙語)가 문득 들려 왔다. 나는 소스라쳐 일어나 캐어물었다.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상제(上帝)라고 부르는데 너는 상제(上帝)도 알지 못하느냐? 나도 역시 일한 보람이 없었다[余亦無功]. 그러므로 너를 이 세상에 나게 하여 이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부디 내 이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상제님께서 대답하셨다.12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 다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라고 물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기 때문이다[吾心卽汝心].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랴! 하늘과 땅은 알아도 이것을 다스리는 귀신을 알지 못한다. 그 귀신이라고 하는 것도 곧 나다. 지금 너에게 무궁하고 무궁한 가르침을 내려 줄 터이니 이것을 닦고 익혀라! 그리고 이 가르침을 담은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닦는 법을 바르게 하여서 은덕을 세상에 널리 펴라! 그러면 너를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할 것이다”라고 상제님께서 대답하셨다.13
여기서 상제님께서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릴 대상으로 수운을 선택하신 이유가 ‘여역무공(余亦無功)’과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으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상제님께서 ‘나도 역시 일한 보람이 없었다’라고 하신 것은 선천이 상극에 의해 발생한 원(冤)때문에 진멸지경에 처한 현실을 개탄하시며 선천의 상극을 뜯어고쳐 세상을 건질 도[濟世大道]를 펼치시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수운의 뜻과 같음을 아시고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고 인정하신 것이다.
이렇게 수운은 상제님으로부터 제세대도의 천명(天命)과 ‘이 가르침을 담은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닦는 법을 바르게 하여서 은덕을 세상에 널리 펴라’는 방법으로 ‘무궁하고 무궁한 가르침’인 신교(神敎)를 받게 된다. 이후 수운은 상제님과의 만남을 통한 득도에 머물지 않고 약 1년 동안 수차례 상제님과 문답을 통한 가르침을 받으며14 수련에 정진했다.15 수운은 해결점을 찾고자 했지만 유교적 문제 인식과 진단은 계속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후천이라는 시대를 맞이함에 따라 인간의 정신적 변화를 요구하는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나타나게 된다.
(2)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수행
수운은 사람들에게 상제님을 모시는 글인 주문(呪文)을 제시하며 상제님에 대한 정성스러운 마음이 될 때 지상신선이 되고 군자가 되어 후천에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볼 때 시천주 수행은 동학에서 제시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 수운은 제자와의 문답에서 주문이 상제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이라고 대답했다.16 그래서 그는 도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무엇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주문 21자만을 전했다.17 또한 천도(天道)에 이르는 방법이 모두 이 주문에 담겨 있다고 말하였으며,18 주문만 지극히 외우면 만권시서(萬卷詩書)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19
수운이 제시한 시천주는 외재적 기준인 천리(天理)에 맞춰 도덕적 행위를 요구한 성리학과는 달리 상제님을 지극히 모시는 내면의 자각을 요구한다. 이렇게 될 때 마음 내면에 신령(神靈)함이 드러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군자에 이른다고 하였다. 수운이 제시한 시천주는 양반이라는 특정대상이 아닌 누구나 수양할 수 있다는 대중화(大衆化), 모든 사람에게 상제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보편화(普遍化), 그리고 시천주 21자 주문수행만으로도 지상신선과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간이화(簡易化)가 그 특징이다.20 수운은 주문의 의미를 『논학문』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侍’는 안에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밖에 기화가 있어[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主’는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造化’는 무위이화요, ‘定’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永世’는 사람의 평생이요, ‘不忘’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萬事’는 수가 많은 것이요, ‘知’는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21
여기서 수운은 천(天)에 대한 설명을 유보하고 있다. 성리학(性理學)에서 천(天)은 도덕의 원천으로 인간에게 절대불변의 진리에 해당한다. 수운은 이법(理法)으로서의 천에서 모시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천(天)을 이해했다. 아울러 상제님을 만난 이후 천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인격적인 대상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시천주라는 것은 상제님을 모시는 지극한 마음이 될 때 이러한 초월적 천이 인간 내면에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리학이 인간이 천명(天命)을 회복하기 위해 천과의 합일[天人合一]22을 강조했다면 수운은 이념적인 천(天)을 신(神)으로 구체화시켜 시천주를 통한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상제님의 기획
지금까지 동학을 수운의 기획, 즉 인식, 진단, 목표,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수운은 당시를 유교적 도덕붕괴와 제국주의 외세침략으로 인한 혼란기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런 혼란발생의 근본원인이 하느님을 두려워할지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고 진단했다. 그 후 힘겨운 구도 끝에 상제님과의 문답을 통해 후천(後天)을 알게 되면서 후천과 지상신선을 목표로 제시하며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천주(侍天主) 주문 수행을 제시했다. 수운은 이러한 가르침을 그의 사유구조를 통해 동학(東學)으로 구체화시켰다.
수운이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설정한 인간 개별자의 이기심, 즉 각자위심은 문제발생에 대한 접근을 천지와 같은 외부적 구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 촛점을 맞춘 내부적 수양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유교적 문제의식이 수운의 내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유교가 관심을 두는 영역은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이다. 당연히 신비적이고 세상을 벗어난 영역은 논의에서 배제된다. 이제 인간으로서 현실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윤리ㆍ도덕적 실천이라는 방법이 요구된다. 즉,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현실에서 도덕실천이라는 방법을 통해 도덕적 자아를 완성하는 것이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23 이러한 사유방식은 수운이 유년시절 사상적 토양이 되었던 성리학적 사고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석가모니와 유교의 공자는 창교자의 인식, 진단, 목표, 방법을 스스로 깨닫게 되지만, 수운이 창도한 동학의 경우는 이와 차이점이 있다. 인식과 진단은 수운 자신의 것이지만 목표는 상제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외재적인 것이었다. 문제점은 그 목표를 수운 자신이 깨달은 바에 따라 이해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원대한 목표를 부여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사유방식으로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으로 구체화된다.
방법이라는 것은 결국 문제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방법은 문제를 진단하는 범주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수운은 구도 전에 지녔던 인간 마음의 회복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방법 역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쪽으로 방법을 설정했다. 그것이 바로 시천주 수행이다. 수운에게 있어 개벽은 개개인의 정신개벽을 통해 지상신선이 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천지(天地)에 내재된 상극구조에 대한 개벽은 수운의 인식에서는 벗어난 것이었다.
인식 진단 목표 방법
수운: 인륜의 무질서 각자위심 후천 / 지상신선 시천주
상제님: 진멸지경 상극 / 원 후천 / 지상신선 천지공사
<수운과 상제님의 기획 비교>
그렇다면 상제님의 기획과 비교를 통해 그 차별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경』에는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으로 혼란에 빠진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어 회집하여 구천에 계신 상제님께 호소하므로 상제님께서 문제를 진단하시기 위해 천지인 삼계(三界)를 대순(大巡)하시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24 이러한 점은 기존 종교 창교자의 문제인식 범위가 한 국가나 시대에 머문 것을 초월하여 상제님께서는 우주(宇宙)라는 시공간까지 확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제님은 총체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진멸(盡滅)할 지경’이라고 말씀하셨다.25
이어 상제님께서는 세상이 이렇게 참혹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상극(相克)이라는 구조로 인해 발생된 원(冤)에 있다고 진단하셨다. 이것은 인간이 머무는 사회뿐만 아니라 신명계(神明界)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신계까지도 상극이라는 구조에 벗어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존 종교에서 인간의 선악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진단에서 더 깊이 나아가 구조적 관점에서 평가하신 것이다. 즉, 기존 종교는 상극이라는 구조를 인정한 채 인간으로 하여금 선(善)을 요구하였지만 상제님께서는 삼계라는 구조전체가 바뀌어야만 진정한 선(善)을 추구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제시하신 후천 지상신선 세계는 동학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즉, 동학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그러나 앞에서 방법이 문제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서술하였듯이 수운은 각자위심을 변화시키기 위해 시천주 수행을 방법으로 선택하였고 상제님께서는 상극을 뜯어고치시기 위해 천지를 뜯어 고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단행하셨다. 수운에게 있어 후천은 우주의 순환에 의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가을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만 개벽이 되면 누구나 후천에 갈 수 있다고 보았지만 상제님께서는 진멸지경에 의해 새롭게 고쳐야 할 것으로 보시며 개벽의 영역으로 설정하신 것이다.
수운과 상제님의 기획을 비교해 볼 때, 수운이 문제 원인을 인간의 마음에 두고 외부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지만 상제님께서는 그 원인을 상극이라는 외부적 측면과 원이라는 내부적 측면을 설정하시면서 외부적 구조에 더 치중하신 것이 차이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차이점은 수운의 유교적 문제의식으로 본 진단에 초점이 되며 바로 유교적 사유구조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운의 유교적 사유구조가 무엇이고 그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Ⅲ. 수운의 유교적 사유구조와 한계
1. 주역의 순환론적 세계관
유교의 우주관은 『주역』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이른다.”26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역은 우주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으로 설정한다. 『주역』의 본체론적 성격이 강한 「계사(繫辭)」는 이러한 생성변화 원리를 “한 번은 음(陰)하고 한 번은 양(陽)한 것을 도(道)라 이른다.”27라고 제시하고 있다. 우주 운행이 음양(陰陽)의 기(氣)를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질서로 순환·반복한다는 천리(天理)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 수행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질서가 공동체 사회에서는 혼란 이후 다스림이라는 “일치일란(一治一亂)”28의 모습으로 순환된다고 보았다.
수운 역시 천지와 만물이 음양이라는 작용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천지와 만물이 음양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유교적 세계관을 일정부분 공유하는 것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잘 어울려 수많은 가지가지의 사물이 하늘과 땅 사이에 화생(化生)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오직 사람만이 가장 놀라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늘, 땅 및 사람을 세 가지 근본존재로 삼는 원리가 세워지고, 이 원리로부터 오행의 원리도 나오게 되었다. 오행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행의 중심은 하늘이다. 오행의 바탕은 땅이고 오행의 뛰어난 기는 사람이다. 이것으로 하늘, 땅 및 사람을 세 가지 근본존재로 삼는 원리를 알 수 있다.29
이러한 세계관으로 습합되어 있었던 수운은 상제님을 통해 알게 된 후천 역시 주역의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있다. 수운의 관점에서 본다면 후천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우주적 질서이자 변치 않는 천리(天理)였다.
대저 아득한 옛날부터 봄과 가을이 어김없이 갈아들고 네 계절이 변함없이 제때를 만났다가 사라져 간다. 이것도 또한 하느님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하다는 본보기다.30
대저 하늘의 운행은 아무런 모습이 없는 듯 하지만 그 자취가 있다. 땅덩이의 생김새는 그저 넓고 크기만 한 듯 하지만 일정한 방위가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구성(九星)이 있어 땅의 구주(九州)와 대응하여 있고 땅에는 팔방이 있어 팔괘(八卦)와 대응하여 있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에는 차면 이지러지고, 이지러지면 다시 차는 팔괘의 원리가 있어 동정(動靜)의 차례가 변하여 바뀌는 일이 없다.31
천운(天運)이 둘렀으니 일성일쇠(一盛一衰)아닐런가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 두지말고32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질서는 『東經大全』 「布德文」의 첫 부분에 등장한다. 수운은 선천을 ‘우부우민(愚夫愚民)의 시기’, 그리고 새로운 문명을 자각하고 성인(聖人)들이 등장하여 천도가 밝혀지는 오제(五帝) 이후의 ‘문명시대’, 나아가 세상의 사람들이 천리와 천명을 따르지 않으므로 도덕이 무너지고 혼란이 초래되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막지소향(莫地所向)의 시기’ 등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운은 당시 조선말 혼란기[亂]가 후천[治]으로 들어서는 순간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천리(天理)와 천명(天命)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공맹(孔孟)이 와도 안 되며 기존의 유·불·도가 생명이 다했다고 밝히며 이런 혼란의 모습이 바로 선천(先天)의 마지막 모습이며, 곧 거대차원의 변화와 함께 후천(後天)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열린다고 주장했다.33
수운은 다가오는 후천을 맞이하기 위해 인간의 정신적 인식변화인 정신개벽(精神開闢)을 요구했다. 수운의 개벽은 우주론적 변화인 개벽에서 인간의 심적 변화를 통한 ‘다시 개벽’으로 바뀌게 된다. 그의 다시개벽은 시천주(侍天主) 수행을 통해 각자위심을 떨쳐 버리고 도덕을 회복함으로써 지상신선으로 변화되게 한다. 여기서 그는 동학을 세상에 펴고자 했던 이유를 새로운 시운(時運)을 맞이해 인간이 성운(盛運)을 열어야 한다는 것으로 밝혔다.34
시운(時運)을 의논해도 일성일쇠(一盛一衰) 아닐런가
쇠운(衰運)이 지극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35
그러나 수운은 후천이 선천에서 어떻게 열릴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도가 펼쳐질 때가 바로 선천 오만 년이 지나고 후천 오만 년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36 이것은 수운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질서를 통해 가을이라는 후천이 자연스럽게 도래한다는 것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수운이 후천을 주역의 순환론적 우주관에 의해 등장하는 세계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수운의 우주관을 대순사상 관점에서 살펴보자. 상제님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천·지·인 삼계(三界) 전체로 확대하여 ‘진멸지경’으로 인식하셨다.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 국한해 인식과 진단을 내렸던 수운의 관점과 차별된다. 상제님께서는 삼계라는 영역에서 그 문제원인을 ‘상극(相克)’이라는 구조와 이에 따라 점철된 ‘원(冤)’으로 보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원은 천지라는 영역까지 확장되어 고려하게 된다.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이러한 원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행하신 역사(役事)로서 상극에서 상생으로 변경되는 우주적 시스템의 변화이다.
상제님께서는 상생(相生)만이 존재하는 ‘후천’ 건설을 목표로 제시하시면서 이러한 내용을 수운을 통해 세상에 이미 홍포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교법 1장 1절)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경의 운로를 열어서 선천에서의 상극에 따른 모든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道)로써 세계의 창생을 건지려는 상제의 뜻은 이미 세상에 홍포된 바이니라. (예시 6절)
수운은 이미 상제님으로부터 상극(相克)이라는 구조와 이로 인해 원(冤)으로 점철된 삼계(三界),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상생을 접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東經大全』 「布德文」에서 “나도 역시 일한 보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이 세상에 나게 하여 이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와 「論學文」에서 “지금 너에게 무궁하고 무궁한 가르침을 내려 줄 터이니 이것을 닦고 익혀라. 그리고 이 가르침을 담은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닦는 법을 바르게 하여서 은덕을 세상에 널리 펴라”라는 구절에서 제시되어 있다. 이돈화의 『천도교 창건사』에는 수운이 상제님과의 만남을 통한 득도에 머물지 않고 약 1년 동안 수차례 상제님과 문답을 통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수운은 상제님의 뜻을 일정부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수운은 인간이 정신개벽이 될 때 그것이 후천개벽의 주체가 되는 다시개벽을 말했다. 그러나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개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대순진리회 목적에는 인간 의식이 완성으로 거듭되는 변화로서의 정신개벽과 우주적 차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변화로서의 세계개벽이 제시되어 있다. 수운의 정신개벽은 유학이 대상으로 삼는 영역으로서 ‘현실 속’이라는 구도에 한정되어 있다. 이점은 조선조 정치·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구조를 인정한 채 인간의 의식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수운의 사상에서 구조를 변혁할 수 있는 방법론이 제시되지 못하다는 것이 한계로 남는다.37
수운은 모든 사람들이 지상신선의 경지에 이를 때가 곧 후천개벽의 세계라고 말했다. 이렇게 볼 때 수운이 목적으로 한 지상천국은 실지 선천 상극이 그대로 유지된 채 도덕이 회복된 사람들이 사는 세계다. 그러나 세계개벽에 대한 수운의 관점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수운이 가고자 했던 세계는 인간이 도덕 회복이라는 정신개벽을 통해 지상신선이 머무는 곳이지 선천 상극의 모순이 개벽으로 바뀐 세계개벽은 아니다. 결국 수운이 주장한 후천개벽은 인간의 자발적인 정신개벽으로 상극에서 머무는 지상신선의 세계였던 것이다.
수운이 인간의 정신개벽만을 주장한 것은 자신이 문제의 원인으로 진단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을 의식 속에서 놓지 않고 계속 지녔기 때문이다. 상제님과의 만남을 통해 천명과 신교를 받았지만, 근본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한 것은 일음일양(一陰一陽)의 원리로 순환하는 천리(天理)의 불변성이 수운의 의식에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순환원리로 후천이 다가올 때 천리에 순응해 인간의 도덕수양을 요구하는 것은 유교의 순천명(順天命)과 흡사하다. 수운은 인간이 주어진 하늘의 흐름을 알고 맞춰 나가야 한다는 순응주의적 관점에서 상제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다.38 수운의 주 관심은 천지가 아니라 그 천지에 거주하는 인간에게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수운의 다시개벽은 인간의 정신개벽에만 머문다. 도주님께서는 목적에 개벽이 정신개벽을 넘어 세계개벽까지 확대해 나감을 천명하고 계신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삼계개벽에 대한 핵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천지인 전체가 개벽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개벽이며 참 동학이다. 이런 점에서 동학에서 말하는 지상신선(地上神仙)과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지상신선이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인간의 정신개벽에 해당하며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개벽은 삼계개벽으로 그 영역이 확장된다. 대순진리회의 지상신선은 삼계개벽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머무는 존재이다.
2. 경천명(敬天命) 순천리(順天理)의 천인(天人)관계
수운은 상제님과 만난 종교체험으로 얻은 자신의 깨달음을 ‛동학(東學)’이라 불렀다. 이후 그는 은적암에서 은둔생활 중에 동학을 체계적으로 이론화시켜 나갔다. 특히 유교적 성격을 띠는 용어나 세계관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데, 수운은 동학과 유학의 관계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밝히고 있다.
주역 괘의 길이 변치 않는 이치를 살피고 하·은·주 삼대에 하늘을 공경했던 도리를 잘 익혀 본다. 이제야 비로소 옛 선비들이 천명에 잘 따랐음을 알고 뒷날 학자들이 이것을 잊었음을 슬퍼한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닦고 익혀 보니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다. 공자 가르침을 깨닫고 보니 우리 가르침과 같은 이치로 이루어졌다. 다만 우리 가르침을 밝혀서 말한다면 공자의 가르침과 대체적으로 같으나 구체적으로는 다르다. 그 의심하고 괴이쩍게 여기는 마음만 버린다면 우리 가르침은 사리에 맞는 떳떳한 이치임을 알게 되고 예와 지금을 살펴보면 사람이 해야 하는 도리임을 안다.39
수운이 생각한 유학과 동학의 ‘대체적인 동질성(大同)’은 바로 도덕 주체로서의 인간 이해와 그러한 인간 본성의 실천과 구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동학과 유학의 이러한 ‘대동’은 무엇보다 수운이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고 유학의 관념에 깊이 훈습(薰習)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전히 당시까지 유학적 이념이 가진 현실 구속력이 완전히 상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0
대동(大同)의 성향은 수운이 저술한 책에 나타난 용어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존 유학의 범주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용어들이 등장한다. 한문체로 저술된 『동경대전』에는 유교적인 덕목이나 유교 경전에 나오는 개념에 관한 용어들이 불교나 도교에 비해 가장 많이 등장한다. 특히 포덕(布德), 도덕(道德) 등의 도(道)와 덕(德)에 관한 용어들이 많으며, 공(功), 선왕지충의(先王之忠義), 절(節) 등의 충절에 대한 용어, 그리고 효제(孝悌), 성경신(誠敬信), 인의예지(仁義禮智) 등의 유교덕목에 관한 용어들이 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나오는 개념의 범주로는 삼재지리(三才之理), 오행지수(五行之數), 태극(太極), 기(氣) 등이 있다. 이외에도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가 나타나는데 오제(五帝), 요순(堯舜) 등의 용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41
다음으로 『용담유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용어는 『동경대전』과 마찬가지로 유교 덕목이나 유교 경전에 나오는 덕목들이다. 유교의 덕목과 관련된 용어들로는 ‛삼강오륜’과 이의 덕목들인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 있고 그 외에도 여필종부, 수신제가, 군신부자의 예, 사양지심, 예의오륜, 인의예지 등의 유교덕목에 관한 표현들이 있다. 유교 경전에 나오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표현들로 천지음양시판, 일성일쇠, 안빈낙도 등이다.42
수운에 따르면 유학은 성인이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일체 변화의 원인을 하늘에서 찾음으로써 천명에 대한 공경과 천리에 대한 순응을 제시했다. 또한 배움을 통해 천도(天道)를 밝게 깨닫고 천덕(天德)을 닦는 것을 도덕적 인격에 이르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했다.43
오제 후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이라.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리오.44
수운은 이 글에서 예전에는 성인들이 나타나 천도를 밝히고 경천명(敬天命), 순천리(順天理)했는데 다만 지금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내놓은 동학은 유교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전의 그 천도를 다시 밝힌 것일 뿐이라고 한다. 물론 이 구절은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동학이 유학과 다르지 않다는 정통성을 주장하고 이단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글로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동학의 기본 정신이 바로 경천명, 순천리에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운은 동학이 공자의 도와 한 이치로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45
유학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이상적 인간상인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조건이자 최종상태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천리(天理)에 순응하려는 인간의 도덕적 실천이 바로 그것이다. 즉 주어진 하늘의 운행원리에 인간이 따라간다는 유학적 사고방식이 내재해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나 모사재인 성사재천(某事在人 成事在天)이라는 말도 주어진 천리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내용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수운이 동학과 유교의 관계가 대동소이하다고 했을 때, 대동(大同)은 유교가 취하는 도덕 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다.
3. 유교적 도통의식(道統意識)
그렇다면 수운은 동학과 유교의 관계에서 밝힌 대동소이에서 소이(小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그는 선성(先聖)의 가르침의 핵심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파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유학의 가장 핵심적인 사회적 기능과 효용을 인륜을 밝히고 교화를 행하는 것에서 찾고 있다.46 그는 당시의 인륜도덕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小異]으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제시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 성인이 가르친 덕이고 수심정기는 오직 내가 새로 정한 덕이다.47
수운은 조선 말 시대인식 속에서 더 이상 요순의 도가 행해질 수 없어 유도(儒道)의 생명이 다했다고 선포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도가 공자의 도와 한 이치라고 한 점에서 볼 때, 수운은 인의예지를 배척하기 보다는 수심정기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는 뜻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수심정기는 당시의 무너진 공자의 도를 회복하기 위해 수운이 제시한 독특한 방법이다.
군자의 덕은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한다.48
이에 의거하면 바른 마음과 기운을 함양할 때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인격을 성취함을 알 수 있다. 성리학에서는 인의(仁義)의 성취를 통한 인륜의 완성자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데 수운은 여기에 바른 기운의 측면을 첨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유가에서는 인의의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바른 기운,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중시한 바 있다. 수운의 수심정기의 내용에도 이러한 측면이 배제된 것은 아니며 여기에 또 다른 의미가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49
수운은 자신의 도가 서학(西學)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논학문」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서학에 대칭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동학(東學)이라 불렀는데, 그가 사용한 동(東)은 문화적, 혈연적, 지역적 생활공동체인 조선을 의미한다. ‘도(道)는 같으되 학(學)은 다르다’고 한 그의 평가를 볼 때, 서학의 도와 동학의 도를 같은 지평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수운은 동(東)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그 학문은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수운의 의식에는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화이론(華夷論)50이 걸어간 역사적 방향의 한 시점을 일정부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또한 신선되어 비상천(飛上天)한다 해도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받아
일야간(一夜間)에 멸하고서 전지무궁(傳之無窮) 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이원수(漢夷怨讐) 갚아보세
중수(重修)한 한이비각(漢夷碑閣) 헐고 나니 초개(草芥)같고
붓고 나니 박산(撲散)일세51
곤륜산(崑崙山) 일지맥(一枝脈)은 중화(中華)로 벌려 있고
아동방(我東方) 구미산(龜尾山)은 소중화(小中華) 생겼구나
어화 세상 사람들아 나도 또한 출세(出世) 후에
고도강산(古都江山) 지켜내어 세세유전(世世遺傳) 아닐런가52
조선후기를 지탱한 조선 성리학의 자부심은 명나라가 망한 후 중화에 대한 인식을 지역적, 혈연적인 데서 나아가 문화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것에 근거한다. 이제 중화가 우리라는 인식이 치열한 도통의식(道統意識)53으로 표현된다. 공맹의 문화를 우리만이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을 이적들에게 다시 전파할 책임이 있다는 인식과 함께 반드시 지켜야만 할 자신들의 존재근거를 나타나게 된다. 의리와 명분으로 나타나는 천리를 보존하고 천리를 구현하는 예악전장(禮樂典章)을 보존해야 한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수운 역시 일정한 수준에서 공유하고 있었다.54 동학과 같은 시기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 역시 유학적 정통론에 입각해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이단으로 규정했다.55
당시 서교는 서양 열강의 힘을 통해 전파되고 있었다. 수운은 이러한 서교가 천명을 얻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그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에게 조선[東]의 문화를 지켜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수운이 사용한 ‘천주’와 ‘님’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다. 수운은 1860년 4월 5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상제가 바로 나’라는 말씀을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듣게 된다. 여기서 당시 민중들이 사용하는 절대적 하느님의 명칭이 ‘상제’였으며 상제님께서 하느님의 명칭을 상제라고 직접 언급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수운의 입장에서 상제님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일반 민중들에게 친숙한 상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동경대전』 「포덕문」에 4월 5일 상제님을 만나는 순간 외에는 ‘상제’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고 『용담유사』에는 우리말 표현인‘님’이 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서교에서 말하는 ‘천주’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했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서학과 대비된 동학을 좀 더 이해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56
수운은 대중화의 맥이 끝남에 따라 자신이 그 맥을 이어나간다고 말했다. 주자는 당시 남송시대에 유학이 도불(道佛)의 문화에 압도당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유학의 형이상학적 기획을 통해 신유학(新儒學)으로 탈바꿈시킨다. 주자의 이런 의식은 공자의 맥을 이어나가 유교의 참다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수운 역시 유학자로서 일본과 외세의 침략, 서학에 맞서 조선의 유교문화를 올바르게 이어나가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유는 인륜도덕을 회복해 공자의 정신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일정부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수운은 전통의 흐름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었고 유학적 사유에 깊이 훈습(薰習)되어 있었던 유학자였다. 그런 만큼 동학 창도에서도 일정 부분 유학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고 사상사의 연속에서 유의해서 들여다보면, 동학은 유학과 반대점에 있지 않다. 즉 동학은 유학을 초월하거나 배척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에서 찾았던 것이다.57
Ⅳ. 맺는 말
공자는 자신이 단지 과거 성현의 말씀을 술이부작(述而不作)했다고만 말했다. 공자 스스로 겸양의 표현으로 한 말이겠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에서 보여주듯이 특정인이 내세운 사상도 전승(傳承)된 사상의 토대 없이 등장할 수 없다. 즉 인간은 특정 사상을 자신의 사유구조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이렇듯 외부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정보는 한 사람의 생각에 의해 다양하게 변화되어 개념화된다.
이점은 수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배웠던 학문적 배경이 유교적 토대임을 감안할 때 수운의 사유에 일정부분 유교적 구조가 형성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지닌 인식과 진단은 유교적 접근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수운이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의 출발점은 인간이 사는 세계와 인간의 인륜도덕이었다. 조선말 펼쳐진 시대상황 속에서 수운이 문제의 근본원인이 인간의 이기심[各自爲心]이라고 선포한 것은 이러한 연장선에서 와 닿는다.
이후 수운은 궁리(窮理)와 독서(讀書)라는 유학의 공부 방법을 과감하게 탈피해 기도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전환하게 된다. 세상을 구할 대도(大道)를 얻기 위해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구도의 뜻을 포기하지 않다가 결국 상제님을 만나 천명과 신교를 받아 깨달음을 얻는다. 수운은 무궁하고 무궁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상제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그의 사유구조로 재구성한 동학을 내어 놓게 된다.
이렇듯 동학은 수운이 체험한 시대인식과 진단에서 시작한다. 상제님을 통해 후천이라는 목표를 접하지만 그의 사유구조로 후천을 이해하고 문제원인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내 마음에 상제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는 인륜질서가 무너지고 이기심이 극도로 달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수운이 제시한 방법이다. 시천주를 통해 상제님을 믿는 마음으로 본마음이 회복될 때 지상신선이 되어 후천에 갈 수 있다고 보았다. 수운이 강조한 정신개벽은 상제님을 지극히 모시는 마음으로 각자위심을 극복하는 조건이 된다.
목표가 상제님으로부터 주어진 외재적 항목이라면 인식과 진단은 수운의 유교적 사유구조로부터 시작된 점에 한계성이 드러난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유교의 전헌은 유교가 추구하는 주된 이념이자 규범이다. 이 속에는 유교가 추구하는 세계관이 근본이 되어 인간사회에 유교적 요소로 펼쳐진다. 수운에게 내재된 유교의 전헌은 바로 수운이 유교적 사유구조로 진단과 방법을 설정했다는 점에 있다. 수운의 사유구조에 내재한 주역의 순환론적 세계관은 바로 유교가 추구하는 세계관이었으며 경천명(敬天命) 순천리(順天理)의 천인(天人)관계는 이러한 세계관을 굳건히 하여 천명과 천리를 인간사회에 펼쳐야 한다는 당위적 관계가 된다. 아울러 수운이 당시 인륜도덕을 주장한 것은 유교의 맥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있었다.
물론 동학에는 유교의 극복요소가 없지는 않다. 세계종교사를 통해 볼 때 시대가 바뀜에 따라 종교는 다양한 변모를 취한다. 이 점은 동학 역시 그러하다. 수운이 말한 대동소이(大同小異)는 동학이 유교의 근본사유를 유지하되 시대의 특수성에 맞게 변모되었다는 반증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수운이 유교의 전헌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유교적 사유구조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운의 이러한 사유구조로는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수운과 유교의 전헌과 관련된 내용을 접할 때 수도인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대순진리회 봉축주(奉祝呪)를 볼 때 대순진리회 수도인은 입도한 순간부터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모든 수도인은 후천과 지상신선이라는 목표를 부여 받는다. 그러나 수운의 경우에서 보듯이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과 진단에 따라 자신만의 방법으로 수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이럴 때 자신의 수도가 대순진리에 얼마나 부합한 것인지 상제님의 기획과 비교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해 보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대순회보> 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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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 또는 전형적인 법이나 규범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유교의 규범은 유교 경전에서 나타나는 덕목으로, 충, 효, 인의예지 등으로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유교에서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이념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02 상제께서 어느 날 김 형렬에게 가라사대 “서양인 이마두(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지하신은 천상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천국의 모형을 본뜬 것이라” 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천리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신도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甲子)년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辛未)년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03 『동경대전』의 강시(降詩)에는 “삼칠 자를 그려오니 세간의 악마 다 항복하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서 수운이 강을 신명의 기운이 내리는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04 상제께서 어느 날 한가로이 공우와 함께 계시는데 이때 공우가 옆에 계시는 상제께 “동학주(東學呪)에 강(降)을 받지 못하였나이다”고 여쭈니 “그것은 다 제우강(濟愚降)이고 천강(天降)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도다. 또 “만일 천강을 받은 사람이면 병든 자를 한 번만 만져도 낫게 할 것이며 또한 건너다보기만 하여도 나을지니라. 천강(天降)은 뒤에 있나니 잘 닦으라”고 일러 주셨도다. (교운 1장 58절)
05 상제께서 어느 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三十리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하시고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 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도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라” 또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권지 1장 11절)
06 증산계열 기타경전에 나온 관련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걷우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노라.” (『대순전경』 6판 5-12)
“濟愚가 能히 儒家典憲을 超越하야 大道의 眞趣를 闡明치 못함으로 드듸어 天命을 거두시고 甲子로부터 八卦에 應하야 八年을 經한 後 辛未에 親히 誕降하시니 東經大全과 밋歌詞中에 이른바 ‘上帝’는 곳 天師를 이름일진저” (『甑山天師公事記』)
“동학가사에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는 말이 있으니, 이를 말한 것이며, 제우가 유교의 묵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나니, 내가 가르치는 바가 참 동학이니라.”(『天地開闢經』 7-3-8)
07 기존의 학계의 연구 성과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동학에 나타난 유학사상을 크게 부각시켜 보는 입장이고, 또 하나는 동학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전자의 입장은 배영기, 유경환, 배상현, 정규훈의 연구에 해당하는데 동학 또는 최제우에 대한 유학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한편 유학의 영향을 인정은 하되, 동학의 독창적인 부분에 더 주목한 연구는 박경환, 이찬구, 김용휘, 차성환, 조혜인 등의 경우이다. [임태홍, 『동학의 성립과정에 미친 유학의 영향』, 한국신종교학회, 『신종교연구』 9권 2003, pp.115-118 참조.]
08 만약 몸에 이상 징후를 감지할 경우 우리들은 병원에 가서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게 된다. 여기서 병명을 듣고 발병원인을 의사로부터 들어 알게 되는데 의사는 완치여부와 시기를 말해주며 발병원인을 제거할 치료방법을 제시한다. 즉 기획을 인식(징후 감지), 진단(병명과 발병원인), 목표(완치와 시기), 방법(치료방법)으로 볼 수 있다.
09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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