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교화자의 자임의식(自任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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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경언 작성일2018.10.17 조회4,776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백경언
목차 Ⅰ. 서론 |
Ⅰ. 서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기초로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온당한 방법을 아는 것을 지식의 목적이라 했다. 나아가 그는 이를 바탕으로 비로소 도덕적 행위가 고양된다고 보았다.01 그의 말대로라면 올바른 지식과 도덕적 행위의 완성은 “나는 ○○이다.”라는 형태의 대답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는 도통을 바라고 수도하는 도인에게도 적용해볼 수 있다. 도통은 닦은 바에 따라 주어지는데, 닦는다는 것은 수도의 온전한 법방에 따라 윤리도덕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난관의 극복 여부에 따라 수도의 성패가 갈리게 된다. 이때 “나는 도인이다.”라는 확고한 의식은 겁액(劫厄)을 극복하고 도덕적 완성을 기하는데 큰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도인이다. ”라는 표현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마음을 당당히 가져 자부(自負)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여, 수도 과정에서 여러모로 부족한 자신을 표현하기에는 부담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법을 행하는 도인으로서 이 표현은 당연한 것이며, 이러한 자부감을 받드는 것의 실상은 내면적으로 상제님의 덕화를 펴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거나 상제님의 뜻을 알고 영원히 받들어 나가겠다는 소명의식일 것이다.
이때, 스스로 하늘과 연관하여 시대적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소명감을 갖는 것을 ‘자임의식(自任意識)’이라 한다. 자임의식은 자아도취나 착각에서 형성될 경우 심각한 피해를 낳을 수도 있어 주의가 요망되기도 하지만, 역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 대부분은 이러한 자임의식을 확고히 했던 사람들이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전경』에 등장하는 교화와 관련된 인물들의 자임의식이다. 특히 상제님께서 공자·맹자·예수·수운을 들어 “모두 사람을 교화하였다(都是敎民化民).”라 하셨으므로02 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칭(自稱)03하였으므로 ‘자임’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아 논외로 하겠다. 대신 교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도 있다. 상제님께서 ‘포교 50년 공부’를 말씀하시면서 언급하신 이윤(伊尹)이다.04 이들은 모두 본성을 먼저 회복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이 그를 선택하여 그렇지 못한 중생을 교화하게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교화를 자신의 책무로 삼았던 인물들이다. 이 글은 이들의 삶이 자임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도인들의 자임의식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대순진리회 교화는 진멸지경에 놓인 현하의 창생을 구제(救濟)한다는 목적하에 행해지고 있어 분명한 자임의식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연원(淵源)과 관련하여 상기해 보는 것은 현 시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보인다.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의 삶이 각자의 사명을 자임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오늘날 도인들의 자임감 고취도 기대해 본다.
Ⅱ. 자임의식(自任意識)
“나는 ○○이다.”, “○○을 나의 임무로 여긴다.”는 자임의식은 다양한 계기로 형성되지만 자신의 위치나 소질을 바탕으로 시대적 요구를 깊이 사색한 위에서 세우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사에 발자취를 남긴 인물에게서 이러한 자임의식은 쉽게 발견될 뿐 아니라 남들보다 특별나기도 하여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발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은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1940년 7월 17일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후 ‘자유 프랑스’를 조직, 대독(對獨) 항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비시 프랑스’를 지원하던 영국의 외무장관 앤서니가 그를 회유하러 왔을 때 “내가 곧 프랑스다.”라고 한 드골의 말은 유명하며, 이 말은 오늘날도 프랑스 정치인들이 선거유세 중 단골 표어로 쓰고 있다.05 드골의 이 표현은 그가 조국을 사랑한다는 자부심에서 나왔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자부심만으로 이런 말을 지속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의 처지와 위상은 언제나 유동적이라 자부감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곧 프랑스다.”라는 표현은 조국 프랑스의 사활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임(自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드골의 역사는 프랑스 재건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 그의 자임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학(儒學)의 문집에는 세상의 도의(道義)와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以世道人心爲己任]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06 천명과 연관하여 세상을 교화하는 소임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규정한 말이다. 공자(孔子)는 천명(天命), 대인(大人) 그리고 성인(聖人)의 말을 군자삼외(君子三畏)라 하였다.07 주자(朱子)는 이중 천명에 대하여 “천명은 하늘이 부여해준 바의 정리(正理)이니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것임을 알면 곧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어서 부여받은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08 그리고,『주자어류(朱子語類)』「답황도부서문집」에서는 “인간과 만물이 생성될 때 반드시 이(理)를 부여받은 후에야 본성을 갖게 되고 기(氣)를 부여받은 후에야 형태를 갖는다.”라고 하였다. 모두 우주 자연의 이법(理法)인 이(理)를 하늘로부터 받아 인간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09 그러므로 인간은 그 천명을 살펴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증자(曾子) 역시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맡은 바가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써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또한 중대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또한 멀지 않은가?”라 했다.10
하늘의 인격 유무에 관계없이 인간 존재의 근거를 하늘의 명(命)에 두고 있는 내용이다. 인간·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당위성’을 하늘과 연관하여 이(理)라 했으므로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의 합일성을 공부한 유학의 인물들은 누구의 가르침이나 지도가 없이도 사회에 대한 무한한 연대의식과 책임을 자임하여 도의(道義)적 행동과 사람을 교화하는 일을 자신의 도리(道理)로 삼았다. 이는 훗날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발휘하였다. 특히 『전경』에 등장하는 다음의 인물들은 역사 속에서 이를 실제로 보여준 좋은 사례다.
Ⅲ. 『전경』 속 자임의식이 뛰어났던 인물들
1. 이윤(伊尹)
이윤은 상제님께서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 하여 도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서경』,『맹자』,『장자』,『묵자』,『손자』,『설원(說苑)』,『사기』,『여씨춘추』,『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은대(殷代) 초기의 재상으로 이름은 지(摯), 자는 윤(尹)이며, 관명(冠名)인 아형(阿衡)이 호가 되었다. 신야(薪野: 지금의 산동성 조현북부)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왕의 부름을 세 번 받고 나아가 하(夏)나라를 멸하고 은(殷)나라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11 탕왕 사후(死後), 태자(太子)였던 태정(太丁)이 즉위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태갑(太甲)이 왕이 되었다. 그런데 태갑은 검약(儉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방종(放縱)하여 선왕의 법(法)을 전복시켰다. 이윤은 그를 동(桐: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 서남)땅 궁궐에 모셔 반성하게 하고 일시 섭정했다. 3년 뒤 태갑이 개과수덕(改過修德)하자 왕위에 복귀시키고 보좌에 힘썼다. 이윤이 죽자 사람들은 그를 조상묘(祖上廟)에 배향하였다. 그가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이 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위의 내용으로 보면, 이윤은 성공한 재상이었다. 이러한 성공의 내면에 ‘자임’이라는 요소가 있었음을 맹자는 놓치지 않았다. 『맹자』에는 이윤이 스스로 사명을 받았다고 자임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는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며, 먼저 깨달은 자로 하여금 뒤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 하신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 먼저 깨달은 자이니, 내 장차 이 도로써 백성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니, 내가 이들을 깨우치지 않고 그 누가 하겠는가? 12
맹자는 이를 두고 “이윤은 천하의 백성들이 필부(匹夫) 필부(匹婦) 라도 요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밀어 도랑 가운데로 들어가게 한 것과 같이 여겼으니 그가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 일을) 천하의 중책으로 자임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탕왕에 나아가 설득하여 하(夏)나라를 정벌해서 백성을 구제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13 맹자는 이윤에 대해 ‘성인 가운데 자임으로 특별한 분[聖之任者]’이라고 평하였고,14 정명도(程明道, 1032~1085) 역시 “이윤은 끝까지 자임하는 의사가 있었다.”고 하였다.15
이윤의 의식 속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하늘에 근원을 두는 천명의식이 있으며, 이를 사명으로 자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학장구』서문에 나온 다음의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늘이 사람을 내림에 본성을 부여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 본성의 소유함을 알아 온전히 하는 자가 적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총명하고 밝은 지혜가 있어 그 본성을 다한 자가 그 사이에 나오면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시어 억 조 만백성의 군주와 스승으로 삼아 그 백성의 본성을 회복하게 한다.16
2. 공자
성(姓)은 공(孔)이며 자(子)는 남자의 미칭으로 ‘선생’을 뜻한다.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다.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출신이다. 생몰 연대는 기원전 551년에서 기원전 479년이다. 공자는 51세 때 중도재(中都宰)란 벼슬에 오르면서 정치를 시작하였다. 중도재란 중도를 다스리는 장관의 직이다. 공자는 그 벼슬을 맡고, 일 년 만에 노나라 전체가 본받을 만하게 질서를 잡아 예의와 윤리의 기틀을 세웠다. 정공(定公) 10년, 그의 나이 52세에는 제나라 경공(景公)과의 협곡(峽谷) 회합에서 외교상의 공로를 세웠다. 정공 12년, 그는 54세에 나라의 법을 다스리는 오늘날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되었다.
『전경』에 나오는 ‘공자가 노나라의 대사구를 지냈다.(孔子魯之大司寇)’라는 것은 이때를 말한다. 그가 대사구가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정묘(少正卯)를 처단한 일이었다.17 이 일은 당시에 문인(門人)으로부터 “무슨 죄로 주살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18 그는 또, 막강한 계손(季孫)·숙손(叔孫)·맹손(孟孫) 등 삼환씨(三桓氏)의 세력을 누르고 정치·군사적으로 노나라 공실(公室)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제나라 경공과의 회합에서는 외교상의 무례함을 도의로 꾸짖어 노나라의 위상을 높였을 뿐 아니라 잃었던 땅까지 돌려받아 국위를 선양하였다. 모두 굳은 신념이 아니면 행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공자의 혁신정치가 효력을 발휘하자 제나라는 크게 경계하여 정공에게 미녀 80명과 명마 120필을 보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자행하게 하였다. 공자는 이를 말리다가 성사되지 않자 벼슬을 반려(返戾)하고, 55세의 나이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68세의 나이로 노나라로 돌아오기까지 13년의 긴 여정에 공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공자의 자임의식이 드러나 보이는 것은 이 기간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난경에 처했을 때였다. 공자가 광(匡)에서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죽을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 몰렸을 때19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왕께서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이 문을 없애려 하였다면 나 자신이 이 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나, 이제 내가 이미 문에 참여하였다. 그렇다면 하늘이 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늘이 문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 땅 사람들이 어찌 나를 해치겠는가? 20
자신이 예악과 제도에 관여하고 있음을 ‘하늘이 도를 세상에 펴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몸담은 일로 미루어 하늘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남다른 자임의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공자의 표현은 송나라에서도 있었다. 사마환퇴(司馬桓魋)가 공자를 해치려 했을 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천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임하고 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21
말년의 공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7일전(기원전 479, 魯 哀公16년, 공자 72세)에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예기(禮記)』「단궁(檀弓)」을 보면, 지팡이를 끌고 마당에 나와 “태산이 무너지려는도다. 들보가 부러지려는도다. 철인(哲人)이 시들려는도다!”라 하는 구절이 있다.22 하늘이 자신을 통하여 예악과 제도를 세우고자 하였음을 자임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을 태산과 철인에 비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논어』「위정편」을 보면, 공자는 50세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때는 그가 실제 정치에 참여하여 이른바 교화를 시작한 때이므로23 천하를 교화 한다는 자임의식이 구체적으로 발휘된 때라 할 수 있다. 이후 목숨을 걸고 열국의 제후를 만나 설득하던 13년의 세월도 하늘이 자신에게 예악 제도를 세우는 책임을 부여했다는 자임의식의 발로라 보아진다.
3. 맹자
맹자의 이름은 가(軻), 자(字)는 자여(子輿), 혹은 자거(子車, 子居)이나 모두 위·진 시대(魏晋時代)의 설로서 확실하지는 않다. 생몰 연도는 맹자가 만난 제후들의 재위 연대를 고려할 때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엽인 기원전 4세기 후반으로 기원전 372년경에서 289년경으로 본다. 태어난 곳은 당시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 지금의 산동성 연주부 추현)라는 소국이었다.
맹자가 살던 시대는 제후들 사이에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만이 있어, 백성들은 씨 뿌리고 김을 매야 할 농사철에도 전쟁과 부역에 동원되었다. 그로인해 늙은이와 약자들은 굶주려 죽고, 젊은이들은 흩어져 유리걸식하였다. 이에 맹자는 인정(仁政)으로 패도(覇道)정치의 난맥상을 타개하려 노력하였다. 맹자가 양혜왕(梁惠王)과 제선왕(齊宣王)에게 왕도(王道)를 권하여 백성을 구제하려던 것을 상제님께서는 “맹자는 제와 양나라 임금에게 선정을 설하였다(孟子善說齊梁之君)”고 평하셨다. 비록 당대에는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우활(迂闊)’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백성을 구제함을 급선무로 여겨 인정의 확고한 개념으로 왕들을 설득하던 모습에서는 장부의 기상을 볼 수 있다.
맹자의 이러한 역사(役事)가 자임의식과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맹자가 자임한 내용은 교운 2장 26절의 전교(傳敎)에 ‘맹자는 500년에 반드시 왕도를 행하는 자가 나온다고 하였다(孟子所謂五百年必有王者興者).’는 말과 연관이 있다. 이 말은 맹자가 제나라에서 쓰임을 받지 못하여 낙담하여 기쁘지 않은 기색이 얼굴에까지 나타나자 제자인 충우(充虞)가 “전일에 선생님께서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셨는데 달갑게 여기지 않는 기색이 있습니다.”하였을 때 한 말이다. 맹자는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백 년에 반드시 왕자가 나오니,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한 자가 있다. 주나라로부터 700여 년이 되었으니, 년 수를 가지고 보면 지났고 시기로 살펴보면 지금이 가하다. 무릇 하늘이 천하를 평치(平治)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일 천하를 평치하고자 하신다면, 지금 세상을 당하여 나를 버리고(나 말고) 그 누가 하겠는가. 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24
맹자는 제나라에서의 유세에 실패하자 적잖게 실망한 듯하다. 그는 제나라에서 자기 뜻을 펴지 못하게 한 하늘의 의도는 알 수가 없으나, 하늘이 만약 세상을 평정하고 다스리고자 한다면 그 도구가 자신에게 있으니 어찌 자신을 쓰지 않겠느냐고 하였다.25 여기에 더하여 요순(堯舜)으로부터 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와 탕왕으로부터 문왕(文王)·무왕(武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500년이었고, 그때 세상에 이름을 날린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자는 그들은 고요(皐陶)와 직(稷)과 계(契), 이윤(伊尹)과 래주(萊朱), 태공망(太公望)과 산의생(散宜生)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결국, 맹자는 자신이 왕이 아니므로 그러한 명세자(名世者)26임을 자임하여 하늘이 크게 쓰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제나라에서의 쓰이지 않았을 때 언짢은 것은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27 하며 결국엔 자신이 쓰임이 될 것이니 기쁨이 있다고 한 것이다. 주자는 이를 두고 “현성(賢聖)이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과 천리(天理)를 즐거워하는 정성이 병행되고 모순되지 않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28고 하였다. 결국, 맹자는 성인군주가 출현하여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잡고 치세가 이루어지다가 이후 차차 왕도가 사라지고 500여년이 지나면 혼란이 극에 달하져 세상인심이 간절히 왕도(王道)의 출현을 기다린다는 역사의 반복됨을 관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이야 말로 왕도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는 시기가 아닐 수 없었으므로 자신에게 세상을 평치할 도구가 있음을 자부하며, 군주를 보필하여 세상에 명망을 드러낼 사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하게 자임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맹자가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여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증익하게 한다.”29 라 하였던 말은 하늘의 대임을 자임했던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 말로 보인다. 상제님께서 『맹자(孟子)』 한 절을 일러 주시면서 “그 책에 더 볼 것이 없노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4. 수운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성묵(性默)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관명(冠名)은 제선(濟宣),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이다. 1824년 12월 18일 경주 가정리(稼亭里,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에서 출생했다. 그가 살던 조선말은 국내·외적 혼란이 극심하고 세상인심도 각박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수운은 이 시기를 “요즘 우리나라는 나쁜 질병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있고 또 백성은 사철을 통해 편한 날이 없다.”고 하였다.
수운은 기해년(己亥年, 1839) 16세에 부친 근암공(近菴公)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르면서 가산(家産)이 기울감에 따라 학문의 길도 청운(靑雲)의 뜻도 잃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평생 뜻한 바가 있고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중하게 여겨, 각 이치의 여러 법술을 살펴 그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모든 이치가 세상 사람을 잘못 이끄는 이치라 판단될 뿐이었다.30 그러던 중 을묘년(乙卯年, 1855) 3월에 비몽사몽간 노승으로부터 책을 받고 “이 책과 똑같이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신비체험을 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856) 여름에는 천성산(千聖山)에 들어가 한울님 강령(降靈)과 더불어 명교(命敎)가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였다.
가계를 돕지 못하고 수도생활을 계속하며 무오년(戌午年, 1858)에 이르자 가산이 탕진되고 빚이 산과 같이 쌓였다. 전년(前年)에 논 여섯 두락을 일곱 사람에게 거듭 판 일로 송사 되어 관아에서 심판을 받았다. 기미년(己未年, 1859) 10월, 거처할 곳을 정하지 못하고 마음만 답답해하다가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고향 용담(龍潭)으로 돌아왔다. 이때 처량했던 그의 심상은 『용담유사』「교훈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 후, 약 7개월 뒤인 경신년(庚申年, 1860) 4월 5일, 조카 맹륜(孟倫: 수운의 장조카)의 생일잔치에 갈 면목조차 없이 초라하던 날 오후에,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를 받았다. 그의 표현대로 꿈속의 일처럼 놀라운 일이고 말로 나타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주목할 것 중 하나가 그의 ‘자임의식’이다. 용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앞날이 캄캄하여 거의 절망에 가까운 처지였다. 그러나 세속의 온갖 번뇌를 털어 없애고 산외불출(山外不出) 맹세하며 자신의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우매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濟愚)로 고치고 그 길을 상제님께 구하였다. 이는 자신의 소명을 자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잡지『개벽(開闢)』의 창간자이며 천도교의 사상가인 이돈화(李敦化, 1884~?)는 바로 이 자호 개명(改名)이 상제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였다고 말하였다.
자호(字號) 이름 다시 고친 그 중한 맹세가 마침내 수운을 천명(天命)의 극처(極處)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31
자호란 이름 대신 부르는 별칭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람의 이름은 모두 부모 어른이 명한 것이니 가볍게 고칠 수 없다.”32고 하였다. 이름이 이렇게 지중하므로 함부로 쓰기를 꺼려 사람들은 자(字)나 호(號)를 즐겨 불렀다. 자(字)는 성인식 후 관(冠)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름과 관계하여 받는 것이고, 이보다 자유스러운 것이 호(號)였다. 일종의 별명인 셈으로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 기호를 놓고 친구나 스승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거처하는 곳[所處以號]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志以號], 좋아하는 물건[蓄以號]을 소재로 호를 지었는데, 스스로 지은 호는 자호(自號)라 했다. 이때 ‘자신이 지향하는 뜻’을 표현한 자호는 당사자의 인생관을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뒷날 상제님께서 수운의 개명을 두고 “자호 이름 고칠 때는 무슨 뜻으로 그리했느냐?”33라고 하신 것은 그가 자임한 내용을 물은 것이라 보인다. 인간의 자임하는 바와 상제님께서 찾아 써 주시는 바가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하늘이 자신에게 대임을 맡겼다는 표현은 「교훈가」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을 가렸으면 나만 못한 사람이며
재질을 가렸으면 나만 못한 재질이며
만단의아 두지마는 한울님이 정하시니
무가내라 할 길 없네 사양지심 있지마는
어디 가서 사양하며34
이 글에서 수운은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재질 없는 자신을 하늘이 택하여 주시니 사양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자호할 때의 자임의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요순(堯舜)의 정치와 석가 공자의 가르침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는 세태를, 하늘이 바로 자신을 정하여 바로잡고자 한다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Ⅳ. 연원(淵源)에 근거한 자임의식
교화의 학이라고 불리는 유학에서 교화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성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최근 종교에서 교화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타인에게 전하고 이로써 상대를 이해시켜 감화를 도모하는 종교의 전도형식이라고 보아지고 있다.35 그러므로 교화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거나 상대를 감화시키는 등 내면적이고 인격적이며 자발적 변화를 도모하는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교화가 마음과 관계된 일임을 시사한다. 교화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36 측면에서 마음에 의식이 형성되는 근간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식은 자신이 경험한 역사와 관계가 깊고 추구하는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 자임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때 잘못된 과정과 배경으로 형성된 자임감은 자신은 물론 타인을 파멸로 몰아갈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 교화자의 자임감은 반드시 도통할 수 있는 진리의 바른 근거 위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연원(淵源)이다. 우리 도의 연원은 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 내려왔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말씀과 도주님의 도법, 도전님의 유훈을 근거로 자임하는 바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에 대순진리회 주요 경전에 근거하여 자임의식을 지녀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상제님과 연관하여 자신을 교화자로 자임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전대미증유의 천지공사를 행하셨고 이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다. 여기에 더하여 도인은 연원(淵源)을 따라 입도하게 됨으로써 진법(眞法)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그보다 많은 수행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도통할 수 있는 진법을 따르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큰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 수 없다. 상제님께서는 이를 삼생(三生)의 연(緣)이 있어 가능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자신을 교화자로서 자임하는 것은 넘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진법을 수행 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천지의 은혜로 인식한 당연함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우주의 절대자이신 구천상제님과의 인연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태양과 행성의 운행에 비유될 수 있다. 태양계 내에서 행성이 각각의 고유한 궤도를 지니고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은 모두 태양이라는 근원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이다. 비록 떨어져 존재하면서도 그 움직임은 근원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인력에 의해 지속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인으로서 교화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인생에 가치를 느끼는 일은 연원에 뿌리를 두고 움직일 때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상제님과 삼생의 연이 있음을 깊이 생각하여 수도와 교화의 사명을 자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상제님 말씀을 토대로 세태를 바르게 인식한 위에 자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대에 대한 인간의 안목은 참으로 부족하여 목전(目前)의 일만을 쉽게 알고 마음의 깊이 없이 행하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 한(恨)을 남기기 쉽다. 상제님께서는 오늘의 상황을 “이제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둡다.”고 하셨다.37 그와 더불어 “세상의 세태를 아는 자는 살 수 있으려니와 그렇지 못한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38고도 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때를 맞아 도전님께서는 교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화는 입도한 도인에게 밝은 재활(再活)이 불역(不易)의 천운구인(天運救人)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을 자인 자각케 하는 것이다.39
그러므로 진멸이라는 위태로운 처지를 당하여 상제님께서 정해놓으신 운수로 천하창생을 구하고자 진리를 설파하는 것이 교화다. 위급한 세태를 조금도 모르고 오직 재리에만 빠져 있는 창생의 삶과 상제님께서 정해놓으신 한량없는 운수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이러한 격차의 가운데에 교화자는 서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교화자의 자임의식은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를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로 끌어올려 주어야 한다는 구제(救濟)의 시대적 사명을 토대로 형성될 수 있다.
세 번째는 연원을 알고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 자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인이 교화를 듣는 경우에 흔히 볼 수 있는 마음을 속이는 예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종단 내에서도 살펴보아야 할 사안이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행하셨고, 도주님께서는 도통할 수 있는 법을 정하셨으며, 도전님께서는 그 법에 인연자가 들어와 수도하도록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연원에서 만들어 놓으신 종교적 법리가 아닌 다른 것을 믿는 것은 마음을 속임이며, 도주님께서 정하시고 도전님께서 행하시는 도법을 그대로 행하지 않는 것도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원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대업을 계승하고 대도를 펴는 소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사사로움을 극복하여 마음을 속이지 않는 양심에서 우러나는 자임의식이다.
네 번째는 도가 곧 나요 내가 곧 도라는 경지에서 자신의 사명을 자임하여야 한다. 도가 곧 나라는 경지란 상제님의 덕화를 세상에 드러내고 펴는 존재로서 자각을 하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를 펴는 도인의 언어 행동은 모두 상제님의 덕화를 펴는 일과 직결된다. 책임감을 가지고 어떠한 경우라도 연원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오늘날 세상을 진법으로써 교화하여 구제하는 만화도제(萬化度濟)의 역사가 오직 도를 펴는 자신에 의해 이루어짐을 자각해야 한다. 나름의 법으로 세상을 구제(救濟)하려고 교화를 행하던 성인도 성지직(聖之職) 성지업(聖之業)을 자임하여 행하였다. 진법(眞法)을 교화하는 도인이 내가 곧 도라고 자임하는 것은 진법의 가치와 책임감을 인식한 바탕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교화는 타인의 생명과 인생을 다루는 일이다. 교화자의 생각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자임의식은 생각을 지배하는 심층에서 중추(中樞)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연원에 근거하여 남을 잘되게 하는 일로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자임하는 것은 타자와 우주전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지성(至誠)을 다하게 되고 기대하는 바의 목적을 달성하여 상제님의 덕화를 선양하게 될 것이다.
Ⅴ. 결론
이상으로 이윤과 공자·맹자·수운의 자임의식과 도에서 연원에 근거를 두는 자임의식을 살펴보았다. 『전경』에 교화자로 거론된 인물들은 정치·사회적으로 포악함이 난무하여 쉽사리 제 뜻을 펼 수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사람의 수준을 넘어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분명히 남겼다. 그들의 삶에서 주목할 것은 ‘하늘로부터 세상을 교화’하라는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자임의식’이었다. 이는 오늘날 감각문화40가 만연하여 도를 외면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포덕하고 교화하는 도인들에게 세태와 인심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고 그 답을 내면에서 찾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훌륭한 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이윤 역시 폭군 주(紂)에게 나아가 선정을 도모할 땐 목숨을 걸고 한 것이다. 불초했던 태갑을 교화하여 기어코 선을 행하도록 한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라가 도로써 다스려지면 나가고 혼란하면 물러난다는 일반 군자의 사고와 다르게 그는 오직 세상 사람이 요순의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자신의 중책이 있음을 자임하여 나아갔다. 공자 역시 무너져 가는 예를 바로 세우고자 하늘이 자신에게 예악과 제도를 세우는 일에 참여시켰다고 자임하였으므로 그러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천명을 알았다는 50세 이후로 상갓집 개라는 평과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주유하며 교화로 일관하였다. 죽음에 이르러도 자신의 역할이 크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임의 힘이 큼을 공자 인생에서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맹자는 전국시대의 폐해로 백성의 삶이 벼랑에 이른 것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의 일관된 신념은 인정(仁政)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왕을 보좌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자신임을 자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수운은 자신의 자질이 부족한데도 하늘이 자신을 선택하여 대도를 내렸다고 자임하고 있다. 모두 시대의 사명을 자임한 것이 분명하다.
대순진리회의 교화는 포덕과 연계하여 상제님의 덕화를 이해시키고 지상낙원의 복을 받아 누리게 하는 일이다. 상제님의 크나큰 덕화와 도통에 이를 수 있는 도주님의 법방이 교화로써 인연을 따라 세상에 펼쳐진다. 인간을 구제하고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는 차원에서 그 일의 가치는 과거 성인의 직(職)과 업(業)에 충분히 비견된다. 그러므로 교화자는 자신이 구천상제님을 따르던 삼생의 인연으로 시대적 사명을 띠고 세상에 도를 펴는 존재임을 자임해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세태를 보고 있노라면 백여 년 전 상제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날 하나도 어긋남이 없음을 보게 된다. 천지공사에 대한 교화를 들으면 “앞으로 정말 그리될까?” 라는 의구심이 들지 않는다. 미래를 이미 알고 보여주듯이 말한 예시(豫示)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예시는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어 도인들을 독려하고 미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도인의 마음이, 앞서 언급한 『전경』에 등장하는 교화자들에 비해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반성하게 된다.
천지가 인간을 쓰고자 한다고 하셨다. 포덕·교화·수도는 대순진리회에서 개인의 도통을 위한 신앙의 3대 원칙일 뿐 아니라, 상제님께서 행하신 무궁한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남 잘되게 하려는 상제님의 사업이기도 하다. 이에 참여함으로써 도인들에게 일꾼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내가 평천하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41고 하신 말씀은 천명(天命)이며 일꾼 된 자의 소임(所任)이다.
사람을 도통으로 인도할 수 있는 진법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득의지추(得意之秋)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 쓸 사람이 없어 말뚝에라도 기운을 붙여 쓰신다 하셨다. 연원에 귀의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공정에 참여할 사람이 적음을 한탄하신 말씀이다. 이제 운수의 때를 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 누리기를 바라시는 상제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본다.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다. 성사(成事)가 사람에게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용어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사람의 자질을 보시고 쓴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가 곧 나의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오직 마음을 볼 뿐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한 마음은 물질만을 좇아 마음이 혼란스러울 수 있는 오늘날, 천진(天眞)이나 멍청이 농판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연원에 근거하여 명하신 포덕과 교화를 천명으로 받았다고 자임하는 마음자리가 아니겠는가?
<대순회보> 159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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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지침(大巡指針)』
『대순진리회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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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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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禮記)』
『순자(荀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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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산, 『도원기서』, 모시는 사람들, 2012.
이돈화, 『수운심법강의』, 천도교,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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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성, 「유가사상에서의 자유와 책임」, 『가톨릭철학』제8호, 2006.
유교사전편찬위원회,『유교대사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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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임석진 외 편저, 『철학사전』, 중원문화, 2009, 참조.
02 행록 5장 38절, “孔子魯之大司寇, 孟子善說齊粱之君, 西有大聖人曰西學, 東有大聖曰東學, 都是敎民化民.”
03 마태복음 제16장,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04 공사 3장 37절,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05 1940년 6월 나치 독일에 프랑스가 항복을 선언하자 드골은 몇몇 동지들과 영국으로 망명하여 ‘항전파’ 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주력은 프랑스 남부도시 비시에서 소집된 상ㆍ하양원이 페탱에게 ‘국가원수’로서 전권을 부여한 ‘휴전파’ 정부인 ‘비시 프랑스’에 장악되어 있었다. 주변 제국들 역시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거의 전부였기 때문에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사실상 무늬만의 정부일 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Time USA,『타임지』, 타임사, 1958,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참조.)
06 최영성, 「유가사상에서의 자유와 책임」, 『가톨릭철학』제8호, 2006, pp.148~176 참조.
07 『論語』,「季氏」, “孔子曰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
08 『論語集註』,「季氏」, 朱子註: “天命者 天所賦之正理也 知其可畏 則其戒謹恐懼 自有不能已者 而付畀之重 可以不失矣.”
09 유교사전편찬위원회,『유교대사전』, 1990, p.699.
10 『論語』,「泰伯 第八」,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11 같은 책,『유교대사전』, p.1219.
12 『孟子』,「萬章章句 上」,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予,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 而誰也?”
13 『孟子』,「萬章章句 上」,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如此, 故就湯而說之以伐夏救民.”
14 『孟子』,「萬章章句 下」, “孟子曰, 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필자는 최영성의 글「유가사상에서의 자유와 책임」의 해석을 인용하였다.
15 『孟子』,「萬章章句 下」, “程子曰, 終是任底意思也.”
16 「大學章句 序」, “蓋自天降生民, 則旣莫不與之以仁義禮智之性矣, 然其氣質之稟或不能齊, 是以不能皆有以知其性之所有而全之也, 一有聰明叡智能盡其性者出於其間,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使之治而敎之 以復其性.”
17 『荀子』,「宥坐篇」에는 “공자가 노나라의 재상을 대리하고 있을 때, 정사를 청문한지 겨우 7일 만에 소정묘를 주살하였다(孔子爲魯攝相, 朝七日而誅少正卯.)”고 기록되어 있다.
18 『荀子』,「宥坐篇」, 門人進問曰, “夫少正卯魯之聞人也, 夫子爲政而始誅之, 得無失乎?”
19 『論語』,「子罕」, 광은 지명이다. 사기에 양호가 일찍이 광땅에서 포악한 짓을 했었는데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했으므로 광땅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로 오인하여 포위하였다.(匡地名, 史記云, 陽虎曾暴於匡, 夫子貌似陽虎, 故匡人圍之.)
20 『論語』,「子罕」, “曰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이때 문(文)은 도가 드러난 것을 말하며 예악(禮樂)과 제도(制度)를 말한다.
21 『論語』,「述而」, “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22 『禮記』,「檀弓」, 孔子蚤作, 負手曳杖, 消搖於門, 歌曰, “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
23 고대(古代)에 정치(政治)는 오늘날의 정치와는 다른 의미로 사람을 바로잡는다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러므로 정치와 교화는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24 『孟子』,「公孫丑章句 下」, “五百年必有王者興, 其間必有名世者. 由周而來, 七百有餘世矣. 以其數, 則過矣, 以其時考之, 則可矣. 夫天未欲平治天下也,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其誰也? 吾何爲不豫哉?”
25 주자(朱子) 주(誅), “天意未可知而其具又在我 我何爲不豫哉.”
26 주희는 명세(名世)를 “名世謂其人德業聞望 可名於一世者爲之輔佐”라 하여 “덕업과 명성이 한 세대에 이름을 날릴만한 자가 왕을 보좌함”을 이른다고 하였다. 맹자는 이를 자임한 것이다.
27 『孟子』,「公孫丑章句 下」, “曰彼一時 此一時也.”
28 『孟子』,「公孫丑章句 下」, “蓋聖賢憂世之志, 樂天之誠, 有並行而悖者於此見矣.”
29 『孟子』,「告子章句 下」, “故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30 윤석산, 『도원기서』, 모시는 사람들, 서울, 2012, p.14 참고.
31 이돈화, 『수운심법강의』, 천도교, 1929, p.13.
32 『세종실록 권제123』, 25장 앞쪽, “議政府啓 凡人之名 皆父母尊長所命 不可輕改”
33 『용담유사』, 「교훈가」
34 『용담유사』, 「교훈가」
35 서경전, 『교화학』, 원광대학교 출판국, 2001, p.31.
36 『書傳』「序文」, “禮樂敎化 心之發也.”
37 교법 1장 1절.
38 행록 5장 38절, “知天下之勢者有天下之生氣, 暗天下之勢者有天下之死氣.”
39 『대순지침』, p.22.
40 시각적이고 육체적이며 관능적인 것만 추구하며 도ㆍ덕ㆍ법ㆍ질서 등 추상적인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문화패턴. 러시아 소로킨의 주장했던 문화의 단계이다. 그는 지금을 감각문화의 말기적 단계로 보고 있다.
41 행록 3장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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