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수운(水雲)의 삶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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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태윤 작성일2018.10.06 조회6,021회 댓글0건본문
글 연구위원 김태윤
Ⅰ. 머리말
Ⅱ. 수운의 삶
1. 출생과 성장
2. 구도(求道)와 득도(得道)
1)10년 방랑과 을묘천서(乙卯天書)사건
2)상제님과의 만남
3. 은둔(隱遁)과 순도(殉道)
1)은적암(隱寂庵)에서의 피신생활
2)천명(天命)과 신교(神敎)가 다하다
Ⅲ. 수운의 사상
1. 시천주(侍天主)
2. 지상신선(地上神仙)
3. 후천개벽(後天開闢)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최제우는 격동의 조선말에 태어나 정부에 의해 좌도난정(左道亂政)01이라는 죄목으로 대구장대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하기까지 만 40세가 채 되지 못하는 생애를 살다 간 인물이다. 그는 조선조를 지켜왔던 유교지배체제의 붕괴와 외세의 침입을 지켜보면서 혼란스러운 세상을 구원할 해답을 찾기 위해 유학자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또한 조선조 후기의 사회 흐름에만 국한하지 않고 우주적 흐름 속에서 인류가 지닌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얻고자 했다. 그 결과 그는 1860년 4월 5일 상제님02으로부터 제세대도(濟世大道)의 계시03을 받고 이를 동학(東學)이라는 가르침으로 구체화시켰다.
더 나아가 그는 동학의 탄생을 기점으로 인류역사를 우주적 차원에서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지어 앞으로 다가올 후천 지상천국에 동참하기를 요구했다. 또한 ‘시천주(侍天主)’를 통해 신분계급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지상신선이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사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사회에 뿌리깊이 박혀있었던 유교의 벽에 부딪쳐 상제님께서 전하신 제세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해 생긴 원(冤)을 풀어주시고자 선도종장(仙道宗長)으로 임명하셨다.
본 글은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의 삶과 그 속에 담겨진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선도종장으로 임명된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수운의 삶
1. 출생과 성장
19세기 초 조선은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 신분제 문란, 삼정(三政)04의 문란 등으로 인해 혼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져 해체와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민중들은 윤리와 가치규범이 붕괴되는 것을 겪으면서 절망의 시대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갖가지 전염병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외세 위협은 사회 불안과 공포를 초래했다.
이러한 시대에 최제우(崔濟愚, 이하 수운으로 표기)는 1824년(순조 24년, 甲申年) 음력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3일 전부터 구미산(龜尾山)이 울어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예시했다고 전해진다.05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성묵(性)이며 호(號)는 수운(水雲)이다. 제우는 개명한 이름이며 초명(初名)은 복술(福述), 족보명은 제선(濟宣)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옥(, 1762~1840)이고 호는 근암(近菴)이며 어머니는 곡산(谷山) 한씨(韓氏, 1793~1833)부인이다.
근암의 선조는 신라말기 대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이나 그 이후 이 가문에서 크게 벼슬을 했던 사람은 없었고, 중시조(重始祖)라 할 수 있는 최예(崔汭)라는 사람으로부터 7대조가 되는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92~1636)장군이 종2품의 벼슬에 올랐을 뿐이다. 근암은 정무공 이후 거의 200여 년 동안 별 다른 벼슬을 지낸 인물이 나오지 않은 한미한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계보를 이은 선비로서 문장과 도덕이 높아 경상도 일대에서 사림의 사표가 되었다.06 하지만 이러한 그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조선시대 말기 부패한 과거 제도의 폐해와 세도정치의 모순 때문에 번번이 낙방하였다.07 나이 50이 지나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아버지 종하(宗夏)로부터 물려받은 정자를 용담(龍潭)08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 산림처사를 자처하며 한가로이 살아가게 된다.09
근암은 나이 36세에 첫 번째 부인인 오천 정씨와 사별을 하였고, 다시 달성 서씨 부인을 맞이했으나 나이 50세 때에 또다시 사별하였다. 특히 첫 부인인 정씨에게서는 아들을 하나 얻었으나 곧 사망하고 딸만 하나 남았고, 두 번째 부인인 서씨에게서는 딸 둘을 두었으나 아들은 없었다. 그래서 조카인 제환(濟)을 양자로 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 번째 한씨 부인에게서 친아들인 수운을 63세에 얻었으니, 수운이 부친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유독이 영민하여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로부터 남다른 관심을 받기도 했다.10
수운은 출생신분으로 볼 때 정실부인의 자식이 되나 어머니 한씨 부인이 한번 출가했다 재혼한 재가녀(再嫁女)였기 때문에 재가녀자손이 된다. 조선초기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예전(禮典)에 명시하기를 재가녀자손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다.11 수운은 바로 이에 해당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는 신분으로 태어난 셈이다. 10세가 되던 해 수운은 어머니 한씨 부인을 여의게 된 후 연로한 아버지 밑에서 성리학을 배우며 영남학파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 울산 박씨를 부인으로 맞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 아버지 근암이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1840년 2월 23일 7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런 어려운 와중에 뜻하지 않은 화재까지 일어나 집과 재산을 모두 날려 버리고 말았다. 어느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홀몸도 아닌 그로서는 모든 것이 암담할 뿐이었다. 그러나 근암의 죽음과 화재는 오히려 그가 새로운 현실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2. 구도(求道)와 득도(得道)
1) 10년 방랑과 을묘천서(乙卯天書)사건
근암은 하나뿐인 아들에게 공부만 시켰지 농사를 짓는 등의 일은 가르치지 않았다.12 그러므로 아버지를 여읜 수운은 더욱 살 길이 막막했다.13 동리에서 훈장노릇을 해보기도 했으나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여러 가지로 생활대책을 생각하던 수운이 선택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장삿길로 나서는 것뿐이었다.
그는 1844년(21세)부터 10년간에 걸쳐 주로 백목(白木), 즉 무명 등의 생활용품을 취급하면서 당시 서민들과 직접 만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수운은 행상을 하며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또 한편으로 세상의 풍속을 살폈다.
수운이 전국을 주유할 당시, 아편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주인이던 중국이 ‘사랑’을 내세우는 서양 기독교세력인 영국의 무력에 굴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기독교의 허구성을 깨닫고 서양문명이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 사회에서 중요한 질서의 바탕이 되는 강상(綱常)이 하나의 명분일 뿐 실제로는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발견했다. 주유팔로(周遊八路)를 통하여 이러한 실상을 몸소 겪어 본 수운은 유도(儒道)의 생명이 다해 요순(堯舜)이 다시 와도 회복될 수 없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평생에 하는 근심 효박(淆薄)14한 이 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 부불부(父不父) 자부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15 탄식하니 울울한 그 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어 처자산업 다 버리고 강산 다 밟아서 인심풍속 살펴보고 … 매관매작 세도자도 일심은 궁궁(弓弓)이오 전곡 쌓인 부첨지(富僉知)도 일심은 궁궁이오 유리걸식 패가자도 일심은 궁궁이라. 풍편에 뜨인 자도 혹은 궁궁촌 찾아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해서 각자위심 하는 말이 내 옳고 네 그르지. …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孔孟之德)이라도 부족언(不足焉)이라.16
주유팔로를 통해 얻게 된 이와 같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사회 질서를 이루고 있던 유교적 강륜이 실천되지 않고 사회가 어지러워진 그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공경하고 두려워 할 ‘구체적인 믿음의 대상’없이, 각기 자신의 이익만 따라 살아가는 마음인 각자위심(各自爲心)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수운은 장삿길에 나선지 10년만인 1853년(30세)부터 각자위심에 대한 해답을 얻어 보려고 하였다. 도학이 높은 이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해보기도 하였으나 신통한 해답을 얻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공맹의 도나 불도의 이상을 논하는 정도였다. 1854년(31세) 봄에 이르러 수운은 자신이 그 해답을 직접 얻어내기로 결심하고 10년간 다니던 장삿길을 그만두고 경주 용담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을 해보기로 결심하였다. 제세대도(濟世大道)를 얻기 위한 파란만장한 구도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한 사색에 들어갔지만 어떠한 실마리도 잡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을사람으로부터 이상한 눈초리만 받게 되었다. 선친 근암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느니 이상한 도를 구하려 엉뚱한 짓을 한다느니 하는 말이 들려왔다.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질시가 심해지자 용담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해 10월경 부인의 고향인 울산(蔚山)의 유곡동(幽谷洞) 여시바윗골에 초가 3칸을 짓고 이사하였다. 늦가을부터 다시 시작한 수운의 사색은 어느덧 반년이 지났으나 역시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때는 을묘년(1855년) 봄 3월, 선생은 봄철의 노곤함으로 낮잠을 주무시던 차 꿈결에 어떤 선사(禪師)가 밖에 이르러 주인을 찾아왔다. 선생이 문을 여니 어디서 온 노선사인지 용모가 청아하고 차림새와 풍채가 정중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맞으며 “스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아왔소.”하고 물었다. 중이 말하기를 “주인께서 경주의 최생원이십니까?”하였다. 선생은 그러하다고 대답하였다. “ … 소승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습니다. … 영험이 없기 때문에 백일기도를 드리면 신효(神效)가 있을까 하여 지성으로 감축하였습니다. 기도가 끝나는 날, 탑 아래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보니 탑 위에 책 한 권이 있어서 거두어 읽어보니 세상에서 보지 못한 희귀한 책이었습니다. 소승은 즉시 산을 나와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생원께서 박식하다는 소문을 듣고 책을 품고 왔는데 생원께서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선생은 책상에 놓으라 하자 노승은 예를 차려 바쳤다. 펼쳐 읽어보시니 유도(儒道)·불도(佛道)의 책이었지만 문리에 들어맞지 않아 풀기 어려웠다. 중이 말하기를 “그러면 3일 동안 머물다가 다시 올 것이니 그동안 자세히 살펴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물러갔다. 그날이 돌아오자 중이 다시 와서 묻기를 “혹시 깨달은 바 있습니까”하므로 내가 이미 알아냈다고 하였다. 중이 백배 사례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말하기를 “이 책은 진정 하늘이 생원께 내려주신 책입니다. 소승은 단지 이 책을 전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이 책의 뜻을 세상에 행하옵소서.” 하고 계단을 내려가 몇 발자국 안되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 선생께서는 … 그 뒤에 깊이 이치를 살펴보니 책속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18
이 책의 내용은 유도ㆍ불도에 관한 것이었으나 문리에 들어맞지 않아 풀기 어려웠으나 그는 깊이 탐구한 끝에 기도(祈禱)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운은 기도(祈禱)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런 ‘을묘천서(乙卯天書)’의 체험은 ‘천(天)’19에 대한 그의 관점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수운은 이전까지 조선 성리학20에서 말하는 리(理)의 개념으로 ‘천(天)’을 이해했지만 이제는 섬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부방법도 독서를 통한 사색과 궁리의 공부 방법에서 기도(祈禱)의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21
1856년 봄에 이르러 입산기도를 시작해 보기로 하였다. 때마침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양산 천성산(千聖山, 811.5m)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이 기도할 만한 곳이라고 소개해 49일간을 작정하고 기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한을 이틀 남겨놓은 47일째 되던 날, 그날도 수련에 정진하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뭉클한 기운이 돌며, 고향에 계신 숙부가 돌아가셨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이미 마음으로 숙부의 돌아가심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수련에 임할 수가 없었다.22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 다시 2차 천성산 자연동굴 기도를 시도했지만 이것 또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때쯤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구도에만 정진하던 수운에게 생활고가 닥쳐왔다. 비록 자기 소유의 6마지기 논이 있었으나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구도의 길을 포기하고 장삿길로 다시 나설 수도 없었다. 친구들의 권유로 철점(鐵店)23을 경영하기로 결심하고 그 논을 7명에게 저당 잡혀 자본을 준비했다. 철점 중 용광업은 운이 좋으면 막대한 이득을 보지만 날씨와 바람의 영향에 민감해 실패율도 높았다. 수운은 이 투기성 높은 용광업을 경영하다 2년 만에 실패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이 일로 여러 사람에게 논을 판 사실이 드러나 수운은 논을 산 사람 7명으로부터 날마다 빚 독촉을 받으니 그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7명을 불러 소장(訴狀)을 써주고 같은 날 같이 소송하라 말하며 좋게 그들을 돌려보냈다. 정한 날짜가 되어 7명이 같이 고소를 하자 결국 관에서는 선매자(先買者)순으로 차지하게끔 판결하였다. 재판은 일단락되었으나 돈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은 수운을 원망했다.
이들 중 동리에 사는 한 할머니가 이 문제로 인해 매일같이 집으로 찾아와 욕설과 행패를 부렸다. 평생 모은 돈을 모두 날렸으니 분통이 터질 만했다. 어느 날 다시 할머니가 찾아와 수운의 옷을 휘어잡고 마구 쥐어박았다. 수운은 이를 막기 위해 손을 휘젓다 할머니가 그만 손길에 맞아 쓰러져 숨을 쉬지 못할 지경에 놓였다. 이때 그 아들 셋과 사위 두 사람이 찾아와 욕설을 하며 부여잡고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를 살려내지 않는다면 당장 관에 고발할 것이라고 했다. 세상을 구할 도를 얻고자 한 그가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방에 들어가 맥을 짚어보고 시신을 만져보니 이미 죽은지 오래였다. 수운은 곰곰이 생각하다 닭 꼬리에 있는 한 자짜리 깃털을 구해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목구멍에 넣어 가볍게 움직여보았다. 잠시 후 목에서 문득 숨소리가 나면서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한 뒤 할머니가 완전히 살아났다.24 이렇게 채권자의 소동은 일단 잠재웠으나 집도 빼앗기고 양식까지 다 떨어져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1859년 10월 초 어느 날 짐을 싸 짊어지고 가족들과 같이 울산을 떠나 70리나 떨어져 있는 구미산 용담으로 다시 돌아왔다. 6년간 살던 여시바윗골을 뒤로 하고 경주 용담으로 향하는 수운의 발걸음은 처절하기만 했다. 다시 옛집으로 돌아온 수운은 며칠이 지난 10월 중순 어느 날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제우(濟愚)로 고치며 구도의 결의를 재차 다짐하였다. 이듬해 1월 13일(양 2월 4일) 입춘 날 이른 아침에 수운은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
道氣長存邪不入 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하면 사특한 기운이 침입하지 못한다.
世間衆人不同歸 도를 얻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과 돌아가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렇게 구도에 대한 정성이 그치지 않던 중, 그의 나이 37세 되던 1860년 4월 5일, 이전과는 다른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된다. 조카 맹윤(孟胤, 1827~1882)의 생일연에 참석해 상을 받고 잘 물리고 난 뒤 몸과 마음이 이상해졌다. 곧 집으로 돌아와 대청에 오르자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며 상제님을 만나게 된다. 10년 방랑을 끝내고 구도의 뜻을 세운 뒤, 몇 차례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끝없는 정성을 기울인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뜻밖에도 이해 4월 어느 날 나는 마음이 아찔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병이라 해도 무슨 병인지 알 수 없고 말하려고 해도 형용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 어떤 선어(仙語)가 문득 들려 왔다. 나는 소스라쳐 일어나 캐어물었다.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상제(上帝)라고 부르는데 너는 상제(上帝)도 알지 못하느냐? 나도 역시 일한 보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이 세상에 나게 하여 이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부디 내 이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상제님이 대답했다.25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 다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라고 물었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랴! 하늘과 땅은 알아도 이것을 다스리는 귀신을 알지 못한다. 그 귀신이라고 하는 것도 곧 나다. 지금 너에게 무궁하고 무궁한 가르침을 내려 줄 터이니 이것을 닦고 익혀라! 그리고 이 가르침을 담은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닦는 법을 바르게 하여서 은덕을 세상에 널리 펴라! 그러면 너를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할 것이다.”라고 상제님이 대답했다.26
당시 상제님께서는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불에 30년간 영(靈)으로 계셨다.27 “나도 역시 일한 보람이 없었다.”라는 것은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후 선천의 상극에 의해 진멸지경에 처한 현실을 보시고 토로하시는 말씀이다.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것은 상제님께서 천지를 구하시고자 하신 그 마음을 수운 역시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수운은 상제님으로부터 제세대도의 천명(天命)과 ‘이 가르침을 담은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닦는 법을 바르게 하여서 은덕을 세상에 널리 펴라’는 방법으로 ‘무궁하고 무궁한 가르침’인 신교(神敎)를 받게 된다.
3. 은둔(隱遁)과 순도(殉道)
1) 은적암(隱寂庵)에서의 피신생활
▲ 1861년 수운이 관의 지목을 피해 은둔한 남원의 은적암 터.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 소재)
수운은 상제님과의 만남을 통한 득도에 머물지 않고 약 1년 동안 수차례 상제님과 문답을 통한 가르침을 받으며28 수련에 정진했다.29 이후 그는 신념체계를 다듬어 수행절차를 정한 다음 1861년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포덕하기 시작하였다.
수운이 제일 먼저 동학에 입도(入道)시키고자 한 사람은 그의 부인인 박씨였다. 수운에게 시집온 이후 숱하게 고생만 한 터라 입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수운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절을 하며 입도를 권하는 지극한 정성에 부인은 동학에 몸담게 된다. 이렇듯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가르침을 전하고, 집에서 부리던 하녀 중 한 사람을 수양딸로, 또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는 것으로 자신의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30
그런데 포덕을 시작한지 한 달이 못되어 수운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일부 반대자들이 수운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운이 살던 현곡면 일대의 경주 최씨, 곧 수운의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내놓는 험담과 질시였다. 수운이 성장한 가정리 일대가 유학적인 풍습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마을임을 감안할 때 수운의 신비체험이 마을 사람들 특히 일가친족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내 문운(門運) 가련하다
알도 못한 흉언(凶言)괴설(怪說) 남보다 배나 하며
육친(六親)이 무슨 일로 원수 같이 대접하노
살부지수(殺父之數)있었던가 어찌 그리 원수련고
은원(恩怨) 없이 지낸 사람 그 중에 싸잡혀서
또 역시 원수 되니 조걸위학(助桀爲虐)아닐런가31
더욱이 8월에 이르자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은 수운의 도가 하느님을 모시는 서학(西學)과 같다고 몰기 시작하였다. 당시 천주학(天主學: 서학)은 국가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으므로 서학으로 덮어씌우는 것은 곧 죽음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였다. 포덕을 시작한지 불과 3개월이 지난 9월에 이르자 유생들의 음해는 더욱 기승을 부려, 비난의 소리가 더욱 거세지더니 드디어 10월에는 경주관아가 직접 나서서 수운에게 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수운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포덕활동을 하였으므로 관의 명령대로 포덕활동을 중지하려면 곧 용담을 떠나야만 했다.
수운은 남원의 선국사(善國寺)에 딸려 있던 은적암32으로 피신했다. 포덕을 시작한 지 불과 5개월여 만에 관의 지목을 피해 은적암에 왔지만, 피신 중에 오히려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33되는 것을 반성하고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신유년(1861) 11월부터 다음 해인 3월까지 머물면서, 동학의 중요한 경전들을 직접 지었고, 또 교단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구상을 하였던 것이다.
임술년(1862) 3월 수운은 남원 은적암에서 경주로 다시 돌아왔다. 스승인 수운이 돌아오자, 그간 흩어졌던 신도들이 다시 모여들게 되고 경주 일대는 다시 동학의 열기가 달아올라 자연 관으로부터 지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34 결국 9월 수운은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자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에 더욱 열을 올렸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이렇게 동학의 세력이 더하게 되자 추로지향(鄒魯之鄕)35을 자부하던 영남의 유생들은 수운에 대한 비난 공격을 가했는데 경주 유림들의 공격이 더욱 심했다. 특히 수운과 직접 관련된 경주 최씨 문중이 유학적인 관습을 깨고 새로운 도를 펴는 수운에 대해 배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경상도와 충청도 접경인 상주지방에서는 1863년 9월에 이 지역 유생들이 조직적으로 동학배척운동에 나섰다. 유생들은 지식층 인사들이 동학에 가담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서둘러 동학배척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동학이 민중 속에 파고들자 자신들의 영향력과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겼다. 특히 귀천을 타파하는 교화를 시키고 있어 조선왕조의 뿌리를 뒤흔드는 일로 받아들여 동학배척운동에 나선 것이다.36
상주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산서원(愚山書院)은 1863년 9월 13일 동학 배척통문(排斥通文)을 만들어 상급 서원인 도남서원(道南書院)으로 보냈다. 그들은 동학을 “지금 이 요망한 마귀와 같은 흉측한 무리들이 하는 짓은 분명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감히 경상도에 서학이 들어오지 못하였으나 소위 동학은 선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쭉쟁이풀과 같은 것으로 들어와 자라고 있다, 우리들의 급선무는 햇빛을 못보게 넝쿨을 뽑아 버리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산서원으로부터 통문을 받은 도남서원은 1863년 12월 1일자로 통문을 다시 만들어 상주 외남면 신상리(新上里)에 있는 옥성서원(玉城書院) 등 여러 서원에 보냈다.
경주부윤(慶州府尹)ㆍ병조참판을 지내고 고향 성주(星州)에 있던 이원조(李源祚)와 같은 재야 선비는 동학의 교세가 크게 일어나자 유자(儒者)들이 앞장서서 동학교도들을 관에 고발하여 처벌해서 발본색원할 것을 주장하는 통문을 성주일대에 보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경상관찰사 서헌순(徐憲淳)에게 동학의 무리들을 더 이상 좌시하지 말고 더 세가 확산하기 전에 동학을 제압할 것을 호소했다.37
▲ 수운이 한 달간 문초를 받았던 대구감영 터(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소재)
2) 천명(天命)과 신교(神敎)가 다하다
조정에서는 동학에 대한 유림들의 반발이 심각해지자 동학을 금압(禁壓)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수운과 동학의 주요 간부들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이때의 죄목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인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었다.38
이렇듯 관의 지목으로 용담 일대에 위기감이 넘치던 어느 날, 수운은 문득 제자들을 불러놓고, “내가 전에 한 꿈을 꾸었는데 태양의 살기(殺氣)가 왼쪽 넓적다리에 닿자 불로 변하여 밤새도록 타며, 사람 인자를 그렸다. 깨어서 넓적다리를 보니, 한 점 붉은 흔적이 있어, 사흘을 남아 있었다. 이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분명히 머지않아 화가 미칠 것이다.”39라고 말하였다. 이미 수운은 그에게 주어진 천명(天命)과 신교(神敎)가 다할 것이라는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다.
▲ 수운이 처형당한 대구장대자리. 현재 관덕정순교기념관이 서있다.
조정에서 파견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와 그 일행은 12월 10일 새벽에 용담 일대를 습격해 수운과 제자 23명을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했다.40 수운이 도를 세상에 편 지 불과 3년도 안 돼서 겪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철종의 승하로 과천에서 회송되어 다시 대구의 감영(監營)에 이른 것은 1864년 1월 6일이었다. 대구로 압송된 수운은 당시 관찰사인 서헌순으로부터 문초를 받게 된다. 관변기록(官邊記錄)에 의하면, 1월 21일부터 2월 하순까지 거의 한 달간에 걸쳐 22차례의 문초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문초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마당에 꿇어앉혀 놓고 매질을 가하는 것이었으니 그 고통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1월 추운 겨울, 마당의 맨바닥에 꿇어앉혀진 채, 추상같은 호령과 함께 가해진 매질로 얼었던 살가죽이 갈라졌으니 그 어려움이 여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듯 심하게 문초를 받던 중, 매질로 인해 수운은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내리치는 장(杖)에 정강이가 부러지며 내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벼락치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에 문초를 하던 관찰사 서헌순이 놀라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정도였다.
한 달 가까이 문초가 진행된 끝에 2월 29일 상부에 그 결과가 보고되었고 결국 1864년 3월 10일 수운은 대구장대41에서 참형을 당하게 된다.42 그의 참형이유는 서학을 이름만 바꾸어서 유포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것인데 무엇보다 황건적이나 백련교도들의 난리처럼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43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은 지 채 4년이 못되어 당시 조선시대 뿌리깊이 박혀있었던 유교의 벽에 부딪쳐 제세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요언혹민(妖言惑民)과 좌도난정(左道亂政)이라는 죄명44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의 나이 고작 41세 때의 일이었다.
Ⅲ. 수운의 사상
1. 시천주(侍天主)
수운은 당시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원인이 하늘에 대한 외경(畏敬)이 없이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各自爲心]에 있다고 평가해 천명(天命)을 받들 수 있는 마음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해답이 바로 상제님을 모신다는 ‘시천주’다. 이에 따라 수운은 사람들에게 상제님을 모시는 글인 주문45을 제시했다. 그는 제자와의 문답에서 주문을 상제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이라고 대답했다.46 그래서 그는 도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무엇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주문 21자만을 전했다.47 또한 천도(天道)에 이르는 방법이 모두 이 주문에 담겨 있다48고 말하였으며, 주문만 지극히 외우면 만권시서(萬卷詩書)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49 수운은 주문의 의미를 「논학문」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侍」는 안에 신령이 있고[內有神靈] 밖에 기화가 있어[外有氣化]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主」는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造化」는 무위이화요
「定」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永世」는 사람의 평생이요
「不忘」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萬事」는 수가 많은 것이요
「知」는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에 이르느니라.50
위의 설명 중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상제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시’(侍)의 의미에 대한 것이다. 수운이 상제님을 최초로 만났을 당시의 상황을 참고하면 ‘시(侍)’에 대한 상태를 잘 알 수 있다.
바로 이 무렵에 몸이 마구 떨리면서 밖으로는 영(靈)과 서로 맞닿은 기운이 몸을 감싸고[外有接靈之氣], 안으로는 말씀을 내려서 가르쳐 주었다[內有降話之敎]. 그러나 애써서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마음은 더욱 이상스럽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 다잡은 뒤에[修心正氣]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라고 물었다.51
‘안에 신령이 있다’[內有神靈]는 것은 ‘안으로 말씀을 내려서 가르쳐 주었다’[內有降話之敎]에, ‘밖에 기화가 있다’[外有氣化]는 ‘영과 서로 맞닿은 기운이 몸을 감싼다’[外有接靈之氣]에 해당한다.
따라서 ‘내유신령 외유기화’는 마음이 신령한 상태가 될 때 상제님의 말씀이 들리고 상제님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응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감각기관에만 의지할 때는 상제님을 접할 수 없다. 이것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수운의 경험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수심정기(修心正氣)52하여 상제님과 다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신령(神靈)’이란 인간이 상제님을 만남으로써 느끼게 되는 마음으로 감각기관을 초월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은 위의 사실을 깨달아 몸과 마음에서 상제님을 지극히 모시는 행위를 잊지 않고 일심(一心)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시(侍)’의 순간에는 인간의 몸과 마음이 상제님을 모실 수 있는 경지가 되어 상제님의 기운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종래의 유학은 인간이 천명(天命)을 회복하기 위해 천과의 합일[天人合一]53을 강조했다면 수운은 이념적인 천(天)을 신(神)으로 구체화시켜 시천주를 통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지상신선(地上神仙)
수운은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천명을 행할 수 있는 신교인 영부와 주문을 받았다.
나(상제님)는 영부(靈符)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고 그 모양은 태극(太極)과 같기도 하고 궁궁(弓弓)과 같기도 하다. 나로부터 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해 주고 나로부터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여라.54
가슴에 불사약을 지녔으니 그 형상은 궁을(弓乙)이요
입으로 장생하는 주문을 외우니 그 글자는 스물한 자이다.55
‘영부’는 영과의 부합(符合)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며, ‘시천주’는 상제님의 기운을 인간이 그대로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상제님께서 영부를 선약(仙藥)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상제님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은 불사약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며 이 순간 상제님의 무한한 기운을 인간이 가지게 되어 불사의 존재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56 수운은 이렇게 시천주를 통해 상제님의 기운을 모신 사람을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고 불렀다.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無爲而化) 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아니냐57
일반적으로 유교의 군자나 도교의 신선은 이상적인 인간을 만든다는 목적에서는 같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다. 유교는 윤리도덕의 교육으로 인간내부 본성을 되찾아 절대적 진리인 하늘과 하나되는 세간(世間)의 군자가 되기를 추구했다. 이렇게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유교의 경전이나 주석서를 수없이 읽어 그 뜻을 이해해 실천해야만 했다. 이것은 일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뿐더러 일반 선비 역시 그렇게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교는 조식(調息)58·도인(導引)59·방중(房中)60등의 수행에 의한 양생법(養生法)과 단(丹) 또는 금단(金丹)61을 만들어 복용하는 복이(服餌)62의 두 가지로 불로불사하기 위해 출세간(出世間)의 신선이 되고자 했다.63 또한 신선이 되는 방법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고 은밀하게 전수될 뿐이었다. 도교의 신선들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해 일반적인 사람은 얻을 수 없는 신지(神芝)ㆍ선초(仙草) 등의 불사약이 있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신선들이 머무는 선경은 현실의 밖에 존재하는 곳으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수 없는 신선만이 갈 수 있는 이상향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수운은 실제 삶에서 구현하기 힘든 유학의 군자와 도교의 신선과는 그 성격이 다른 지상신선을 제시하며 누구라도 시천주를 하면 지상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시천주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바뀌지는 않는다고 했다. 상제님에 대한 정성스러움[誠], 공경함[敬]과 믿음[信]이 있어야만 그 기운이 온다고 강조했다.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별로 다른 도리가 없고 성·경·신 석 자이니라.64
따라서 수운은 정성스러움과 공경함으로 시천주를 하면 지상신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서로 양립될 수 없었던 유교와 도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자연스럽게 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수운은 모든 사람들이 시천주를 할 수 있는 밝은 본성이 있다고 강조하며 주문을 통한 수도의 길을 소개했다. 양반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상제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평등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신분과 제도로 반상의 구분을 짓고, 귀천의 차별이 분명했던 봉건 사회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65
3. 후천개벽(後天開闢)
수운은 당시 사람들이 천리와 천명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유로 기존의 유ㆍ불의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런 모습이 바로 선천(先天)의 마지막 모습이며, 곧 거대차원의 변화와 함께 후천(後天)이 열린다[開闢]고 주장했다.66
그러나 그는 후천이 선천에서 어떻게 열릴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도가 펼쳐질 때가 바로 선천 오만 년이 지나고 후천 오만 년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라고 이야기할 뿐이었다.67
그가 말하는 후천개벽은 태초의 우주를 다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덕을 회복함으로써 열리는 새로운 의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수운이 생각한 후천개벽의 주체는 인간이 된다.68 여기서 그는 동학을 세상에 펴고자 했던 이유를 새로운 시운(時運)을 맞이해 인간이 성운(盛運)을 열어야 한다는 것으로 밝혔다.69
시운(時運)을 의논해도 일성일쇠(一盛一衰)아닐런가
쇠운(衰運)이 지극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하였던가70
천운(天運)이 둘렀으니 일성일쇠(一盛一衰)아닐런가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十二諸國)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두지말고71
그러나 수운은 세상 사람들이 후천개벽이 온다는 사실을 믿지 않자 답답함과 한스러움을 토로하게 된다.72 그가 걱정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도와 덕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이 도와 덕을 따르지 않는다면, 시운이 아무리 다가와도 결코 후천 세상이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3 수운은 성운을 맞이해 올바르게 열어가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상제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어 다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74 시천주는 이를 이루기 위한 사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지상신선의 경지를 이루는 때가 곧 후천개벽의 세계라고 말했다. 수운이 지향하던 낙원은 현실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현실, 즉 지상에 존재한다. 수운이 제시하는 지상천국은 실제적인 이 땅에 펼쳐지는, 인간들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이다. 상제님의 도와 덕을 체득함으로써 도덕적 인격적 완성을 이룬 지상신선이 머무는 곳이다.75 그러나 수운이 가고자 했던 세계는 인간 정신의 개벽으로 말미암아 도덕을 회복한 지상신선이 머무는 곳이지 실지 선천 상극의 모순이 개벽으로 바뀌어진 세계개벽은 아니다. 결국 그가 주장한 후천개벽은 인간의 자발적인 정신개벽으로 선천의 모순 속에서 머무는 지상신선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Ⅳ. 맺음말
수운은 신분의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 조선말 유학자로, 조선왕조 몰락과 외세 침입을 지켜보며 직접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다양한 방법으로 제세대도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는 정통 유학자였지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답을 얻기 위해 다양한 사상과 방법을 접했다. 을묘천서를 수운에게 가지고 온 유점사 승려와의 문답과 사찰에서 2차에 걸친 기도는 불교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을묘천서 체험 이후 기도라는 파격적인 방법을 통해 절대자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렇게 그가 끊임없이 구도에 대한 의지와 정성을 기울인 것은 결국 기존의 유ㆍ불ㆍ선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당시의 문제를 풀기 위한 답을 얻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그의 끝없는 구도의 노력은 상제님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음으로써 열매 맺게 된다. 그는 당시 신분계급으로 인해 핍박받고 억압된 민중들에게 ‘시천주’를 제시했다. 시천주를 하는 순간 상제님의 기운을 받아 지상신선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시천주’를 통해 천명을 받아 순리를 따르는 지상신선이 될 때 후천개벽의 세계인 지상천국이 비로소 실현된다고 밝혔다.
그가 제시한 ‘시천주’로 모든 사람은 상제님을 모실 수 있는 평등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수운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유교의 이념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신분계급의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유교사회에 혁명적인 주장을 선포한 그는 유학자들로부터의 박해와 질시를 받게 되어 결국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필자는 수운의 삶과 사상을 통해 수운이 이루고자 했던 두 가지 큰 뜻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에 존귀하게 하고자 했던 마음과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의지였다. 그는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시천주를 통해 주문 수련을 제시했다. 이 주문을 통해 누구나 상제님을 모시고 지상신선이 되어 다가올 후천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제님의 기운을 모시는 주문수련을 강조한 것은 결국 그가 선도(仙道)차원의 가르침을 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들을 종합해 볼 때 그가 시천주를 통해 지상신선이 되는 방법과 지상천국의 이상향을 제시한 것이 선도의 종장으로 선택된 요인이 아닌가 한다.
<대순회보>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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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좌도(左道)는 유교의 종지(宗旨)에 어긋나는 모든 사교(邪敎), 난정(亂政)은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는 의미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참조
02 대순진리회에서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를 말하며, 본 글에서 동학의 ‘ 님’을 ‘상제님’으로 표기한 것은 성격상 같은 분으로 판단해서이다.
03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 (교운 1장 9절)
04 조선 후기에 국가 또는 공공기관에서 백성으로부터 수취한 전결세·군역·환곡을 중심으로 한 조세운영 과정의 일반을 일컬는 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D 참조)
05 그 달부터 태기(胎氣)있어 그해(甲申) 시월 이십팔일에 대신사를 탄생하시니 이 날에 천기청명하여 서운(瑞雲)이 집을 두르고 집안 구미산(龜尾山)이 삼일을 크게 울었다. (『천도교창건사』 「제1편」 제1장)
06 『東京通誌』 권14, 명유조(名流條)에 의하면 최옥은 시(詩)ㆍ부(賦)에 뛰어나 동도낙부(東都樂府)에 등재되었다.
07 설화에 의하면, 근암이 아홉 번씩이나 과거를 치렀으나 한 번도 급제를 못하고 번번이 낙방하여, 자신의 재주 없음을 한탄하며 고향으로 내려갈 수도 없고 신세도 처량하여 강둑에 앉아 울고 있으려니, 그 옆에서 빨래하던 웬 할머니가 근암을 달래며 말하기를, “영남의 최옥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아홉 번이나 낙방을 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갔는데 대장부가 과거에 떨어졌다고 우느냐?”며 위로했다고 한다. (조동일, 『한국구비문학대계』7-1, 한국학중앙연구원, 1980)
08 일반적으로 동학과 관련된 지명으로 흔히 사용되는 경주 ’용담’은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실제로는 없는 이름이다. 그 일대는 경상북도 경주군 현곡면 마룡리라는 불리는 곳으로, 이곳 마룡리 구미산 자락 골짜기에 있는 용담정이라는 정자에 연유하여 불리게 된 것이다. (윤석산, 『윤석산의 동학답사기』, 신서원(2000). p.11)
09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p.41~42
10 『道源記書』, “稍至十餘歲 氣骨壯肅 智局非凡”
11 『經國大典』 卷之三 諸科, “罪犯永不敍用者 贓吏之子 再嫁失行婦女之子及孫 庶孼子孫 勿許赴文科 生員進士試” 죄를 범하여 영구히 임용할 수 없게 된 자, 국가의 재산을 횡령한 자의 아들, 재가하거나 실행한 부인의 아들과 손자, 서자의 자손은 문과, 생원ㆍ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 (한우근 외 4인, 『譯註 經國大典 번역편』, 한국정신문화연구소(1985년), pp.171~172) 원문은 규장각 홈페이지 내 전자정보/원문정보(http://kyujanggak.snu.ac.kr/info/info01.jsp) 참조
12 근암의 가훈(家訓) 11조 중에 자녀교육에 대한 조항이 있다. “지금 사람들은 자식을 가르침에 입학 후에도 마소를 먹이게 하거나, 들에 물대기를 시키는 등 글공부에 힘쓰지 못하게 하니 이래서야 어찌 훌륭히 되기를 바라겠는가. 여덟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공부시켜보면 재간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된다. 머리가 둔하여 잘 될 가망이 없으면 그때 가서 농사일을 배우게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을 볼 때 근암 생전에 수운에게 공부만 시켰음을 알 수 있다. (표영삼, 『동학1』통나무(2004) pp.55~56)
13 『東經大全』 「修德文」, “心有家庭之業 安知稼穡之役 書無工課之篤 意墜靑雲之地 家産漸衰未知末梢之如何” “ 마음에는 떳떳이 가정을 일구고 싶지만, 심고 거둘 줄을 몰랐고, 글공부도 독실치 못했으니 벼슬할 뜻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가산은 점점 기울어져 나중에 어떻게 될는지 알 수가 없다.”
14 사람들의 인정이나 풍속이 아주 어지럽고 경박함.
15 주야(晝夜)간
16 『龍潭遺詞』 「夢中老少問答歌」
17 울산광역시 한 외곽에 딸려 있는 유곡동이라는 마을의 일부지역이다. 울산 시내를 벗어나 북서쪽 외곽으로 달리면, 아직 정비되지 못한 그래서 작은 집들이 난립했고 또 골목도 비좁은 마을이 나오는데 이가 곧 유곡동 일대가 된다. 이 마을을 앞으로 하고 지금은 인가가 전혀 없는 산길로 접어들게 되면, 길다란 장방형의 골짜기가 나오게 되고 이 골짜기를 계속 따라서 들어가게 되면 작은 등성이를 넘게 된다. 이 등성이 너머로 기념비가 하나 눈에 들어오는데 이 기념비가 있는 자리가 곧 여시바윗골이다. (윤석산, 『윤석산의 동학답사기』, 신서원(2000), p.39)
18 『崔先生文集道源記書』 표영삼, 『동학1』 통나무(2004), p.70 재인용
19 유학에서 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地’와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자연적인 형상을 뜻하는 자연천(自然天)이 있다. 하(夏)나라에서는 자연현상을 어떤 신비한 힘의 결과로 보지 않고 이해 가능한 변화와 생성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둘째, 종교적 의미로서의 ‘天’ 인 주재천(主宰天)이 있다. 이것은 변화하는 현상 뒤에는 변화가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 또는 주재자가 있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신성(神性)으로 표현되었는데 은(殷)나라에서 제(帝) 혹은 상제(上帝)는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 권능을 가진 지고신(至高神)으로 나타났다. 셋째, 도덕적 의미로서의 ‘天’인 의리천(義理天)이 있다. 여기에서의 천은 명을 통치자에게 주었다가도 그가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정치를 하면 언제나 그 명을 박탈해 가는 존재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逆成革命)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천’개념은 송대 이후 성리학에서 만물의 변화 법칙과 생성원리로서의 ‘理’가 더욱 강조되었다. (김충열, 「중국철학의 원류」 『중국철학사1』, 예문서원(1994), pp.30~39 참조)
20 조선 중기이후 조선 성리학은 형이상학적인 성격이 강해 천을 이법천(理法天)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법천은 太極ㆍ理 등으로 표현되는 비인격적인 존재로서 합리적인 법칙성이 강조되는 개념이다. (이경원, 「한국 근대종교에 나타난 天의 인격성 고찰」, 한국종교사연구 제7집, p.296)
21 김용휘, 『최제우의 시천주에 나타난 천관』, 한국사상사학회(2003), p.222
22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91
23 철점(鐵店)은 금점(金店)ㆍ은점(銀店)ㆍ동점(銅店)과 같이 철제품을 생산하는 업을 말한다. 대장간 정도로 오해하는 이가 있으나 철점이란 철광업을 총칭하는 말이다. 철점에는 채광업과 용광업과 용선업(鎔銑業)이 있다. 채광업은 토철과 사철(砂鐵)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업이고, 용광업은 토철과 사철을 사다가 용광로에 녹여 펀철(片鐵)을 만들어 파는 업이다. 용선업은 편철을 사다가 솥이나 보습과 같은 쟁기나 가구를 주조하여 파는 업이다. 수운은 그중 용광업 분야의 철점을 경영하였다. (표영삼, 『동학1』 통나무(2004). p.83)
24 『崔先生文集道源記書』 표영삼, 『동학1』 통나무(2004), pp.82~89 재인용
25 『東經大全』 「布德文」
26 『東經大全』 「論學文」
27 교운 1장 9절
28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인문화사(1970), pp.15~16
29 『東經大全』 「論學文」, 吾亦幾至一歲 修而度之
30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p.136~137
31 『龍潭遺詞』 「敎訓歌」
32 전라도 남원 동편, 교룡산성 속에 위치한다.
33 수운의 저서에 등장하는 상제님에 대한 표현 중 천주(天主)는 당시 정부에서 금했던 천주학의 천주와 그 대상은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조는 유교 이념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사회로 유교라는 질서 외 다른 질서 체계가 들어오면 집권층에 볼 때는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다. 군주와 백성이라는 지배 계층에서 천주와 인간이라는 새로운 구도의 등장은 당시 유교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것었다.
34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p.163~164
35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참조
36 표영삼, 『동학1』, 통나무(2004), pp.266~276
37 이원조, 『凝窩集』 권7, <與徐方伯徐憲淳條> (최효식,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연구」, 경상북도ㆍ한국동학학회, p.44 재인용)
38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p.286 ~ 287
39 『水雲行錄』 先生曰 前日有一夢 太陽殺氣 着於左 而變爲火 終夜寫人字 而覺後見 則有一点紫 露於三日 是以尙有所憂 而心獨知禍 將至也
40 윤석산,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모시는 사람들(2004), p.290
41 대구장대는 지금의 대구시 중구 덕산동 일대로, 덕산시장이 서는 시장 한가운데가 된다. 이곳이 바로 처형장소였던 관덕당(觀德堂)자리이다. 당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던 곳인데 이곳에서 수운은 참수를 당하고, 그리 멀지 않은 남문 밖에 사흘 간 효수(梟首)되었다가 큰 아들 세정(世貞)에게 넘겨졌다. 이 자리에는 현재 관덕정순교기념관으로 세워져 있다.
42 윤석산, 『윤석산의 동학답사기』, 신서원(2000). pp.101~102
43 『議政府啓言』 「일성록」高宗 元年(1864) 甲子 3月 2日 壬寅 참조
44 『大明律直解』 권11, 禮律, 「禁止師坐邪術條」 (최효식,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연구」, 경상북도ㆍ한국동학학회, p.50 재인용)
45 呪字는 읽거나 외움으로써 효력을 가지게 되는 주술적인 글귀를 말한다. 대개 일정한 문구를 반복해서 읽거나 문구를 반복해서 외우는 경우가 많으며 특정한 마음가짐으로 특정한 자격과 장소에서 행하여 질 때 효력을 발생한다고 여겨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20, 1992, 한국학중앙연구원, pp.833~835)
46 『東經大全』 「論學文」 “曰呪文之意何也 曰至爲天主之字”
47 『龍潭遺詞』 「道修詞」“내 역시 이 세상에 무극대도 닦아 내어 오는 사람 曉諭해서 三七字 전해주니 無爲而化 아닐런가”
48 『東經大全』 「論學文」 “一以作呪文 一以作降靈之法 一以作不忘之詞 次第道法 猶爲二十一字而已”
49 『龍潭遺詞』 「敎訓歌」 “열세 자 지극하면 萬卷詩書 무엇하며”
50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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