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제갈량의 생애와 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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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재원 작성일2018.10.06 조회5,788회 댓글0건본문
제갈량의 생애와 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
- 교법 2장 52절과 관련하여 -
글 연구위원 이재원
Ⅰ. 머리말
Ⅱ. 제갈량의 생애
1. 시대적 배경
2. 출생에서 출사(出仕)
3. 출사에서 오장원 병사(病死)
Ⅲ.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기존의 논의
Ⅳ.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상제님의 진단
1. 위천하자(爲天下者) 불고가사(不顧家事)
2.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
Ⅴ. 맺음말
Ⅰ 머리말
『典經』을 보면 상제님께서 종도들을 훈도하시면서 역사적인 인물을 거명하신 사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들과 그들에 관련된 고사를 통해 상제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상제님께서 언급한 인물 중에서도 제갈량(諸葛亮)에 관한01 것이 많고 그 인물됨과 처리처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신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교법 2장 52절)이다. 상제님께서는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그의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에 있다고 진단하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이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갈량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또한 그가 성공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기존의 논의와 함께 상제님께서 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로 거론하신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갈량은 중국 삼국시대에 촉(蜀)을 이끈 명재상으로 그에 관한 기록은 진수(陳壽)의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02(이하 『삼국지』)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정사(正史)와 소설(小說) 어느 쪽을 봐도 그는 출중한 인물이었고, 상제님께서도 제갈량의 처리처사를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교법 3장 29절)”고 하시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을 정도이다.03 그러나 제갈량이 한실부흥(漢室復興)이라는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이것이 의문점으로 제기되어 왔다.
또한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제갈량전(諸葛亮傳)」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은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밭 15경(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갈량의 전 재산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는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표(表)를 올려 자신의 재산 상황을 보고 하면서 이것으로 족하며 축재(蓄財)로 인해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는데 그동안 이 말은 그의 청렴결백을 증명하는 말로 이해되어 왔다.
본고는 앞서 언급한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제갈량전(諸葛亮傳)」을 중심으로 제갈량의 생애를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삼국지연의』 는 진수의 『삼국지』 에 나관중의 작가적 상상력이 적절하게 가미된 역사 소설로 그 소설적인 허구(虛構)로 인하여 제갈량이 가진 본 모습을 오히려 왜곡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한실부흥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교법 2장 52절의 말씀을 분석하여 이를 통해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뜻은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제갈량의 생애
1. 시대적 배경
제갈량(181~234)은 후한 말기인 181년 당시로는 서주(徐州)에 속해 있던 낭야군 양도현(琅邪郡 陽都縣: 현재 산동성 교남시)에서 태어났다.04 그가 태어난 181년은 후한(後漢) 영제(靈帝) 광화(光和) 4년에 해당한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후한 황제들의 즉위시 나이와 재위 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 1>에서 보면 후한은 196년간 14명의 황제들이 있었는데 10세 초반의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장제(章帝) 이후의 황제들이 모두 10대에 즉위하고, 30대 이전에 사망한다. 게다가 상제(殤帝)와 충제(沖帝)의 경우 즉위 당시의 나이를 보면 갓난아이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외척이나 권신들의 손에 죽은 황제도 있는데 이는 당시의 황제권이 얼마나 취약하였던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이다.
황제권의 잦은 교체로 나이 어린 황제들이 등극하게 되고 이는 황제의 어머니들에 의한 섭정(攝政)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외척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외척들은 손쉽게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갔고 그 권세와 부는 황제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성인이 된 황제들이 친정(親政)을 하려고 할 때에는 실권을 쥔 외척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외척을 몰아낼 세력으로 환관이 부상하게 된다. 이미 외척과 그 수하들이 조정(朝廷)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도 정치적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환관들이 역대 황제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 양 세력 간의 알력으로 인한 정국의 혼미는 계속되었다. 최종적으로 환제(桓帝)가 환관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외척 양기(梁冀)를 처단하면서 권력은 환관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05
이후 30여 년 동안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들도 부정과 부패에 있어서는 외척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환제가 정권을 쥔 환관들의 비리를 비판하던 사대부들과 관료들에게 조정을 공격했다는 죄를 물어 이들을 종신금고(終身禁錮)에 처하면서 환관들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06 또한 환제 다음의 황제인 영제(靈帝)는 자신의 행궁에서 공개적인 매관매직을 행하여, 돈으로 관직을 산 관료들이 자신의 부임지에서 본격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07에 들어가는 등 당대 사회의 모순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제갈량이 4세가 되던 해인 184년에 터진 황건적(黃巾賊)의 난은 이러한 지배계층 내부의 모순과 부패한 관료들에 의한 가혹한 착취가 배경이 된 것으로 당시 일어난 농민 반란 중 최대 규모였다. 부패한 중앙정부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기 힘들게 되어서 각지의 유력자들이 이 반란의 진압을 위해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 확장하기 위한 세력 쟁탈전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치열한 세력 쟁탈전 속에서 후한 각 지역이 전쟁터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떠돌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는 혼란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황건적 토벌과 동탁 타도를 위해 일어선 세력들이 군벌로 변하면서 이들이 궁극적으로 위(魏)· 촉(蜀)·오(吳)로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위(魏)를 계승한 사마염(司馬炎)08의 진(晉)에 의해서 삼국이 통일된다(280년). 이를 서진(西晉)이라고 하는데 진에 의한 통일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팔왕(八王)의 난(亂)09으로 일컬어지는 내부의 권력 투쟁이 발생되고 이를 계기로 주변 제 민족들의 중원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진이 중원을 잃고 지금의 남경(南京)에 도읍을 하게 되는데 이를 동진(東晋)이라고 하며, 후한이 망한 이후부터 남조(南朝)와 북조(北朝)로 갈라지게 된 시기를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라고 한다. 이 혼란은 589년 수(隋)가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재통일하기까지 약 400년간 지속되는데 이러한 난세가 시작되는 시점에 제갈량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2. 출생에서 출사(出仕)
제갈량이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응하여 출사할 때의 나이가 27세였다. 이를 중심으로 제갈량의 생애를 양분할 수 있는데 이는 제갈량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면서 또한 54세로 병사(病死)한 그의 일생을 봐도 절반에 해당하는 시점이다.
제갈량은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와 어머니 장(章)씨의 3남 2녀 중 2남이었다. 그의 형제를 보면 위로는 7살 연상인 형 근(瑾)과, 두 누이가 있고 아래로 8살 연하인 동생 균(均)이 있다. 그의 형 근(瑾)은 뒷날 오(吳)의 손권(孫權)에 출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손권의 신임도 대단했는데 형제가 오와 촉에 각각 출사한 것을 두고 당대에도 촉은 용을 얻었고 오는 호랑이를 얻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부친인 제갈규는 당시 태산군(泰山郡)의 승(丞)으로 있었는데 승은 군(郡)의 태수 밑에 있는 부지사에 상당하는 관직이었다.
제갈씨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들의 성은 원래 갈(葛)씨였는데 양도로 이주했을 때 그 고장에도 갈씨가 있었음으로 ‘제현(諸縣)의 갈씨’라는 의미에서 제갈이라는 성을 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조상은 진(秦)나라 말기의 농민 장군인 갈영(葛蘡)으로 그의 후손이 한(漢)나라 때에 제현(諸縣)에 분봉 받게 되어 제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제갈량의 조상의 성이 갈(葛)씨였으며 후에 다시 ‘제(諸)’가 더해져서 제갈(諸葛)씨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의 이름인 량(亮)은 밝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字)는 공명(孔明)인데 ‘매우 밝다’는 뜻으로 본명의 의미를 살린 것이다. 그의 키는 8척(尺)으로 후한시대는 1척(尺)이 23cm임으로 184cm의 비교적 장신이었다. 공자와 같은 거구는 아니라도 ‘산동대한(山東大漢: 산동의 거한)’이라는 말에 맞는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시대도 난세였지만 그의 어린 시절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제갈량의 부모는 그의 나이 10대 초반에 이미 세상을 떠나 그는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의 밑에서 자라게 된다. 그의 나이 13,4세에 태어나고 자란 서주(徐州)가 조조로부터 두 번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때 숙부 제갈현이 당시 형주(荊州)의 유표(劉表) 밑에서 일을 했으므로 그도 형주로 피난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에 숙부인 제갈현도 사망하여, 맑은 날은 밭 갈고 비오는 날은 글을 읽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가계(家系)를 보면 전한(前漢)에서 사례교위(司隷校尉)10를 지낸 제갈풍(諸葛豊)이 있다. 제갈풍은 엄정한 법 집행으로 이름나 있었는데 제갈량의 법 집행을 보면 이런 가풍을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의 부친 제갈규와 숙부 제갈현이 관직에 나간 것을 볼 때 그의 집안은 유력한 가문은 아니었다 해도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받들며 대대로 관직에 나간 중산(中産)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숙부 제갈현이 사망하고 27세 유비에게 출사하기까지 약 10년간 그는 꾸준하게 공부하고 사색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들과 그는 공부 방법에 있어서 판이했다. 당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내용을 연구하고 그 해석을 밝히는 훈고학(訓學)의 시기였다. 유교 경전을 정밀하게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이 주된 공부 방법이었던 당대의 풍토11에서 전체 내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둔 그의 공부는 방법 면에서 너무 달랐다. 따라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으며 그가 유비에게 출사하기 전까지 이름 없는 학자에 불과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는 일부의 사람들은 그를 복룡(伏龍) 또는 와룡(臥龍)선생이라고 불렀다는 데에서 이 시기 그의 공부가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관중(管仲, BC ?~BC 645)12 과 악의(樂毅, ?~?)13 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학자로서 학문에 매진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한 공부의 사회적 실현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제갈량은 스스로 제후들에게 이름이나 알려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공부는 단순히 자신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후한 말기에 시작된 혼란을 한실부흥을 통해 수습하는 데 그 자신이 일정한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이 시기에 정착하게 된 형주(荊州)의 청류파(淸流派) 인사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때 형주에는 당고(黨錮)의 화(禍)를 면한 청류파 인사들이 많았고, 그들의 곧은 뜻과 정조, 그리고 한 왕실에 대한 충성은 청년 제갈량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리고 방덕공(龐德公)과 사마휘(司馬)는 이들 중에서도 대표적 인사이다.14 제갈량이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표명한 한실부흥의 의지는 실로 이 청류파 인사들의 생각이었으며 이것이 당시 세력으로 보면 별 볼일 없었던 유비에게 제갈량이 출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3. 출사에서 오장원 병사(病死)
제갈량은 그의 나이 27세에 유비에게 출사하게 된다.15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때 유비는 단지 사마휘(司馬)와 서서(徐庶)의 천거로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리고 세 번씩이나 직접 그를 찾았던 것은 당시 유비의 처지가 얼마나 고단하였는가를 잘 알려주는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이른바 융중16 대책(隆中對策)으로 알려진 그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제갈량이 대답했다. “동탁 이래로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나 주(州)를 넘고 군(郡)을 이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중략) 지금 조조는 이미 백만 병력을 끌어안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와 더불어 싸울 수 없습니다. 손권(孫權)은 강동(江東)을 지배한 지 벌써 삼대(三代)가 지났으며, 국가는 견고하고 백성들은 의지하며 현명한 사람이나 재간 있는 사람은 그에게 임명되었으니 이는 그를 밖에서 원조할 수는 있지만 도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주(荊州)는 북쪽으로는 한수(漢水)와 면수(沔水)가 있어 경제적인 이익이 남해에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오군(吳郡), 회계군(會稽郡)과 연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파군(巴郡), 촉군(蜀郡)으로 통하니 이는 무력을 세울 만한 나라이지만 그곳의 주인[유표(劉表)]은 지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이 장군에게 사용하도록 주는 것일텐데, 장군께서는 뜻이 있습니까? 익주(益州)는 요새가 견고하고 옥토가 천 리나 되므로 천연의 보고이며 고조[高祖, 한고조 유방(劉邦)]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제업(帝業)을 세우셨습니다. 그 땅의 주인인 유장(劉璋)은 우매하고 유약하며 장로(張魯)는 북쪽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으며, 인구가 많고 국가가 부유하지만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에 마음을 둘 줄 모르고 있으므로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은 현명한 군주를 얻기를 원합니다. 장군은 이미 황실의 후예이고 신의는 천하에 빛나며 영웅들을 널리 불러들이고 갈증이 나는 것처럼 현인들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주와 익주를 점거하여 그 요충지를 지키고 서쪽으로는 각 만족(蠻族)과 조화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이월(夷越)을 위로하며 밖으로는 손권과 맹약을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할 수 있어서 천하에 변화가 생긴다면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하여 형주의 군대를 완현(宛縣)과 낙양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장군 자신은 익주의 병력을 이끌고 진천(秦川)으로 출격한다면 백성들이 어찌 감히 대그릇에 담은 밥과 병에 넣은 장으로써 장군을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실제 상황이 이와 같다면 패업(業)은 성취될 것이고 한실(漢室)은 부흥할 것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좋습니다.”17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시대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유비에게 천하(天下) 삼분(三分)의 계책을 설명하면서 익주와 형주를 차지하며 오의 손권과는 동맹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후 국력을 키우고 천하 즉 위(魏)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익주와 형주 양쪽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위(魏)를 공격하면 충분히 한실(漢室)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국지』에 주(註)를 단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漢) 왕조가 기울어지려 할 때 종친(宗親) 중 걸출한 인물을 도와 끊어질 듯한 왕조를 다시 일으켜 옛 수도로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19
제갈량은 당대의 혼란을 한실부흥을 통한 재통일로 수습하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존경한 인물은 제(齊)의 명재상이었던 관중이었는데 그는 관중이 제를 패자(覇者)로 만든 것처럼 한(漢)나라를 부흥시키고 그 한나라의 재상(宰相)이 되고자 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갈량에게 있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은 유비였다. 다른 유력자들은 아무리 세력이 강대하다 해도 ‘천자는 유씨(劉氏)’라는 당시의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비에게 출사한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제갈량의 현실 인식이 얼마나 정확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난 것을 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할 정도로 기뻐하였으며 최후에는 자신의 후사를 당부할 정도로 신뢰했다.
조조가 형주와 동오(東吳) 정벌을 위한 군대를 일으키자, 유비는 오의 손권과 연합하기로 하고 제갈량을 파견하게 된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것처럼 동남풍을 불게 하는 일은 『삼국지』에 보이지 않지만 제갈량의 활약으로 오(吳)와의 동맹이 성사되고 적벽대전을 통해 조조를 물리치게 된다. 그 결과 유비는 비로소 자신의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익주를 공격하여 파촉(巴蜀)의 땅에 유비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제갈량의 탁월한 재능에 힘입은 것이었다.
221년 위(魏)의 조비(曹丕)는 후한(後漢)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정권을 인수하였다. 이렇게 후한이 멸망하게 되자 유비는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는데 이를 촉한(蜀漢)이라고 한다. 이때 제갈량은 승상에 임명되어 촉을 정비해 갔는데 엄정히 법을 집행하여 처벌을 받은 사람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공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촉(蜀)에 정권을 수립한 이후 전개된 상황은 제갈량으로선 위기의 연속이었다.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나면 형주는 오(吳)의 손권에게 넘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고 나서도 형주 반환의 약속을 지킬 의향이 없음을 알게 된 오(吳)는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위(魏)와 공동 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위(魏)와 오(吳)의 협공으로 형주를 잃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형주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관우는 손권에 의해 참수된다.20 그리고 이 관우의 복수전에 나선 유비는 이릉(夷陵)에21서 육손(陸遜)이 이끈 오군(吳軍)에 대패하고 백제성(白帝城)22에서 후사를 당부한 후 죽고 말았다(222년).
제갈량으로서는 이 패배를 수습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정권은 안정되지 못하고 동맹은 깨어지고 많은 군사와 인재가 한순간에 사라진 위기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하고 재차 오(吳)와 연합하여 위(魏)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내적으로 생산 장려와 운남(雲南) 진출을 통해 이 패배로 인한 후유증을 최소화하면서 국력 신장에 힘쓰게 된다. 이런 내적인 정비를 바탕으로 위(魏)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그는 한실부흥의 의지를 담아 후주 유선에게 표(表)23 를 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출사표(出師表)」이다. 이후 그는 모두 5차례에 걸쳐 출정하게 되는데, 5차례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성과를 보지 못하고 234년 그의 나이 54세에 오장원의 진중에서 병사(病死)하였다. 그의 원정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그가 지금과 같이 지나치게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삼국지연의』에 그의 귀신같은 전략이 너무 과장되어 있음에도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행정가로서 엄정한 법집행과 공정한 인사 그리고 시의적절한 제도의 시행에서 드러난다. 또한 청렴하였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당대 그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사당이 촉의 수도인 성도(成都)에 세워지고 촉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 위(魏)의 장군들까지 정군산(定軍山) 부근에 있는 그의 묘에 정중한 예를 표한 것을 보면 그 인물됨을 알 수 있다.
그의 묘인 무후묘(武侯墓)는 현재 섬서성(陝西省) 한중시(漢中市) 면현(勉縣)에 있으며, 그 입구의 ‘무후묘간개(武侯墓簡介)’에 실린 설명은 다음과 같다.
무후묘는 중국 역사상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軍事家)였던 삼국 촉한(蜀漢)의 승상(丞相) 제갈공명이 영면(永眠)한 곳이다. 234년 제갈공명은 제5회 위(魏)와의 전쟁에서 과로로 병이 들어 오장원(五丈原)의 군중(軍中)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촉한(蜀漢) 조정(朝廷)은 그의 유언에 따라 정군산하(定軍山下)에 그를 묻었다. 제갈공명은 생전(生前)에 유비를 도와 촉한정권을 수립하도록 보좌하여 관직이 ‘승상무향후(丞相武鄕侯)’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는 ‘충무후(忠武侯)’로 추시(追諡,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내림)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묘를 무후묘(武侯墓)라고 부른다.
Ⅲ.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기존의 논의
제갈량이 위(魏) 정벌에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한실부흥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제갈량의 출중한 재능과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이것이 의문점으로 제기되어 왔다. 먼저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로 현실적인 국력의 열세가 첫 번째로 꼽히고 있다. 왜냐하면 위(魏)와 촉(蜀)의 국력 차이가 너무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출중한 실력을 가진 제갈량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삼국의 국력을 비교한 표이다.24
삼국의 국력을 비교한 <표3>을 보면 후한(後漢)은 13주(州)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위(魏)는 그 대부분이라고 할 9개 주를 오(吳)는 3개 주, 촉(蜀)은 익주(益州)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호수(戶數)와 인구(人口)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열세였는데 당시의 호수와 인구로 판정한 국력을 대비해 보면 촉(蜀)의 국력을 1로 볼 때 오(吳)는 2, 위(魏)는 6으로25 애초에 삼국이라는 개념 설정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 삼국의 세력분포와 주요격전지
두 번째는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평한 것으로 제갈량이 임기응변에 약했다는 것이다. 다음을 보자.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다스리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奇策)이라는 점에서는 열등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간이 군사를 지휘하는 재능보다 우수했다.26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 소하에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매년 군대를 움직였으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임기응변의 지략이 그의 장점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 같다.27
제갈량은 매번 출정 때마다 반드시 자신이 패하지 않을 곳을 확보한 뒤에야 공격을 하였으며 또한 정공법(正攻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 생각해보면 이는 천재적인 전략가인 제갈량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하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과감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연이 자오곡(子烏谷)을 통한 장안(長安) 진공(進攻)을 요청하였을 때 이를 기각하고 정공법을 택하였다. 이 이후에도 그는 정공법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진창(陳倉)의 경우처럼 그의 전략이 적에게 간파되었고, 위(魏)는 충분한 대비 속에서 촉군(蜀軍)을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촉의 공격을 손쉽게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위(魏)는 이미 촉의 약점이 식량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28 위(魏)의 전략은 단지 촉군(蜀軍)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시간을 끌면서 촉군(蜀軍)이 식량 부족으로 후퇴하기를 기다려 이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제갈량 스스로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고 판단하고 그의 위(魏) 정벌의 주목적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였다는 것이다. 청대(淸代)의 학자 왕부지(王夫之)는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인용하며 그의 실패를 분석하고 있다.29
그러나 적을 정벌하지 않는다면 왕업도 역시 망하고 말 것이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린다면 누구와 더불어 적을 정벌하겠습니까.30
이 구절을 보면 제갈량이 최선의 수비는 바로 공격이라는 점에서 위(魏) 정벌을 추진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그 스스로 이미 위(魏) 정벌의 목적이 승리가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제갈량이 그 자신의 후계자를 비롯한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후계자 강유(姜維)는 훌륭한 품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재능은 제갈량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을 비롯한 촉의 주요 장군들은 대부분 선주(先主) 유비가 발탁한 사람들로 이들이 죽고 난 다음에 촉에는 이들에 필적할 장군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촉에 인재가 없었다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제갈량이 사람을 키우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갈량은 어떤 일에서나 완벽을 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것이 남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것이 그가 과로사 할 수밖에 없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제갈량의 맞수 사마의는 제갈량의 이러한 점을 간파하고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는데31 그의 이러한 성격적 한계를 지적해 줄 만한 사람이 당시 촉에 없었던 것도 그의 실패의 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그간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첫 번째는 국력에서의 절대열세, 두 번째는 제갈량이 임기응변에 약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그가 위 원정에 나선 이유가 공격이 아닌 수비가 주목적이였다는 것이다. 끝으로 네 번째는 그 자신의 후계자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Ⅳ.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상제님의 진단
1. 위천하자(爲天下者) 불고가사(不顧家事)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보면 상제님과 같은 시각으로 그의 실패가 거론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32 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는 상제님의 독특한 해석이며 진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제님께서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이와 같이 진단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 교법 2장 52절의 구절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위천하자는 불고가사’라는 말은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가사를 돌볼 겨를이 없다’로 이해된다. 천하사를 도모하는 사람이 가사를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가사를 챙길 정신적, 시간적인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는 것으로 이는 의도적으로 가사를 돌보지 않는 것과는 구별될 것이다.
여기서 구년 홍수에서 치수(治水)를 맡았던 우(禹)와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우임금에 대해 살펴보자. 『사기(史記)』에 의하면 하(夏)33나라를 세운 우(禹)는 그의 부친이 곤()으로 순(舜) 임금 밑에서 치수(治水)를 담당하였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우산(羽山)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죽게 되었다. 우는 아버지인 곤의 뒤를 이어 치수를 맡게 되었는데 총명하고 의욕이 왕성하며 매우 부지런하였다고 한다.
『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는 부친이 치수사업에 실패하여 처벌 받은 것을 슬퍼하였으므로 노심초사하여 일하느라 밖에서 13년을 지내면서도 자기 집 대문 앞을 지나가며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도산씨(途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나흘 만에 집을 떠나게 되었으며, 아들 계(啓)가 태어나도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치수사업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34
오직 치수사업에서의 성공만이 오명(汚名)을 쓰고 돌아가신 부친의 혼을 위로하고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는 일이 되는 상황에서 그의 마음에는 치수사업 이 외에 그 어떤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치수 사업에서 성공함으로써 하나라를 창업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김유신에 대해 살펴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또 급보가 있었다.(중략)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공은 수고를 꺼리지 말고 빨리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라.” 하므로 유신은 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때 그 집 사람들이 모두 문 밖에 나와 오기를 기다렸으나 유신은 문을 지나치면서 돌아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집의 장수(漿水)36를 가져오게 하여 마시며 말하기를, “우리 집 물이 여전히 예전 맛이 있다.” 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우리가 어찌 골육(骨肉)의 이별을 한으로 삼겠는가.” 하였다.37
김유신은 거듭되는 전쟁으로 자기 집 앞을 지날 때조차 집에 들르지 못했고 집을 지나치고 나서야 마상(馬上)에서 장수(漿水)를 마시며 “물맛이 여전하니 내 집에 아무런 일이 없구나”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여러 장졸(將卒)들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이었고 그 누구도 쉽게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인 김유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모든 장졸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왕은 400년 하나라의 창업자이고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맡은 숙명의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 가사는 고사하고 집에 잠시 머물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일을 맡은 총책임자가 이렇듯이 잠시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일에 임하는데 그와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했을 것인가. 아마 누구도 가사를 이유로 쉽사리 자신의 일에서 빠지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장기간 가사를 돌보지 못하는 일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우왕과 김유신은 그들 자신의 성공과 실패가 개인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흥망에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인물들로 위천하자라 할 만하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개인적인 가사를 돌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성공에 국가의 흥망이 걸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가사는 고사하고 잠시 집에 들르는 것도 그들 스스로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 자세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심이라고 할 것이다. ‘위천하자는 불고가사’라고 했을 때 이는 일심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이다.
2.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
이제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유상팔백주’는 뽕나무 800그루를 말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잠(農蠶)이라고 하여 농사와 양잠(養蠶)을 중요한 국가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직접 잠실(蠶室)을 설치하여 모범을 보이기도 했는데 현재 서울에 있는 ‘잠실(蠶室)’은 조선시대에 그곳에 잠실을 설치하여서 유래된 지명으로 아직 그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양잠이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양잠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의 뽕잎 공급은 양잠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한 일이었다. 누에는 성장해 탈피하면서 매번 여러 차례 많은 양의 뽕잎을 먹기 때문에 뽕잎이 부족한 경우 제대로 된 누에고치를 생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뽕잎이 부족하면 이를 사서라도 보충해야 했다.38
이를 통해 볼 때 뽕나무 800그루라면 제갈량과 그 일족은 충분히 비단 옷을 입을 수 있는 기반은 충분히 마련된 것이다.
다음으로 ‘박전십오경’에서 대해서 알아보자. 15경의 땅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보(步), 묘(畝), 경(頃)을 자전(字典)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고39 이를 토대로 박전(薄田) 15경(頃)을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다.
1척(尺) = 19.5㎝40 = 0.195m
1보(步) = 사방 6척(尺)
= (6×0.195)×(6×0.195)
= 1.3689㎡
1묘(畝) = 100보(步)
= 100×1.3689㎡ = 136.89㎡
15경(頃) = 15 × ( 100묘 )
= 15×(100×136.89㎡)
= 205,335㎡
그런데, ㎡×0.3025 = 평(坪)
= 205,335㎡ × 0.3025
= 62,113.8평(坪)
위의 계산에 따르면 15경(頃)을 평(坪)으로 환산하면 62,113평이 된다. 그리고 당시는 시비법(施肥法)이 현대처럼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2년 경작하면 1년 휴경(休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1년을 단위로 보면 6만평의 2/3인 약 4만평 정도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제갈량의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은 결코 적은 재산이 아니었다. 다음 구절을 보자.
이전에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표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성도(成都)에는 뽕나무 8백 그루와 박전(薄田) 15경(頃)이 있으므로 제 자손의 생활은 이것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히 조달해 줄 필요가 없고, 몸에 필요한 의식은 모두 관부에서 지급해 주므로 다른 산업을 경영하여 약간의 재산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신이 죽었을 때, 저의 집안에 남은 비단이 있거나 밖으로 여분의 재산이 있어 폐하의 은총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죽은 후에 그가 말한 것과 같았다.41
그런데 여기서 박전(薄田)이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 박전의 뜻은 진정으로 메마른 땅이란 의미보다는 겸양의 뜻이 들어간 것으로 “변변치 못한 땅이 15경 있습니다.”라는 의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재산은 그 형성과정도 비교적 명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건안 19년(214) 유비가 성도를 포위한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은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촉은 풍요롭고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었으므로, 유비는 주연을 열어 병사들을 위로하고, 성 안에 있던 금과 은을 취해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42
위의 내용은 유비가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난 이후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수많은 공훈을 세우게 되는데 그 논공행상(論功行賞)의 과정에서 많은 상급(賞給)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촉의 고위 관료였던 그가 받은 녹봉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갈량의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적은 재산이 아니었지만 제갈량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볼 때 실로 미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상제님께서 진단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일심(一心)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올린 표(表)를 보면 ‘이것으로 제 자손의 생활은 여유가 있습니다.’란 구절이 있다. 이를 보면 그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후손들에게 남김으로써 어떤 경우라도 자손들의 생활은 보장된다는 점에서 안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지사지이후(陷地死地而後)에 생(生)하고 치지망지이후(致之亡地而後)에 존(存)한다.”43는 말씀도 있다시피 절박한 지경에 이르면 누구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할 수밖에 없고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저력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안도하는 마음과 이 정도면 되었다는 마음에서는 아무리 맹세가 크고 깊다 해도 쉽사리 자신의 저력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며 또한 신명의 음호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44
제갈량의 표(表)에서 언급된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지금까지 그의 청렴결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을 남김으로서 안도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그의 이러한 마음을 일심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상제님께서는 이와 같이 일심(一心)이 되지 못한 그의 마음을 지적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여러 가지가 나열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국력의 열세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이유는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일심(一心)이면 그 어떤 불리한 조건도 극복할 수 있음을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典經』을 보면 ‘상제께서 최 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라사대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임 낙안(林樂安)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 하셨도다.(교법 3장 20절)’는 구절과 ‘이제 범사에 성공이 없음은 한 마음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한 마음을 가지면 안되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슨 일을 대하던지 한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할 것이로다. 안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교법 2장 5절)’는 구절이 그것이다.
따라서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는 구절은 제갈량은 그가 남긴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재산으로 볼 때 그는 대사의 성공보다 가족의 장래를 먼저 염려했었던 것이다. 이는 대사를 담당한 사람이 가져야 할 일심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이탈한 것으로 이것이 그가 성공하지 못한 원인인 것이다.
Ⅴ. 맺음말
제갈량은 후한(後漢) 말기와 위진(魏晉) 초기의 혼란을 한실부흥(漢室復興), 즉 한(漢)에 의한 재통일을 통해 수습하고자 하였으며 그 현실적인 선택이 유비의 삼고초려에 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당대에도 그러했지만 시대를 흐르면서 그의 인물됨과 역량으로 대사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이것이 의문점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그가 성공하지 못하게 된 원인에 대한 그간의 논의를 보면 국력에서의 절대 열세와 전략적인 면에서는 그의 전략이 이미 위(魏)에 간파되었기 때문에 불가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의였다.
그러나 상제님께서는 제갈량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로 그의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을 꼽으셨는데 제갈량에게 있어서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실패를 하더라도 그 자손들의 생활은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정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자손들의 삶은 보장이 된다고 하는 마음과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거니와 그 후손들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과는 분명 구분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법 2장 52절을 통해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위천하자인 제갈량의 ‘유상팔백주’와 ‘박전십오경’은 그가 일심이 되지 못한 반증이며 이로써 대사를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수도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일심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천리나 되는 큰 방죽도 개미굴로 무너진다[천리지제(千里之堤) 궤우의혈(潰于蟻穴)]”는 말도 있듯이 성공을 위해 매진하는 수도인에게는 잠시 잠깐의 방심도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대순회보>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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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상제께서 앞날을 위하여 종도들을 격려하여 이르시니라. “바둑에서 한수만 높으면 이기나니라.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여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제갈(諸葛)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어느 틈에 끼어 있었는지 모르리라. 선천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은 크게 없었나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덮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 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 오듯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 1장 36절)
- 束手之地葛公謀計不能善事(공사 3장 39절)
-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였으되 제갈량(諸葛亮)은 유상 팔백주(有桑八百株)와 박전 십오경(薄田十五頃)의 탓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교법 2장 52절)
- 모든 일을 알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리라. 그러므로 될 일을 못 되게 하고 못 될 일은 되게 하여야 하나니 손빈(孫臏)의 재조는 방연(龐涓)으로 하여금 마능(馬陵)에서 죽게 하였고 제갈량(諸葛亮)의 재조는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에서 만나게 하는데 있느니라.(교법 3장 28절)
-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을 본 받으라.(교법 3장 29절)
- 상제께서 “제갈량(諸葛亮)이 제단에서 칠일 칠야 동안 공을 드려 동남풍을 불게 하였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공을 드리는 동안에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요.” 말씀하시고 곧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도다.(권지 1장 3절)
- 상제께서 김형렬을 불러 물으셨도다.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냐.” 형렬이 “재질이 둔박하와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꾸짖으시니 형렬이 대하여 “가르치심에 힘입어 담당하겠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무한유사지불명(無恨有司之不明)하라.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하므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가할 지어다.”고 일러주셨도다. (권지 2장 38절)
02 『삼국지』는 진(晉)나라의 진수(陳壽, 233~279)가 위(魏, 220~265)·촉(蜀, 221~263)·오(吳, 222~280) 삼국(三國)의 역사를 국가별로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정사(正史)이다. 삼국중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인데, 진(晉)은 위(魏)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나라를 창업했고 진수는 그 진의 저작랑(著作郞: 위(魏) 명제(明帝) 태화연간(太和年間, 227~238)에 조칙(詔勅)으로 설치됨. 저작성(著作省) 장관으로 역사기록을 맡음)이었음으로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조(曹操)는 위무제(魏武帝)로 유비(劉備)는 선주(先主)로 손권(孫權)은 그냥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진수의 『삼국지』가 너무 간략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 남송(南宋)의 문제(文帝, 在位 424~453)가 배송지(裵松之, 372~451)에게 『삼국지』를 보충할 것을 명하여 배송지에 의한 주(註)가 작성이 되었고 이것이 현재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즉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연의(演義)란 그 뜻을 부연한다는 것으로 『삼국지연의』는 『삼국지』의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그것을 부연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는 단시일에 성립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민간에서 전하여 온 화본(話本)이나 희곡에 있어서 설화인(說話人), 극작가(劇作家)와 민중의 공동제작으로 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살려서 최종적으로는 나관중(羅貫中, 1328?~1398)에 의하여 정리, 가필, 창조된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소설이다. 하지만 진수의 『삼국지』와는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라는 중국민족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등이 주인공이다. 특히 유비와 제갈량에 대해서는 극찬하면서도 조조에 대해서는 모멸로 일관하고 있다. 나관중은 명(明)을 창건한 주원장(朱元璋, 在位 1368~1398)과 동시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원을 상실하고 이민족(異民族)인 원(元)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漢)나라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나라였으며 그 한나라를 계승하고자 했던 촉(蜀)과 제갈량이 표명한 한실부흥의 의지는 숭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李慶善, 「三國志演義의 成立過程」, 『國語國文學』 7,8, 문창어문학회, 1968, 김운회, 『삼국지 바로 읽기』, 도서출판 삼인, 2004 참조)
03 朴貞沃, 「공명지정대(孔明之正大)」, 『相生의 길』 제2호,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참조.
04 여명협 著·신원봉 옮김, 『제갈량평전』, 지훈출판사, 2007, pp.26~41 참조.(이하 『제갈량평전』)
05 양기는 순제(順帝), 충제(沖帝), 질제(質帝), 환제(桓帝)까지 4대 20여 년간 정치를 농단한 대표적인 외척으로 정권을 쥐고 있던 그의 부친 양상(梁商)이 141년 죽자 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정권을 잡았는데, 144년 질제를 독살하고 당시 15세이던 환제를 내세웠다. 159년 성인이 된 환제가 환관들과 모의하여 양기의 전 가족을 몰살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그의 재산이 당시 국가의 한 해 세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것(약 30억 전)이었으며 또한 핵심 추종자만 수백 명으로 이들을 제거하자 조정이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제갈량평전』, pp. 26~29 참조)
06 이를 당고(黨錮)의 화(禍)라고 한다. 당고란 환관에게 빌붙지 않으려던 사대부들에게 관직을 빼앗고 벼슬길을 막은 금고(禁錮)를 가리킨다. 외척 또는 환관 등과 결탁하여 이들의 추천으로 관료가 된 자와 그들의 정치는 자주 ‘탁류(濁流)’로 비유되었다. 이에 대하여 탁류에 몸을 더럽히는 것을 떳떳치 못하게 여긴 일군의 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청류파(淸流派) 인사라고 한다. 환제 때 환관의 세력이 커지고 이들의 전횡이 외척들보다 심하게 되자 사대부, 관료, 태학생들이 환관집단을 맹렬히 비판했다. 급기야 166년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응(李膺)이 태학생(太學生)들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조정의 정사를 비방했다고 환관들이 무고하자, 환제는 격노하여 ‘당인(黨人)’들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이응 외 2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다음해에 당인의 금고 조령이 내려져 종신토록 관리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당고(黨錮)이다. 그 해(167) 말에 환제가 죽자 환제의 장인인 두무(竇武)는 재빠르게 12세의 영제(靈帝)를 황제에 즉위시켰다. 두무는 진번(陳蕃)과 결속하여 이응과 금고된 명사들을 등용하여 환관세력을 일거에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일이 누설되어 오히려 환관들의 역습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두무는 자살하고 진번은 투옥되어 살해되었다. 이런 와중에 청류파의 한 사람이던 장검(張儉)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자가 장검이 붕당을 만들어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무고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청류파 전체에 대한 체포와 투옥이 시작되었다. 이 때 살해된 청류파 인사는 100명에 이르고, 그들의 처자는 모두 변경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환관의 원한을 산 사람들 산 사람들은 청류파 당인으로 분류되어 사형, 유배, 금고의 처벌을 받았으니, 이런 사람들이 600~700명이나 되었다. 이것이 제2차 당고이다. 두 차례의 탄압으로 환관들을 견제할 세력이 부재한 가운데 환관들에 의한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한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이때 비로소 당인을 사면하는 조령이 내려 당고령은 해제되었다. (이재권, 「청담사상의 형성 과정과 의미(1)」, 『동서철학연구』 26, 2002, pp.194~195와 李瑾明 編譯, 『中國歷史(상)』, 신서원, 1993, pp.249~258 참조)
07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
08 사마의(司馬懿)의 손자로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선양을 받아 진(晉)을 세운 진 무제(武帝, 在位 265~290)로 서진(西晉)의 1대 황제이다. 280년 오(吳)의 항복을 받아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위(魏)나라가 종실(宗室)을 억압하여 왕실을 고립시킨 실패를 거울삼아 일족을 국내 요지의 왕으로 봉하고 병력을 맡겼는데, 이는 그의 아들 혜제(惠帝)때에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09 290년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면서 무제의 황후 양씨(楊氏)와 혜제의 황후 가씨(賈氏) 간에 정권을 두고 다툼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이후 16년간에 걸친 진(晉)의 내란으로 황족(皇族: 司馬氏) 8명의 왕이 관여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여러 왕이 병력 보급을 위하여 끌어들인 흉노(匈奴), 선비(鮮卑) 등 북방민족은 그 후 화북(華北) 각지에 증식하여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의 주원인이 되었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10 한무제(漢武帝) 정화(征和) 4년(BCE 89)에 처음 설치 된 것으로 수도와 그 부근 각군의 백관(百官)과 백성 들을 규찰하며 치안을 담당했다. 주(州)의 자사(刺史)에 상당하는 관직이었음.(『二十六史大辭典』, 典章制度卷, 吉林人民出版社, 1993)
11 한대(漢代) 유교의 이와 같은 경향은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그 원인이 있다. 분서갱유로 인 해 법가(法家)와 의학, 복서(卜筮), 농업 관련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전(古典)들이 불타게 되었다 이후,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성립하면서 유교 경전의 원전(原典)을 복원하는 작업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때 고문(古文), 금문(今文)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유교 원전의 복원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경전의 존재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 논쟁은 그 진위(眞僞)를 둘러싼 것으로 한대(漢代) 유교사회의 최대 쟁점이었다. 따라서 글자 한자 한자에 대한 정밀한 추구가 이 당시 학문의 주된 경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대(漢代)의 유교(儒敎)」, 『대순회보』 69호, pp.108~111 참조)
12 춘추시대 초기의 정치가로 제(齊)나라의 명재상. 이름은 이오(夷吾). 포숙아의 천거로 제 환공(桓公)에 등용되어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였던 제를 패자로 만든 것은 그의 공로였다. 토지 등급에 따른 세금을 걷고 농업과 함께 염전 제철업을 일으켜 제나라를 춘추시대 가장 막강한 맹주(盟主)로 만들었다. 사마천(司馬遷)은 “관중 없이 환공의 패업이 없고 중원의 평화도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고 평하고 있고 공 자(孔子)도 “관중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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