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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이마두의 중국 전교(傳敎)와 상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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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정락 작성일2018.10.20 조회4,9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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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최정락

 

 

목  차

   Ⅰ. 머리말
   Ⅱ. 이마두의 중국 전교(傳敎)
   Ⅲ. 성리학의 리(理) 비판
   Ⅳ. 상제관의 정립과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전교(傳敎)는 자신이 가진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에는 자기와 같은 이상을 지니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01 그러나 올바른 전교는 자기 종교의 우월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른 종교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 교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을 일생 동안 실천한 사람이 중국 천주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마두(利瑪竇, Matteo Ricci, 1552~1610)이다.
  이마두가 중국에서 행한 전교란 한 개인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알려주고 종교성을 형성하여 천주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 전교란 천주의 가르침을 전하고, 이해시키고, 수용케 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수행의 차원을 넘어 천주교적인 가치관에 기반을 둔 사회의 건설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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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두는 명말 천주교 교리를 본격적으로 중국 사회에 전교한 예수회 선교사로서 천주교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주요한 인물이다.02 또한 그는 상제님께서 행한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에 수차례 등장하는 인물이자 상제님께서 임명한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서 대순사상(大巡思想)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03 그는 천주교 전교를 위해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가 『천주실의(天主實義)』이다. 이마두가 성리학자들과의 대화에 기초하여 작성한 『천주실의』에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의 천주(天主)를 유학의 고전 속에 등장하는 상제(上帝)와 동일한 존재로 본다는 것이 주목된다. 즉 그는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같은 중국 고대 경전에 나오는 상제를 부각해 천주교의 천주는 중국의 상제와 같다고 주창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리학의 리(理)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상제관 중심의 선진유학이야말로 진정한 유학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마두의 전교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천주교의 천주와 선진 유학의 상제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것으로 서로 다른 문화를 소통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상제관을 연구하는 것은 소통을 위주로 한 그의 전교의 구체적인 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 글의 목적은 이마두의 중국 전교와 그의 상제관에 대해 고찰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먼저 Ⅱ장에서는 이마두의 전교 방법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Ⅲ장에서는 명말 신유학의 핵심 이론인 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이마두가 리에 대해 비판했던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Ⅳ장에서는 『천주실의』에 나타난 그의 상제관을 살펴보겠다. 이 같은 고찰을 통해 이마두의 전교 방법과 상제관에 대해 더욱 명료한 이해를 도모하고 수도인에게 주는 교훈을 찾고자 한다.


 

Ⅱ. 이마두의 중국 전교(傳敎)

 

  천주교의 전교는 거의 타문화권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전교 역사를 볼 때, 신부들이 천주교의 교리를 선포하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현지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에 관해서는 관심이 부족하였다. 이마두는 당시 제국주의적인 태도와는 달리 배우는 자세로 중국에 접근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 외국인에 패쇄적이었던 중국사회의 중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인 이마두는 1582년 신부 알렉산드로 발리냐니(Alexandro Valignani, 1539∼1606)의 요청에 응해 마카오에 상륙하였고, 이듬해 신부 미카엘 루지에리(Michael Ruggieri, 1543∼1607)를 따라 당시 광동성의 성도였던 조경부(肇慶府)로 들어갔다. 이어 소주부(韶州府)·남창부(南昌府)·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에 진출하였다. 중국에 온 지 4년 동안 이마두는 전교에 크게 힘썼지만 겨우 3명의 중국인에게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 사이에 화이사상(華夷思想)이 강했기 때문이다. 화이사상이 강한 중국인에게 천주교를 일방적으로 전교하려는 것은 스스로 긍지를 저버리게 하는 방식이었다.04 그래서 이마두는 중국인 신자를 유럽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신부가 중국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전교 방법은 일본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교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의 ‘현지적응주의’를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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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 출처 : 위키피디아 영어판

 


  이마두의 적응주의 전교 방법은 1) 언어 습득, 2) 문화 수용, 3) 과학기술 소개, 4) 번역과 저술활동 등으로 구체화된다.05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마두는 중국어를 배우면서 전교를 준비하였다. 그는 통역 없이 직접 중국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어 당대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인 서광계(徐光啓, 1562∼1633), 이지조(李之藻, 1564~1630) 같은 학자들과 자유로운 교류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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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중국의 사회윤리와 생활풍속을 따르는 문화접근을 하였다. 처음에 그는 일본에서 불교 승려들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승려의 옷을 입었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유가의 지위가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불교와 도교 두 종교는 사회에서 경시되고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585년에 자신의 이름을 중국식 이름인 이마두(利瑪竇)라 개명하고 서진(西秦)이라는 호를 갖는 동시에 승복을 벗고 유자(儒者)의 옷을 입어 서유(西儒)로 자칭했다. 또한 예절에서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국의 방식을 따랐다.
  셋째, 중국에 유럽 과학기술을 소개하였다. 그는 중국의 지식계층인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세계지도, 수학, 천문학 등의 다양한 저술들을 소개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원본(幾何原本)』,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및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 등이다.
  넷째, 번역과 저술 활동을 하였다. 그가 중국에 있던 28년(1582∼1610) 동안 사서(四書)의 번역을 비롯한 종교와 천문, 그리고 지리와 수학 등 전교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한문으로 저술하였다. 이 중에서 중국의 청(淸)나라 고종(高宗) 때인 건륭(乾隆, 1736∼1795)년간에 수집·정리된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 수록된 이마두의 저술은 다음과 같다. 『건곤체의(乾坤體義)』 2권; 『동문산지(同文算指)』 전편(前篇) 2권, 통편(通篇) 8권; 이마두 역: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 이마두 역: 『변학유독(辨學遺牘)』 1권; 『이십오언(二十五言)』 1권;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 『기인십편(畸人十篇)』 2권; 『교우론(交友論)』 1권 등이다.06
  이마두에게 있어서 전교의 핵심은 유학자들에게 천주(天主)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중국에서 천주교를 전교하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의 지식인층을 지배하고 있던 성리학적 사유를 먼저 동요시켜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합리적 사유로 천주교를 논증하기 전에, 성리학적 사유 체계를 먼저 비판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은 만물의 근원으로 리(理)를 설정하고 있는 데 비해, 천주교는 인격적 주재자, 즉 천주(天主)라는 유일자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믿었다.07 이마두는 비인격적 개념인 리가 천주와 서로 마주 대하는 위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선결 과제는 리를 궁극의 위치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공맹유학(孔孟儒學)의 이론과 접목해서 만든 것이 바로 『천주실의』이다.08 이 책의 목적은 천주의 의미를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데 있었다. 그는 현지적응주의에 입각하여 중국 고대 경전들을 인용하고 중국인의 심성과 정황을 파악하여 그들이 천주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서술하였다.

 


Ⅲ. 성리학의 리(理) 비판

 

  천리(天理)를 전제로 구성된 성리학 체계에서는 천지만물의 근원을 리(理) 또는 태극(太極)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유학자들이 천지의 창조자로서의 인격신 개념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수 있다.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주희(朱熹, 1130∼1200)는 인격신에 의한 천지만물의 지배를 긍정하지 않았다.09 주희에 의하면 소가 말을 낳을 수 없고 복숭아나무에서 자두 꽃이 필 수 없으며, 오직 소가 소를, 말이 말을 낳고, 북숭아 나무에서는 오직 복숭아 꽃이 필 수밖에 없는 이치를 생각해 본다면 천지 만물의 변화 발전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재하는 이치, 즉 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사물은 반드시 각기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리(理)이다.10

 

  주희가 말한 ‘리’는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의 통일인데, 전자는 자연법칙이고 후자는 윤리법칙이다. 주희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당연은 소이연에 근거하는 것으로, 곧 윤리법칙은 자연법칙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완전히 합일된 것이기도 하다.11 이처럼 주희는 리를 “‘리’란 하늘에 있는 것으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실로 모든 변화의 핵심이요 만류의 뿌리이다.”12라고 하여 천지만물의 근원이자 비인격적 주재자로 설명하였다.
  ‘리’에 대한 주희의 설명을 좀 더 살펴보면, “이 리(理)가 있으면 바로 이 물체나 현상이 있다. 초목이 종자(種子)가 있으면 바로 초목을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13는 것이다. 여기서 주희가 사물의 리와 초목의 종자 사이의 유비관계를 사용한 것은 물체나 현상이 존재하거나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의 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14 주희는 이러한 생각을 하나의 구절에서 다음의 네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15

  

  ① 이 리가 있으면 이 사물이 있다.
  ② 이 리가 없음에도 이 사물이 있는 법은 없다.
  ③ 이 리가 없으면 비록 이 사물이 있어도 이 사물이 없음과 같다.
  ④ 이 리가 없으면 이 사물이 없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그것의 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천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천지의 리가 있어야 한다. 그는 “그 리가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사물 또한 여러 가지가 있다”16고 말했다.
  리에 대한 이러한 규정을 종합해 보면 법칙, 본질, 원인, 동력, 목적 등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17 그러므로 리란 인간 의식 활동의 산물도 아니며 하느님이 창조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주희가 말하는 리를 도덕원칙이나 자연법칙의 어떤 한 측면에만 국한한다면 그것은 주희의 이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18
  그럼 이제 당시 중국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주희의 리에 대해 이마두가 어떻게 비판했는지 살펴보자. 이마두는 『천주실의』에서 공자와 맹자의 이론은 제한적으로 수용하지만, 성리학의 ‘리(곧 太極)’19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천리(天理)를 바탕으로 구성된 성리학의 체계에서는 천지만물의 근원을 ‘리’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20 이마두는 성리학의 태극(太極)에 대하여 “그러나 저는 고대 (중국의) 군자들이 천지의 상제(上帝)를 공경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태극을 높이 받들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 태극이 상제이며, 만물의 시조라면 옛 성인은 왜 그 말을 숨겼겠습니까?”21라고 하였다. 즉 유일신의 천지창조를 믿고 있는 이마두는 만물의 근원을 종교적 절대자로 이해하고,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22 그래서 그는 고대 중국에서 상제를 공경하고 태극을 높이 받들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리가 만물의 근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물에 대한 실체와 속성의 범주적 구별을 원용하여 ‘리가 천지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물의 범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실체[自立者]가 있고 속성[依賴者]이 있습니다. 다른 개체에 의뢰하지 않는 사물로서, 자립적인 개체로 존립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천지, 귀신, 사람, 새와 짐승, 초목, 쇠와 돌, 사행(四行)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스스로는 설 수 없는 사물로서 다른 물체에 의탁하여 존립하는 것은, (예를 들면)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칠정(七情)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속성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23

  

  그는 모든 사물은 자립적인 실체와 실체에 의존하고 있는 속성으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리학의 리는 사물의 속성일 뿐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즉, 그는 모든 사물의 존재 양식의 범주를 먼저 판별하여 놓고 그 관념[理]을 해당 범주[本品]에 대입하고 태극이 만물의 본원이 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밝힌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물의) 범주를 (존재의 형식에서) 비교해보면, 실체가 (속성보다) 앞서 있어서 (더) 귀중하고, 속성은 (실체가 있고 난) 나중이어서 천한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 자체에 실체는 오직 한 종류뿐입니다. … 태극이라는 것이 단지 ‘리(理)’라고 해석된다면 (그 태극은) 천지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리’ 역시 속성의 부류이니 스스로 자립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물을 존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의 문인들이나 학자들이 ‘리’를 따져서 말할 때에는 두 가지 경우: 혹시 “리는 마음속에 있음”, 혹은 “리는 사물 속에 있음”을 말합니다. 사물의 실정이 마음속에 있는 ‘리’와 합치하면, 그 사물은 비로소 참으로 실재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 밖의) 사물 속에 있는 그 ‘리’들을 끝까지 파고들어가 그것을 다 알아낼 수 있으면, 그것을 사물에 나아가 인식함[格物]이라고 합니다. (리가 오직) 이 두 경우 (“리는 마음속에 있거나”, 혹은 “리는 사물 속에 있음”)에 의거한다면 ‘리’는 진실로 속성입니다. (그 속성이) 어떻게 사물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두 가지 경우 모두 사물이 있는 뒤에 있는 것이며, 뒤에 있는 것이 어찌 앞선 것(구체적 사물이나 마음)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그 ‘리’가 어느 곳에 있었으며 어떤 사물에 종속해 있었습니까?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존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일 의탁할 만한 실체가 없다면 속성이란 존립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없는 것[空虛]에 종속해 있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아무것도 없는 것은 ‘리’가 의탁하기에 충족한 것이 못 되지 않을까 합니다.24

  

  이마두는 성리학의 리를 파악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기원하는 실체와 속성의 범주적 구별, 사물 생성의 시간적 순서에 기반을 두는 인과법칙에 근거하여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리’가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25
  첫째, 리는 오직 두 경우에만 존재한다. 리는 “사람의 마음[心]속에 있거나 사물들[物] 안에 존재”하고 있다. 리가 실체[心이나 物]에 종속되는 속성에 불과하기에, 마음도 사물도 아닌 무엇에 종속하는지를 묻고 있다. 공허(空虛)에 종속했다면, 공허는 실체가 아니므로 의탁할 만하지 못하니, 이런 리는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둘째, 그는 사물 생성의 인과법칙에 따라서 결과가 원인보다도 시간상 앞설 수 없다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리는 먼저 인간의 마음[人心]이나 (마음 밖의) 사물이라는 실체들이 있고 난 다음에, 그것에 종속되는 것이기에, 시간상으로 뒤[後]가 앞서 있는 것[先者]의 존재원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리는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셋째, 그가 이해한 리는 동정(動靜)도 없고 의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리는 “스스로 작용”하여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생”할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천지만물을 창제한 근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리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창조성(創造性)과 주재성(主宰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마두는 “저 ‘리’라는 것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물에 베풀어 있도록 할 수 없습니다. ‘리’는 영(靈)도 없으며 각(覺)도 없으므로 ‘영’과 ‘각’을 생겨나도록 할 수 없습니다.”26라고 하였다. 리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베풀 수가 없다는 것은 곧 창조성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영과 각은 각각 신령함과 깨달음을 의미하지만 합하여 영혼(靈魂)을 의미한다. 즉 리에는 영혼이 없으므로 만물의 근원이나 주재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영혼은 천주교에서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초인간적이고 영원한 실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영혼은 신의 속성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힘으로 파괴될 수 없으며, 천주에 의해 구원될 대상이기도 하다. 이 영혼을 구원할 능력은 천주에게 있으며, 리에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무릇 천주의 본성은 가장 완전하고 성대하며 또한 지극히 돈독하여,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헤아려 볼 수 없으며 만물로서는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천주의 본성은 비록 확연하게 만물의 실정들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정묘한 덕성(德性) 안에 만반의 이치를 내포하고 모든 만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그 능력은 온갖 것을 갖추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 ‘리’는 사람보다도 비천합니다. ‘리’가 사물을 위한 것이지, 사물이 ‘리’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자(仲尼)는 “사람이 도(道)를 널리 펼칠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널리 펼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선비께서 “리가 만물의 이성 능력을 함유하고 만물을 조화·생성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바로 천주입니다. 어찌 유독 ‘리’라고만 말하고 ‘태극’이라고만 말씀하십니까?27  

  

  이마두는 성리학에서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현상의 원리로 이해하는 ‘리’를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유일신의 사상에서 천주가 아닌 리에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28 따라서 그는 리를 단지 하나의 속성으로만 이해하였다.
  성리학에서는 리가 조화·생성의 능력을 가진 진리였지만 이마두에게 있어서 리는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없는 사물의 속성일 뿐이며, 오직 ‘상제(上帝)’만이 그러한 능력을 가진 궁극의 진리였다.

 


Ⅳ. 상제관의 정립과 그 의미

 

  이마두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탕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한다. 이마두의 신의 명칭은 라틴어로 데우스(Deus), 곧 천주(天主)이다.29 이마두는 이 데우스가 우주 만물의 주인이며 이러한 존재가 실재함을 논증한다.

  

  첫째 증명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배우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양능(良能)’입니다. 지금 천하의 모든 나라 (만민들)에게는 각기 스스로 우러난 참마음이 있어서 서로 일러 주지 않았어도 모두 하나의 ‘최고 존자[上尊]’를 공경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는 슬픔을 애소하며 마치 인자한 부모에게 바라는 것처럼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악을 저지른 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마치 적국을 두려워하듯이 놀라서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의 마음을 주재하며 그들로 하여금 높이 받들게 하시는 높은 존자가 어찌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두 번째 증명은 이러합니다: 혼(魂)도 없고 지각(知覺)도 없는 사물은 자기 자리에 있을 뿐 스스로 움직임이 (일정한) 도수(度數)에 맞을 수가 결단코 없습니다. (일정한) 도수에 따라 움직이려면 필연적으로 밖에 있는 ‘이성[靈才]’의 힘을 빌려서 운동을 도와야 합니다. 만약 공중에 돌을 매달거나 물 위에 놓으면, 그 돌은 반드시 아래로 내려가 땅에 닿아야 비로소 (운동을) 멈추고 다시 움직이지 못합니다. … 지금 위를 바라보면, 하늘은 동쪽에서부터 움직이지만 해, 달, 별들은 서쪽으로부터 거꾸로 쫓아가며, (일정한) 도수대로 각각의 법칙에 따라서 차례로 각기 제자리에 안정되게 머물며, 일찍이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착오도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 사이를 알선하고 주재하는 높으신 주님이 없다면, 오차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증명은 이러합니다: 비록 본래 감각은 가지고 있되, ‘이성[靈性]’은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가 만약 이성적인 일을 했다면, 반드시 이성을 가진 존재가 그를 이끌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짐승의 무리를 관찰해 봅시다. (그들은) 본래 미련하여 이성 능력이 없습니다. … (그러나) 모두 자기 몸을 보호하고 새끼를 기르며, 해로운 것을 막고 이로운 데로 나아감은 이성을 가진 존재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반드시 높으신 주님이 존재하시어, 가만히 그들을 가르쳐서 비로소 이와 같은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0

  

  첫 번째 논증에서 이마두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양능(良能)31으로 인해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였던 양능을 신의 존재를 입증할 기본 전제로 활용한다. 두 번째 논증에서 그는 이 세계가 신에 의해 설계되고 창조되었음을 밝혔다. 그는 자연계의 질서를 근거로 우주의 주재자를 설정한다. 세 번째 논증에서 그는 사물들의 통치에 대한 증명을 사용하여 주재자의 존재를 논증하고 있다. 두 번째 논증이 생명 없는 천체의 물리적 작용 가운데서 주재자를 도출한 것이라면 세 번째 논증은 생명 활동은 하지만, 지성적 능력이 없는 생물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보존해가는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해 주재자를 상정하는 것이다.32
  또한 스콜라 철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던 이마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을 가지고 천주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증명하려고 했다.33 그렇다면 이마두가 주장한 상제는 어떤 존재인가? 이마두는 만물의 근원이자 섭리자인 천주를 동양의 상제와 같은 개념34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서양]의 천주는 바로 (중국의) 옛 경전에서 말하는 상제입니다. 『중용(中庸)』에서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교사(郊社)의 예(禮)는 상제를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35

  

  상제께서 조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곧 ‘푸른 하늘[蒼天]’을 상제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옛날 경서(經書)들을 살펴보면, 상제와 천주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36

  

  만일 천(天)을 상제로 이해한다면 말이 됩니다. (본래) 천은 하나[一]와 크다[大]일 뿐입니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가 사물의 주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어제(의 논의로서) 이미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상제라는 명칭의 뜻은 아주 분명하여 (어떤) 풀이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망령된 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37

  

  사물들의 개별적인 뿌리와 바탕[根原]은 진실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물들의 보편적인 본래의 근원[本主]이라면 둘일 수 없습니다. … 한 집에 하나의 가장만이 있고, 한 나라에 하나의 군주만이 있습니다. 둘이면 집도 나라도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 저는 이런 점들 때문에 이 하늘과 땅 사이에 비록 귀신이나 신들이 많다 해도, 오직 천주만이 원초에 천지와 사람과 만물을 창제하고 때에 맞게끔 그들을 주재하고 편안하게 생존시키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38

  

  이마두에 따르면 상제는 세계를 주재하는 의지를 가진 인격신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초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세계는 상제의 의지로 창조되고 인간의 행위도 상제의 의지를 규범으로 삼는다. 이러한 상제의 존재로 말미암아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존재의 근거를 갖게 되고 동시에 도덕적 선의 보편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또한 이마두는 천지만물을 초월적 천주의 창조물로 이해한다. 천주는 천지만물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물 가운데서 선택된 존재로서 천주의 혼(魂)을 받아 천지만물의 지배자로 설명된다.

  

  천주란 만물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엇에)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라면 천주가 아닙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존재는 금수(禽獸)나 초목과 같은 것입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은 천지나 귀신과 인간의 영혼을 말합니다. 천주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만물의 시조요, 만물의 뿌리입니다. 천주가 없으면 만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물은 천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며 천주는 말미암아 생겨난 바가 없습니다.39

  

  그는 천주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부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존재이고, 둘째 부류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존재들이며, 셋째 부류는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존재들이다. 이마두에 따르면 천주가 유일하게 첫 번째 부류의 존재에 속하고, 우주, 귀신,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두 번째 부류의 존재에 속하며, 식물이나 동물들이 세 번째 부류의 존재에 속한다. 이마두에 의하면 천주는 시작도 끝도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다.40 이것은 천주가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작용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바로 이 천주에 의해서만 다른 피조물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지금 천주가 무엇이냐를 규정해 보려면, 우리는 (천주는)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지만 천주의 높고 밝고 넓고 두터움은 오히려 하늘과 땅[天地]보다 더하다고 말합니다. (천주는) 귀신도 신령도 아니지만, 그 신령함은 귀신이나 신령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가) 인간이 아니지만 성인의 지혜를 훨씬 초월해 있습니다. (천주는) 도(道)와 덕(德)이라 말할 수 없으며, ‘도’와 ‘덕’의 근원입니다. 저 (천주는) 실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주를 과거의 측면에서 말하려면 단지 ‘시작이 없음[無始]’이라 말하고, 그것의 미래의 측면에서 말하려면 단지 ‘마침이 없음[無終]’이라 말합니다.41

  

  천주는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존재이며, 만물의 시조가 되고 뿌리가 되니 만물은 천주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만물은 천주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지만, 천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천주의 전체(全体), 전능(全能), 전지(全知), 전선(全善)에 대해 설명하며 천주가 초월적 존재라 주장한다.42

  

  ① 전체(全體): 또한 그 크기를 미루어 생각해 보자면, 천주를 수용하고 실을 만한 공간은 없으나, (천주가) 채워 주지 않는 장소는 없습니다. (천주는 그 자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운동의 최초의 원인[宗]입니다. 손도 없고 입도 없지만, 만물들을 조화하여 만들어 냈으며 모든 생물을 가르치고 깨우칩니다.
  ② 전능(全能): 천주의 능력은 망가짐도 쇠함도 없으며, ‘없는 것[無]’을 ‘있는 것[有]’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③ 전지(全知): 천주의 지능은 몽매함도 없고 오류도 없어서, 만세(萬世) 이전의 과거나 만세 이후의 미래 일이라도 그의 앎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마치 바로 눈앞에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④ 전선(全善): 천주의 선(善)은 순수하여 찌꺼기가 없으니 모든 선의 귀결점입니다. 아무리 미미한 불선(不善)이라 해도 천주에게 누(累)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마두의 설명에 의하면 천주는 만물의 근원이다. 따라서 천주는 시간상으로 우선하거나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의 시초로서 만물의 존재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천주는 도덕의 근원으로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가르치는 전능자이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이마두의 중국 전교와 그의 상제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마두는 중국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면서 당시 주도적 지식인층인 유학자들에게 다가갔고 유럽의 학문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전교를 위한 책을 저술했다. 이마두가 중국에 도착했을 당시 학문의 큰 흐름은 성리학이었다. 천리(天理)를 전제로 구성된 성리학 체계에서는 천지만물의 근원을 리(理)로서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의 전교를 위해 먼저 성리학의 리를 비판한 뒤에 천주교의 천주(天主)가 곧 선진 유학의 상제(上帝)라고 설명한다. 이 상제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며 리는 천지만물의 속성을 가리키는 개념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마두는 성리학의 리를 대신하여 천주교의 천주와 선진 유학의 상제의 동일성을 인정함으로써 이질적인 사상의 소통을 시도한 것이다. 그의 상제관은 만물의 근원에 대한 중국 유학자들의 관심을 파악하여 천주교 신학자가 그것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모색한 결과였다. 결국 그는 유학의 교리와 사고방식을 공부하여 상제관을 중심으로 천주교와 유학의 합일점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마두는 유일신인 천주를 기초로 하여 성리학의 리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리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진 유학의 상제관이 갖는 가치를 인정하고 천주와 상제를 동일한 존재로 설명함으로써 중국 전교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마두의 상제관 중심의 전교를 통해 대순진리회의 포덕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마두의 삶을 통해 종교인이 지녀야 할 자질과 그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전교를 하는 주체인 이마두는 당시 중국 문화의 언어로 전교할 수 있는 교학적 소양과 깊은 신념이 있었다. 그로 인해 전교의 대상인 중국 지식인층은 천주교를 손쉽게 접하며 호감을 갖고 천주교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순진리회의 수도인도 개인의 자질 향상에 힘쓰며 폭넓은 문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43 도전님께서는 타인을 구제하려면 무엇보다 자성이 완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여 끊임없는 내적 성장을 위해 항상 살피고 연구하여 수도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44 포덕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므로, 수도인의 진정성 있는 종교적 삶은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감화를 준다.
  둘째, 그의 적응주의 전교 방법은 대순진리회가 타 종교와 교류할 때 상생의 법리로 포덕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대순진리회에서 전교는 곧 포덕(布德)이다.45 도전님께서는 자기가 믿는 종교가 제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종교인과 무종교인을 이방인 취급하거나 백안시하지 말고 오히려 이들과 더욱 화목하고 화합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46 포덕하는 과정에서 수도인들이 타 종교인과 교류할 때 타 종교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상호의 이해와 존중을 추구한다면, 이것이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상제관 중심의 전교는 대순진리회의 상제님을 타 종교의 신앙의 대상과 비교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늘날 종교 간 마찰의 원인은 무엇보다 자기 신앙의 대상에 대한 독선적인 고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유도하기 위한 비교 연구는 신앙의 대상이 지니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종교인들 간에 그들이 각기 믿고 헌신하는 신앙의 대상의 차이와 공통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존중과 화합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신앙을 존중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도전님께서는 “포덕에서 우주를 주재하신 권능의 주인으로서 상제의 무량(無量)하신 덕화와 무변(無邊)하신 권지의 소유주(所有主)이심을 널리 알려야 한다.”47라고 하셨다. 이러한 상제님을 타 종교의 신앙의 대상과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학술적으로 큰 의의를 지니며 종교 간의 소통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아울러 타 종교의 신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여러 사람에게 상제님의 덕화를 선양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마두는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학을 배척하지 않고, 유학의 이론체계를 수렴하여 상제관 중심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전교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마두의 전교와 상제관에 대한 연구는 향후 대순진리회의 포덕 활동에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순진리회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순회보> 1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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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기시모토 히데오(岸本英夫), 『종교학』, 박인재 옮김 (서울: 김영사, 1996), p.84 참조.
02 이마두의 생애와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것으로는 빈센트 크로닌, 『西方에서 온 賢者: 마테오 리치의 생애와 중국 전교』, 이기반 옮김 (서울: 분도출판사, 1994); 조너선 D. 스펜스,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주원준 옮김 (서울: 이산, 1999); 히라카와 스케히로(平川祐弘), 『마테오 리치』, 노영희 옮김 (서울: 동아시아, 2002)가 있다.
03 교운 1장 9절, 교운 1장 10절, 교운 1장 65절, 예시 66절.
04 와덕충(洼德忠)ㆍ서순장(西順藏), 『중국 종교사』, 조성을 옮김 (서울: 한울 아카데미, 1996), pp.367∼368.
05 조은식, 「마테오 리치의 중국선교 방법론 연구」, 『선교신학』 17 (2008), p.3 참조.
06 송영배, 「마테오 리치의 중국 전교와 그의 유교관」, 『종교신학연구』 7 (1994), p.14.
07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주희와 마테오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서울: 이학사, 2007), p.64.
08 『천주실의』는 ‘천주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8편 17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주실의』의 내용·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권: 1) 천주가 처음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그가 그것을 주재하고 구원하는 일을 논함, 2) 세상 사람들이 천주를 알아보지 못함을 논하고 도교와 불교의 무(無)와 공(空)에 대한 이마두의 논박, 3) 동물의 영혼과는 다른 인간 영혼의 불멸을 논함, 4) 귀신들이나 인간의 영혼과 연관된 잘못된 관념들을 반박하고,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만물들이 하나의 실체[氣]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음을 설명함, 제2권: 5) 육도윤회(六道輪回)나 살생 금지 같은 불교의 허황한 이론을 비판하고 금식의 참뜻을 밝힘, 6) 행위를 선하게도 악하게도 할 수 있는 인간의 의도는 소멸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사후에는 반드시 살아서 행한 선악에 따른 천당의 행복과 지옥의 불행 응징이 있다는 점을 설명함, 7) 사람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임을 제시함, 8) 서양의 도덕관념에 따라서 사제들의 독신과 천주의 현세 강생을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송영배, 『동서 철학의 충돌과 융합』 (서울: 사회평론, 2012), pp. 27∼28 참조.
09 『주자어류(朱子語類)』 1:22, “蒼蒼之謂天, 運轉周流不已,便是那箇. 而今說天有箇人在那裡批判罪惡, 固不可. 說道全無主之者, 又不可(저 푸른 하늘은 운행을 계속하고 멈추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지금 저 하늘에 인격적인 존재가 있어서 죄악을 심판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10 『대학혹문(大學或問)』, “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人.” 이와 같은 내용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大學或問』,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 莫不各有當然之則, 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 而非人之所能爲也.(일단 사물이 존재하면, 그 사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치는 각각 그 존재의 당연한 법칙을 갖지 않는 것이 없으니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모두 하늘[天]이 부여한 것이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1 몽배원(蒙培元), 『성리학의 개념들』, 홍원식 외 공역 (서울: 예문서원, 2008), p.47.
12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上天之載, 無聲無臭, 而實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也.”
13 『주자어류』 13:84, “有是理, 方有這物事. 如草木有箇種子, 方生出草木.”
14 김영식, 『주희의 자연철학』 (서울: 예문서원, 2005), p.58.
15 『주자어류』 64:97, “① 有是理, 則有是物 … ② 未有無此理而有此物也. ③ 無是理, 則雖有是物, 若無是物矣. … ④ 無是理, 則無是物.”
16 『주자어류』 94:111, “其理有許多, 故物亦有許多.”
17 이와 관련해 피터 볼(Peter K. Bol)은 리(理)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리’라는 용어는, 작동의 원리, 발언의 논리/논증/일관성, 부분을 연결하는 관계의 시스템 혹은 패턴 등을 지칭하는 묘사적 용어(descriptive term)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또한 규범적 용어(normative term)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 ‘리’는 어떤 것이 그에 따라 기능해야만 하는 표준, 모든 부분이 함께 작동하는 것을 보장하는 표준을 의미하였다.” 피터 볼, 『역사 속의 성리학』, 김영민 옮김 (서울: 예문서원, 2010), p.262.
18 몽배원(蒙培元), 앞의 책, p.48.
19 주돈이(周敦頤, 1017~1073)와 정이(程頤, 1033~1107), 주희 등은 태극(太極)을 리(理)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기(氣)를 전제로 하는 개별적인 리가 아니라 모든 만물이 품수하고 있는 공공(公共)의 리이며 만물의 근원적인 리이다. 그러나 송대의 유학자들이 모두 태극을 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장재(張載, 1020~1077)는 태극의 기야말로 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계사(繫辭)」에서는 태극을 기로 보고 있다.
20 손흥철,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의 학술사적 의미 고찰: 다산 丁若鏞과 信西派ㆍ攻西派를 중심으로」, 『다산학』 9 (2006), pp.43~44.
21 『천주실의(天主實義)』 上卷, 第二篇, “但聞古先君子敬恭于天地之上帝, 未聞有尊奉太極者. 如太極爲上帝, 萬物之祖, 古聖何隱其說乎?” 이후 『천주실의』의 번역은 모두 Matteo Ricci, 『천주실의』, 송영배 외 공역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을 따른다.
22 성리학의 리에 대한 비판은 주자학의 범신론적 체계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天主實義』 上卷, 第二篇, “要惟此一天主化生天地萬物, 以存養人民. 宇宙之間, 無一物非所以育吾人者, 吾宜感其天地萬物之恩主, 加誠奉敬之, 可耳. 可捨此大本大原之主, 而反奉其役事吾者哉?” (요컨대 오직 이 한 분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조화ㆍ생성하고, 사람을 생존시키고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는 마땅히 천지 만물의 은혜로운 주인이신 천주께 감사드리고 더욱 정성스럽게 받들어 공경하여야 마땅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근본이며, 위대한 근원인 천주를 버리고, 거꾸로 우리 인간들에게 부림 당하고 봉사하는 것(즉 물리적인 하늘이나 땅)들을 받들어야겠습니까?)
23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夫物之宗品有二. 有自立者有依賴者. 物之不恃別體以爲物, 而自能成立, 如天地鬼神人鳥獸草木金石四行等是也. 斯屬自立之品者. 物之不能立, 而託他體以爲其物, 如五常, 五色, 五音, 五味, 七情等是也. 斯屬依賴之品者.”
24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比斯兩品, 凡自立者先也貴也, 依賴者後也賤也. 一物之體, 惟有自立一類. … 若太極者止解之以所謂理, 則不能爲天地萬物之原矣. 盖理亦依賴之類, 自不能立, 曷立他物哉? 中國文人學士講論理者, 只謂有二端, 或‘在人心,’ 或‘在事物.’ 事物之情, 合乎人心之理, 則事物方謂眞實焉. 人心能窮彼在物之理而盡其知, 則謂之格物焉. 據此兩端, 則理固依賴. 奚得爲物原乎? 二者皆在物後, 而後豈先者之原? 且其初無一物之先, 渠言必有理存焉? 夫理在何處, 依屬何物乎? 依賴之情, 不能自立, 故無自立者以爲之託, 則依賴者了無矣. 如曰: ‘賴空虛耳,’ 恐空虛非足賴者.”
25 송영배, 「마테오 리치의 功績」, 『유교문화연구』 18, (2011), p.168.
26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彼理者以己之所無, 不得施之于物, 以爲之有也. 理無靈無覺, 則不能生靈生覺.”
27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夫天主之性最爲全盛, 而且穆穆焉, 非人心可測, 非萬物可比倫也. … 天主性, 雖未嘗截然有萬物之情, 而以其精德, 包萬般之理, 含衆物之性, 其能無所不備也. … 理卑於人. 理爲物, 而非物爲理也. 故仲尼曰: ‘人能弘道, 非道弘人也.’ 如爾曰: ‘理含萬物之靈, 化生萬物.’ 此乃天主也. 何獨謂之理, 謂之太極哉?”
28 손흥철, 앞의 글, pp.48~53.
29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西士曰:子欲先詢, 所謂‘始制作天地萬物, 而時主宰之’者. 予謂天下莫著明乎是也. 人誰不仰目觀天? 觀天之際, 誰不默自叹曰:‘斯其中必有主之者哉!’ 夫卽天主, 吾西國所稱 ‘陡斯’是也(선비께서 이른바 ‘천지 만물을 처음으로 창제하고 때에 맞추어 그것을 주재하신다’는 것을 먼저 묻고자 하셨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자명한 것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 중에 누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며, 하늘을 바라 볼 때에 “여기 이 한가운데 반드시 주재하는 분이 계신다.” 하고 가만히 스스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분이 곧 천주이시니, 우리 서양 나라에서 말하는 ‘데우스(Deus)’입니다).”
30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其一曰: 吾不待學之能爲, 良能也. 今天下萬國各有自然之誠情, 莫相告諭而皆敬一上尊. 被難者, 籲哀望救, 如望慈父母焉. 爲惡者捫心驚懼, 如懼一敵國焉. 則豈非有此逹尊能主宰世間人心, 而使之自然尊乎? 其二曰:物之無魂無知覺者, 必不能于本處所, 自有所移動而中度數. 使以度數動, 則必藉外靈才以助之. 設汝懸石於空或寘水上, 石必就下至地, 方止不能復動. … 今觀上天, 自東運行, 而日月星辰之天, 自西循逆之. 度數各依其則. 次舍各安其位, 曾無纖忽差忒焉者. 倘無尊主斡旋主宰其間, 能免無悖乎哉? 其三曰: 物雖本有知覺, 然無靈性, 其或能行靈者之事, 必有靈者爲引動之. 試觀鳥獸之類. 本冥頑不靈. … 俱以保身孳子, 防害就利, 與靈者無異. 此必有尊主者, 默教之, 才能如此也.”
31 『맹자(孟子)』, 「盡心ㆍ上」 15, “孟子曰: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맹자께서 말씀하였다.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은 양능(良能)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은 양지(良知)이다.”]
32 김선희,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 (서울: 예문서원, 2012), pp.167∼171 참조.
33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夫作者, 造其物而施之爲物也. 模者, 狀其物置之於本倫, 別之於他類也. 質者, 物之本來體質, 所以受模者也. 爲者, 定物之所向所用也. … 天下無有一物, 不具此四者. 四之中, 其模者質者, 此二者在物之內, 爲物之本分, 或謂陰陽是也. 作者爲者, 此二者在物之外, 超於物之先者也, 不能爲物之本分. 吾按: 天主爲物之所以然, 但云: 作者, 爲者. 不云: 模者, 質者.” (운동인은 그 사물을 만들어서 그 사물이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형상인은 그 사물의 모습을 드러내어 본래의 범주에 자리 잡게 하여 다른 부류와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질료인은 그 사물 본래의 물질적 재료로서 형상인을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인은 그 사물이 지향하는바, 소용(所用)되는 바를 정해주는 것입니다. … 이 세상에 이 4원인을 갖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넷 중에서 형상인과 질료인, 이 둘은 그 사물에 내재하여 그 사물의 본래 몫을 이루니 혹 음(陰)과 양(陽)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운동인과 목적인, 이 둘은 그 사물 밖에, 그 사물에서 초월하여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 그 사물의 본래 몫일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천주가 사물의 소이연’이라는 뜻은 다만 운동인과 목적인을 말한 것이고, 형상인과 질료인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34 『시경(詩經)』, 『서경(書經)』, 『좌전(左傳)』, 『국어(國語)』에 천(天)과 제(帝)를 언급한 곳이 많은데, 대부분 인격적인 하느님[上帝]을 지칭한다. 상제(上帝)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권위자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종교적 신앙인데, 옛날부터 이미 존재했다. 고대(古代)의 천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 풍우란(馮友蘭)은 천(天)의 개념을 ① 물질천(物質天), ② 주재천(主宰天), ③ 운명천(運命天), ④ 자연천(自然天), ⑤ 의리천(義理天)으로 나누었다.(馮友蘭, 박성규 역, 『中國哲學史』 上, 까치, 1999, P.61) 노사광(勞思光)은 ① 『시경(詩經)』의 형상천(形上天), ② 『역경(易經)』의 우주질서적(宇宙秩序的) 천, ③ 『서경(書經)』의 정치적 의미의 천, ④ 고대의 인격천(人格天)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형상천(形上天)은 천의 법칙, 원리로서 천도(天道), 천리(天理)로 발전했으며, 인격천은 주재적(主宰的), 인격적(人格的) 의미의 천의(天意), 천지(天志)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노사광(勞思光), 『중국철학사』 고대편, 정인재 옮김 (서울: 탐구당, 1991), pp.28~44.
35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吾天主, 乃古經書所稱上帝也. 『中庸』引孔子, 曰: ‘郊社之禮, 以事上帝也.’”
36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上帝有庭, 則不以蒼天爲上帝可知. 歷觀古書, 而知上帝與天主, 特異以名也.”
37 『천주실의』 上卷, 第二篇, “如以天解上帝, 得之矣. 天者一大耳. 理之不可爲物主宰也, 昨已悉矣. 上帝之稱甚明, 不容解. 況妄解之哉?”
38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物之私根原, 固不一也. 物之公本主, 則無二焉. … 是故一家止有一長, 一國止有一君. 有二則國家亂矣. … 吾因是知乾坤之內, 雖有鬼神多品, 獨有一天主始制作天地人物, 而时主宰存安之.”
39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天主之稱, 謂物之原, 如謂有所由生, 則非天主也. 物之有始有終者, 鳥禽草木是也. 有始無終者, 天地鬼神及人之靈魂是也. 天主則無始无終, 而爲萬物始焉, 爲萬物根柢焉. 無天主則無物矣. 物由天主生, 天主無所由生也.”
40 백민정, 앞의 책, p.60.
41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今吾欲擬指天主何物, 曰: 非天也非地也. 而其高明博厚, 較天地猶甚也. 非鬼神也, 而其神靈魂神不啻也. 非人也, 而遐邁聖睿也. 非所謂‘道’‘德’也, 而爲‘道’‘德’之源也. 彼寔無往無來, 而吾欲言其以往者, 但曰: ‘無始’也, 欲言其以來者, 但曰: ‘無終’也.”
42 『천주실의』 上卷, 第一篇, “又推而意其體也,  無處可以容載之, 而無所不盈充也. 不動而爲諸動之宗. 無手無口, 而化生萬森, 教諭萬生也. 其能也, 無毁無衰, 而可以‘無’之‘有’者. 其知也,  無昧無謬, 而已往之萬世以前, 未來之萬世以後, 無事可逃其知, 如對目也. 其善純備無滓, 而爲衆善之歸宿. 不善者雖微, 而不能爲之累也. 其恩惠廣大, 無壅無塞, 無私無類, 無所不及, 小虫細介亦被其澤也.”
43 “믿음 없는 행실이 없고 행실 없는 믿음이 없으니, 모든 도인들은 행실에서 믿게 하라.” (『대순지침』, p.79.)
44 “타인을 구제하려면 무엇보다 자성(自性)이 완성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때문에 끊임없는 내적 성장을 위해 항상 살피고 연구하여 수도에 매진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성찰과 완성을 위한 실천은 무엇보다 분수를 지키고 허영과 야망을 경계하여 열심히 수도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올해에는 우리 모두 도인들이 내적 신앙심을 더욱 충실히 다지고 참된 생활 자세로서 후회 없는 해원의 이념을 달성해야 합니다.” (『대순회보』 3호, 「도전님 훈시」, p.2)
45 “포덕이란 상제님께서 천지신명(天地神明)들의 하소연에 따라 이 땅에 오셨고, 진멸지경(盡滅地境)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구하셔서 영원한 복록(福祿)이 있는 후천 선경(後天仙境)으로 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과, 이에 맞추어 수도(修道)를 함으로써 큰 운수(運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천하 창생(天下蒼生)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대순회보』 9호, 「도전님 훈시」, p.2)
46 “흔히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가 믿는 종교가 제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을 이방인 취급하거나 백안시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도인들은 절대로 그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들과 더욱 화목하고 화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대순회보』 4호, 「도전님 훈시」, p.2)
47 『대순지침』,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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