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전통 제례에서 혈식천추(血食千秋) 도덕군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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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주우 작성일2018.10.20 조회5,876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김주우
목차 Ⅰ. 여는 글 Ⅲ. 불천위(不遷位) 제사와 혈식천추 도덕군자 Ⅳ. 닫는 글 |
Ⅰ. 여는 글
『전경』에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배를 몰고 전명숙(全明淑)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예시 50절)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은 남조선 뱃길과 관련하여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전명숙과 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 道德君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도통군자(道通君子)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일심(一心)으로 수도(修道)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도사공(都沙工)인 전명숙(全明淑, 1855~1895)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동기에 탐관오리의 학정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패정개혁(悖政改革)의 기치로 농민항쟁을 이끌었다. 그는 천대와 질곡(桎梏)에 빠진 민중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세우기 위해 자신을 헌신한 백의한사(白衣寒士)였다. 그렇다면 배를 모는 사공(沙工)인 혈식천추 도덕군자는 누구인가? 또 긴 세월 동안 혈식(血食)을 하는 도덕군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열쇠는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일심을 소유한 인물이고 만인의 추앙을 받는 군자신이라는 평가에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인물이 사후에 신(神)으로 만인의 추앙을 받는다는 것은 곧 전통적으로 공적인 제사를 받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혈식천추 도덕군자는 국가 제사 또는 공공의 제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제사와 관련된 혈식천추 도덕군자의 의미를 찾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수도의 측면에서는 일심을 이루었던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은 먼저 Ⅱ장에서 고대 제례의 의미와 형식을 통해 제사의 본질적 의미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전통 제례를 고증하여 확립한 조선 시대의 국가 사전(祀典)과 그 규범 체계를 통해 제사의 종류와 형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제사와 혈식의 관계를 밝힐 것이다. Ⅲ장에서는 인귀(人鬼)의 대상인 불천위(不遷位) 제사와 그것을 상징하는 혈식을 고찰하여 그 의미와 형식이 무엇인지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목적인 혈식천추 도덕군자의 조건과 의의를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Ⅱ. 전통 제례의 형식과 규범
1. 제례의 본질과 형식
제(祭)라는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月[肉]+又+示로 구성된 회의문자로서 “피가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오른손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낸다”는 뜻을 나타낸다.01 그러므로 ‘희생을 차려놓고 신에 제사 지냄으로써 인간과 신이 만나는 의식’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물질적 공양을 완비하는 것은 제례의 중요한 요소로서 제사의 외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제사의례에서 제물은 희생(犧牲)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제사의 본질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이다.
고대부터 동아시아 문화적 지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유교의 제사는 자연신과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례가 복합되어 나타나는데 희생제의의 성격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제사는 인간이 천(天: 上帝) 또는 신(神: 鬼神)에게 정성과 제물을 바침으로써 천 또는 신과 교류하는 종교적 의례로 규정된다.02 유교의 경전인 『예기(禮記)』에서는 “사람을 다스리는 도(道)에는 예(禮)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예에는 오경(五經)이 있는데 제례(祭禮)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03라고 하였다. 즉 사람을 다스리는 법도인 예치(禮治)에서 제례가 가장 비중이 큰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제사는 국가의 의례인 오례(五禮) 중에서도 길례(吉禮)에 해당한다.04 이런 까닭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국가에서는 가례(家禮)나 국례(國禮)에서 제사를 가장 주된 의식으로 여겨왔다.
『주례(周禮)』에는 제사의 대상을 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로 구분한다. 천신은 상제(上帝), 또는 호천(昊天), 천(天) 등으로 호칭되는데, 고대국가에서는 이에 대한 제사를 교(郊)라고 불렀다. 또 지기에 대한 제사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때문에 사직(社稷)이라 하였다. 이러한 천제와 사직제는 형식에 일정한 규범이 정해져 있다. 『예기』에 따르면 “천자(天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諸侯)는 사직에 제사 지내고, 대부(大夫)는 오사(五祀)에 제사 지낸다”05라고 하였다. 즉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는 천자의 고유한 권한이자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다. 인귀에 대한 제사는 선성(先聖)과 선사(先師), 조상의 숭배가 여기에 해당한다. 『예기』에 선성과 선사를 위해 석전(釋奠)에 제사를 드린다는 기록이 있다.06 그리고 조상 제사는 천자를 비롯하여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봉행할 수 있는데, 천자는 7묘(七廟), 제후는 5묘(五廟), 대부는 3묘(三廟), 사(士)는 1묘라고 하여 사회적 신분계급에 따라 조상을 모실 수 있는 범위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07
이와 함께 희생 또한 제사의 대상, 즉 위격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종류의 제사라도 봉사자의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예기』에 “교(郊)의 제사에는 특생(特牲: 소)을 쓰고, 사직의 제사에는 태뢰(太牢: 소·양·돼지)를 쓴다”08고 한다. 또 “천자는 사직의 제사에 태뢰(太牢)를 쓰고, 제후는 사직의 제사에 소뢰(小牢: 양과 돼지)를 쓴다”09고 한다. 이러한 희생을 처리하는 방식도 제사의 중요도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예기』에 따르면 교(郊)는 혈(血: 피), 대향(大饗)은 성(腥: 날고기), 삼헌은 섬(爓: 데친 고기), 일헌은 숙(孰=熟: 익힌 고기)을 진설한다. 요리의 가공도가 높아질수록 인정(人情)에 가까운 것이지만 지극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10 이처럼 고대 제사의 제물은 희생의 피, 날고기 또는 약간 데친 고기 등 생기(生氣)가 강한 원초적인 것을 더 존귀하게 여겼다.11 그러므로 고대국가에서는 격이 높은 제사일수록 희생의 피와 익히지 않는 생(生)을 관행으로 여겼다.
고대에는 이러한 제사의 목적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한다. 『예기』에 “제사에는 기구함[祇]이 있고 보답함[報]이 있고 피함[辟]이 있다”고 하였다.12 즉 복을 구하고, 은혜에 보답하고, 화를 면하기를 구한다. 따라서 제사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조상에 대한 보본의 정성으로 시행되었지만 신(神)과 인(人) 사이의 교접을 통해 인간이 복을 받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13 그리고 제사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고 외적으로는 도리에 순응하는 것이다.14 즉 제사는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2. 조선의 사전(祀典) 규범
중국 고대에 성립한 예제의 질서와 예치(禮治)는 오랜 기간 초월적 통치이념으로 역사를 지배해왔는데,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수용했던 조선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법 이전에 예(禮)가 사회를 통합, 조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15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유교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예제에 따라 국가의 사전(祀典)을 정비하게 된다. 먼저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고 『예기』의 ‘좌묘우사(左廟右社)’에 근거하여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종묘와 사직단을 세운다.16 이후 태종은 1396년 천제(天祭)를 위해 원단(圓壇)을 수축하는 등 고려의 예에 근거하여 여러 제사를 대(大)·중(中)·소사(小祀)로 구분하고 각종 제사의 의주(儀註: 의식절차)를 제정했다. 세종대에 오면 고례에 대한 집현전의 고증으로 국가제사가 더욱 체계화되었다. 경서(經書)의 삼례(三禮)17 이외에 『문헌통고(文獻通考)』와 『통전(通典)』을 통해 중국의 역대 사전(祀典)을 이해하고 당시 중국의 전례집인 『명집례(明集禮)』의 규정들을 받아들여 현실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성과는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로 나타나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성종 5년(1475)에 「오례의」에 대한 보완작업이 이루어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완성되었다.18 이에 근거하여 국가 제사를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의 사전체계 근간은 『국조오례의』였고 이는 조선 후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19 특이한 점은 조선 초기에 시행하던 제천의례인 원구제(圓丘祭)가 성종 때는 완전히 폐지된다. 이는 호천상제(昊天上帝)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음에도 천자(天子)의 예(禮)이기 때문에 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명(明)나라와 사대관계가 설정되면서 제후국의 예제에 따라 국가의 사전을 정비했기 때문이다.
『국조오례의』에 나타난 국가의 모든 제사는 공적인 제사를 의미하고 그 규모와 위격에 따라 대사·중사·소사로 등급을 나누어 분류하였다. 그리고 대·중·소사에 속하지만, 국가의 서울과 더불어 지방의 주현(州縣)에서 올리는 사직, 문선왕 등의 제사를 명시했다. 이러한 차등적 분류의 기준은 봉사 대상, 봉사자의 신분, 제물의 질과 양이다.20 이는 국가 제례에서 어떤 제사를 중히 여기는지 그 우선순위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사전체계에서 대사는 큰제사를 뜻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제사는 국가 제사 중에서 최고의 격식을 갖추는 의례이다. 아울러 중사와 소사 또한 제사의 위격에 따라 봉사자를 지정하고 그에 합당한 규범에 따라 진행하였다. 이 밖에도 세부조항을 지정하여 제사의 절차와 형식, 제기(祭器)와 제물, 희생과 폐백(幣帛) 등에서 제사의 등급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이 중에서도 제물의 희생은 국가제사의 위격을 가장 명확히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의 국가 제사를 대표하는 것은 당연히 사직과 종묘의 대사이다. 그러므로 대사의 제례는 왕이 직접 주관하고, 제물도 고례(古禮)에 근거하여 최고의 격식에 맞는 모혈(毛血)과 더불어 희생의 생육(生肉)과 숙육(熟肉)을 모두 갖춰서 올린다. 사직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이라는 두 개의 단으로 구성되며, 사단에는 국토의 신인 국사(國社)의 신주를, 직단에는 오곡의 신인 국직(國稷)의 신주를 모신다.21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으로 구분되는데 정전은 태조와 세실(世室)에 속하는 선왕, 그리고 현재의 왕을 기준으로 4대 이내에 있는 선왕의 신위를 모신 곳이고 영녕전은 4대가 지난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22 이와 더불어 역대 국왕들이 재위에 있을 때 공(功)이 가장 크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을 공신당(功臣堂)에 배향하였다. 이 사직과 종묘는 대사로서 국가의 운명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실제 국가 제사의 차원에서 보면 종묘 제사에 더 신중을 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사를 지내는 횟수의 다소로 판단하는 것이 무리일 수 있지만 사직 제사는 1년에 세 번, 종묘 제사는 1년에 다섯 번을 지냈기 때문이다.23
이외에도 국가 제사의 체계에서 대사는 아니지만 이에 상당하는 제사가 있다. 바로 중사인 문묘(文廟) 제례이다. 조선의 문묘는 유교 도통(道統)의 권위와 정통성을 표상하며 만세의 사표(師表)인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함께 학문에 공덕이 있는 선현(先賢)을 모신 곳이다. 태종 7년(1407)에 한양에 문묘가 중건된 이후로 다른 제사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권위를 획득해 나간다. 국왕이 문묘 성현(聖賢)을 배알할 때는 신하를 대하는 복식인 강사포 대신 예복인 곤룡포와 면류관을 입어 선성(先聖)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24 세종 12년(1430)에는 박연(朴堧)을 통해 문묘제례악을 정비하는 등 그 위상을 격상시키고자 노력했다.25 그리고 성종 8년(1477)에는 문묘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문묘 성인의 위엄이 침탈되지 않도록 하였다.26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따라 문묘의 제사형식은 대사에 준하는 격식을 받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문묘와 관련된 인물을 기리기 위해 각 지방에 향교와 서원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사전체계에서 대사와 중사의 문묘는 왕의 친제(親祭)가 이루어졌던 만큼 이후에는 중요한 국가 제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은 왕조 국가에서 나라의 역사와 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왕위의 전승을 천명하고 더불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유효한 측면이 있었다. 이와 함께 유교 윤리를 통치이념으로 확립했던 조선에서 문묘는 유학자들의 공부를 진작시키고 국가의 통치이념을 공고히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특히 종묘와 문묘는 인귀(人鬼)인 불천위(不遷位)를 모신다는 공통점이 있다. 종묘가 서울 한곳에 설치됐지만 문묘는 서울 외에도 각 지방의 군현마다 설치되어 많은 사람의 추모와 경배를 받았다. 그러므로 문묘가 국가 차원에서 볼 때 성리학적 질서 체계의 보급과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그 비중은 종묘보다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Ⅲ. 불천위 제사와 혈식천추 도덕군자
1. 불천위(不遷位) 제사와 혈식(血食)
1) 불천위의 제사
불천위는 시조(始祖)나 국가에 큰 공훈이 있는 인물로서 신위(神位)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묻지 않고 사당에 영원히 두면서 제사를 받드는 신주(神主)를 말한다. 즉 유교의 제사에서 불천위는 불후(不朽)의 공덕을 쌓은 조상의 신이 영원히 존재하게 됨을 구체적 의례로 보여주는 예이다.27 불천위 제사는 인귀의 영역인 만큼 유교의 생사관(生死觀)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
유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기의 모임[聚]과 흩어짐[散]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형백(形魄)은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28 즉 인간 존재는 몸과 정신의 두 요소로 이루어지며, 정신의 주재자는 양의 기운인 혼(魂)이고 몸의 주재자는 음의 기운인 백(魄)이라는 것이다.29 여기서 혼백의 흩어짐이란 한 개인의 개체성이 소멸하여 보편적 음양의 ‘기’에 흡수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사관은 사후 영혼이 점차로 소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제사는 죽은 후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그 영혼을 찾아 만나는 의식이다.30 이에 조선 시대에는 『주자가례』에 근거하여 ‘사대(四代) 봉사(奉祀)’를 하게 되었다. 봉사 범위가 사대(四代)인 것은 생시에 자손과 대면 접촉의 경험이 있을 법한 최대 범주의 조상이었다.31 그러므로 사대 봉사가 끝난 조상은 신위를 땅에 묻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나 불천위는 사대 봉사의 규범과 다르게 신위가 소멸하지 않고 영원성을 담보로 제사를 받는 것이다. 이에 종묘나 문묘[성균관, 향교], 서원의 사우(祠宇)에 모셔진 인물들이 불천위의 대상이 된다.
조선의 창업군주나 중흥군주와 같이 국가에 공덕이 있는 왕은 신위(神位)를 옮길 수 없으므로 불천지주(不遷之主)라 하였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이들 왕은 국가 제도의 정립이나 국난 극복 등의 정치적 평가로써 정해지기도 하지만 후임 왕들의 직계조상이라는 혈연관계가 시대적 상황과 결부된 경우도 있었다.32 그러므로 불천위는 넓게는 종묘에 모셔진 왕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종묘의 공신당과 문묘에 배향된 인물을 지칭한다.
문묘에 모셔진 공자는 유학자들에게 있어 유학적 삶의 지향점이고 이상적 인간인 성인(聖人)의 모습을 확인하는 존재이다. 이런 성인의 모습은 현실의 일반적인 인간상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유학의 전통에서 공부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군자가 삶의 목표가 된다.33 이에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도덕적 기준으로 삼아 현실의 이상적 모습인 군자가 되기 위해 수기(修己)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사후에 군자의 삶을 인정받아 문묘의 불천위에 배향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그리고 왕조 국가였던 조선에서 왕업을 도와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신하 역시 생전에는 도덕적 군자가 삶의 이정표였다. 이들 또한 공신으로 배향되면 그 가문의 영광은 물론 가묘(家廟)에서도 불천위로 모셔졌다.
문묘 외에 서원에도 배향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가 추존을 받을 만할뿐더러 세세토록 모든 사람에게 존경의 인물로 삼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34 즉 불천위는 가례(家禮) 중심의 제사가 아닌 공공(公共)의 제사이기 때문에 제사의 참여자들이 초세대적이다. 참례자는 그 조상의 세대수에 상관없이 일가 친족, 학맥을 이은 인물의 후손, 불천위 인물을 존숭하는 대다수의 사람이었다.35 이러한 사실에서 불천위 제사는 일반 기제사에서 숙육(熟肉)을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생육과 숙육의 사용은 신분에 따른 조상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공공제사라는 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항간에는 생육을 올리는 불천위의 제사를 큰 제사로 여기는 관행이 있다.36 이러한 까닭에 종묘 또는 문묘와 서원에 배향된 불천위의 제사를 ‘혈식(血食)’이라 불렀다.
2) 불천위의 상징: 혈식(血食)
혈식은 화식(火食)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류가 불을 다룰 수 있기 전에 사람들이 먹던 피 묻은 생고기를 의미한다. 이에 제상(祭床)에 혈식을 올리는 것은 아득한 태초 인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37 혈식은 ‘피를 먹는다’는 뜻으로 제사에 받쳐진 신(神)의 음식인 것이다.38 그러므로 혈식은 제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희생을 받쳐 제사를 지낸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기』에는 “지극히 공경하는 곳에는 맛으로 제사 지내지 않고 기(氣)와 냄새를 귀중하게 여긴다”39고 한다. 이러한 근거로 조선의 국가 제사 역시 고대의 예에 따라 질박함을 유지하여 전통의 예를 지키고자 하였다.40 따라서 조선의 사전체계에 해당하는 모든 제사는 공통으로 혈식의 생기(生氣)가 지속된다.
가장 성대한 종묘제례의 제물은 희생과 기타의 찬물(饌物)로 구분되는데, 희생은 우(牛: 소), 양(羊), 시(豕: 돼지)이다. 먼저 도살한 희생의 모(毛: 털), 혈(血: 피), 간(肝), 율료(膟膋: 희생의 기름)를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 올린다. 그리고 제사가 끝나면 감(坎:구덩이)에 묻는다. 이렇게 대사에서 모혈(毛血)을 통해 혈식이 나타나는데, 모혈은 제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고 이것을 묻음으로써 신의 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41 이러한 의식은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털은 외(外), 피는 중(中)이므로 털과 피를 가진 짐승을 잡아서 온전히 올린다는 의미라고 한다.42 또 털을 바치는 것은 희생 제물의 순전(純全)함을 아뢰고, 피를 바치는 것은 희생물을 죽였음을 아뢰고, 고기 기름을 바치는 것은 향내를 신에게 올린다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43 이어서 제사의 절차에 따라 희생의 고기인 우성(牛腥), 양성(羊腥), 시성(豕腥)을 날고기로 올린다.
문묘제례 또한 우, 양, 시의 모혈(毛血)과 희생의 날고기를 올린다. 물론 대사와 중사에 따라 기타 제물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사를 상징하는 모혈과 희생의 수는 종묘제례와 같다. 희생에서는 소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제사에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각 지방의 향교나 서원에서의 혈식은 성균관의 문묘제례와 달리 모혈은 없고 양 또는 돼지의 생육(生肉)을 올린다. 이것은 희생이 제사의 격식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지표와 같은 성격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묘, 성균관[문묘], 향교, 서원은 그 희생과 제물의 숫자를 규정하여 제사의 등급을 제한하였다.44 이처럼 제사의 격과 규모에 따라 모혈과 희생의 진설 차이가 있지만 혈식을 올린다는 형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종묘와 문묘, 서원의 사우는 4대 봉사에서 끝나지 않는 불천위를 배향하기 때문에 국가의 공공제사로서 혈식을 상징한다. 이처럼 희생의 피와 날고기를 제사에 올리고 요리를 최소화한 것은 생전의 식사가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임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러한 원시성은 질박함을 최고의 의례적 가치로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희생을 바치는 혈식은 태고의 역사성과 질박함을 담고 있다.45 이로써 불천위에 모셔진 인물은 오랜 세월 동안 제사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혈식군자(血食君子)’ 또는 ‘혈식도덕군자(血食道德君子)’로 칭하였다.
2. 혈식천추 도덕군자의 의미
1) 혈식도덕군자의 조건
혈식도덕군자는 ‘혈식을 받을 만큼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풀이되는데 그들은 혈식을 올리는 종묘와 문묘 또는 서원에 배향된 불천위이다. 이에 유학자들에게 있어 날고기를 의미하는 ‘혈식’을 대접받는다는 것은 격이 높은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곧 불천위에 배향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에 ‘혈식도덕군자’야말로 선비로서 영예가 아닐 수 없다.46 그러므로 혈식도덕군자로 추대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어야만 했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불천위 추대 요건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사직을 받든 공[功存社稷]이다. 사직은 국가를 상징하는 것인데, 사직을 받든 공이라는 것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등의 공적을 의미한다. 둘째는 학문에 끼친 공[敎在斯文]이다. 조선은 유교를 기반으로 건국되었던 까닭에 유학적 이론을 독창적으로 구축하여 학맥을 형성하는 등의 공적을 말한다. 셋째는 도덕적 귀감이 된 공[業垂後裔]이다. 유학의 일상적 덕목인 충과 효 등의 모범적 삶을 실천함으로써 후손들과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는 공적이다. 이들 공적을 기반으로 타당성 여부를 검토한 뒤 혈식을 받는 불천위 추대가 이루어진다.47
이러한 불천위는 추대하는 방법에 따라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로 나누어진다. 국불천위는 임금이 직접 국론을 거쳐 예조(禮曹)에 명하여 추대하는 방식이다. 천거된 인물이 국가적 차원에서 백성들에게 귀감이 됐을 때 사당(祠堂)과 제구(祭具), 전답(田畓) 등을 교지(敎旨)와 함께 내려준다. 유림불천위는 지역유림들의 엄중한 공론에 의해 추대되는 경우이다. 지역유림의 결의안으로 예조에 상소하면, 예조에서 타당성을 검토한 후 국론을 거쳐 지역으로 가부의 하명(下命)을 내린다.48 이 두 가지 방법은 국가 차원과 지역 차원이라는 천거의 경로가 다를 뿐, 국론이라는 통합된 의결에 따라 불천위 추대가 이루어지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국불천위는 원칙적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라면 유림불천위는 그 수가 상당히 많은데, 대부분 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이다.
일단 배향된 인물이라도 추후에 그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는 확인절차를 거쳐 퇴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고대의 성현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배향되고 있는 인물이라도 모두 엄격한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그 배향의 지속 여부를 결정했다.49 물론 배향의 퇴출문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역학관계가 일정 부분 서로 맞닿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퇴출의 미묘한 변수가 있을지언정 국가의 공론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불천위는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들로부터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2) 혈식천추 도덕군자의 의의
『조선왕조실록』에는 혈식을 받을 수 있는 불천위의 종사(從祀)와 퇴출(退出)에 대해 많은 논의가 발견된다. 그 대상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성왕(聖王)과 그와 연계된 공신, 공자(孔子)를 모시는 문묘에 배향되는 인물, 향촌에서 유림들의 공론에 의해 추대된 인물이다. 이 모두는 유학 공부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이루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수기치인의 궁극적 이상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이룬 성인이며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군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회지도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수기(修己)를 통해 자신을 닦고 치인(治人)을 통해 이상사회를 실현하는데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50
그들이 지향한 군자의 삶은 사후의 평가에서도 기준점이 되었다. 임금은 국가와 백성에 대한 공덕에 따라 조(祖)와 종(宗)의 시호를 받아 종묘에 부묘(祔廟)되었고, 그 왕을 보좌한 신하 중에 가장 큰 공훈을 인정받은 자가 공신당에 배향되었다. 또 만약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는 공공의 삶을 살았던 선비들이 불천위에 배향되었다. 실제로 불천위는 조선 초기에 나라에 기여한 개국 공신에게만 내려졌으나 4대 사화(士禍)51와 양란(兩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6-17세기에는 절의와 학문에 기여한 인물들이 많이 양산되었다. 조선의 통치이념을 미루어 봤을 때 이들의 평가의 기준은 자연스럽게 성리학이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특히 세종대에는 권근의 사후(死後)를 기점으로 사림파(士林派)에 의해 성리학적 명분인 도통(道統)과 의리(義理)에 따라 문묘 종사의 논의가 활발해진다. 일례로 권근의 제자들에 의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권근(權近)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승에 따라 문묘종사가 거론되었으나, 이제현은 학문의 순정성(純正性), 이색은 호불(好佛) 행위로, 권근은 절의(節義)의 문제 등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반면, 조선왕조 건국에 맞서다 살해되었던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절의가 추숭되면서 중종(中宗) 때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비록 충절의 대상은 달랐지만, 충절 자체는 성리학이 지향하는 의리의 실천이기에 정몽주는 절의의 사표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는 사사(賜死)되었지만 도덕적인 요순(堯舜)시대의 정치를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한 공로가 인정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후 퇴계 이황(李滉)은 이단인 양명학(陽明學)을 배척하고 주자학(朱子學)을 확립시킨 학문적 공로로 배향되었고, 율곡 이이(李珥)는 주자학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문묘에 종사되었지만 불문(佛門)에 들었다는 과거의 행적 때문에 출향(黜享)과 복향(復享)을 겪었다.52 이들을 비롯한 18명의 조선의 선비들이 엄정한 공론에 따라 현자(賢者)로 인정받아 문묘에 배향되었다.53
혈식도덕군자에 대한 평가의 근간은 곧 도덕적 삶의 유무에 있다. 그것은 인간사 일반과 사회적 문제에 있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利]보다 가치상의 옮음[義]을 우선시함으로써 공공의 삶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선비정신이었다. 이는 국가를 위기로부터 보호하고, 학문의 순정성과 절의를 지키고,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율곡은 선비를 국가의 원기(元氣)라고 여겼다. 즉, 혈식천추 도덕군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격과 지성의 모범자이며 공공의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상이었다. 이들은 생전의 공적, 학문, 인격, 행적 등을 구분하여 살펴보고 아무런 결함이 없을 때 승인을 얻었다. 이러한 인물들의 삶은 평생을 수신(修身)으로 이루어낸 결정체로서 국가의 공의(公議)에 의해 엄정하게 평가받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Ⅳ. 닫는 글
지금까지 제사를 통하여 혈식천추 도덕군자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혈식천추 도덕군자는 오래도록 만인(萬人)의 추모와 경배를 받는 제사의 대상을 말한다. 즉, 생전에 공적을 남겨 사후에 긴 세월 동안 혈식을 상징하는 공공의 제사를 받는 인물이다. 혈식은 고대의 제사에서 희생의 생기를 귀중하게 여긴 것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제사의 관행에 따라 조선 시대의 국가 제사인 종묘와 문묘는 고례에 근거하여 모혈과 희생을 올렸다. 이 제사의 대상은 불천위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통해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데 분명한 목적을 두었던 인물들이다. 불천위의 가부(可否) 문제는 생전의 공덕(功德)을 다각적으로 조명하여 국가의 엄정한 공론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사후에 백세 불천위로 남는 것은 가장 권위 있는 고매한 인간다움의 상징이었고, 그 업적과 덕목이 공인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살아서는 군자를 지향하고 사후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아 혈식천추 도덕군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혈식천추도덕군자가 만인에게 추앙을 받는 이유를 일심(一心)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처럼 일심을 가져야만 남조선을 향하는 배를 탈 수 있다고 교훈하셨다. 남조선은 만국(萬國)을 살리는 계책이 있는 곳으로 이상세계를 상징한다. 이 세계를 가는 배는 조선명부(朝鮮冥府)인 전명숙이 도사공을 맡고 군자신(君子神)인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사공을 맡아 희망찬 항해를 떠난다. 상제님께서는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 했던 전명숙을 만고명장(萬古名將)으로 평가하셨다. 또 불후의 공덕을 쌓은 혈식천추 도덕군자를 일심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셨다. 이들은 모두 남을 잘되게 하려는 의지의 소유자로 현실적인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옳음, 즉 의(義)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 마음가짐이 ‘남을 잘되게 한다’는 일심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수도를 통해 이루어야 할 일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데 있다. 즉 물욕(物慾)에 치우치는 욕심인 사심(私心)을 제어하고 인간의 본질인 양심(良心)을 지키고 발현해야 한다. 이것의 실천은 먼저 자기를 속이지 않는 무자기(無自欺)로 나타나고 궁극에는 남을 잘되게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도덕적 인격을 수양하여 돈독한 일심을 이루었을 때 혈식천추 도덕군자가 모는 남조선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대순회보> 1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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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설문해자(說文解字)』: “祭祀也, 從示從又從肉.”
02 금장태, 『귀신과 제사』 (서울: 제이앤씨북, 2009), p.59.
03 『禮記』, 「祭統」: “凡治人之道, 莫急於禮. 禮有五經, 莫重於祭.”
04 『의례』, 「특생관식례(特牲館食禮)」<주(註)>: “聚於五禮屬吉.” 오례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를 말한다.
05 『禮記』, 「王制」: “天子祭天地, 諸侯祭社稷, 大夫祭五祀.”
06 『禮記』, 「文王世子」: “凡學春官釋奠于其先師, 秋冬亦如之, 凡始立學者, 必釋奠于先聖先師, 及行事必以幣.”
07 『禮記』, 「王制」: “天子七廟, 三昭三穆與大祖之廟而七,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大祖之廟而五, 大夫三廟, 一昭 一穆與大祖之廟而三, 士一廟, 庶人祭於寢.” 사당의 위패는 시조[一世]를 중앙에 모시고 이세(二世)·사세(四世)로 내려가는 짝수의 세(世)는 소(昭)라고 하여 왼편에 모시고, 삼세(三世)·오세(五世)로 내려가는 홀수의 세(世)는 목(穆)이라 하여 오른쪽에 모신다.
08 『禮記』, 「郊特牲」: “郊特牲而社稷大牢.”
09 『禮記』, 「王制」: “天子社稷皆大牢, 諸侯社稷皆少牢.”
10 『禮記』, 「祭器」: “禮之近人情者, 非其至者也. 郊血, 大饗腥, 三獻爓, 一獻孰.” 그 주(註)에 교는 천과 상제에게 올리는 제사이고, 대향은 종묘에 협제(祫祭)하는 것이고, 사직(社稷)과 오사(五祀)에 제사할 때는 삼헌(三獻)을 올리기 때문에 그 제사를 삼헌이라 한다. 일헌(一獻)은 여러 가지 작은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낮은 제사를 지낼 때는 술을 한 잔만 올린다.
11 『禮記』, 「祭統」: “有虞氏之祭也, 尙用氣. 血腥爓祭, 用氣也.”
12 『禮記』, 「郊特牲」: “祭有祈焉, 有報焉, 有由辟焉.”
13 한형주 외, 『조선의 국가 제사』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09), p.13.
14 『禮記』, 「祭統」: “賢者之祭也, 必受其福. 非世所謂福也, 福者, 備也. 備者, 百順之名也. 無所不順者謂之備, 言內盡於己而外順於道也.”
15 임민혁, 「주자가례를 통해본 조선의 예치」, 『정신문화연구』 23-3 (2000), p.24.
16 『禮記』, 「祭義」: “建國之神位, 右社稷而左宗廟.”
17 삼례는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를 말한다.
18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 118 (2002), pp.168-171.
19 이영춘, 「조선후기 사전의 재편과 국가제사」, 『한국사연구』 118 (2002), p.214.
20 권상문, 「향사의 지속과 변화」, 『실천민속학연구』 9 (2014), p.187.
21 김문식 외 5인 공저, 『왕실의 천지제사』 (파주: 돌베개, 2011), p.159.
22 이욱, 앞의 글, p.181 참조.
23 한형조 외 5인 공저, 『왕실의 천지제사』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0), p.123.
24 이욱, 앞의 글, p.183.
25 이하나, 「한국 문묘제례의 특수성과 수용의 의미」, 『어문논집』 61 (2015), P.319.
26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9년(1478) 5월 26일 정해.
27 박미라, 「종묘에서 시조신의 위상과 신격」, 『한국사상과 문화』 77 (2015), p.396.
28 『朱子語類』, 「鬼神」: “人所以生, 精氣聚也. 人只有許多氣, 須有箇盡時, 盡則魂氣歸於天, 形魄歸于地而死矣.”
29 도민재, 「유교 제례의 구조와 의미」, 『동양철학연구』 42 (2005), p.229.
30 최규홍, 「유교제례의 본질적 의미와 현재적 의의」, 『동양철학연구』 85 (2016), pp.52-53.
31 배영동, 「전통적 기제사를 통해본 조상관」, 『비교민속학』 23 (2002), p.288.
32 최순권, 임승범, 『종묘제례』 (대전: 민속원, 2008), p.40.
33 이동건, 「선비와 동양의 이상적인 인간상」, 『퇴계학논집』 15 (2014), p.12-14 참조.
34 김영순, 「안동지역 불천위 제사의 규범과 종가의 관행적 제사」, 『실천민속학연구』 6 (2003), p.339.
35 김영순, 앞의 글, p.341.
36 김미영, 「조상제사를 둘러싼 이론과 실제」, 『지방사와 지방문화』 9 (2006), p.335.
37 이욱, 「혈식을 원하는 신(神)」, 《종교문화다시읽기》 460호(한국종교문화연구소: http://kirc.or.kr)
38 이덕우, 「혈식의 민속학적 고찰」, 『민속연구』 18 (2006), p.2.
39 『禮記』, 「郊特牲」: “至敬不饗味而貴氣臭也.”
40 이귀영, 「종묘제례의 제기와 제수의 진설 원리」, 『미술사학』 27 (2013), p.413.
41 이욱, 「조선왕실의 제사와 제물의 상징」, 『종교문화비평』 20 (2011), pp.226-227 참조.
42 이귀영, 앞의 글, p.417.
43 이욱, 「제사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고찰」, 『유교사상문화연구』 16 (2002), p.90.
44 종묘: 12변 12두, 4보 4궤, 6대갱 6화갱, 생우양시, 숙우양시, 모혈반. 문묘: 12변 12두, 2보 2궤, 3대갱 3화갱, 생우양시, 숙우양시, 모혈반. 향교: 8볍 8두, 2보 2궤, 생우양시. 서원: 4변 4두, 1보 1궤, 생양시.[권상문, 「향사의 지속과 변화」, 『민속연구』 9 (1999), p.182 각주 참조.]
45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 118 (2002), p.231.
46 김미영, 「조상제사를 둘러싼 이론과 실제」, 『지방사와 지방문화』 9 (2006), p.341.
47 김미영, 「불천위 제례의 사회문화적 의미와 역할」, 『영남학』 30 (2016), p.30-31.
48 김길령, 「영남지역 종가의 불천위제례 사례연구」, 『차문화·산업학』 19 (2011), p.6
49 이하나, 「한국 문묘제례의 특수성과 수용의 의미」, 『어문논집』 61 (2015), P.331.
50 이동건, 「선비와 동양의 이상적인 인간상」, 『퇴계학논집』 15 (2014), p.12-16 참조.
51 4대 사화(士禍)는 사림파들이 정치적 반대파인 훈구세력에게 화를 입은 일을 가리키며, 조선 중기인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을사사화(1545년)를 말한다.
52 김용헌,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파주: 임프린트, 2010), p.58-224 참조.
53 오늘날 성균관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사성(四聖), 십철(十哲), 송조(宋朝) 6현(六賢), 동국(東國) 18현(十八賢) 등 모두 39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 118 (2002), p.1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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