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의식색(衣食色)의 도, 나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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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22.10.13 조회5,273회 댓글0건본문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몇몇 글들을 읽어주신 일이 있으셨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음의 성구(聖句)다.
人生世間何滋味 曰衣 曰食 衣食然後 曰色也
故至於衣食色之道 各受天地之氣也
惑世誣民者 欺人取物者 亦受天地之氣也 01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즐길만한 흥취[滋味]라 하는가?
말해보자면 옷[衣]이고, 말해보자면 음식[食]이다.
옷과 음식 이후에는, 말해보자면 색(色)이다.
그러므로 의식색(衣食色)의 도에 이르면, 각각 천지의 기를 받는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자도,
사람을 기만하여 물건을 빼앗는 자도
역시 천지의 기를 받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문에 익숙하지 않아 이 성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다음의 두 가지 문제는 더 그러하다.
첫째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3대 기본 요소는 의식주(衣食住)로 알려져 있는데, 이 성구에서는 왜 의식주가 아니라 의식색(衣食色)으로 되어 있는지, 그리고 의식색의 색(色)은 무슨 뜻인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의식색의 도에 도달하는 사람도 천지의 기를 받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천지의 기를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입고 먹고 즐기면서 신나게 살아보자. 그래도 천지의 기를 받는다고 하셨다. 아무렇게나 해도 천지의 기라는 것은 다 받을 수 있다’는 오해를 떨쳐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는 해명의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의식주는 ‘이쇼쿠주우’라는 일본어
2. 의식색에서 색(色)은 무엇인가?
3. 생존의 ‘의식색’, 흥취[자미]의 ‘의식색’
4. 천지의 기를 받는다는 것
5. 선택은 단 한 번뿐
1. 의식주는 ‘이쇼쿠주우’라는 일본어
상제님께서 ‘의식주’ 대신 ‘의식색’으로 글을 쓰신 것은 그 당시의 시대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요즘은 의식주가 일상어(日常語)로서 인간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3대 기본 요소로 당연시된다. 하지만 전통 시대의 한국은 ‘의식(衣食)’이라는 말만 썼을 뿐, ‘의식주’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다.
한국 전통 문헌을 뒤져보면 ‘의식(衣食)’은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의식주(衣食住)’는 단 하나의 용례도 찾을 수 없다. 의식주와 가장 가까운 표현으로는 『중종실록』(1530년)에 적힌 ‘의식안거(衣食安居: 옷, 음식, 편안히 거주함)’ 정도에 불과하다.
중종 25[1530]년 5월 12일, 시강관(侍講官: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던 정4품 직책) 황헌(黃憲, 1502∼1574)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 대개 옷, 음식, 편안히 거주함[衣食安居]은 사람이 가장 크게 바라는 바입니다. (백성을 이주시킬 때는) 반드시 논과 밭[土田]을 이롭게 해준 연후에라야 백성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02
‘의식주’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에야 나타난다. ‘의식주’ 용어의 초기 형태로 대표적인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896년 11월 26일의 『독립신문』 1면에,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이 세 가지 바깥에서 지내는 바가 없으니, 의복과 음식과 집이다. 이 세 가지 일에 사람마다 그 분수와 힘을 따라 하는 것이 다 다르니…’라고 적힌 용례다.03 물론 한글 표현이고 의식주라는 한자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완전하지 않다.
둘째, 1898년 7월 28일에 발령된 국가 내부령(內部令) 제15호 제12조에 ‘(경무청 소속 관원들 가운데) 가족이 있는 자는 화목함을 유지하고 의식주거(衣食住居)를 알맞게 하여 타인으로부터 지적을 받지 말아야 함’이라고 한 용례다.04 여기에도 ‘의식주거’ 네 글자이니 ‘의식주’ 세 글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셋째, 1906년 5월 24일의 『황성신문』 3면에 실린 대한자강회 연설문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사물의 원리를 알게 하며, 인생 본래의 의무와 권리를 깨닫게 하여 스스로 향상하고자 하는 생각을 키우고 의식주(衣食住)의 삼자(三者)를 완성하여 건전한 국민으로 국가사회에 서게 함에 있거늘’이라고 한 용례다.05 여기에, 그러니까 20세기 이후인 190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석 자 형태의 ‘의식주’가 등장한다.
세 사례의 맥락이 보여주는 사실은 ‘의식주’라는 용어가 문명개화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의식주는 문명개화 이전의 전통 시대와 상제님 재세 시에는 보편적으로 쓰이던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주는 개항 이후 외국의 문물이 밀려들 때 그 모습을 드러낸 용어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주체는 일본이었다. 한국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 정책을 펴고 서구의 여러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그 주된 통로가 된 것이 일본이었던 까닭이다. 서구 문명에 속하는 여러 용어는 일본에서 한자로 대량 번역되었고, 그것들이 그대로 한국에 옮겨졌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종교’, ‘문화’, ‘물질’, ‘사진(寫眞)’, ‘공원’, ‘방송’, ‘영화’, ‘발명’, ‘생산’, ‘숙제’, ‘경제’, ‘자유’, ‘사회’, ‘대학교’ 등 그 사례는 매우 많다. 근대 이후 사용하게 된 이런 말들은 대개가 일본식 한자어였다.
그런데 서구 문명 용어의 일본식 한자 번역 표현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번역과는 상관이 없이 일본어가 그대로 들어와 한국에 정착되는 사례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인 용어가 ‘의식주’다. 그러니까 ‘의식주(衣食住)’는 상제님 재세 시에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생활 언어도 아니고, 서구 문물의 번역어도 아니고, 그저 개항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이쇼쿠주우(いしょくじゅう)’라는 일본말이었다.
정리하자면,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의식(衣食)이라는 용어는 종종 사용되었지만, 의식주라는 말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 1692년 일본의 소설가 사이카쿠는 ‘이쇼쿠주우[衣食住]’를 자기의 소설에 처음 썼다. 그로부터 170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에서는 의식주라는 말이 일상화되었다. 한국은 19세기 말, 일본으로부터 서구 문물의 일본식 한자 번역어를 대거 받아들였는데, 그때 일본어 ‘이쇼쿠주우[衣食住]’도 따라 들어와 일상어가 되었다.
이웃 중국도 근대화 이전에는 ‘의식’이라는 말만 사용했을 뿐 ‘의식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우리나라와 같은 전철을 밟고 일본식 한자어 ‘의식주’라는 말을 받아들여 쓰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세 글자보다 네 글자를 더 좋아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의식주’에다 교통을 의미하는 ‘행(行)’까지 덧붙여서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를 ‘의식주행(衣食住行)’ 네 가지로 규정하여 사용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20세기 초엽 상제님께서 종도들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글을 쓰실 때 일본식 표현인 ‘이쇼쿠주우[衣食住]’를 사용하지 않으셨던 사실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좀 더 알아봅시다> ‘의식주’라는 말의 유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한국에 도입된 서적들을 조사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서양의식주(西洋衣食住)』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를 이끈 저명한 계몽교육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가 카타야마 준노스케(片山淳之助)라는 필명으로 1863년에 서양의 문화를 소개하려고 쓴 것이다. 유키치는 한국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 자였으나, 한국은 그의 이 책을 서구의 문물을 배우기 위한 목적에서 수입했다(주로 1867년 재판본). 이 책은 ‘의식주’라는 용어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황성신문』에 ‘의식주’ 용례가 등장하지만 대체로 보면, 후쿠다 긴게쯔(福田琴月)의 『위생과 의식주(衛生と衣食住)』(1911), 무라카미 타다요시(村上唯吉)의 『조선인의 의식주(朝鮮人の衣食住)』(1916) 등과 같이 ‘의식주’ 용어 사용은 문명화와 관련하여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본의 여러 사전을 참고하면,06 일본에서 의식주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17세기의 소설가인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사이카쿠는 하이진(俳人: 우리나라의 시조와 같은 위상을 지닌 일본 고유의 정형시 하이쿠[俳句]를 짓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영역을 넓혀 1682년에 호색한의 일생을 그린 소설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을 간행하였다. 현세적이고 향락적인 이 책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그로부터 100년 동안 교토와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유사한 통속소설이 범람하였다. 그 소설들을 총칭하여 ‘우키요조시(浮世草子)’라고 부른다. 사이카쿠는 1692년에 5권짜리 우키요조시 『세간의 속셈(世間胸算用: 세켄무네잔요)』도 펴냈고, 이 책 역시 폭넓게 읽혔다. 이 책의 1권 제3화에는 ‘분수에 맞게 인간 이쇼쿠주우[衣食住]의 세 가지를 즐긴다’라는 표현이 보인다.07 이것이 ‘의식주’라는 용어의 최초 사용이다. 이로부터 일본에서 18∼19세기에 ‘의식주’가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를 정의하는 개념으로 정착되어갔다. |
2. 의식색에서 색(色)은 무엇인가?
한국 전통 시대나 상제님 재세 시에는 의식주가 아닌, 의식이라는 말이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의식에 색을 붙여 ‘의식색(衣食色)’이라고 글을 써 주셨다. ‘색(色)’은 무엇을 말하는가?
‘색’에는 낯빛, 표정, 빛, 색상, 광경, 경력, 종류, 조짐 등 여러 뜻이 있다.08 서구 혹은 인도 종교 전통에서는 색의 의미 가운데 하나인 ‘빛’이 신(神) 혹은 가시적인 물질 존재로 이해되기도 한다.09 불교는 인간이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원소로 구성된다고 보는데, ①색(色)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물질인 ‘신체[몸]’를 의미한다. 오온의 나머지는 ②감정과 느낌을 받아들이는 ‘감각’의 수(受), ③관념을 이루는 ‘사상’의 상(想), ④경험을 사실로 형성하는 ‘의지’의 행(行), ⑤인지와 식별을 담당하는 ‘정신’의 식(識)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색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나는 그 무엇, 혹은 물질이나 인간의 몸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기 121년 무렵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색의 원래 의미는 언기(顔氣: 얼굴 기색, 낯빛, 표정)였다.10 감정 표현이 얼굴에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언기는 곧 인간 각자가 가지는 다채로운 성격과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색의 원래 의미는 개인의 성격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어떤 것이다.
이런 여러 뜻과는 별도로, 동양 전통에서 색은 식(食) 또는 의(衣)와 더불어 사용될 때만큼은 후손을 생산하기 위해 요구되는 남녀 간의 관계를 뜻하는 단어였다. 예를 들자면, 명나라 때 용준(龍遵, ?∼?)이 세상에 내어놓은 『식색신언(食色紳言)』이라는 책이 있다. ‘식(食)’과 ‘색(色)’을 주제로 한 ‘신언(紳言: 점잖은 말)’을 담은 이 책은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음식 즉 식욕을 주제로 한 「음식신언(飮食紳言)」이고, 2권은 남녀 즉 색욕[性慾]을 주제로 한 「남녀신언(男女紳言)」이다.11 그러니까 『식색신언』은 요즘 말로 하면 ‘음식남녀’인 셈이다. 주지하듯, ‘음식남녀’는 음식과 남녀 문제를 다룬 영화(1995년)다.
▲ 1995년 개봉된 이안(李安) 감독의 영화 <음식남녀>. 음식과 남녀 문제를 담담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색(色)이 음식과 더불어 쓰일 때 남녀 관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통 문헌은 유가의 사서 가운데 하나인 『맹자(孟子)』다.
○ 고자(告子)가 말하기를, 식색(食色)은 성(性)이다.12
여기에서 식색(食色)은 각각 식욕(食慾: 먹는 욕망)과 색욕(色慾: 이성 욕망)을 의미한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13 색(色)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맹자』의 구절은 아래와 같다.
○ 임(任)나라 사람이 질문이 있어 옥려자(屋廬子: 맹자의 제자)에게 물었다. “예절[禮]과 먹는 것[食]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옥려자가 가로되, “예절이 더 중요하다.”
(임나라 사람이 또 묻기를) “색(色)과 예절[禮]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옥려자가 답하기를) “예절이 더 중요하다.”
(그 대답을 듣고 임나라 사람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예절을 지키면서 먹으면 굶어 죽고, 예절을 지키지 않고 먹으면 먹을 것을 얻게 되는 상황이라면, (이럴 때도) 반드시 예절을 지켜야 하겠는가? 친영(親迎: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직접 신부를 맞아오는 예절)을 지키면 아내를 얻지 못하고, 친영을 지키지 않으면 아내를 얻는 상황이라면, (이럴 때도) 반드시 친영의 예절을 지켜야만 하겠는가?”
옥려자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고, 다음 날 맹자에게 가서 고했다.
맹자가 말하기를 “… 음식의 중요한 것과 예절의 가벼운 것을 가져다 둘을 비교해보면, 어찌 다만 음식이 중요할 뿐이라고 하지 않으리오. 색(色)의 중요한 것과 예절의 가벼운 것을 가져다 둘을 비교해보면, 어찌 다만 색(色)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으리오.”14
▲ 월하정인(月下情人), 신윤복 혜원풍속도첩,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 wikipedia
이들의 대화에서 ‘색(色)’의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단서는 아내를 맞이하는 예절을 의미하는 ‘친영(親迎)’에 있다. 그러니까 ‘색(色)’은 아내, 즉 이성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색은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음식 먹는 일과 대비될 때는 대개 남녀 간의 이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좀 더 알아봅시다> ‘의식색’은 인간 생존의 삼급(三急)
○ 천하에는 가장 급한[大急] 두 가지가 있다. 덜 급한[小急] 것은 한 가지가 있다. 그 외의 나머지는 급하지 않다[不急]. … 인용문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시급히 필요한 요소는 먹는 것[食], 그리고 후손을 낳게 해서 인간의 명맥을 잇도록 하는 색(色), 한기와 열기를 막아줄 옷[衣]이다. 이처럼 색이 옷이나 음식과 더불어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로 표현될 때는 남녀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있음이 확인된다. |
3. 생존의 ‘의식색’, 흥취[자미]의 ‘의식색’
상제님께서는 사람의 세상살이에 자미가 의식색이라고 하셨다. 자미(滋味)는 흥취나 재미를 의미한다.17 따라서 의식색은 인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이해되어왔으나,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흥취의 의식색은 여기에만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다. 상제님 글귀 속의 의식색은 생존에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 재미와 흥을 추구하는 수준까지 확대된, 더 방대한 개념이라는 뜻이다.
▲ 쌍검대무(雙劍對舞), 신윤복 혜원풍속도첩,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 wikipedia
그렇다면 흥취로서의 의(衣)는 추위와 더위를 막아 생존을 추구하는 기능을 갖춘 ‘투박한’ 옷에 그치지 않는다. 패션을 담은 옷은 물론이요, 선글라스나 고글, 헬멧, 목도리, 신발, 모자, 심지어 목걸이나 귀걸이, 넥타이 등 멋을 부리기 위해 몸에 걸치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모두 의(衣)의 범주에 든다.
마찬가지로 흥취로서의 식(食)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는 기본 식량에 한정되지 않는다. 쌀과 같은 필수 먹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식도락가들이 즐기는 수천 가지의 요리들, 커피나 차(茶), 음료수나 주류, 과자, 아이스크림과 같은 기호식품에 이르기까지, 맛을 즐기기 위해 입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식(食)의 범주에 들어간다.
흥취로서의 색(色)도 후손을 낳아 인간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의 이성 관계만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대로 색의 원래 의미는 개인의 성격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흥취를 즐기는 색은 남녀 관계라는 좁은 개념에서 벗어나, 영화나 음악 감상ㆍ여행ㆍ스포츠ㆍ독서ㆍ바둑ㆍ웹 서핑ㆍ유튜브ㆍ게임ㆍ명상ㆍ촬영과 편집ㆍ연주ㆍ요리ㆍ드라이브ㆍ등산ㆍ산책ㆍ서예 등 각종 다양한 취미까지 의미하게 된다. 이런 활동을 즐김으로써 각자가 원하는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활동은 인간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을 규정하고 나아가 인간을 다채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흥취의 ‘색’을 뜻하게 된다는 것이다.
4. 천지의 기를 받는다는 것
생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의식색은 단조롭고 그 범주가 좁다. 하지만 흥취를 목적으로 하는 의식색은 다양하고 그 범주가 넓다. 그렇다면 흥취의 의식색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입고 걸치는 일도 정도에 지나칠 수 있고, 먹고 마시는 것도 정도에 지나칠 수 있으며, 이성 교제 혹은 삶의 활력과 정서 안정 및 정체성 구축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때에 따라서는 삐뚤어진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기에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그렇다면, 흥취를 목적으로 삼는 의식색은 생존을 목적으로 삼는 의식색과 달리 그 내용과 정도에 신경을 써줘야만 한다. 과도하게 향락적이거나 정도(正道)에서 벗어난다면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흥취의 의식색은 도리[道]에 맞아야만 한다. 상제님께서 인간이 흥취를 즐기는 의식색의 ‘도(道)에 도달하면’ 천지의 기운을 받는다[至於衣食色之道 各受天地之氣也]고 하셨음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주유청강(舟遊淸江), 신윤복 혜원풍속도첩,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 wikipedia
뜻을 알기 어려운 곳은 그 뒤에 곧바로 등장하는 성구다. 그러니까 도리에 맞으면 천지의 기운을 받는다고 하심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세상을 어지럽히는 나쁜 사람조차도 천지의 기운을 받는다고 하셨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상제님의 이 성구는, 악행을 일삼는 자에게마저도 천지가 풍요로운 은혜를 골고루 베풀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흥취의 의식색을 제멋대로 남용하든, 도에 맞게 즐기든, 또는 나쁜 짓을 저지르든 간에, 그런 모든 행위는 각자의 의지에 따라 벌어지는 일이니, 천지는 그것을 지켜보고 난 뒤 그에 합당한 결과를 따져 묻겠다는 뜻이다.
『전경』에는 이와 유사한 성구가 하나 더 보인다. 그것은 상제님께서 “길한 꽃은 길한 열매를, 흉한 꽃은 흉한 열매를 맺는다[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18고 적어주셨던 글귀다. 길(吉)과 흉(凶)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이라는 사자성어에서 확인되듯이 복된 길한 것과 복되지 않은[재앙의] 흉한 것을 의미한다. 길흉은 선악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대 동아시아 전통에서 길흉은 선악을 의미하는 개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9 『설문해자』에 의하면, 길(吉)은 선(善)을 뜻하는 글자였다.20 또 선(善)은 상서로움, 훌륭함, 착함, 올바름, 뛰어남, 좋음, 잘함, 착하고 인자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21 흉(凶)은 악(惡)이라는 뜻의 글자이며,22 악은 과실(過失), 과오(過誤), 잘못, 허물,23 나아가 죄, 흉포함, 사나움, 나쁨, 추함 등의 의미로 쓰였다.24 간단히 말해서 동아시아 전통에서 길흉(吉凶)은 유리하고 복됨ㆍ불리하고 재앙이 닥침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선악(善惡) 즉 올바르고 좋음ㆍ바르지 않고 나쁨의 의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길한 꽃[吉花]과 흉한 꽃[凶花], 길한 열매[吉實]와 흉한 열매[凶實]에 보이는 ‘길’과 ‘흉’은 이러한 의미들을 다 갖는다. 그러니까 길한(올바르고 좋은) 꽃이니 길한(유리하고 복이 되는) 열매가 되고, 흉한(바르지 않고 나쁜) 꽃이니 흉한(불리하고 재앙이 닥치는) 열매가 된다는 뜻이다. 쉽게 비유해서 말하자면, 착한 심성의 흥부[吉花]가 타는 박은 길한 열매요, 나쁜 심성의 놀부[凶花]가 타는 박은 흉한 열매라는 것이다.
천지는 길한 꽃이든 흉한 꽃이든 가리지 않고 똑같이 기운을 주어서 열매가 되게끔 허용한다. 길한 꽃을 피워서 길한 열매를 맺든, 흉한 꽃을 피워서 흉한 열매를 맺든,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그에 따른 결과 역시 각자가 받아들여야만 한다.
흔히 이 원리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種瓜得瓜 種豆得豆]는 속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상식은 지금 시대에 현실적으로 더 극대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상제님께서 모든 일을 풀어놓으심으로써 만물은 각자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일을 벌이고 해원을 할 수 있는 ‘해원시대(解冤時代)’를 맞았기 때문이다.25 해원시대는 제멋대로 해원을 할 수 있는 시대이나, 그 내용과 방향성 및 정도에 따른 결과는 자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26 선한 의지로써 길한 꽃을 피워 선(善)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 이기적이거나 악한 의지로써 흉한 꽃을 피워 악(惡)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는 각자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문제다.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따라 천지는 상극의 시대에서 상생의 시대로 변화한다. 지금은 그 과도기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만물은 각자 해원을 도모한다. 해원 과정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상극을 끊어내고 상생을 추구함으로써 천지의 변화에 동참할 것인지, 그렇지 않고 향락을 쫓거나 악행을 도모하며 천지의 변화에 따르지 않을 것인지 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렸다. 이에 대한 상제님의 준엄한 가르치심은 다음과 같다.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司命: 生殺과 禍福을 주관함)하여 만유(萬有: 萬物)를 재제(宰制: 다스림)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仁愛)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지어다.27
정리하자면, 흥취의 의식색을 도리에 맞게 하는 자도, 향락으로 즐기는 자도, 악행을 일삼는 자도 천지의 기운을 ‘공평하게’ 받는다. 그러나 천지의 기운을 받는다고 함은 은혜와 복을 누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다는 뜻이다. 원하는 대로, 의도했던 대로 해주지 않으면 그것 또한 원한이 되기에, 해원시대인 지금의 천지는 인간이 흥취에 빠져 즐기고 놀든, 흥취의 도를 지키든, 악행을 저지르든 간에 상관없이 기운을 다 준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는 본인 스스로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
5. 선택은 단 한 번뿐
혹자는 이번 생(生)을 실컷 즐겨보자는 마음을 가지고서, 자신이 설령 흉한 열매를 맺더라도 일단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 그만이고, 선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일은 다음 생으로 미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음 생’의 재도전 기회는 없다. 상제님께서는 참된 자를 ‘길이 창성’, 거짓된 자를 ‘길이 멸망’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택의 기회는 지금 단 한 번뿐이다.
더구나 이 열매가 빚어내는 결과는 나 한 개인에게 미치는 것도 아니다.
대자대비 우리상제 옥추문을 열어놓고
대신문을 열어놓니 신명떨음 이때로다
천상공덕 선령신들 자손찾아 내려올제
나를보고 반기하며 춤을추고 노래할때
적선일세 적선일세 만대영화 적선일세
백조일손 그가운데 자손줄을 찾아가니
어떤사람 이러하고 어떤사람 저러하고
자손줄이 떨어지면 선령신도 멸망된다
희희낙낙 기뻐할제 한모퉁이 통곡이라
뼈도없고 싹도없다 영혼인들 있을소냐
화인적악 되었던가 너의운수 가소롭다
복연선경 되었으니 이내운수 장할시고
자 손 을 잘못두면 욕급선조 된다하고
자 손 을 잘만두면 조상여음 송덕이라
천지인신 대판결은 선악분별 분명하다28
『채지가』의 「달 노래」가 전하는 대로, 현재 내가 수도하여 맺고자 하는 열매는 선령신들과 가문 공동체의 열매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 옥추문(玉樞門)과 대신문(大神門)을 여신 뒤 선악 구별로써 천지인신(天地人神)을 대판결(大判決)하실 때, 나의 성취에 따른 열매도 그 속이 열려 심판받는데, 그 결과는 가문과 선령신 전체에게 미친다. 길한 열매라면 나만이 아니라 가족ㆍ가문 공동체 전체가 더불어 길이길이 창성할 것이요, 흉한 열매라면 나만이 아니라 가족ㆍ가문 공동체 전체가 길이길이 멸망할 것이다.29
▲ 해원시대에는 뭘 해도 천지의 기운을 다 받는다. 천지의 기운으로써 길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 흉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 하는 결정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출처: 영화 <매트릭스 1>의 한 장면)
사실관계가 이러하다면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기 위해 살아갈지 선택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만 한다. 흥취의 의식색을 즐길 것인지 즐기지 않을 것인지, 즐기되 도에 따를 것인지 향락에 빠질 것인지,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을 속일 것인지, 사람을 기만하여 물건을 빼앗고 나쁜 짓을 자행할 것인지, 이 모두는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뽑기’ 기회는 이번 생애 단 한 번뿐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와 가족, 가문 공동체 모두에게 영원히 미친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이후 도수에 따라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오직, 선택에 따른 그 모든 책임을 각자가 질 따름이다.
01 교법 3장 47절.
02 『중종실록』, 중종 25[1530]년 5월 12일 1번째 기사. 侍講官黃憲曰: “… 夫衣食安居, 乃人之所大慾也, 必利其土田, 然後民無怨心矣.”
03 “사이 셰샹에 사거시 세가지에 지내 업시니 의복과 음식과 집이라 이세가지 일에 사마다 그 분슈와 힘을 라 거시 쳔 만칭이나 다르니 ….” 『독립신문』 1896.11.26, 1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04 第12條 “… 家屬이 有한 者는 輯睦一家하며 衣食住居를 適度히 하여 他人의 指斥을 招치 勿하는 事.” 『內部令 第15號 地方警務章程을 發布하다』 光武 2[1898]年, 7月 28日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05 “卽敎育이라은 人으로야곰 事物의 理를 知며 人生本來의 義務와 權利를 覺知케야 自主向上의 念을 養成고 衣食住의 三者를 完成야 健全 國民으로 國家社會에 立케에 在거 ….” 『황성신문』 1906.5.24, 3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06 코토반쿠(https://kotobank.jp/word/衣食住); Weblio 辭典(https://www.weblio.jp/content/衣食住); Agora Sofia 日本語辭典(https://jiten.eu/衣食住).
07 “分際相応に人間衣食住の三つの楽の外なし.” 井原西鶴, 『世間胸算用』, 潁原退藏 註 (東京: 明治書院, 1930), p.13.
08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11』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p.717.
09 이지영·이경원, 「대순사상의 미(美) 개념과 미학적 특징」, 『대순사상논총』 37 (2021), p.201.
10 『說文解字』 卷十 「色部」. “色, 顔氣也.”
11 용준, 『식색신언』, 박동욱 옮김 (서울: 북드라망, 2021), p.47. 『식색신언』에는 수면욕에 대한 언급도 있다: “윤진인(尹眞人)이 말하기를 ‘세 가지 욕망은 식욕(食慾), 수면욕[睡慾], 색욕(色慾)이다. 세 가지 욕망 가운데에서 식욕이 맨 근본이 된다. 배 불리 먹으면 졸음이 쏟아지고 색욕이 일어난다.”
12 『孟子』 「告子章句上」. “告子曰, 食色性也, 仁內也, 非外也, 義外也, 非內也.”
13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11』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p.717 ; 『漢韓大辭典 15』, p.251.
14 『孟子』 「告子章句下」. “任人, 有問屋廬子曰, 禮與食孰重, 曰禮重. 色與禮孰重, 曰禮重. 曰以禮食則飢而死, 不以禮食則得食, 必以禮乎. 親迎則不得妻, 不親迎則得妻, 必親迎乎. 屋廬子不能對. 明日, 之鄒, 以告孟子. 孟子曰 … 取食之重者, 與禮之輕者, 而比之, 奚翅食重. 取色之重者, 與禮之輕者, 而比之, 奚翅色重.”
15 『太平經合校』 卷三十六 「守三實法」. “天下大急有二, 小急有一, 其餘悉不急, … 天下人本生受命之時, 與天地分身, 抱元氣於自然, 不飮不食, 噓吸陰陽氣而活, 不知飢渴, 久久離神道遠, 小小失其指意, 後生者不得復知眞道空虛, 日流就僞, 更生飢渴, 不飮不食便死, 是一大急也. … 傳之當象天地, 一陰一陽, 故天使其有一男一女, 色相好, 然後能生也. … 如男女不相得, 便絶無後世. 天下無人, 何有夫婦父子君臣師弟子乎. 以何相生而相治哉. … 天道有寒熱, 不自障隱, 半傷殺人. 故天爲生萬物, 可以衣之, 不衣, 但穴處隱同活耳, 愁半傷不盡滅死也, 此名爲半急也. … 右守三實平氣來邪僞去奸猾絶.”
16 윤찬원, 「『태평경』에 나타난 도교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pp.226-232.
17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8』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p.761.
18 행록 5장 38절.
19 임재규, 「유교윤리에 있어서 선악의 문제」,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편), 『한국사회와 종교학』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pp.506-520 참조.
20 『說文解字』 卷三 「口部」. “吉, 善也. 從士口.”
21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3』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0), p.220.
22 『說文解字』 卷八 「凶部」. “凶, 惡也.”
23 『說文解字』 卷十 「心部」. “惡, 過也. 从心亞聲.”
24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漢韓大辭典 5』 (서울: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3), p.583.
25 공사 1장 32절. 교운 1장 20·32절, 교법 1장 9·67절, 교법 2장 14·20·55절, 교법 3장 15절.
26 차선근, 「대순진리회의 개벽과 지상선경」, 『신종교연구』 29 (2013), pp.229-233; 차선근, 「증산계 일괄 기술에 나타난 문제점과 개선방향」, 『신종교연구』 30 (2014), p.86.
27 예시 30절.
28 대순진리회 교무부, 『채지가』 (서울: 대순진리회 교무부, 1978), p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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