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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진표율사(眞表律師)와 미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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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수 작성일2018.07.01 조회3,8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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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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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760년(통일신라 경덕왕19),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가지고 전라북도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01이라는 곳을 찾아 산을 오르는 27세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하였으나 3년이 되도록 수기(授記: 부처가 중생에게 장래에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고 알리는 것)를 받지 못하자 절망한 나머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때 문득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손으로 그를 받아 다시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기적에 힘을 얻은 그는 다시 뜻을 발하여 3·7일을 기약하고 부지런히 망신참법(亡身懺法: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하여 이를 이겨냄으로써 과거의 죄악을 씻어내는 참회법)으로 수련하였다. 돌로 몸을 두드리며 참회한 지 사흘 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져 나갔다. 7일째 되는 날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금장(金杖)을 흔들며 나타나더니 손과 발을 고쳐주고 가사(袈裟: 중이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옷)와 바리때(중의 공양 그릇)를 주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자 천안(天眼)이 열리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계(戒)를 구하는 것을 칭찬하였다.   

지장보살은 계본(戒本: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의 조목을 뽑은 책)을 내려주고 미륵보살은 제8간자, 제9간자라고 쓰여 있는 목간(木簡)을 내려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다. 이것은 처음과 근본의 두 깨달음을 비유한다. 또 9는 법(法)이며 8은 새로 만들어질[新熏] 종자(種字)이니[신훈종자: 여러 수도로써 새로 만들어지는 종자. 본유종자(本有種子)와 대비된다], 이것으로써 인과응보를 마땅히 알 수 있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나중에 도솔천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 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바로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때가 임인년(762) 4월 27일이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수받고 산에서 내려오자 뭇짐승들이 그 앞에 엎드렸고, 마을의 남녀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여 그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龍王)으로부터 옥가사(玉袈裟)를 받았고 그 용왕 권속들의 도움으로 금산사(金山寺)를 중창하였다.   

위의 인용문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에 실려 있는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중의 한 부분으로 진표율사02가 목숨을 건 구도(求道)끝에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수받고 금산사(金山寺)를 다시 세우는 과정을 짤막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용하지 않은 나머지 부분에는 그가 금산사를 떠난 후 중생을 교화하다가 입적할 때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발연사(鉢淵寺)를 짓고 점찰법회(占察法會)03를 열면서 7년간을 머무른 뒤에 다시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고향으로 가 부친을 만나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덕(大德)04 진문(眞門)의 방에 가서 머물기도 하였다. 이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永深)이 대덕 융종(融宗), 불타(佛陀)와 함께 찾아와 목숨을 걸고 법문을 구하자 교(敎)를 전하였는데, 그들에게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 간자 189개, 미륵으로부터 받은 8, 9간자를 건네주며 속리산으로 돌아가서 길상초(吉祥草)05가 난 곳에다 절을 짓게 하였다. 영심 등은 곧 절을 세우고 절의 이름을 길상사(지금의 법주사)라 하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진표율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로 들어가 수도를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진표율사(眞表律師)에 관한 기록은 현재 총 3종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4 「백제국금산사진표전(百濟國金山寺眞表傳)」06이고, 그 다음이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外金剛面) 용계리(龍溪里) 발연사(鉢淵寺) 터에 남아 있는 비석 ‘관동풍악산발연수진표율사진신골장입석기명(關東楓岳山鉢淵藪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記銘, 이하 ‘발연사 석비’로 약칭함)’07이며, 남은 하나가 『삼국유사(三國遺事)』08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이다. 이 중 ‘발연사 석비’는 현재 마멸이 심하여 전문(全文)을 다 읽을 수 없는 상태이나, 일연이 『삼국유사』의 「진표전간」 다음에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라는 제목으로 옮겨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3종의 기록은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몇 가지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진표전간」은 지장보살로부터 계(戒)를 받은 때를 경진년(740)으로 기술하고 ‘발연사 석비’는 임인년(762)으로 기술하고 있어 약 20여 년의 차이가 나고, 또 진표에게 「점찰경」을 전해주는 인물도 각각 미륵보살과 스승으로 서로 다르다. 그리고 『송고승전』은 다른 기록에서 볼 수 없는 출가 동기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진표율사는 『전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상제님께서 강세하시기 전 30년간 영(靈)으로 머무르신 금산사(金山寺)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모셨다는 점에서 많은 수도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인물이다. 이에 위의 3종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의 일대기를 기술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 주변을 중심으로 성행하게 된 미륵신앙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 한다.

      

진표의 구도행(求道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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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는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660년)한 후 약 60년이 지난 718년(또는 734년)
09에 전라도 만경(萬頃)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은 정(井)씨라고 한다.10 

진씨(眞氏)는 백제 귀족의 대표적 성씨 가운데 하나였고 ‘내말(乃末)’은 이름이 아닌 관직인 것으로 보인다.11 『삼국사기』 권40 직관 하(職官下)의 ‘백제 관인에게 신라 벼슬을 줄 때 백제 관등 3품이었던 은솔(恩率)은 신라 관등 내말(乃末)로 한다’는 기록으로 볼 때 진표의 집안은 그 지역에서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부족함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진표가 험난한 구도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의 기묘한 사건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한 그는 홀로 사냥 나가기를 즐겼는데, 11세가 되던 어느 봄날 짐승을 찾아다니다 버들가지를 꺾어서 30여 마리의 개구리를 꿰어 물에 던져두었다. 나중에 구워먹기 위함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사슴을 쫓다가 그만 깜빡 잊고 귀가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이듬해 봄이 되어 다시 사냥을 나간 진표는 우연히 작년에 꿰어 놓은 개구리들이 아직 살아서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몹시 한탄하여 자책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고 한다. ‘아뿔싸, 어떻게 입과 배를 채우자고 저들로 하여금 한 해가 지나도록 고통 받게 했단 말인가!’ 이에 얼른 버들가지를 끊어 조심스럽게 풀어준 다음 이로 인해 뜻을 일으켜 출가하게 되었다.12  

12세의 어린 나이로 금산사(金山寺) 숭제법사(崇濟法師)의 문하로 들어간 진표는 이름난 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전북 변산(邊山)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참회를 통한 수행으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지장보살로부터는 계(戒)를 받고, 미륵보살로부터는 『점찰경』 2권13과 간자(簡子)를 받는다.

      

지장신앙의 영향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불을 조성함으로써 금산사를 미륵신앙의 본산(本山)으로 만들었으며, 또한 한국 고대사회에서 미륵신앙을 민중의 신앙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14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위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의 득도과정을 서술하는 3종의 기록들에는 공통적으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장신앙15의 영향인데, 진표가 구도(求道)과정에서 미륵을 친견하기 전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먼저 만나고 있는 점과 미륵으로부터 미륵신앙과는 직접 관계가 없고 지장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점찰경(占察經)』과 ‘간자(簡子)’를 받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뒤와 미륵(彌勒)이 오기 전의 공백기(空白期)에 육도(六道)16 중생(衆生)을 교화하는 대비(大悲)의 보살이다.17 대승불교의 모든 보살들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上求菩提, 智) 하화중생(下化衆生, 悲)’을 추구하지만, 지장보살만은 상구보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빼어난 자비의 힘과 지혜를 갖추었지만, 결코 부처가 되는 데 연연하지 않으며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한 연후에야 비로소 성불하겠다는 지장보살18의 서원은 비원(悲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19   

한편, 『점찰(선악업보)경』은 당나라 현장이 영휘 2년(651)에 번역한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10권과 실차난타가 장안 4년(704)에 번역한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2권과 함께 『지장삼부경(地藏三部經)』으로 불리는 지장신앙의 중심경전으로,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과거의 선악업보(善惡業報)와 현재·미래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占)쳐서 그것이 흉수(凶數)일 때 지장보살에게 예배·공양하고 ‘참회(懺悔)’하는 의식을 거쳐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간자(簡子)’는 『점찰경』의 방법대로 점을 칠 때 필요한 점괘가 적힌 표찰인데, 보다 자세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점치는 방법에 대해 잠깐 소개하기로 한다. 점을 치기 위해서는 윷처럼 던져서 숫자를 얻을 수 있는 나무토막 여섯 개와 거기서 나온 숫자에 해당하는 점괘가 적힌 ‘간자(簡子)’ 189개가 필요하다. 우선 나무토막 여섯 개를 각각 4면이 나오도록 다듬는다. 그 다음 한 면은 공면(空面)으로 남겨두고 3면에만 차례로 1, 2, 3과 4, 5, 6 등을 써나가 16, 17, 18까지 쓴다. 이 나무토막 여섯 개를 동시에 세 차례 던져서 모두 합산한 숫자를 가지고 해당 숫자의 간자(簡子)를 뽑아 점을 치는데, 이때 각 나무토막의 최고 숫자인 3, 6, 9, 12, 15, 18을 합하면 63이 되며 이것이 세 번 모두 나오면 189까지 나올 수 있으므로 모두 189개의 간자20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21  

『점찰경(占察經)』과 간자(簡子) 이외에도 발연사석비(鉢淵寺石碑)는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는 고성군에 당도하여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발연수(鉢淵藪)를 세워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그곳에서 7년 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진표가 지장신앙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의 조성(造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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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구도의 과정을 거치고 난 진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금산사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의 조성이었다. ‘발연사석비’에는 ‘미륵으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은 때가 임인년(762) 4월 27일이었고, 불상은 갑진년(764) 6월 9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병오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하였다’
22고 기록되어 있다.   

금당23 내부 지하에는 철(鐵)로 만들어진 연대 미상의 연화대(蓮華臺: 불상을 놓는 받침)가 남아 있는데, 이 연화대는 지금은 다소 닳았지만 원래 솥[鼎]이었다고 한다.24 그 솥을 만지는 사람은 속세의 업장이 소멸되고 소원성취를 한다고 전해져서, 솥을 만져보는 일은 지금도 금산사 관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

 

766년 진표에 의해 쇠[鐵]로 조성된 미륵불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27년 미륵전을 중건할 때 다시 만들어졌다. 불상의 신체를 흙으로 빚어 만든 다음 얼굴과 살갗에 금칠을 한, 두 번째로 조성된 이 미륵불이 바로 상제님께서 강세하시기 전 영(靈)으로 30년간 머무르신 미륵불상인 것이다. 상제님 화천 후 그 불상은 1934년 원인모를 화재로 불에 타서(미륵전과 옆의 두 불상은 타지 않았음) 1938년에 당시의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또 다시 조성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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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진표가 미륵상을 조성할 때는 가운데의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복원되면서 《그림 3》과 같은 ‘뫼 산(山)자’ 형태의 삼존불이 되었는데, 그 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양 옆으로 두 구의 보살상이 추가로 봉안되어 현재는 《그림 5》의 모습처럼 전체적으로 ‘날 출(出)자’ 형태가 되었다.   

《그림 3》을 보면 중앙에 있는 11.8m 높이의 본존미륵불상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는 협시(夾侍)상이 서 있다. ‘협시(夾侍)’는 협사(脇士) 또는 협립(脇立)이라고도 하며, ‘부처님을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菩薩)’이란 뜻이다. 관세음(觀世音)보살과 대세지(大勢至)보살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협시(夾侍)이고, 일광(日光)보살과 월광(月光)보살은 약사불(藥師佛)의 협시(夾侍)이며, 문수(文殊)보살과 보현(普賢)보살은 석가불(釋迦佛)의 협시(夾侍)라고 알려져 있다.26 금산사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협시상은 좌측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우측은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며,27 높이는 둘 다 8.8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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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래 장륙상(丈六像)이란 보통의 불상보다 훨씬 큰 규모인 1장 6척(열여섯 자, 4.8m)의 거대한 불보살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미륵전의 삼존불은 모두가 4.8m 보다 큰 8.8m, 11.8m이므로 다 장륙상인 것이지만,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이라 하면 협시를 제외한 가운데의 미륵불만을 뜻한다.

      

물 위에 세워진 미륵전(彌勒殿)

 

미륵장륙상을 모신 미륵전(彌勒殿)28은 땅이 아닌 물 위에 세워졌다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전하여진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수기를 받은 진표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금산사로 갔다. 때는 경덕왕 21년(762) 4월이었다.   

스님은 금산사를 대가람으로 중창할 원력(願力: 부처에게 빌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마음의 힘)을 세웠다. ‘옳지, 저 연못을 메우고 거기다 미륵전을 세우자.’ 경내를 둘러보던 스님은 사방 둘레가 1km나 되는 큰 호수에 눈이 머물렀다. 불사(佛事)는 바로 시작되었다.   

돌과 흙을 운반하여 못을 메웠다. 그러나 아무리 큰 바위를 굴려 넣어도 어찌된 영문인지 연못은 메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인력과 비용을 댈 수가 없게 되자 진표스님은 미륵과 지장보살의 가호 없이는 불사가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곧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백일기도를 마치는 날 미륵과 지장보살이 나타났다.   

“이 호수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바위나 흙으로 호수를 메우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고 숯으로 메워야만 하리라. 인근에 눈병이 퍼질 것이니 너는 사람들에게 숯을 한 짐씩 지고 와서 호수에 붓고 나서 눈을 씻으면 완치될 것임을 알리도록 해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대에 눈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진표스님은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든지 눈병이 있는 사람은 숯을 한 짐씩 져다가 호수에 넣고 그 물에 눈을 씻으면 나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신도들은 수군대기 시작하였다.   

“스님이 백일기도를 마치고 나서 좀 이상해지셨나 봐요.”   

“아냐, 절을 세울 수가 없으니까 이젠 별소릴 다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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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안질을 심하게 앓고 있던 한 사람이 숯을 지고 금산사에 도착했다. 그는 지고 온 숯을 호수에 넣고 그 물에 눈을 씻었다. 눈병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숯을 지고 몰려와 금산사 호수에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눈병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호수 물은 며칠 안가서 반으로 줄게 되었다. 그렇게 수 주일이 지나자 호수는 아주 메워져 반듯한 터를 이루었다.

 

이 금산사 터에 대해서는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29에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는 본래 그 터가 용추(龍湫)로서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 대전 네 모퉁이 뜰아래서는 가느다란 간수(澗水: 산골에서 흐르는 물)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이 같은 표현을 보게 되면 원래 이곳이 못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미륵신앙(彌勒信仰)

 

진표에 의한 금산사의 중창과 미륵장륙상의 조성은 향후 천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이 일대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 이외에도 이 근방의 미륵신앙 융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지역정서 자체에 이미 미륵신앙을 강력히 흡수할 수 있는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산사가 위치해 있는 모악산 주변을 위시한 호남지역은 예로부터 광활한 평야를 끼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물산(物産)도 풍부해서 권력자들에게는 더없는 수탈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연히 이 지역을 중심으로 위정자들의 횡포에 맞서는 저항의식과 체제 비판의식이 자라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왕조가 바뀔 때마다 요주의 감시지역으로 지목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벼슬길에서도 차별을 받아야 했고 평상시에도 잠재적인 반란자의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30

 

이렇듯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깊은 한(恨)을 마음에 담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금산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미륵신앙은 잠시나마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하고,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피난처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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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彌勒)이란 범어로는 Maitreya, 중국어로는 자씨(慈氏) 혹은 자존(慈尊)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미륵은 석가의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현재불(現在佛)인 석가모니에 이어서 ‘다음 대(代)의 불(佛)’이 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이라는 뜻이다. 즉 과거불, 현재불에 대해서 당래불(當來佛), 미래불인 것이다. 그래서 미륵은 현재 불(佛)이 되고자 수행 중에 있는 보살(菩薩)이지만 다음 부처로서 확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불리어지며, 같은 이유로 보살상(菩薩像) 이외에 여래형(如來形)으로도 조형되고 있다.31

 

미륵경전32에 의하면 현재 도솔천33에서 수행 중인 미륵은 약 56억 년 후에 도솔천의 수명이 다할 때, 지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도(成道)한 후 인연 있는 중생들에게 3회에 걸쳐 설법을 한다고 한다. 이 때 첫 번째 설법에서는 96억 명, 두 번째는 94억 명, 세 번째는 92억 명이 일체의 번뇌를 파하는 아라한(阿羅漢)34의 경지를 얻는데, 미륵이 행할 이 설법을 믿고 거기에 참여하려는 것이 미륵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이 중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은 사람들이 죽은 뒤 도솔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미륵과 함께 56억 년을 함께 보내다가 지상에 내려와 설법에 참가하겠다는 것이고, 미륵하생신앙은 도솔천 상생과는 관계없이 그냥 미래세의 설법에 직접 참여하여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다.35

 

미륵경전의 제작순서상 하생신앙으로부터 상생신앙이 파생된 것이 확실36할 뿐더러, 도솔천은 미륵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임시 체류의 장소37라는 점에서 도솔천에서의 상생신앙보다는 지상에 미륵불(彌勒佛)이란 메시아가 나타나 용화세계(龍華世界)로 불리는 지상천국을 건설해 주기를 기원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 미륵신앙의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일반 불교신앙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기득권층보다는 주로 힘없는 서민층과 압박에 신음하는 피지배자들에게 신봉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호남 지역은 미륵신앙의 색채가 더욱 짙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정에 대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다.

 

한편 만고에 쌓인 원(冤)을 풀어 후천의 선경을 열어 주시고자 하시는 상제님께서는 이 지역을 택하여 강세(降世)를 하시게 되었다. 그간 미륵(彌勒)을 염원하며 살아 온 백성들은 말 그대로 소원성취(所願成就)를 한 것이었다.38 56억 년 뒤 도솔천의 수명이 다할 때에 지상에 내려오는 미륵을 친견(親見)하고 설법(說法)을 들어 아라한이 되겠다는 그들의 신앙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 삼층전(三層展)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年을 지내다가 최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1장 9절)

 

사실 미륵신앙이 전라도 지방, 나아가 우리나라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에야 비로소 우리나라에 상륙하였기 때문이다.39 하지만 무엇 때문에 상제님(미륵)의 강세가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그것도 전라도 지방에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에선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천 년 동안을 한결같이 이어왔던 이 지역 미륵신앙의 전통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진표율사의 일대기와 미륵신앙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상제님께서는 “삼생(三生)의 인연이 있어야 나를 좇으리라.”(교법 1장 4절)는 말씀을 통해 상제님을 따르는 일이 아무런 연고 없이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셨다. 천여 년 전 진표율사 또한 인간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치열한 구도과정을 거친 후에야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01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 동쪽 깎아지른 듯한 절벽 중간에 사방 한 평 넓이의 작은 터를 마련하고, 작은 사다리로 연결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 곳. 이곳은 지금도 지형이 험하여 그 고장 사람들이 ‘다람쥐 절터’라고 부르고 있다. 울금바위에 있는 원효굴과는 다른 곳이다.

02 계율(戒律)을 잘 지키며 덕이 높은 고승(高僧).

03 점찰경(占察經)에 의거한 법회. 과거의 선악업보와 현재,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을 쳐서 알아본 후에 그것이 흉수일 때 지장보살에게 빌어 전화위복으로 만들고자 하는 대중적인 불교집회이다.

04 (梵)Bhadanta 婆檀陀.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 본래는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사문(沙門)의 존칭으로 쓰임.

05 외떡잎식물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나무 그늘에서 자생하며, 관상용으로 정원의 그늘진 곳에 심는다. 꽃은 연한 자주색으로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피며, 길상초라는 이름은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꽃이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2002)

06 북송 태종 단공(端拱) 원년(988)에 찬녕(贊寧)이 저술.

07 고려 신종 2년(1199)에 승려 영잠(瑩岑)이 지음.

08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일연(一然)대사 저술.

09 「진표전간」, ‘발연사 석비’ 내용 중 지장으로부터 계를 받은 시점을 기준으로 출생년도를 각각 역산(逆算)한 것.

10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

11 최완수,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신동아』 2001년 5월호, p.617.

12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4 「백제국금산사진표전(百濟國金山寺眞表傳)」, 위의 책에서 재인용, p.618.

13 ‘발연사석비’에서는 미륵이 아니라 스승인 숭제법사로부터 『점찰경』 2권을 받는다.

14 조용헌, 「韓國思想史學」 제6집,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pp.104~105.

15 지장신앙이란 중생 모두가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지장보살(地藏菩薩)에 대한 신앙으로서 인도에서 4세기경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중국에서는 신행(信行, 540~594)이 삼계교(三階敎)를 세우면서부터 성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圓光, 542~640)이 『점찰경(占察經)』에 의거한 신도 조직인 ‘점찰보’를 설치하면서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2002)

16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 무지한 중생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게 되는 6가지 세계. 가장 좋지 못한 곳이 지옥도(地獄道), 그 다음이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또는 수라도,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의 여섯 갈래로 갈라져 있다. 6도를 6취(趣)라고도 하는데, 마지막의 천상도·인간도는 선취(善趣)이고, 앞의 네 가지 도는 악취(惡趣)가 된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2002)

17 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명문당, 1993.

18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또 지장보살은 고통 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찰에서는 독립적으로 세워지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主尊)으로서 신앙되고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주존으로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며, 명부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있다고 해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한국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D-ROM, 2003)

19 조용헌, 「韓國思想史學」 제6집, 진표율사 미륵사상의 특징, pp.115~116.

20 「진표전간」에는 미륵이 189개의 간자를 주었다고 나온다. 『송고승전』에서는 8, 9간자 두 개와 108개를 주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발연사 석비’에는 8, 9간자 두 개를 주었다고 되어 있다.

21 최완수,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신동아』 2001년 5월호, p.623.

22 「진표전간」은 지장보살로부터 계를 받은 시기를 74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불상을 안치한 766년은 진표의 나이가 이미 40대의 중년에 해당하므로, 이 기록을 따른다면 발연사를 다녀온 이후가 된다.

23 본존불(本尊佛)을 안치하는 당(堂). 佛을 金人이라 말하므로 佛殿을 金堂이라고 하는 것임.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명문당, 1993)

24 우리사찰답사회, 『모악산 금산사』, 문예마당, 2000, p.14.

25 금산사 사적기에 의하면, 766년에 진표율사에 의해 조성된 미륵불은 쇠로 만들어졌었고 1627년에 다시 조성된 불상은 소조상(塑造像: 흙으로 만든 상)에 도금을 한 것이었으며, 1938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불상 역시 도금소조상(塗金塑造像)이라 한다. (한국불교연구원, 『한국의 사찰11. 금산사』, 일지사, 1994, p.70)

26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불교대사전』, 명문당, 1993.

27 금산사 홈페이지 (www.geumsansa.org) 참조.

28 국보 제62호. 신라 법상종 계통의 미륵본존을 봉안하고 있으며 금산사의 중심 금당이다. 초창 당시의 위치나 건물 형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발연사석비’에는 ‘진표율사가 미륵장륙상을 3층전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그 뒤 중창하여 복원한 것이 오늘의 미륵전이다. 지금도 소조 불상 대좌 아래에는 큰 철제 수미좌가 남아 있는데 옛 장륙상의 대좌라고 전해진다. (김남윤 외 2, 『금산사』, 대원사, 2000, pp.53~61)

29 조선시대 1751년(영조27)에 실학자 청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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