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논단대순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경원 작성일2018.10.05 조회4,802회 댓글0건본문
대순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01
- 해원상생의 사상적 특징을 중심으로 -
글 이경원(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교수)
Ⅰ. 대순사상과 해원상생
Ⅱ. 해원상생의 사상적 특징
1. 해원사상
2. 상생사상
Ⅲ. 대순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
1. 인간주체성의 재발견
2. 유기체적 사고방식으로의 전환
Ⅳ. 맺음말
※ 본고는 2010년 1월 29일 미국 클레어몬트 과정사상연구소에서 개최된 <한국신종교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Ⅰ. 대순사상과 해원상생
한국 신종교로서의 대순진리회는 지금으로부터 140년전 한국에 강세하신 강증산(1871~1909) 구천상제의 가르침을 교리로 하여 창설된 순수한 한국종교이다. 그 주된 교학사상을 총칭하여 ‘대순사상’이라고 일컫는 바, 여기서 ‘대순(大巡)’은 증산의 사상 전체를 대변하는 주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순’이란 교리상 세 가지 의미로 나누어 이해될 수 있겠는데, 첫째는 최고신으로서의 구천상제께서 인간의 몸으로 출현하심을 표현하고 있고, 둘째는 강세하신 상제께서 9년간(1901~1909)의 천지공사를 통해 광구천하(廣救天下)의 대역사(大役事)를 행하심을 의미하며, 셋째는 구천상제의 역사와 그 가르침에 입각하여 오늘날의 인류가 실천(實踐)봉행(奉行)해야 하는 진리가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인류가 믿고 따를 만한 그 진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순사상의 핵심진리는 오늘날 종단의 종지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을 말한다면 바로 ‘해원상생(解冤相生)’이다. ‘해원’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곧 ‘원(冤)을 푸는 것’이요, ‘상생(相生)’은 ‘서로 살리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념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공간은 증산이 활동한 19세기 말엽의 한국사회였다. 당시의 한국사회는 외세 특히 서양세력과 일본의 침탈로 인해 민생이 극도로 피폐해져 갔으며,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하고 혼란이 반복되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종교문화적인 상황도 열악하여 유·불·도와 같은 삼교(三敎) 전통은 시대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민간을 위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었다. 이때 전래된 서학(천주교)은 당시의 한국인에게 너무나 낮선 외래종교로서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을 부정하는 태도로 인해 정부로부터 배척당하였으며, 또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이질적인 가치관으로 작용하였다. 말하자면 이때는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면서 그 조화된 이념을 찾지 못해 가치관의 혼돈이 극심한 시기였던 것이다.
‘해원상생(解冤相生)’은 이상과 같은 시대적 상황에 처하여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전 인류의 새로운 가치관이라는 차원에서 주창된 증산의 핵심 사상이었다. 구천상제의 자격으로 활동한 증산의 ‘대순사상’에서 그 핵심이 되는 ‘해원상생’은 20세기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인류문명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인류에게 지구촌 문명의 가치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성종교와 차별화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대순사상의 핵심이념인 ‘해원상생’을 중심으로 그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어서 사상적 의의를 밝히는 것으로 서술해보겠다.
Ⅱ. 해원상생의 사상적 특징
1. 해원사상
‘해원’사상에서 우선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원(冤)’의 의미이다. 여기서 ‘원’은 인간의 특별한 감정상태 혹은 정서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 한자의 구조를 살펴보면冖+免로 이루어져 있다. 한자옥편에는 그 뜻을 풀이하기를, “토끼가 굴레(冖) 밑에 있어서 달릴 수 없으므로 더욱 구부리고 꺾인다.”라고 하였다. 즉 자연의 동물인 토끼를 예로 들어 어떤 속박에 갇혀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원’의 의미가 도출될 수 있는데, 바로 그 속박을 가한 대상에 대해서 끝없는 원망(혹은 원한)을 품고 있는 감정 상태를 말하며, 나아가서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은 소원(혹은 희망하고 감정을 내포한다. 해원은 이처럼 원망과 소원의 감정을 모두 해결하여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으로 존재의 궁극적인 자기실현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원’이라는 한자(漢字)에 특별히 사람을 그려 넣지 않고 토끼라는 동물의 글자를 사 용한 것은 해원이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물 모두를 포함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사물이 해원함으로써 진정한 이상세계가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사람은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이러한 진리를 자각하고 세계에 실현시켜 나가는 주체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왜 이러한 ‘해원’의 진리가 필요한가. 그것은 대순사상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은 『전경(典經)』(대순진리회의 경전)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상제께서 七월에 「예로부터 쌓인 원을 풀고 원에 인해서 생긴 모든 불상사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는 공사를 행하시니라. 머리를 긁으면 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인류의 기록에 시작이고 원(冤)의 역사의 첫 장인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의 원을 풀면 그로부터 수천년 쌓인 원의 마디와 고가 풀리리라. 단주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 이로부터 원의 뿌리가 세상에 박히고 세대의 추이에 따라 원의 종자가 퍼지고 퍼져서 이제는 천지에 가득 차서 인간이 파멸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에서 건지려면 해원공사를 행하여야 되느니라」고 하셨도다. ( 공사 3장 4절)
위의 구절에 따르면 어느 시기부터 인류사회는 원(冤)의 뿌리가 형성되어 부정적인 역사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사적 이야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고대 동양(중국)의 어느 왕자가 정당하게 물려받지 못하고 소외됨으로써 태초의 ‘원’이 생겨났다. 이 원은 결국 원망하는 상대를 죽이게 되었으며 다시 반복되는 관계 속에 (동·서양에 걸쳐) 역사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말한다. 이로써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원의 역사가 되었으며, 결국 전 인류는 원이 누적됨으로 인해 파멸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원이란 이같이 인류의 역사 전체에 대해 그다지 평화롭지 못한 과거로 이해한다. 나아가 대순사상은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는 ‘해원’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인류의 평화를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인간이 지닌 원의 감정 때문이며, 이를 풀고 해소함으로 인해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감정, 상대로부터 피해를 입음으로써 생겨나는 억울하고 화나는 감정,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감정, 이러한 감정들이 모두 근원적으로 해소될 때 진정한 해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원이 됨으로써 모든 인류가 화합하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대순사상의 가르침이다.
2. 상생사상
해원상생에서 ‘상생(相生)’은 해원과 연결되어 있다. 즉 해원함으로써 상생이 되고 또한 상생의 실천을 통해 진정한 해원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상생’은 그 반대가 되는 ‘상극(相克)’개념과의 대비를 통해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상극은 우선 ‘해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원’을 발생시킨 원인이 되는 것이다. 태초에 인간사회에서 상호관계를 규정할 때 서로를 친밀히 여기기보다는 서로를 적대시하였으며, 상대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던 사회구조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상극이다. 이러한 상극은 비단 인간사회에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대순사상에서는 과거 우주적인 환경이 이와 같은 상극에 지배됨으로써 인간사회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다음의 『전경』구절은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 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三界公事)이니라」고 김 형렬에게 말씀하시고 그중의 명부공사(冥府公事)의 일부를 착수하셨도다. (공사 1장 3절)
위의 구절에 의하면 먼저 선천(先天)이라고 하는 세계의 실상을 언급하고 있다. 인류의 과거 역사는 모두 선천에 속하며, 여기에는 우주 사물도 포함되어 있다. 즉 이 세계는 선천과 후천이라는 두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증산 상제의 위대한 활동이었던 천지공사이다. 이러한 천지공사 이전, 말하자면 19세기 말엽까지의 인류역사(혹은 우주역사)는 ‘상극’이라고 하는 원리에 지배된 부정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상호 배타적인 태도를 지니고, 서로를 분리시키며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내온 아픔의 역사이다. 자연의 생태계도 소위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 지배하여 힘이 세고 환경에 우세한 개체만이 살아남는 때였다. 이와 같은 상극의 세상에서 인류사회는 인간이 지닌 원(冤)의 감정으로 인해 더욱 치열한 투쟁을 일삼고 살아왔으며, 한시도 평화로울 때가 없이 상대를 향한 복수의 감정만을 불태워왔던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원의 감정이 남아있는 이상, 또한 상극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상 평화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상생의 진리가 필요한 이유는 위와 같은 설명에 기초해 볼 때 먼저 이 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원리의 개선이 요구된다는 데 있다. 인간사회에서 원이 발생한 이유는 그 우주적 배경에서 볼 때 ‘상극’에 지배된 세계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우리가 살아온 세계의 구조가 이미 상극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인간사회에서는 이를 원의 감정에 의해 서로를 죽이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사회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는 보다 근원적인 처방으로서 이 세계를 상생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이와 같은 세계의 구조적인 변혁을 위해 단행한 종교적인 대역사(大役事)이다. 여기서 증산은 그가 지닌 초월적인 신력(神力)으로 영계(靈界)를 새롭게 뜯어고치고, 모든 부조리(不條理)를 바로잡는 활동을 하였으니 그 주된 방향과 원리가 바로 ‘상생(相生)’이었다. 상생은 절대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며, 나의 행동지침은 오직 상대를 잘 되게끔 해주는데 목적이 있다. 상생의 원리란 상대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고, 또한 상대의 성공과 이익이 모두 나의 성공과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나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해쳐야만 하고 손해를 입혀야만 했던 선천과는 달리, 후천에서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 먼저 상대가 이익을 얻게 해야 나에게 혜택이 돌아올 수 있다는 정반대의 논리가 성립된다. 이로써 후천 세상은 상호적대감이 없어지고 오직 상호혜택만이 주어지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성립됨으로써 다시는 원이 발생하지 않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세계도 다 같이 상생에 지배됨으로 인해 모든 만물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며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상생의 진리란 이처럼 후천세상을 주도하는 새로운 원리로서 해원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원을 근원적으로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인류 평화를 달성하는 새로운 이념이 될 수 있다.
Ⅲ. 대순사상의 새로운 패러다임
1. 인간주체성의 재발견
인간이 지닌 주체성의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정신사를 지배해 온 주된 가치로 작용하였다. 인간이 지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하는 자연세계에 대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군(一群)의 노력은 또한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일적 해석으로서의 철학은 이러한 인간문화를 이룩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스팩트럼을 만들어 왔다. 서양의 경우 고대 희랍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 플라톤(기원전 427~347),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계보에서 처음으로 자연으로부터 인간자신에게로 시각을 돌리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초월철학에서 인간은 순수한 영혼을 지니면서 최고 이상인 이데아(Idea)를 포착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그의 『영혼론』을 통해 영혼이야말로 육체의 형상이고 이 영혼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자기 본질을 현실적으로 획득한다고 보았다. 영혼의 능력은 다름 아닌 인간의 사고 능력이며 인간의 지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시대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이후 서양철학사를 꾸준히 관통하는 원리였으며 중세와 근대 이후에도 지배적인 흐름이었다고 본다. 말하자면 서양전통에서의 ‘인간주체’는 ‘이성적인 주체’였던 것이다.
동양에 있어서 인간주체의 문제는 유(儒)·불(佛)·도(道) 삼교(三敎)의 정신사에서 그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교학체계로서의 유교(儒敎)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천(天)에 근거한 인도(人道)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다.(天生德於予)”고 한 것이나, 『중용(中庸)』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품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고 한 것은 인간의 도덕적 실천과 절대자와의 합일적 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이후 성리학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상술하였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깨달음’의 세계는 석가모니 초기 교설의 체계에서 등장하는 삼법인(三法印)·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십이연기(十二緣起)를 올바로 자각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이 본래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아 아무런 집착도, 그로 인한 고통도 없이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성불(成佛)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전개에서는 이러한 공(空)의 실체를 규명하거나 그에 대한 인식(認識)의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이론의 다변화가 이루어졌다. 도교(道敎)의 철학에서는 근본적으로 자연의 무위성(無爲性)을 강조하고 그 속에 담긴 궁극적 실재로서의 도(道)를 말하고 있는데, 이때의 도(道)는 인간과 자연을 두루 관통하는 상도(常道)를 말한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서 내 안에 와 있는 대자연의 도(道)를 숭상하고 이에 부합된 삶을 살 수 있다면 언제나 진정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자연성(自然性)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 사회의 인위적인 욕심만을 추구할 때 인간은 그 본래 모습을 상실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동양에서의 유·불·도는 ‘천(天)’, ‘공(空)’, ‘도(道)’와 같은 궁극적 실재를 강조하면서 인간과의 합일적 관계를 유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본다. 여기서 인간주체는 언제나 이 세계의 궁극적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며, 그 궁극자의 원리를 인식하여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데 인간의 사명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대순사상에서 해원이념은 이상에서 살펴본 인간주체의 역사와는 그 궤도를 달리한다고 본다. 즉 해원이념에서 바라본 인간은 ‘원(冤)’의 담지자로서 자기 욕망을 지닌 존재이다. ‘원(冤)’은 욕망을 지닌 인간의 현실적 모습을 순수하게 그리고 있다. 이러한 욕망은 하나의 응어리진 감정으로 누적되어 왔고, 역사적으로는 다양한 원한으로 분출되어 왔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양면의 가치로 발휘될 수 있는 이 원(冤)은 담지자인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결단과 실천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욕망을 자유롭게 발휘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하고 또한 진정한 자기실현을 추구하게 된다.
상제께서 「이제는 해원시대니라. 남녀의 분별을 틔워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놓았으나 이후에는 건곤의 위치를 바로잡아 예법을 다시 세우리라.」고 박 공우에게 말씀하시니라. (공사 1장 32절)
이제 해원시대를 맞이하였으니 사람도 명색이 없던 사람이 기세를 얻고 땅도 버림을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오리라. (교법 1장 67절)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 (교법 2장 56절)
윗글에서 볼 수 있듯이 ‘해원시대’는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벗어난 개인의 권리 회복과 자유 그리고 모든 사람의 동등 동권의 시대이다. 사회적·계급적·계층적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개인의 권리가 무시될 수 없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존중받는 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존중받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원(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원(冤)’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원(冤)’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인간이 지닌 ‘원(冤)’은 서양철학에서 강조해 온 인간의 이성도 아니며, 동양철학에서 추구해 온 궁극적 실재도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본래 지니고 있는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원(冤)은 이성보다 앞서며, 어떤 궁극적 실재보다도 인간에게 근원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원(冤)’은 인간의 감성적 본질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해원이란 바로 이러한 인간 본질로서의 ‘원(冤)’을 해소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인간주체를 새롭게 확립하게 한다. 즉 대순진리회에서 바라본 인간주체는 ‘감성적 존재’로서 ‘원(冤)’을 지닌 인간이다.02 이 원을 해소하고 실현시키는 것이 인간 삶의 목적이고 또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원’이념은 인간주체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으로 새롭게 하고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2. 유기체적 사고방식으로의 전환
해원상생의 이념에서 또 하나 엿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은 바로 유기체적 사고방식이다. 상생(相生)은 해원 이념과 결합하여 중요한 관계이론을 담고 있다. 해원이 하나의 개체가 지닌 가능성과 그 자아를 실현하는 이념이라면, 상생은 그 개체와 개체의 관계에 있어서 요구되는 상호작용과 실천의 원리이다. 따라서 해원만으로는 개체적인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상생이라는 관계이론을 통해 진정한 세계성을 획득하고 있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가족관계, 사회관계, 계급관계, 민족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신의 관계 등등 이 모든 관계들은 인간의 자기 존립을 위해서 필연적이며,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해서라도 이 모든 관계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상생이념은 해원을 통한 자기실현이 관계적인 세계 속에서 보다 큰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일찍이 카프라 교수는 말하기를,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가치는 아주 밀접히 얽혀 있다. 오늘날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사고방식과 가치기준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모두에서 공통적인 것은 상극에서 상생으로의 변화, 다시 말해 ‘자기를 주장’하던 분위기가 공존과 화합으로 옮아간다는 점’03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사고방식의 변화의 특징에 대해서는 주로 이성중심에서 직관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분석에서 종합으로, 선형적(linear) 사고에서 비선형(non-linear)으로 옮아가면서 가치기준도 경쟁에서 협조체제로, 자기주장보다는 공존과 화합의 분위기로 바뀌면서 인간관계도 지배와 종속의 관계에서 상호동반자의 관계로 바뀌는 양상을 총칭하고 있다.04 상생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에 따른 중요한 사고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상생이념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 먼저 정치와 경제활동에 있어서 ‘상생’개념은 ‘서로 상이한 두 존재가 공생하는 원리’로 보고 대치관계가 아닌 상호보완, 상부상조의 관계를 말한다. 비대칭적 관계가 아닌 대칭적 조화와 균형을 이룸으로써 사회적 안정이 확보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사회적으로는 ‘상호 부정적인 대립과 갈등의 주체가 서로를 용인하고 조화시켜 함께 긍정적 세계로 나아가는’ ‘다함께 사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내부의 갈등, 즉 여야갈등, 지역갈등, 이념갈등, 계층갈등 등을 지양하고 화해와 협력의 사회로 나아가자는데 상생의 본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상생은 특히 주요한 이념이 되고 있는데, 이는 발전과 진보라는 이름의 문명을 자연친화적 생명실천의 문명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철학적 반성으로 보는데 그 핵심이 있다. 서양문명의 자연정복적인 세계관으로부터 탈출하여 인간과 자연의 화해 및 평화로운 만남을 주선하는 열린 정신으로서 ‘상생’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는 또한 생태주의적 세계관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생명체의 상호의존(상보적) 시스템도 이러한 상생의 개념을 파악하는데 주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다.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도 ‘상생’은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갈등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철저하며 감정적인 것이 되기 쉬운 종교는 문명의 본질로 기술되기도 하며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미 종교문화간의 전쟁이 인구의 절반가량을 초토화시킨 역사를 경험한 지금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가치관들을 융화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와 존중만이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된다. 말하자면 ‘상생’은 문명간의 대화에 따른 결과로서 문화다원주의(cultural pluralism)를 전제한 윤리적 규범으로 다루어져야 된다는 것이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대순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제를 해원상생 이념의 특징에 입각하여 살펴보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활발하게 종교활동을 하고 있는 대순진리회는 그 핵심사상인 해원상생을 근본원리로 하여 모든 조직과 규범이 만들어져 있으며, 또한 대사회적 실천을 행해나가고 있다. 비록 이 종단은 다른 기성종교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념의 역사성과 보편성은 오늘날 지구촌 문명을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새로운 가치관이 있으니, 해원상생의 이념이 가지고 있는 그 특별한 의미는 전 세계 인류 나아가 전 우주의 개벽을 위해 한국에서 출발한 새로운 진리인 것이다.
<대순회보> 105호
--------------------------------------
01 여기서 패러다임(Paradigm)이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지식체계로서 어떤 집단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 또는 개개인이 주어진 조건 하에서 생각하는 방식 등을 총칭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용어는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Khun)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쿤에 의하면 과학사의 특정한 시기에는 언제나 개인이 아니라 전체 과학자 집단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범적인 틀이 있는데, 이 모범적인 틀이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전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학 위에서 혁명적으로 생성되고 쇠퇴하며,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고 한다.
02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현대 실존철학에서 일찍이 발견하였으며, 또 ‘르상티망(ressentiment)’이론과 더불어 그 개념을 발전시켜 나왔다고 본다. 포스트모던철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감성은 대순진리회 고유한 의미인 ‘원()’으로 충만한 상태의 감성을 말하는 것이다.
03 Fritjof Capra, David Steindl-Rast, and Thomas Matus, Belonging to the Universe: Explorations on the Frontiers of Science and Spirituality, 1993, p.133.
04 카프라 교수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고방식을 과학에서 다섯 가지 준거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부분에서 전체로의 패러다임 전환, 둘째, 구조에서 과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셋째, 객관적 학문에서 인식론식 학문으로의 전환, 넷째, 건물에서 그물로 전환하는 지식의 체계, 다섯째, 절대치에서 근사치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그것이다.(위의 책, pp.147~274 참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